137화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4회 초가 끝났을 땐.
부쩍 목소리가 줄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아직 목표 달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조용해졌네.
4회에도 또다시 삼진 두 개.
외야로 타구를 보낼 타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으니.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걱정 없이 그냥 던져도 된다는 거지. 최소한 큰 거 한 방 맞을 염려는 안 해도 되니까.
그것으로 벌써 삼진만 아홉 개고, 거기다 삼자범퇴 또한 이어지고 있으니. 팬들도 낌새가 이상할 수밖에 없긴 하겠네.
“브루스.”
“어? 어어- 어. 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조용한 건 팬들만은 아니었다. 덕아웃도 아예 목소리가 사라졌으니까. 침 삼키는 소리 외에는 말이야.
평소처럼 내 옆에 앉는 게 아니라, 멀찍이 앉아, 얌전하게 있는 브루스를 부르니. 아주 기겁을 하네
왜 그래 인마. 사람 민망하게. 니가 그러니까 내가 너 괴롭히는 거 같잖아. 사람들 오해하겠네.
“그냥 긴장 풀라고.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쫄지 마. 상대 타자들 별다른 낌새는 없지?”
“어, 아직은. 그냥··· 다들 멍해 보이더라. 슬슬 정신줄을 놓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계속 체크해.”
별건 아니고. 바짝 얼어 있는 게, 사고 칠 것 같더라고. 과도하게 긴장하는 것도 안 좋거든. 저러면 몸이 굳으니까.
그래서 살짝 긴장을 풀어준 뒤, 그라운드를 봤는데. 공격은 다시금 금방 끝났다.
맷 케인, 아직 잘하네.
지금은 배리 지토라는 역대급 먹튀보다 더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완벽한 먹튀의 길을 걷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이언츠 영광 시대의 한 축이었던 양반인데. 확실히 내리막이라고 해도, 가끔 번뜩이긴 하나보네.
‘자이언츠 첫 퍼펙트게임이었던가?’
5년 전, 맷 케인이 그 주인공인 걸로 아는데. 아마도 맞을 거다.
내가 막 미국 물 좀 배부르게 시작했을 때였는데. 정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
같은 투수이기에 동경했었지. 메이저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이라니. 꿈같은 일이잖아?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그와 같은 구장에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하다.
“아웃!”
화려했던 맷 케인이 이미 심하게 떨어진 양반이고, 내가 초신성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중간에 안타를 맞긴 했지만.
맷 케인은 노련하게 범타를 유도하며 4회 말을 끝냈다.
다시 나갈 시간이라는 거지.
마운드에서 물러서며.
맷 케인은 무언가, 회한에 찬 듯한 눈빛을 했다. 나를 흘끔 보기도 했고. 그 혼자만은 아니다. 자이언츠 타자들 모두가 나를 봤으니까.
‘조용~하네.’
관중들은 확실히 조용해졌다.
홈팬들도, 자이언츠 원정팬들도 말이다.
다만 서로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홈팬들은 사랑에 빠진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데 반해. 원정팬들은 이를 갈고 있다는 것 정도.
‘긴장하지 말라니까, 또 힘이 빡 들어갔네.’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들은 건지. 브루스는 홈 플레이트에 앉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저러다 실수 한번 크게 하면, 그때가서 후회에도 소용없는데 말이야.
뭐,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공을 던지는 건 나니까.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긴장한 얼굴로 타자가 올라왔다.
5회 초 선두타자는 4번타자 버스터 포지. 아시다 시피 지난 이닝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현시점 자이언츠 타선에서 유일신이나 다름없는 스탯을 찍고 계시는데. 이 양반도 스윙이 얕더라고.
‘그러니, 아무리 버스터 포지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정말 세상일 모른다니까.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90마일도 못 던지는 작대기 구위, 싱글A도 간당간당했던 동양인 투수가.
“스트라이크!”
이렇게 빅리그에 올라서. 10년대 최강의 팀이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작살내게 될지. 누구도 예상 못 했겠지.
나도 마찬가지고.
초구는 가볍게 몸쪽으로.
전력으로 꽂은 포심 패스트볼. 살짝 나간 것 같은데 잡아주네.
버스터 포지는 스윙을 참았다. 어떻게든 공을 눈에 담겠다는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서.
의지가 대단하네.
저 정도쯤 되는 선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볼!”
