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애슬레틱스와 자이언츠의 경기는 한국에서도 제법 주목을 받았다.
고유석의 멋진 7월을 마무리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로 말이다.
<고유석vs황정균, 한국인 메이저리거 투타 맞대결 성사>
오래간만의 한국인 메이저리거 간의 맞대결이었으니까.
심지어 직전 7월 30일(미국 기준)에는 류영진과 경기가 있기도 했었기에.
이틀 연이어 한국인 메이저리거 간의 맞대결이 성사된 만큼, 방송사는 코리안 데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특집 방송을 내보낼 만큼 쾌재를 부르짖었지만.
사실 그런 주목과는 달리, 팬들의 반응은 조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맞...대결...?
└누구랑 누가 맞대결이라고? 설마 황섹머랑 갓유석?
└이 둘이 매치업이 되나?
└솔직히 고유석이 욕할 듯
└ㄴㄴ황정균이 욕할 거임. 자기 ㅂㅅ 만드는 거라고.
└한국인끼리 연달아 만나서 MBS 신난 건 알겠는데. 이런 거 좀 하지마라.
한쪽이 메이저리그 역사를 뒤엎을 수준의 임팩트를 뽐내는데 반해, 다른 한쪽은 다소 처지는 성적을 기록 중이었으니까.
맞대결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무게가 기우는 매치업인 만큼 네티즌들의 반응은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중계진은 그런 냉소에도 프로의식을 유지했다.
“자! 드디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다시 무대로 돌아온 황정균 선수와 리그를 폭격하고 있는 고유석 선수의 코리안 더비!”
“고유석 선수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최근 10년, 아니, 100년을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에 반해 황정균 선수는 다소 기대에 못 미치긴 합니다만. 충분히 반등할만한 여지가 있기에, 기대해볼 만하겠습니다.”
고유석 등판 경기의 전담 캐스터인 박일훈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올렸으나.
전담 캐스터이기에, 고유석의 경기를 가장 많이 지켜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힘들겠지. 많이.’
그리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절호의 기회였던 다저스와의 3연전을 아쉽게 마무리한 황정균과는 달리.
고유석은 후반기를 들어서며, 그야말로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7월 무실점. 39이닝 연속 무실점. 완전히 미친 수준이야. 쉬고 돌아와서 너클 커브까지 장착하더니. 그냥 괴물이 됐어.’
심지어 후반기에는 실점은커녕, 피안타조차 잘 허용하지 않고 있다.
매 경기 무언가를, 노히터나 퍼펙트 같은 것을 해낼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안타 하나. 딱 그 정도만 바라더라도 큰 기대라고 할 수 있겠지.
이번 시즌, 고유석에게 그 안타 하나를 못 쳐본 슈퍼스타들이 수두룩하니까.
“예, 황정균 선수가 비록 그리 인상적이지 못한 성적을 기록 중입니다만은. 데뷔전에서 홈런을 날린 것에서 알 수 있을 만큼, 타고난 빅뱃이기에. 고유석 선수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해설자인 송연우 역시 적절하게 과거 황정균이 보여줬던 기대를 거론하며 그런 분위기를 도왔다.
메이저리그라는 무대에 도전한 뒤에 보여 준 모습은 대단히 아쉽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자랑하는 타자고, 최고의 타자로도 불렸던 선수이기에, 마냥 한쪽에 편파적일 수는 없으니까.
사실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메이저리그 사정을 잘 모른다. 그저 가끔씩 경기가 있으면 어쩌다가 보는 수준이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야지.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야 하니까.’
중계진의 역할은 그런 어쩌다가 채널에 들어온 시청자들을 어떻게든 현혹하는 것.
거기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코리안 더비라는 이슈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이 재료를 살려야 할 수밖에.
-플레이볼!
“주심이 경기 시작을 선언합니다. 1회 초. 마운드에는 대한민국의 자랑! 두 번째 코리안 특급 고유석! 지금 성적이 나오고 있는데, 어우~”
“21경기 15승 0패. 탈삼진 249개. 방어율 0.49. 정말이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네요.”
“보통 메이저리그에서 에이스 투수의 기준이 15승 200삼진인데. 고유석 선수는 반시즌 만에 이뤄냈습니다.”
