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스트라이크 아웃!”
희희낙락. 공 던지고 타자들 삼진이나 잡으면서, 즐겁게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Suck, 너 타석 나가는데?”
“남 일처럼 굴더니. 큰일 났구만.”
“그러고 보니 애초에 너 무조건 6회 초에 타석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으···렇지?”
생각해보니, 6이닝까지 던진다고 치면, 무조건 내 타석이 돌아오잖아?
4회 초 원아웃에서 내가 스퀴즈 번트를 댔고. 라제이 데이비스가 홈런. 그리고 2,3번타자인 시미언이랑 라이온 힐리가 아웃.
5회 초에 삼자범퇴가 나오더라도 6회 초에는 타순이 무조건 7,8,9다. 5회 초에 안타도 하나 나오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내 세 번째 타석은 확정이라는 거지. 계산을 잘못했어. 큰일났는데?
룰루랄라 공만 훅 던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결자해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좀 아플 거 같은데··· 무슨 눈빛이··· 내가 사람이라도 죽였나? 아, 스티븐 마츠를 거의 살인하긴 했지.’
6회 초. 원아웃.
다시 타석에 서자, 아주 살벌한 시선이 쏟아졌다. 홈팬도, 메츠 선수들도. 죄다 나를 노려봤다.
“Kill! Kill Him!”
“Kill! 저 Fucking Cunt 새끼한테 징벌을 내려!”
“동업자 정신도 없는 쓰레기 새끼!”
특히 홈팬들은 아무래도 이 고유석의 처형을 강력하게 원하는 것 같다. Kill이라니 다들 너무하시네.
누가 보면 내가 죽을죄라도 지은 줄 알겠어. 내가 노히터에 번트를 댔냐? 아니면 뭐, 15대0인데 번트했어?
그냥 상식적인 상황에서 팀을 위해 스퀴즈 번트를 했고, 오직 열심히 한 죄밖에 없는데. 억울하다, 억울해.
그야말로 장엄한 처형식처럼 모두가 내 대가리를 노리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대타!”
눈치를 살피던 밥 멜빈 감독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급히 대타를 요청했다. 아직 5이닝 밖에 안 던졌는데 바로 교체네.
타석에서 교체되면, 마운드도 교체가 돼야 하지만. 한 이닝 더 던지게 하려다가, 내 대가리에 공이 꽂히는 것보다는 그냥 휴식 겸 딱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낫다는 거겠지.
“어우, 무서워. 잘 있어라.”
“운 좋은 줄 알아. 죽여 버리려고 했으니까. 다음에 볼 땐 대가리 조심해라.”
“아니, 내가 뭐 배트 플립이라도 했어? 진짜 너무하네.”
“닥치고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 X같은 사기꾼 새끼야.”
“예예, 얌전히 꺼지겠습니다. 잘 계십쇼.”
원래라면 거부했겠지만, 나도 눈치는 있기에 얌전히 타석에서 물러났다. 어우, 무서워.
5이닝 밖에 못 던진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헤드샷 맞고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어차피 오늘은 짧게 던지기로 했고. 살짝 아쉽지만, 쉬는 셈 쳐야지.
“Suck 너 때문에 내가 맞는 거 아니야? 오늘은 쉬려고 했더니. 이게 뭔 지랄이야.”
“뭐, 죽기야 하겠어요. 헬멧 잘 썼죠? 그럼 괜찮아요.”
오늘 아담 로살레스에게 2루를 내주고 쉬었던 제드 라우리가 나 대신 대타로 나왔는데. 그는 무섭다는 듯 짧게 몸을 떨었다.
수고하슈. 난 이만 갑니다.
불 질러놓고 혼자 튀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긴 하네.
‘5이닝 6삼진. 뭐,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네.’
5이닝 6삼진 2피안타 무실점. 그리고 2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 오늘 성적이구만.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내 시간이 끝나긴 했지만. 대신 안타 두 개 쳤잖아? 그러면 된 거지.
“FA되면 내셔널리그로 갈가. 그때까지 다리만 멀쩡하면, 메이저에서도 3할 찍겠는데?‘
거기다 긍정적인 가능성도 엿봤으니까. 슈퍼소닉 고유석, 아직 살아있네. 기분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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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 아쉬운 이른 교체, 허나 새로웠던 모습!>
<두 타석 동안 완벽한 테이블세터였던 Go! 오클랜드의 강한 9번?>
<신이 내린 왼팔, 오늘은 발야구? 5이닝 2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 2타석 2안타 1타점 1득점. 투타가 완벽했다!>
흉흉한 분위기에 예상보다 빨리 교체되며, 흥이 깨지긴 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도 고유석의 퍼포먼스는 계속해서 회자됐다.