2구는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스윙을 유도해보려고 했는데. 다시금 참았다. 음, 아쉽구만.
아쉬움을 털어내고 다시 재정비하며, 흘끔 관중석을 살피니, 웬 자이언츠 팬이 보였다.
꼬마 녀석인데. 한 10살쯤 됐나?
콜리시엄에서 어린아이는 꽤나 드문 존재다. 물론 종종 보이기는 하는데. 워낙 위험한 곳이잖아. 이 일대가 우범지대니까. 애들 데리고 오긴 조금 뭐하지. 경기 끝나면 못해도 저녁, 저녁 경기면 한밤인데 말이야.
그런데 우리 홈팬도 아니고, 원정팬, 심지어 자이언츠 유니폼까지 입고 있으니. 희귀하다 못해, 환상종 수준이다.
자이언츠, 거인이나 다름없지.
녀석은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도하는 것처럼. 바라고 있는 것처럼.
걔만 그런 건 아니다. 주변의 다른 원정팬들도 똑같았으니까.
‘기대인가?’
버스터 포지라면 해줄 거다.
그라면 가능하다. 이 망할 놈의 투수가 아무리 X같이 잘 던져도. 그라면 한방을 쳐줄 거다. 분명히.
자이언츠의 유일신 같은 존재이니, 아마도 이런 기대하는 거겠지.
“스트라이크!”
어딜 콜리시엄에서 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있어. 베이 브릿지를 건넜으면. 이쪽 룰을 따라야지.
어린애한테 몹쓸 짓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것을 보니 더욱더 힘이 샘솟았다.
원래 어릴 때부터 빡세게 자라야. 나중에 상처도 안 받고 그래.
‘나만 봐도 그렇지. 얼마나 멘탈이 강해? 이게 다 어릴 때 단련된 덕분이야.’
나도 아빠 때문에 어느 팀 응원하다가 많이도 울었는데. 지금 봐?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됐잖아?
“스트라이크 아웃!”
너도 그렇게 되라는 의미에서 확실하게 던졌다. 마지막 4구. 대놓고 낮게 던진 공.
버스터 포지는 스윙했다.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한 거지. 누가 봐도 서클 체인지업, 그것도 떨어지는 V1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다가 살짝 존에 걸치는 쓰리핑거 체인지업일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내가 타자들을 자주 그렇게 낚아 먹었고. 아마 그걸 노리고 수싸움을 걸은 것 같은데.
어우, 전 그렇게 귀찮게 안 꼬아요, 선생님. 최고의 포수라서 그런가, 혼자 생각이 많으시네. 난 그냥 던진 건데.
공은 여지없이 떨어졌고, 그는 헛스윙했다. 당신들의 기도, 오늘 경기 열 번째 스트라이크로 변환됐다.
‘강하게 크거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버스터 포지의 시선을 피해. 다시금 그쪽을 봤다.
아이는 이제 기도하는 대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아, 아주 강하게 자라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무럭무럭 자라라는 의미에서, 뒤에 타자들도 멋지게 잡아줬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마지막 6번타자, 같은 나라 선배이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지.
너클 커브 던지니까, 배트를 시원하게 돌리시네. 다른 경기에서 그러시면 분명 홈런 치실 수 있을 겁니다. 파이팅!
그렇게 다시 한 번 KKK.
삼진은 12개까지 올라갔다.
마운드를 내려가며 슬쩍 보니. 이젠 울상이 됐네.
좋은 투수가 되겠구나.
어릴 적부터 정신이 확실하게 단련됐으니 말이다. 왠지 조금 뿌듯하군.
양 옆의 사람은 부모인지, 애를 열심히 달래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도 얼굴이 말이 아니다. 애는 그거 보고 더 서러워진 것 같고.
“내가 너무 나쁜 놈인가?”
가족끼리 행복한 야구 관람을 꿈꿨을 일가족에게 몹쓸 짓을 범한 것 같은 기분이야.
왠지 죄책감이 생겨서 브루스에게 물으니. 녀석은 꽤 그럴듯한 말을 했다.
“뭔 상관이야. 우리한텐 좋은 사람인데. 원래 모든 사람한테 좋을 사람일 수는 없는 거잖아?”
“타당한 말이군.”
정답이다.
이런 말도 할줄 아네.
새가슴이라서 그렇지. 바보는 아니었어. 앞으로 조금 더 믿어도 되겠군.