“저런 방어율은 선종열 선배님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억지 코리안 더비 외에도 재료는 충분했다. 고유석의 성적이야말로 최고의 조미료였으니까.
그 압도적인 성적은 메이저리그, 아니, 야구 자체를 그다지 깊이 알지 못하고, 귀동냥 수준에 머문 이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그 퍼포먼스에 매료되어 유입된 야구팬들 역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고.
‘고유석 유입이지.’
오죽하면 방송국 내에서는 종종 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야구팬이 대거 유입된 것에 빗대어.
고유석 유입 혹은 고유석 키즈라고 지칭하기도 할 정도면, 말 다 했으리라.
‘오늘도 잘하겠지. 고유석이니까.’
이것 역시 방송가에서 종종 도는 말이었다.
스포츠 경기 중계에서 한 선수에게 포커싱을 맞추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다.
개인에게 집중한 중계는 그 선수가 경기를 망치는 순간 나락으로 치달으니까.
어쩌면 한국인 메이저리거를 중심으로 중계하는 메이저리그 중계의 가장 큰 단점이자 위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
허나 고유석은 현재까지 불패신화를 자랑했다. 언제나 잘했지. 최소한 기대는 충족시켜줬고. 그리고 그건···
“삼진 아웃! 고유석!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
“9구3삼진으로 이닝을 마치는 걸, 무결점 이닝이라고 부르는데. 첫 이닝부터 고유석 선수가 해내네요.”
“올스타전에서도 강력한 피칭으로 네 타자 연속 삼구삼진을 만든 바가 있는데. 오늘도 역시나! 폼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기대 이상의 장면이 나왔다. 자이언츠, 라이벌을 상대로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이라니?
투수 출신 해설자야 더 말할 것도 없이 감탄했고. 박일훈은 남몰래 중계 테이블 아래로 양손을 꽈악 쥐었다.
역시, 그래 역시!
고유석은 언제나 옳고.
오늘도 옳았다.
1회 초가 끝난 순간 한줌의 걱정조차 모두 내려갔다. 최소한 코리안 더비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더라도.
이제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고유석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지금 보시면 아홉 개 모두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공격적이게 들어온 걸 알 수 있는데-”
같은 생각인 건지. 해설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이야기를 풀며, 평소처럼 찬양 모드에 들어갔지만.
곧 오클랜드의 공격이 이전과 다르게 시작부터 터지기 시작했기에, 더 이어나가진 못했다.
“크리스 데이비스! 깔끔한 적시 2루타! 3루주자 마커스 시미언 홈인! 1루주자 제드 라우리 홈인! 애슬레틱스가 1회 말부터 2득점을 올립니다!”
“최근 고유석 선수의 경기에서 득점지원이 부족했던 오클랜드인데. 오늘은 시작부터 한 건 하네요.”
기분 좋은 스타트.
좋은 일이다.
최근 득점지원이 부실하여, 조금 피해를 끼쳤던 타선이, 오늘은 드디어 한몫했으니까.
그렇게 2대0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2회 초.
마운드에 오른 고유석과 덕아웃 바깥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황정균을 보며, 때가 됐음을 느꼈다.
“1회, 양 팀의 공격이 빠르게 저지되면서. 이제 다시 2회 초입니다. 4번타자 버스터 포지. 5번타자 브랜든 크로포드. 그리고 6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황정균으로 타순이 이어지겠습니다.”
“경기 시작부터 대단한 파괴력을 선보인 고유석 선수인데, 과연 자이언츠, 그리고 황정균 선수가 그걸 뚫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네요.”
“현재 팀이 2점차로 밀리고 있는데. 이런 순간일수록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입니다.”
코리안 더비. 일단은 코리안 더비다. 마운드에는 한국인 투수가, 그리고 6번타자로 한국인 타자가 있으니.
어떻게든 조명해야겠지.
그렇기에 두 선수를 강조한 중계진이었지만, 곧 이닝이 시작되고, 그들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3구, 쳤습니다, 타구가 구르는데, 유격수가- 잡았습니다. 아쉽게도 연속 삼진은 이어가지 못하는군요.”