엄청난 주력을 뽐내며, 전혀 예상치 못한 활약을 선보였으니까.
<답내친이 아닌, 답내뛴? 고유석 답답해서 내가 뛰었다!>
수준급 테이블세터도 아니고. 그날 선발투수로 등판했던 투수가 타석에서 두 다리로 그라운드를 뒤흔들었으니.
그건 마치 투수타석에서 만루홈런을 나온 것만큼이나 뜻밖의 풍경이었다.
또한 우스꽝스러운 타격폼으로 땅볼을 만들며, 오직 가공할만한 주력만 빛났던 첫 타석과 다르게.
두 번째 타석은 번트부터 꽤나 깔끔하고, 준수했기에 더욱더 헛웃음을 자아냈다.
[#Yankees]
[메츠 X신들 Suck한테 2안타 맞았네.]
└내야 수비가 얼마나 X신이면, 투수한테 털려?
└메츠 수준 알만하다. 어메이징하네, 어메이징해.
└X신들, 하여튼 뉴욕 망신은 메츠가 다 시킨다니까?
└우린 최소한 너네처럼 노히터는 안 당했어.
└야이 X같은 새끼야!
간혹 일부 네티즌들은 고유석의 2안타 보다는, 그것을 당한 대상인 메츠에게 집중해서 조롱하기도 했지만, 메츠의 격렬한 반격에 금방 격퇴됐다.
<이른 교체. 하지만 기록은 계속된다! 고유석의 목표는 본인 기록 경신?>
<7월 무실점, Go의 ERA는 점점 떨어진다!>
다만 몇몇 이들은 어차피 잠깐의 이벤트에 불과한 타격 대신. 투수로서 고유석의 기록에 기대하기도 했다.
전반기 막바지부터 서서히 무실점을 쌓아 올리더니. 어느덧 다시금 기록을 노려볼만한 수준까지 올라왔으니까.
[#A’s]
[이번엔 50이닝까지 가자!]
└50이닝이 뭐야, 너무 속이 좁네. 최소한 신기록은 해야지.
└Suck 클래스가 있는데. 무조건 역대 1위가 맞지.
└이번엔 좀 빨리 내려가긴 했지만. 쉬고 와서 그런가, 폼 좋던데. 충분히 가능해.
후반기 기세가 날카로운 고유석이기에, 팬들은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 신기록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상상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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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부탁이니까, 제발, 제발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경기 이후 스콧 에머슨은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다. 자기 투수가 머리에 헤드샷 맞거나, 뛰다가 발목이 삐끗하는 걸 보기 싫었겠지.
그 절절한 마음이 잘 전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좀 안심하더라.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아무튼 간만에 뛰어서 기분 좋았던 메츠를 뒤로한 채. 우린 높이 날아, 국경을 넘었다. 뭔 개소린가 싶겠지만. 진짜야.
“나 여권 챙겼던가?”
“어, 설마 안 챙겼어? 그럼 등판 못 하는 거 아니야?”
“큰일이네. Suck 얘 못 나오면 팬들이 아주 난리 날 텐데.”
“캐나다니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옆동넨데.”
토론토 블루제이스.
몬토리올 엑스포스가 워싱턴으로 연고지를 옮겨, 내셔널스가 되면서. 유일하게 남은 캐나다 팀이다.
봐, 높이 올라갔고, 국경 넘었잖아. 난 언제나 진실만 말해.
‘최근 성적이··· 별로 좋지는 않네.’
현재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시원하게 꼬라박는 중이다. AL 동부 꼴찌를 자랑하지.
2015시즌, 데드라인에 있었던 광란의 트레이드 이후, 15,16년 2년 동안 대권을 노리며, 굉장한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에 대한 리바운드인지, 1년 만에 처참하게 망가졌네.
작년만 해도, 애슬레틱스랑 사정이 정반대였는데, 한순간 확 바뀌었어.
‘타선도 전체적으로 침체 분위기고. 심각한 것까진 아니지만, 강한 건 아니야.’
팬들은 아예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세우라며 소리치고 있던데. 그 기대에 적절한 상대였다.