그래, 우리 팬들에게만 좋은 놈이면 된 거지. 당장 레이더스 봐봐.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괴상망측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꼬맹이 자이언츠 팬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최소한 아이처럼 좋아하고는 있잖아?
“써어어어-억-”
“Hell! 읍-”
소리를 지르려다가, 분위기를 보고 간신히 참는 건지, 환호성 지르다 말고 끊으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네.
아니지, 어쩌면 얼굴 빨간 건 그냥 술기운이 돈 걸지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마저도 침묵했다. 마치 이제부터 진짜라는 것처럼.
레이더스마저 조용해진 지금.
콜리시엄은 적막했고, 묘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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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시엄은 조용했다.
저녁을 지나, 밤으로 다가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꽤나 적절한 모습이리라.
하지만 그런 적막함과는 달리, 경기장 안의 분위기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들떠 있었다. 그저 감정 표현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을 뿐.
“미친···”
“지금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Suck 오늘 완전히 돌았네.”
일단 두 가지가 진행중이다.
하나는 ‘그거’다.
왜 그거냐면. 이젠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었기에, 정말 가시권이 돼서 그렇다. 감히 입 밖으로 뱉어선 안 돼지.
에둘러서 표현한다면. 오늘 Go의 이닝에서 콜리시엄의 1루를 밟은 건, 1루수 욘더 알론소뿐이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라.
아무튼 부정 탈지도 모르기에, 입 밖으로 감히 내뱉을 수 없는 ‘그거’대신. 두 번째 것이 더욱 자주 언급됐다.
Go라는 투수의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여러 가지가 거론될 거다.
구속이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무브먼트와 스터프. 다양하고 강력한 브레이킹볼. 칼 같은 핀포인트 제구 등이 주로 거론되겠지.
때때로 약간 힙스터적인 이들은 매 경기 기복 없이 일정한 성적을 찍는 꾸준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보다 조금 더 아는체 하고 싶다면, 부드럽고 안정적이면서 디셉션이 좋은 투구폼을 입에 올리지.
그 모든 장점이 어우러져서 나온 결과물 중 무엇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면. 그때는 장점처럼 중구난방하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를 이야기 할 테니까.
“삼진이 열두 개··· 완전히 돌았어.”
“그럼 이제 시즌 탈삼진은 몇 개야?”
“271개네. 미친···”
“300삼진이 아니라, 400도 찍겠는데? 놀란 라이언 넘는 거 아니야?”
“가능성은 있지.”
탈삼진.
오늘 Go가 ‘그거’와 함께 선보이고 있는 두 번째 퍼포먼스다.
타자가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것이 홈런이라면. 투수는 단연 삼진이다.
그런 의미에서 Go는 이번 시즌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투수지. 전반기에만 200삼진을 기록했고. 시즌 300삼진을 우습게 넘길 페이스니까.
이렇듯 기존에도 압도적이었던 탈삼진 능력은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더욱더 남달랐다.
“아웃!”
5회 말. 다시금 공격이 저지됐다. 맷 케인. 저런 퇴물 녀석에게 1외에만 2점을 내놓고, 거기서 더 점수를 내지 못하다니.
평소라면 타자들에게 욕을 듬뿍 박아줬겠지만. 오늘은 침묵을 유지했다.
곧이어 6회 초. 다시 그가 올라왔고. 한 팬은 손을 달달 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삼진이 올라갔다.
지난 이닝까지 합치면 네 타자 연속 삼진. 그리고 열세 번째 삼진이다.
그래, 오늘은 다르다.
Go의 삼진은 원래도 대단하지. 100마일의 강속구가 아닌. 90마일조차 되지 않는 느릿한 공으로 리그 최고의 타자들을 여유롭게 농락하면서 잡아내는 풍경은. 애슬레틱스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Go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농락이 아니었다. 마치 일말의 불안감마저도 지워진 건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손쉽게 삼진을 잡아냈다.
“스트라이크!”
또 한번 스트라이크. 볼넷은 원래도 잘 없지만. 오늘은 아예 볼 자체가 없다. 무조건 스트라이크.
오죽하면 아까 전, 버스터 포즈에게 볼을 내줬을 때 조금 놀랐을 정도지.