“그래도 지금은 굉장히 지능적인 투구입니다. 패스트볼만 세 개를 집어넣으면서. 마지막에 투심을 섞어서 땅볼을 유도했어요.”
“네,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불리며, 자이언츠 타선의 핵심인 버스터 포지인데. 효율적으로 잡았습니다.”
버스터 포지.
명실상부 최고의 포수다.
야디어 몰리나에게 수비력으로는 밀린다는 평가가 많지만. 어찌됐든 공수가 완벽한 선수지.
비록 삼진이 아닌 것은 아쉽기는 하나, 자이언츠의 핵심 타자를 내야땅볼으로 잡아낸 건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였다.
‘투심이 평소보다 좋은데. 변형 패스트볼이 올라왔다는 건···’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컷 패스트볼. 고유석은 종종 그 두 가지를 포심에 섞어 변주를 주며, 범타를 유도하는데.
리그 최상급의 구위로 평가받는 포심에 비해 다소 부족한, 그저 평균적인 수준의 변형 패스트볼이라는 평가가 주류지만. 오늘은 그것 역시 좋아 보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버스터 포지를 완전히 찍어 눌렀으니까. 힘 대 힘으로.
‘컨디션이 제대로라는 거야. 시즌 초반에 애스트로스전이나. 노히터를 했던 양키스 때처럼.’
포심이나 서클 체인지업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변형 패스트볼의 폼이 올라온 경기들.
박일훈이 기억하는 경기는 그 두 가지였다. 커터로 완전히 애스트로스를 농락했던 것과 사실 그냥 모든 것이 완벽했던 양키스전.
고유석의 수많은 손 패 중 평범한 수준으로 평가받는 것들마저 폼이 올라왔다는 건.
기존에도 강력했던 것들은 그냥 완벽해졌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브랜든 크로포드! 하이 패스트볼에 크게 헛스윙합니다! 삼진!”
“87마일. 최고구속은 아니지만. 오늘 볼 끝이 평소보다도 더욱더 살아 있습니다.”
“네, 지금 릴리스 포인트를 보시면, 포구 위치와 거의 일직선이죠?”
아니나 다를까.
최고구속조차 찍지 않은 포심이 타자의 허리를 돌려세웠다.
이것 역시 수백 번가량 봤던 장면이다. 메이저리그 기준 저조한 구속에도 하이 패스트볼을 즐겨 사용하는 고유석이니까.
그렇기에 박일훈은 잘 알았다. 평소보다 거리가 멀다는 걸. 즉 타자가 보기에 더 떠올랐다는 뜻이지.
‘이거··· 어쩌면 진짜로···’
그의 캐스터 일생에 유일한 한이 있다면. 저번 양키스전이다.
고유석의 모든 등판 경기를 전담한 박일훈이지만. 그날은 개인사정상 후배에게 자리를 내줬었지.
그날, 고유석이 노히터를 달성했다는 소식에, 화장실 안에서 다시보기를 시청하며, 와이프와 아들이 듣지 못하도록 샤워기를 틀어놓고 홀로 울었었다.
너무 억울해서.
다른 것도 아니고, 한국인 투수가, 무려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했는데.
그걸 중계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전담 캐스터인데!
그날 남몰래 울면서 다시보기로 봤던 경기와 오늘의 피칭이 묘하게 겹쳐졌다.
“또다시 삼진! 2회 초도 삼자범퇴로 틀어막는 고유석! 벌써 다섯 번째 삼진입니다!”
“황정균 선수, 슬러브에 제대로 속았네요. 과감하게 스윙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그 순간 코리안 더비라는 글자는 사라졌다. 그런 재료가 필요 없을 만큼. 더욱더 확실한 메인디쉬가 생겼으니까.
‘코리안 더비는 날리자. 그냥 고유석 위주로.’
그는 말없이 PD와 해설자에게 손짓했다. 다른 변주는 필요 없다. 오늘도 그저 평소처럼.
그 사인에 비슷한 기운을 받은 건지, 다른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무조건 일어난다.’
캐스터의 감이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단단히 일어날 것이라고.