‘로저스 센터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다만 문제가 있다면 토론토의 홈구장인 로저스 센터가 아주 거지 같은 곳이라는 것 정도.
일단 돔구장이라서 홈런이 잘 나온다. 풍압이 덜한 만큼, 공도 잘 뻗고, 또 밀폐된 만큼 관중들과 조명이 내는 열기에 상승기류가 생겨서 높이 뜨지.
거기다 인조 잔디라 타구가 더럽게 빨리 굴러가는 것도 문제고.
몇몇 언론에서는 쿠어스 필드와 비교하기도 한다. 명실상부 AL 최고의 타자구장이지.
그런 특성이 문제지만···
‘즉 안 맞으면 된다는 거지.’
난 상관없다.
저번 경기에 짧게 던져서 그런가, 힘이 아주 남아돌거든.
구장빨? 삼진 많이 잡으면 구장 빨이 어딨어. 그냥 조지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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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2년을 보내며. 한순간 올라간 인기는, 올해의 추락에도 쉬이 가시지 않았다.
월드시리즈에 도전하며, 열기를 불태웠던 여운이 아직 토론토, 그리고 온타리오 주에 남아 있었으니까.
NFL 팬들이 제법 유입되며, 팬덤의 분위기로 꽤나 열정적으로 변했고 말이다.
“저건··· 뭐야?”
“미친놈들이네.”
“하여튼 미국놈들 좀 이상하다니까···”
허나 그런 열정적인 이들마저도, 정신적인 충격을 선사하는 코스튬 앞에선 그저 당황하기 바빴다.
저 미친놈들은 대체 뭘까.
대체 뭔데 저런 꼴을 하고 여기에 온 걸까. 로저스 센터, 이 야구장에 말이다.
“Suck은 3경기에 나오는 거 맞지?”
“어, 확실하다니까? 원래 5일 쉬고 등판하잖아.”
“저번처럼 이번에도 막 내일 나온다거나 하면 죽을 줄 알아.”
“좀 믿어라 새끼들아. 정 안 미더우면 니네가 일정 짜던가?”
고유석과 함께 레이더스도 국경을 넘었다. 토론토, 평화로운 캐나다를 약탈하기 위해서.
무려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뽐낼 기회인 만큼. 모든 장비를 풀장착한 그들의 모습은 주변 캐나다인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본인들이 미국인임을 자랑하는 성조기까지 당당하게 흔들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Suck이라면 걔 맞지? 오늘 선발투수.”
“미친놈들. 걔 하나 응원하겠다고 저러고 야구를 봐?”
“원래 풋볼 보던 놈들이라더니. 진짜 좀 머리가 돌았네.”
원래 아이스하키 보던 사람들이 미식축구 보던 이들을 욕하는 진풍경이 일어났고.
몇몇 토론토 팬들은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도대체 그 Suck이라는 놈은 어떤 놈이기에, 저런 또라이들이 이토록 지극한 팬심을 가진 건지 궁금했으니까.
최근 가장 잘나가는 투수라는 거야 이미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메이저리그를 보는 사람들 중 Go 혹은 Suck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으니까.
그 성적이 단순히 이번 시즌 최고를 넘어서, 역대 최고와 비견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선수이고, 또한 오클랜드와 토론토의 엄청난 거리, 야구에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한 캐나다 언론으로 인해, 블루제이스의 홈팬들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의구심을 가지고, 궁금해한 블루제이스의 팬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부심도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든지, 한방 맞으면 뻑 가는 거야.”
“루키라며? 로저스 센터에 넋이 나가겠네.”
언제나 강타선을 자랑했던 블루제이스고, 리그 최악의 타자구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상대 투수가 누구더라도, 지금 블루제이스가 얼마나 약해졌더라도, 최소한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몇몇 이들은 그토록 잘난 투수를 우리가 한번 두들겨 보자며,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You-Suck!”
곧 경기가 시작되고.
학살이 시작된 순간.
그리고 이상한 코스플레이를 한 또라이들이 본격적으로 광분하기 시작한 순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 어어-”
“You-Suck!”
어째서 저 또라이들이, 저 동양인 선수에게 그토록 푹 빠져 있는 건지.
그리고 대체 왜.
“스트라이크 아웃!”
“Youuuuuuuuu Suuuuuck!”