[@HeartSuckFire]
[오늘 Go 진짜 미쳤다! 뭘 잘못 먹은 거야, 아니면 잘 먹은 거야? 이걸 내가 직관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Go! #A’s #You-Suck]
몇몇은 일찌감치 휴대폰을 꺼내 들기도 했다. 남겨야 했으니까. 자신이 이 경기에, 이 구장에 함께 했다는 것을.
삼진과 그것. 어느 쪽으로든 무언가는 확실하게 이뤄질 것만 같았으니까.
이 기적을 목도하지 못한 주변 지인, 친구들을 놀리려는 의도도 조금 있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이 올라갔다.
이젠 다섯 타자 연속.
평소처럼 마치 시동을 거는 것처럼, 엄청나게 빠른 피칭은 아니었다.
보통은 못 해도 5회 정도면 속도를 올리는데. 오늘은 전혀 그럴 낌새가 없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만족스러웠고. Go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을 길게 보낼 생각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여러 하이라이트 영상 속의 Go처럼 미칠 듯한 속도감은 없었지만.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기에, 지금이 더욱더 반가웠다.
“아웃!”
마지막은 아쉽게도 범타.
올스타전처럼 여섯 명의 타자를 나란히 조지는 걸 기대했던 이들은 아쉬운 탄식을 뱉으려다, 자신들을 둘러보는 Go의 모습에 입을 꾸욱 닫았다.
마치 누가 입을 여나, 안 여나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팬들을 겁박하다니. 대단히 오만한 모습이지만. Go이기에, Suck이기에 그들은 괜찮았다.
그저 얌전히 입을 닫을 뿐.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앞으로 3이닝, 3이닝만 더.”
“X발 자이언츠 새끼들, Go한테 아주 Suck되고 있네.”
마침내 Go가 덕아웃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 그제야 홈관중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6회 초 종료.
남은 이닝은 단 셋.
숨이 터질 것처럼 벅찼다.
그런 의미에서 영 수확이 없는 공격은 나름대로 숨 돌릴 공간이 되어주었지만.
맷 케인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고, 그 휴식시간 역시 제법 달아올랐다.
“어? 가나?”
“갔다, 갔어.”
무려 4득점.
교체로 올라온 투수는 줄줄이 출루시키더니. 마커스 시미언에게 쓰리런을 내줬고. 그 뒤의 투수도 1점을 내줬다.
나름대로 소소한 규모의 빅이닝이니. 원래라면 축하하고, 환호하는 게 맞는데. 경기장은 여전히 조용했다.
홈런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홈런을 치고도 박수조차 못 받는 게 서러운 건지, 마커스 시미언은 억울한 눈빛으로 팬들을 흘겨봤지만.
살벌한 홈팬들의 시선에 얌전히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뭐, 점수나서 좋기는 하네.”
“좋긴 뭐가 좋아. 왜 이런 날만 점수를 많이 내는 거야?”
“우리 타자들 보면, 진짜 영양가가 없다니까.”
억울하긴 할 거다.
심지어 욕까지 먹었으니까.
무려 4점이 더 났는데도, 팬들은 그리 반기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1회 말에 나온 2점이면 충분한 경기니까.
다른 아슬아슬한 경기에선 점수를 못 내서 승리를 말아먹더니. 정작 큰 점수가 필요 없을 때는 왕창 내버리는 타선이 팬들은 괜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오늘 같은 날, 더 점수를 낼 힘이 있으면, 차라리 수비에 전념할 것이지.
그렇게까지 말하는 홈관중들을 알았다면, 타자들은 꽤나 억울했겠지만.
그들의 서러움을 충분히 닥치게 만들 이유가 조금 뒤 마운드에 올라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여전히 조용한 콜리시엄.
주심의 시끄러운 콜만이 조용한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소음이 없기에 어쩌면 더욱더 잘 퍼지는 것도 있고.
7회 초. 지난 이닝의 폭발력이 지워진 그라운드에선 다시 싸늘한 학살이 이어졌다.
오늘 경기 열다섯 번째 삼진.
그리고 남은 타자는 여덟.
그 숫자를 손으로 꼽으며, 팬들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여덟 명만 더-”
“닥쳐. 말하지 마.”
“이런 것까지? 직접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부정탈 수 있잖아. 그러니까 제발 닥쳐.”
“아, 진짜 조용히 좀 합시다. Suck한테 들릴라.”
이젠 남은 타자를 세는 것조차 금지됐고, 팬들은 말없이 마운드의 선수를 내려 봤다.