비슷한 기시감이 드는 양키스 전과 똑같은 노히트노런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평범한 경기는 아니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
“Suck, 1회 말 잘 봤지? 오늘은 우리가 제대로-”
2회 초, 깔끔하게 자이언츠를 조지고 벤치로 돌아오니.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건지, 첫 득점의 주인공이었던 마커스 시미언은 뽐내듯 달려왔다.
달달 긁히다가 한 건을 올렸으니,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것 같은데. 대충 눈치를 본 주변 다른 동료들이 그를 끌고 갔다.
“어허, 괜히 Suck 귀찮게 하지 마.”
“그래, 마커스, 너 잘했어, 잘했어. 저쪽 가서 얘기하자.”
왜 그러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짓는데. 음, 니가 이상한 놈이지. 지금 피칭 중인 선발투수 신경을 왜 건드려.
사실 단순히 그런 것 때문은 아닐 거다. 내 낌새가 이상한 걸 자연스럽게 캐치한 거겠지. 눈치도 좋아.
‘컨디션.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것 같은데.’
일단 지금까진 완벽하다.
타자 여섯 명 상대해서, 삼진만 다섯 개 잡았는데 뭘 더 말해?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결과 이상의 기운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정말로 자이언츠를 향한 팬들의 승부욕이 내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리기라도 한 건가?
‘한창 좋은 사이클이기도 했지. 후반기 들어선 뒤로 쭉.’
푹 쉬면서 다시 재정비하고. 거기다 너클 커브까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기대이상의 성적을 올리긴 했다.
비록 메츠전에서는 위협감에 짧게 치고 빠지긴 했지만. 어쩌면 그게 또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고.
‘오늘은··· 속도를 높이면 안 되겠어.’
몸이 좋다. 너무 좋다.
그렇기에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또 막 흥에 취해서 오버페이스를 한다면. 다시 전반기 막바지로 돌아갈 테니까.
또한 이렇게 폼이 좋은 날일수록, 힘을 지능적으로 써야 한다. 기왕이면 길게 던져야지 않겠어?
‘어느 정도 제어할 수는 있지만. 워낙 컨디션이 좋아서. 내 뽕에 내가 취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기어는 지금 상태를 유지한다. 어차피 지금도 느리지는 않고. 또 굳이 변주를 주지 않더라도 충분할 테니까.
“아웃!”
2회 말의 공격은 금방 끝났다. 맷 조이스가 안타 하나를 날리긴 했지만. 딱 그 정도.
맷 케인, 현재는 완벽한 먹튀가 되신 분인데. 확실히 베테랑이라서 그런가. 몇 대 맞아도 금방 회복하네.
“쩝···”
“아, 저 양반 진짜 오래가네. 어차피 얻어맞은 거 좀 더 맞아주지.”
“돈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냥 시원하게 터트리고 가면 오죽 좋아.”
기세를 살려 나가지 못한 게 아쉬운 건지, 타자들은 괜히 상대 투수 맷 케인을 씹었지만. 괜찮다.
2점.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이번 이닝은 어떻게 갈까?”
“지금처럼만 해야지. 지금처럼만. 대신 너클 커브 비중 좀 늘리자. 오늘 잘 긁히네.”
“오케이, 타자들 계속 체크할까? 솔직히 오늘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마운드로 나가기 전. 브루스는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내 공이 워낙 좋다보니, 그냥 해도 쉽게 막지 않겠느냐는 의미에서 말한 거겠지만. 그러면 쓰나.
“그러니까 더더욱 체크해야지. 오늘 같은 날 아쉬운 성적을 올리면 얼마나 두고두고 후회되겠어?”
원래 잘할 때일수록 더욱더 철저해야 하는 법이다. 성적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려야 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확실하게 되는 날이니, 제대로 성적을 올려야지.
“오~ 역시 다르네. 계속 눈치 보고, 좀 낌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사인 보낼게.”
감탄하는 브루스의 어깨를 툭 친 뒤, 다시 덕아웃을 빠져나가니, 팬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다.
“Suck! Suck! Suck!”
“It’s Suck Time!”
“다시 You Suck 외칠 시간이다! 그래, 자이언츠 너네보고 하는 말이야!”
그렇게 좋을까.
경기 전부터 아주 부담감을 팍팍 얹어주더니. 이젠 또 만족한 건지 기분 좋게 웃고들 계시네.