왜 다른 구단의 팬들, 특히 같은 지구라 자주 보는 양키스 팬들이 저 동양인만 보면 치를 떨고, 이를 가는지 말이다.
시작부터 볼넷 두 개를 내주며, 아슬아슬했던 1회 초의 수비 이후. 위기 뒤의 기회라며 소리쳤던 홈팬들이 무안하게도.
1회 말의 공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삭제됐다.
자기가 누군지 캐나다인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켜주겠다는 것처럼.
미친 듯이 타자들을 쓸어 담은 고유석으로 인해서.
“Hell Yeah!”
“USA! USA!”
“이게 미국의 힘이다!”
“You Suck! 이 X같은 캐네디언들아! 크하하하핳!”
이닝이 끝난 뒤 남은 건. 대체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You Suck을 신명나게 외치는 소수의 또라이들, 애슬레틱스 원정 팬들의 목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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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오늘 경기에 대한 내 감상은 간단하다. 니들이 공 던져라, 내가 빠따 칠게.
그게 훨씬 낫겠다.
이 개쓰레기들아.
4이닝 8탈삼진 1피안타 1볼넷. 일단 오늘 내 성적이다. 삼진도 X나게 많이 잡았고. 타선을 아주 꽉꽉 묶어뒀지.
말했잖아, 힘이 남아돈다고.
로저스 센터고 나발이고.
죄다 때려잡으면 타자구장이 뭔 소용이야? 그러니 참 좋은 경기인데.
문제는 상대투수도 똑같이 우리 타자들을 막고 있다는 거다. 0대0이거든.
우리 팀이 기록한 안타도 똑같이 하나다. 볼넷은 두 개고. 이야, 블루제이스보단 잘했네. 아주 대단하다! 무려 볼넷 하나를 더 얻어내다니!
“니들이 사람이야?”
데뷔한지 이제 4달이 조금 더 된 루키가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주변의 이들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제드 라우리나 라제이 데이비스 같은 베테랑들도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고.
최근 들어 엄청난 공갈포를 자랑하는 크리스 데이비스 역시 민망한 듯 볼만 긁었다.
“어흠흠···”
“자자, 다들 빨리 나가보자. 이번 이닝은 한 점 내야지?”
“아, 당연히 그래야지. 어우, 눈치 보여서 못 살겠네.”
살기 어린 눈빛에 못이겨, 도망치듯 그라운드로 뛰어나가는데. 이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내가 버릇을 잘못 들인 거야.
못 이길 경기도 악으로 깡으로 이겨주니까, 다들 정신이 헤이해진 거지.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Go, 진정해, 진정해. 이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잖아. 그냥 네 피칭에만 집중하자.”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문제죠. 봐요, 저러니까 제가 안 뛰고 배겨요?”
“은근슬쩍 그런 어필은 하지 말고. 두 번 다시 네가 뛸 일은 없으니까.”
요거 안 통하네. 아니, 거 뭐, 인터리그 몇 번이나 된다고. 가끔 별미처럼 즐기겠다는데, 이걸 부득부득 막으시네.
아무튼 스콧 에머슨도 날 이해한다는 듯 위로하며, 은근히 타격코치를 흘겨봤다.
투수가 잘하고 있는데 타자들이 죽쑤고 있으면, 원래 코치도 투수코치가 갑인 법이지.
그 시선에 타격코치도 머쓱한 듯 괜히 먼 산을 봤는데. 다행히 압박이 먹힌 건지. 드디어 점수가 나왔다.
“야이 X새끼들아!”
“한 점만 내라고, 한 점만!”
“타자라는 놈들이 어떻게 그 정도도 못 하냐!”
선두타자로 나갔던 브루스 맥스웰과 라제이 데이비스가 나란히 아웃당하며. 우리 원정팬들의 혈압이 극도로 올라갔지만, 직후 맷 조이스가 다시금 볼넷을 얻어낸 뒤.
“갔다~~~~”
“그래! 이제 좀 말을 듣네!”
“난 진작에 믿고 있었어!”
“한 점 더 가자~~~”
“아···”
“What the F-”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다음 이닝에 치면 돼.”
마커스 시미언이 드디어 로저스 센터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큼직한 홈런을 날려 보냈으니까.
“자, 봤지?”
“어우, 누구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힘드네.”
비록 이후 추가득점은 없었지만. 점수를 낸 것이 그렇게도 좋은 건지 아주 거들먹거리는데. 누가 보면 빅이닝이라도 만들 줄 알겠네. 고작 2점 내놓고 자랑스러워하지 마.