정말로 하는 건가? Go라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강력했고, 지치지 않았으니까.
Go가 그걸 달성하는 순간을 상상해봤지만. 딱히 ‘기절’외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광분해서 소리를 지르다가, 뒷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고.
그나마 심장마비가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아웃!”
그런 팬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처럼. 그들을 정말로 모조리 눕혀버릴 작정인 건지. Go는 유유히 타자들을 잡았다.
원래라면 시끄럽게 환호할 레이더스조차,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헤롱헤롱 거렸다.
“아웃!”
그리고 마지막.
묵직한 패스트볼이 다시금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하이 패스트볼. 타구는 이번에도 바닥을 뒹굴었다.
“88마일···”
“쌩쌩하다 못해. 그냥··· 경기 시작하는 모습 같네.”
여전히 최고에 근접한 구속이 찍혔다. 멀리서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구위도 멀쩡했고.
그것이 순식간에 털려 나간 타자들과 어우러져. 마치 이제 막 경기가 시작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세 번째 타석인데.
타자들은 처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이 박살났으니까. 물론 이젠 슬슬 감을 잡은 건지 조금 치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오늘 Go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냥 자이언츠를 잡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제 여섯.’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숫자를 관중들은 마음속으로 그렸다.
남은 이닝은 둘. 타자는 여섯.
기록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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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아무런 감각이 없네.
피로도, 통증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별로 좋은 증상은 아니다.
감각이 맛이 갔다는 거니까.
‘그래도 가동은 잘 되네.’
슬쩍 어깨를 돌려보니. 수월하게 돌아간다. 팔도 잘 올라오고. 심각하진 않네. 다행이야.
아마도 진짜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과하게 흥분해서, 뭔가가 많이 분비된 거겠지.
뭐, 그거 있잖아. 아드레날린? 엔돌핀? 도파민? 이 셋 중 하나일 텐데. 잘 기억이 안 나네.
“···”
경기장은 이제 완전히 적막하다. 동료들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투수코치는 흘끔흘끔 날 곁눈질했다.
너무 흥분해서 무리하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면서도. 지금 진행 중인 것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겠지.
‘아직은 괜찮아. 투구수도 평소보다 훨씬 적고.’
투구수 소모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삼구삼진이다.
억지로 막, 풀카운트까지 늘려서 삼진 잡는 게 아닌 이상, 이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5구 이상 끌었던 승부가 있던가?’
내 기억에는 아마도 없다.
그러니 투구수가 적을 수밖에. 이제 한 86~7개쯤 됐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아직 허용범위 안이지.
‘최고를 110개까지 잡으면. 대략 23~4구정도.’
구단에서 제한한 리미트는 100구지만. 오늘 정도는 내 신체 한계로 맞춰도 되겠지.
대략 110구까진 괜찮다.
그러니 넉넉하진 않더라도.
모자라진 않겠네. 9회까지 가더라도 말이야.
7회 말, 공격은 금방 끝났다.
그래 6점 냈으면 잘했네.
오늘만큼은 인정이다.
그런 뜻을 담아, 덕아웃 한쪽에 있던 마커스 시미언을 쳐다보니, 기겁하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아까 뽐낼 때는 언제고. 이젠 홈런 쳐놓고 고개 숙이네.’
뭐, 이해는 해. 내 패기에 지려버린 거겠지.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난 무소불위의 권력자니까.
긴말 필요 없지. 퍼펙트. 이거 중인 투수는 선수가 아니라, 감독, 단장, 구단주도 먼저 대가리 박아야하니까.
‘끝났네. 슬슬 일어나 볼까.’
7회 말은 끝났다. 교체된 투수가 간신히 잘 막았네.
사실 그보다는 타자들이 적절하게 시간을 조절했다. 내 리듬을 끊지 않는 선에서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
오늘은 점수도 잘 내주시고. 이렇게 소소한 도움까지 주시니. 아주 황송하구만.
약 4만 명 정도.
그리고 8만 개의 눈동자.
그것이 내 발걸음 하나하나에 따라붙었다. 오늘의 모든 것을 두 눈에 담겠다는 기이한 열망마저 느껴지는 시선들.
짜릿하네. 마이클 잭슨이 된 기분이야. 이 맛에 열심히 하지.
‘몇 명은 아니겠지만.’
타자가 다시금 올라온다.