천천히 걸어가, 마운드 위에 섰을 때까지도 환호성은 계속됐다. 휘파람 소리도 들리네.
휘파람 잘 부는 사람 보면 좀 신기하더라. 난 그거 잘 못 하거든. 껌으로 풍선은 잘 부는데 말이야.
아무튼 무슨 락스타의 콘서트장처럼 콜리시엄은 시끌시끌거렸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만원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에 비슷한 정도로 관중이 찼으니까.
‘그럼 또 조용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청개구리라서 말이야.
막 사람들 반대로 행동하고 싶네? 어쩌면 관심종자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목표는 정해졌다.
콜리시엄을 조용하게 만들자.
방법은 두 가지지.
하나는 X나게 털려서. 팬들이 넋이 나가도록 하는 것.
이쪽은 난이도가 좀 힘들다.
어지간히 털리는 게 아닌 이상, 조용해지는 게 아니라, 절규하거나, 상대팀을 향해 온갖 종류의 욕설과 저주를 토해내겠지.
진짜 억소리가 나도록. 아니, 억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처참하게 털려야 저 우렁찬 목청이 막힐 거다. 아주 힘든 일이지.
대신 두 번째 방법은 쉽다.
진짜 X나게 잘하는 것.
그래서 감히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앞엣것보다는 훨씬 쉽지.
잘하는 게 더 어려운 거 아니냐고? 물론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스트라이크!”
더 어려운 날이니까.
카를로스 몬크리프.
성적이 대단하다. OPS가 무려 10할이지. 1.000말이야.
거의 트라웃 수준이네.
지금 당장은.
그게 왜 그렇냐면.
“스트라이크!”
29일, 그저께 갓 데뷔한 따끈따끈한 신인이라서 그렇다.
볼넷 하나로 출루율 10할. OPS 10할을 기록했지.
그래서 분석 자료 대부분이 트리플A건데. 타율 0.287 출루율 0.349 장타율 0.421로.
0.770의 OPS를 기록했다.
홈런은 두 개고.
이 정도면 평범한 거 아니냐고? 평범한 거 아니다. 오히려 조금 못하지.
‘PCL에서 홈런 2개라.’
PCL, 퍼시픽 코스트 리그는 극단적인 타고투저거든. 내륙지방이라 건조한데다.
해발고도가 더럽게 높은 산동네 구장이 많아서, 투수들의 지옥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오죽하면 투수들이 트리플A 성적보다, 빅리그 성적이 더 좋은 경우가 허다하겠어.
내가 이걸 왜 잘하냐면, 하도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그렇다.
제발 트리플A 건너뛰고 빅리그 가고 싶다면서. 노래를 부르던 마이너 투수들이 많았지.
아무튼 그런 PCL에서 71경기나 뛰었는데 홈런이 겨우 두 개라는 말은.
“파울!”
파워툴이 없다는 것과 동일했다. 허우대는 그럭저럭 멀쩡한 친구가. 힘이 그렇게 없어서 쓰나.
아니나 다를까. 대놓고 들어온 몸쪽 패스트볼에 타자는 곧바로 스윙을 냈지만. 배트는 마치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밀어낸 공은 홈플레이트 뒤로 툭 날아갔고.
보통이면 범타가 됐을 텐데.
오히려 배트를 너무 잘 밀어내서 파울이 됐네. 투구수 손해봤구만. 심지어 묵직한 포심도 아니고, 커터였는데 말이야.
‘뭐, 이제 잡지 뭐.’
아깝긴 한데,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한번 타격감을 보려고 던져본 거고. 확실하게 잡을 공은 따로 있으니까.
좌타자잖아?
“스트라이크 아웃!”
4구째 너클 커브.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큼직한 헛스윙.
이걸로 다시 삼진 하나.
벌써 여섯 개네.
‘자이언츠가 생각보다 많이 약하긴 하네.’
현재 자이언츠는 확실히 이름값에 비하면 약하다. 10년대에 세 번이나 우승한 팀치고는 좀 그렇지.
어쩌면 당연할지도.
세 번 우승 했다는 건 그만큼 윈나우를 X나게 달렸다는 건데. 좀 쉬고 재정비도 해야겠지. 원래 한 팀이 계속 잘나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번은 퍼져야 정상이잖아?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저~기 계시는 황정균 선배님이나, 방금 잡힌 카를로스 몬크리프가 로스터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걸 증명한다.