어이가 없어서 지그시 쳐다보니, 그제야 자신들의 추태를 깨달은 건지, 다시금 헛기침만 뱉으며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그래, 수고했다. 아주 고맙네. 2점이라도 낸 게 어디야.”
“···뭐야 그 반응은. 우릴 너무 허접 취급하는 거 아니야?”
“왜 포기를 하고 그래. 차라리 욕을 해. 점수 더 내라면서.”
됐어. 바라지도 않는다.
####
“스트라이크 아웃!”
균형이 깨지자, 블루제이스도 이젠 다급해진 건지. 최선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그런다고 안 나오던 점수가 나오나.
마음이 편안할 때도 삼진 잘만 잡혔는데, 이젠 조급해지기까지 했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거기다 나도 기어를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더더욱 득점은 멀어졌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미칠 듯한 인터벌에 제대로 타격폼조차 갖추지 못한 채, 타자는 크게 헛스윙했다.
그렇게 열 번째 삼진이 올라가자,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타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레이더스도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유썩 거렸고.
그래, 평소 같아서 좋네.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야.
이젠 슬슬 누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내가 삼진을 잡았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니까?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아웃!”
그렇게 5회 말이 순식간에 삭제되고, 곧이어 6회 역시 안타를 하나 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삼진 역시 하나 더 내주며 타선이 꽁꽁 틀어 막히자. 홈팬들은 인내심을 잃었다.
“우우우우!”
“X발 믿은 내가 X신이지!”
“내가 다시는 야구 보나 봐라!”
우리가 아닌, 블루제이스를 향한 야유를 퍼부으며, 관중들은 조금 이른 타이밍에 경기장을 벗어났다.
오늘 나한테 털린 게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번 시즌 전체적으로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차곡차곡 쌓인 게 더 크겠지.
겉으로도 보이는 관중 이탈에, 안 그래도 저조했던 블루제이스의 타선은 더욱더 자신감을 잃었다.
‘맛이 갔네, 맛이 갔어. 하긴, 자존심이 상해도 단단히 상할 테니까.’
가장 큰 지지자인 홈팬들마저도 경기를 포기했으니. 의욕이 생길 리가 있나.
안 그래도 쳐졌던 토론토 타자들의 어깨가 한층 더 축 내려앉았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그저 지금까지처럼 맛이 간 타자들을 차곡차곡 주워 담는 것뿐이었다.
‘다 털고 내려가자.’
마음 같아선 완봉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이미 기어를 높였으니, 어쩔 수 없지.
남은 체력을 모두 쏟아붓는다는 느낌으로 7회 말, 마지막 피칭을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가장 먼저 4번타자 켄드리스 모랄레스. 3년 33m, 1100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합류한 선수이지만. 오늘은 별로 좋지 않다.
삼진 두 개가 이 양반 몫이거든. 이제 거기서 하나가 더 추가됐고. 해트트릭하셨네.
지명타자인데다가 클린업에, 연봉도 제법 높은 만큼, 어느 정도 기대 받는 타자인데. 실망스런 성적을 기록한데다, 오늘은 삼진만 세 개를 당했으니.
몇몇 홈팬들은 뒷목을 잡거나, 아니면 다시금 경기장을 이탈했다.
그다음 5번타자 스티브 피어스. 저니맨으로 유명한 양반인데.
‘타격감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
제법 타격감이 나쁘지는 않더라. 비록 안타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삼진 없이, 좋은 타구를 잘 날렸으니까.
실제로 이틀 전, 1차전에선,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하기도 했었고.
‘차분하게 잡자. 어설프게 넣다가 잘못 걸리면 넘어가.’
콜리시엄도 아니고, 로저스 센터니까. 기껏 마지막까지 와서 똥을 끼얹을 순 없지.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파울!”
최대한 바깥쪽 위주로 제구하며, 차분하게 한 구 한 구를 집어넣었다.
차분하다고는 해도, 인터벌은 여전히 유지 중이기에, 타자 입장에선 숨 가쁜 승부겠지만 말이다.
“아웃!”
그리고 마지막, 하이 패스트볼을 집어넣자, 스티브 피어스는 큼직하게 스윙했지만. 약간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공이 빗맞았다. 커터였거든.
통 튕긴 타구를 가볍게 주워 1루로 송구했고, 그것으로 투아웃이 올라갔다.