버스터 포지. 이번이 세 번째네. 그는 여전히 집념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니, 아까 전에 삼진 당하고 내려간 뒤부터 지금까지, 쭉 저런 눈으로 나를 봤다.
‘다른 타자들은 이미 거의 포기한 눈치던데 말이야.’
그를 제외한 나머지 타자들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차라리 퍼펙트, 이거 하나만 진행 중이었다면. 그들도 버스터 포지처럼 열정을 불태웠겠지. 어떻게든 안타를 치겠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미친 듯이 삼진을 잡히면서, 나한테 탈탈 털렸기에 오히려 용기를 잃었다. 이미 포기해버린 것처럼.
‘이 양반이 마지막 관문이겠네. 하긴, 이 양반밖에 없긴 하지.’
이 뒤는 모두 다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번만 잘 넘기면 되겠지.
감각이 사라진 어깨에 억지로 힘을 끌어당겼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니. 확실하게 가야지.
“파울!”
초구는 바깥쪽으로 너클 커브. 오늘 그에겐 처음 던진 코스인데 그는 가볍게 커트했다. 감을 본 건가?
“스트라이크!”
2구는 그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넣은 바깥쪽 포심. 이번에도 크게 스윙했으나. 다행히 공을 맞추진 못했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수월한 상황이지만 예감이 안 좋았다. 어쩐지 이전과 조금 달랐으니까.
“볼!”
3구는 신중하게. 낮게 깔아던진 투심. 삼진을 잡고 싶긴 한데, 그래도 범타라고 유도하려고 했더니. 칼 같이 거르네.
슬슬 감을 잡을 타이밍이긴 하지. 내 구속이 엄청나게 빨라서, 아예 눈으로 못 따라가는 수준은 아니니까.
‘사인이···’
오늘 브루스에게서 처음으로 사인이 왔다. 구종을 유도한 건 아니다.
분위기가 이상한 타자가 있으면 사인을 보내라고 했는데. 바로 그 사인이 나왔다.
‘역시··· 감을 잡은 건가?’
처음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관문이네.
저런 수준의 타자, 정점급 타자가 감을 잡은 건, 꽤나 위협적인 소식이다. 제아무리 오늘 내 컨디션이 최고라고 할지라도.
‘감이 잡혔다면. 오히려 브레이킹볼이 위험하다.’
차라리 패스트볼, 그것도 포심으로. 확실하게 찍어서, 힘으로 누르는 게 낫다.
그런 의미에서 손안에 공을 굴리며, 천천히 그립을 잡았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가볍게 숨을 뱉었다.
‘후우.’
와인드업.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모든 힘을 담아 공을 쏘아 보낸다.
목표는 몸쪽. 포심 패스트볼.
이제 8회인데도 공은 빨랫줄처럼 쭉 날아가며, 날카로운 창처럼 꿰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끝났네.’
따악-하는.
오늘 마운드 위에서는 처음 들어본 청량한 타격음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이제까지는 짧게 스윙하더니.
그는 오늘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배트를 끝까지 뻗었다.
이건 안 봐도 비디오지.
바이바이, 내 예쁜 퍼펙트야.
버스터 포지 X새끼.
“이런 씹-”
누군가 관중 한 명도 결과를 예감한 듯 욕지거리를 내뱉은 순간.
“오! 오오오오오!”
“으아아아아! 맷!”
“끄아악! 와아아아아악!”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잠깐, 환호성? 욕이 아니라?“
“아웃!”
혹시나 싶어, 옆을 본 순간. 심판의 콜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털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말이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멋진 포즈로 엎어진 맷 채프먼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X발 X나게 잘했다! 니가 최고야!”
“X발 이런 이쁜 새끼 이리와! 넌 X발 최고의 3루수야! 그래! 야수가 수비를 잘해야지!”
압도적인 환호성.
그리고 박수소리.
조용하게 만든 건 나지만.
다시 시끄럽게 만든 건 쟤네.
내가 터트리려고 했더니, 얘가 선수 쳤네.
다시 고개를 돌려 1루 방향을 보니, 미친 듯이 달리던 버스터 포지가 1루를 코앞에 두고서 덜컥 멈춘 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퍼펙트는 투수가 아니라 하늘이 내려주는 거라더니··· 아마 그도 하늘이 원망스러운 거겠지.
‘관문, 넘었네.’
마지막 관문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