또한.
“스트라이크!”
타자들의 타격방식도 문제가 있고. 확실히 숫자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까, 확 느껴지네. 뭐가 문제인지.
8번타자 닉 헌들리.
자이언츠의 백업 포수인데.
오늘 지명타자로 나온 버스터 포지를 대신해 포수라 나왔다. 우리 구장이라, 지명타자제거든.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체력부담이 심한 만큼, 버스터 포지에게 휴식을 준 셈이지.
좀 부족하긴 해도. 백업포수 치고는 적절한 성적을 찍고 있지만.
“아웃!”
오늘 나를 상대로 적절한 타자로는 힘들지. 높이 뜬 타구. 3루수 맷 채프먼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가볍게 포구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9번타자, 고키스 에르난데스까지 삼진으로 잡으며, 3회 초가 막을 내렸다.
이걸로 한 타순이 돌았는데. 마음속엔 확신이 깃들었다.
‘이름값을 못 하네.’
얘들, 자이언츠가 아닌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성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구만.’
스윙이 짧아. 대부분 다운스윙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 상대는 처음이다.
플라이볼 혁명, 그 메타 앞에서 죄다 어퍼로 후리고 있으니까. 자이언츠만 혼자 시대를 역행하는 셈이지.
이해는 된다.
AT&T가 타자한테 아주 X같은 구장이고. 바닷바람 때문에 홈런이 나오기 힘든 곳이거든.
그러니 구장의 사정에 맞게 자이언츠만의 타격 방법인 셈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다운스윙이라.’
삼진만 일곱 개.
범타 두 명은 버스터 포지와 닉 헌들리뿐이다. 공교롭게 둘 다 포수네.
아무튼 삼진이야 그냥 오늘 내 역량이지만. 범타 두 개가 전부 다 내야에 머무른 건. 명백히 저쪽 타격법의 잘못이지.
‘장타율 5할이 넘는 타자가 없던데. 이제 좀 이해 되네.’
오늘 자이언츠 타선에서 장타율이 5할이 넘는 타자는 없다. 진짜로 없다. 버스터 포지도 0.491이니까.
즉 팀 자체의 파워가 엄청나게 약하다는 건데. 물론 AT&T라는 극도의 투수친화적 홈구장 때문이겠지.
투수를 위한 쿠어스 필드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 AT&T를 벗어난 자이언츠도 그리 힘이 있지는 않았다.
한 타순을 돌며. 아홉 명 타자를 모두 상대해본 결과.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야 밖으로 안 나가겠네.’
오늘 자이언츠 타자들 중 내 공을 외야로 보낼 수 있는 타자는 없다.
####
“쟤 대체 뭐야?”
“90마일도 안 되는 건데, 대체 왜 못 치는 거야···”
“하, 미치겠다, 진짜.”
첫 타석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완벽하게 썰렸다.
단 한 명의 투수, 올해 데뷔한 루키로 인해서. 그 우울감이 자이언츠의 덕아웃에 감돌았다.
“Hwang, 쟤 너랑 같은 나라 출신 맞지?”
“어, 맞아.”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습관이나 뭐 그런 거. 같은 나라니까, 소문이라도 들은 거 있을 거 아니야?”
“나도 잘 몰라. 우리나라 프로출신도 아니고.”
몇몇은 황정균에게 슬그머니 묻기도 했다. 같은 나라 출신에. 메이저리그에서는 소수에 해당하는 국가 출신이니.
서로 간에 무언가 오고간 말이라거나, 혹은 소문이라도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하긴, 이런 기대 자체가 조금 우스운 일이다.
심지어 꽤 인종차별적이지.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메이저리그에서 소수 국적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친한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에 기댈 정도로 자이언츠 타자들은 몰려 있었고. 그건 버스터 포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제리, 제리는, 올스타전에서 한번 붙어봤잖아요. 혹시 뭐 없어요?”
“나도 딱히 없어.”
몇몇 동료들은 그에게 기대기도 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사정이 조금, 아주 조금 나았으니까.