이제 마지막 6번타자.
트로이 툴로위츠키.
더 말할 것도 없는 선수지.
메이저리그 역사에 손꼽힐 만한 수비력과 수준급 타격을 자랑하며, 완성형 유격수의 표본 같은 양반이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주저앉았나 몰라.’
토론토로 트레이드한 뒤로, 쿠어스 버프가 빠진 건지, 성적이 좀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작년만 하더라도 준수한 성적을 찍었던 양반인데, 올해는 완전히 맛이 갔다.
파워가 확 줄었지.
그래도 한때 정점을 찍어본 선수라서 번뜩이는 천재성은 남아 있는 건지. 오늘은 제법 날카로운 타격을 보였다.
실제로 피안타 두 개 중 하나가 이 양반이 기록한 거니까.
‘방심하지 말자.’
맛탱이 간 노인네라고 안심했다고 쓴맛을 봤으니.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지.
어차피 마지막 타자니까.
힘을 더 아낄 필요도 없고.
“스트라이크!”
초구는 서클 체인지업.
바깥쪽에서 쭉 빨려 나가는 궤적에 툴로위츠키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그대로 헛스윙.
“볼.”
비슷한 코스로 포심 하나.
살짝 나갔네. 타자도 스윙하긴 했지만, 중간에 간신히 멈췄고, 심판 역시 휘두르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볼을 선언했다. 이걸로 원 앤 원.
‘이번엔 좀 낮게.’
슬슬 체력이 좀 처지는 건지. 살짝 어깨가 묵직하다. 빨리 끝내야겠어.
“파울!”
그런 의미에서 3구는 최대한 집중해서 넣었다. 몸쪽 낮은 포심. 툴로위츠키는 억지로 몸을 비틀며 공을 쳐냈지만, 워낙 까다로운 코스이기에 제대로 컨택하지 못했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결정구가 남았구만.
‘이게 딱이겠네. 치려면 치슈. 어떻게든 때리기만 하면 홈런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4구.
과감하게 던진 한가운데의 공에 툴로위츠키의 배트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너무 먹음직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끝내 너클 커브나 서클 체인지업 V1처럼 떨어지는 계열의 변화구라고 판단한 건지, 베테랑다운 인내심을 보이며 꾹 참았지만. 변화구는 맞다.
“스트라이크 아웃!”
단지 쓰리핑거 체인지업일 뿐. 유유히 한복판에 들어온 공. 주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그것으로 삼진 아웃.
“우우우우우우!”
“때려치워! X발 계속 보고 있는 내가 X신이지!”
7회마저 그렇게 끝나버리자.
다시금 한 차례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경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제법 관중이 차 있었던 로저스 센터는 곳곳에 빈자리가 생겨났다.
“수고했어, 요즘 기세 좋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예, 뭐. 이쯤하면 됐겠죠. 팬들도 만족한 것 같고.”
“USA! USA!”
“이게 미국의 승리다!”
“잘 봤지? 이제 아이스하키나 하러 가라! 이 캐나다 X밥들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눈치없이 우리 팬들은 USA를 연호하며 아주 미국 만세를 외치고 계시는데.
뭐야, 한국도 껴줘요. 내가 한국사람인데 왜 미국만 말해. 서운하네. 한미동맹 모르시나.
아무튼 분위기는 좋았다.
“이제 39이닝인가? 잘하면 전반기 기록 넘겠네.”
“전반기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신기록 세우는 거 아니야?”
7이닝 2피안타 13K 1볼넷. 그리고 무실점. 연속 이닝 무실점을 39이닝까지 늘리며 내 피칭은 끝났고.
“우리 믿고 편하게 봐.”
“승리 안 날릴 테니까, 걱정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어.”
심통난 토론토를 보며, 동료들은 자신감 있게 말했는데···
“와아아아아아!”
“갔다! 갔다! 갔다아아아!”
“이게 캐나다고, 이게 블루제이스다! 이 X발 X같은 양키들아!”
“휘이이이이익! 로저스 센터 만세다!”
“야구는 원래 마지막에 이기면 되는 거야! 아이스하키는 너네나 하러 가라!”
9회 말, 블루제이스는 1차전에 이어, 다시금 끝내기 홈런을 날리며 역전승을 거뒀고. 내 승리도 홈런과 함께 날아갔다.
뭐야, 믿고 맡기라며. 이 쓰레기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