바로 얼마 전에 직접 붙어보지 않았던가? 딱 한 타석에 불과하더라도. 오늘처럼 압도적인 피칭을 직접 봤지.
바로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에서 봤을 때도, 충분히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시끄러운 녀석이고, 시끄러운 이웃이기에 그전에도 이름이야 들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녀석은 괴물이었다.
어째서 역대 최고라는, 그 오만하기 그지없는 단어가 당연한 듯이 수식어로 붙는지 잘 알게 됐지.
다른 것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내셔널 리그 최강의 타자들을 허수아비 베어 넘기듯 쓰러트렸으니까.
포지 자신도 그중 한명이었고.
‘그건 놀이였군.’
헌데 지금은 낯설었다.
그때의 위압감, 그리고 피칭조차 오늘에 비견할 수는 없었으니까.
컨디션의 차이, 폼의 차이일 수도 있을 거고. 오늘이 유독 긁히는 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는 실전이냐 아니냐는 것.
이벤트성 올스타전이 아닌.
진짜 정규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마주한 Go는 그날의 임팩트조차 가뿐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
‘3년 전의 커쇼, 어쩌면 그 이상인가?’
3년 전. 투수 포지션으로 세 번째 사이 영과 MVP를 동시에 거머쥔 괴물이 탄생했었다.
클레이튼 커쇼라는 이름이 정점의 정점에 올라서고, 전설로 기록된 순간이었지.
같은 지구, 라이벌팀 자이언츠의 선수로서. 그런 커쇼를 직접 상대한 입장으로서 말하기를.
최소한 오늘 하루에 한해서는. 마운드의 투수는 그때, 극강의 포스를 뿜어냈던 커쇼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사실 실제로 성적 역시 그때 커쇼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이기는 하고.
‘오늘은···’
“아주 고달픈 하루가 되겠어.”
포수이기에 잘 알고 있다.
저런 기세를 가진 투수가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말이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버스터 포지는 흘끔 덕아웃 바깥을 봤다. 이 험한 곳까지 굳이 들어와서 자신들을 응원해주는 고마운 팬들.
정말로 고마운 사람들이지.
올해 자이언츠는 심하게 추락했다. 작년, 그래도 와일드카드를 통해 포스트시즌이라도 진출했던 것에 비해.
올해는 와일드카드는커녕, 그냥 폭삭 주저앉아, 다저스의 비웃음이나 듣는 신세가 됐다.
“Let’s Go! Giant!”
“이제 겨우 3회야! 2점? 거인이 그것도 역전 못 해?”
“상대 투수 신 내고 있는데, 좀 놀아주다가 나중에 두들겨 패자!”
그런데도 여전히 응원해줬고. 여전히 자이언츠가 최고라며 소리친다. 그리고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다.
후반기에 다시 반등하면 된다. 자이언츠라면 할 수 있다. 우린 10년대 최고의 팀이다.
우리에겐 그런 저력이 있다.
아직 경기는 많이 남았으니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어쩌면 인정하지 않는 거겠지.’
애써 모른 척하는 거다.
그들이 꿈꾸던 자이언츠가 이젠 내리막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영광의 시대가 조금 저물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 것이지. 알고 싶지 않다면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도 오늘은 참 고달픈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종지부라고 했던가?’
언론에선 그렇게 표현했다.
Go, 저 투수에게 오늘 경기는 완벽했던 7월에 안녕을 고하는 종지부라고. 마지막 점을 찍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자이언츠에게도 종지부가 될 것 같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의 종지부가.
“다들 정신 차려! 아직 경기 안 끝났어! 이제 겨우 2점차야, 2점차. 설마 애슬레틱스한테 질 생각은 아니지?”
그것을 직감했음에도, 버스터 포지는 팬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
“맷이 잘 막고 있으니까. 수비 잘하면서 차근차근 따라가면 돼. 어린놈이 주제에 안 맞은 지 너무 오래됐던데. 이제 터질 때가 됐지. 우리가 하나 올려주자고. 부담스러울 무실점도 끊어주고.”
불안감을 마음 한쪽에 눌러둔 채. 그는 팀의 리더로서 흔들리는 선수들을 바로잡았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결과도 아직은 결정되지 않았고.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