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31화 (131/316)

131화

[4회 말 종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0 : 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투수전 미쳤네.

└양 팀 타자들 무슨 빨리 죽기 대결이라도 하냐?

└경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5회야?

고유석의 예상처럼, 타자들은 쉬이 코리 클루버를 공략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4회가 종료된 시점에서도 나란히 0대0이 이어졌다.

양쪽 다 순식간에 공격을, 아니, 수비를 끝내는 상황에 몇몇 사람들은 사무국에겐 가장 이상적인 경기일 거라며 농담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경우, 최근 경기 시간 단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는데.

이번 경기는 매 이닝이 길어야 고작 몇 분 정도만에 끝나며,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으니까.

<사이 영 후보 간의 혈전!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Go와 클루버, 과연 그 승자는?>

화끈한(?) 투수전에 기자들 역시 신이 난 건 마찬가지였다. 양 팀의 팬들이야, 자신들이 자랑하는 에이스의 호투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를 두들기지 못하는 타자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감정이 미묘한 반면.

기자들은 경기 전, 사이 영 후보 간의 맞대결이라며 띄워준 어울리는 경기에 그저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면 됐으니 말이다.

<전반기의 신 vs 클루봇, 과연 그 승자는?>

<올스타전 MVP 다운 압도적인 피칭! 후반기에도 Go는 건재하다!>

다만 당연하게도 그런 기사 비율에서 우세를 점하는 건 고유석이었다.

이번 시즌 가장 핫한 슈퍼스타이기도 했고, 또 내용 자체도 고유석 쪽이 더 나았으니까.

또한 올스타전 MVP의 영향력도 한몫을 했고 말이다.

허나 뭐가 됐건. 이 투수전이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했다.

둘다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Go! 또 다시 삼진! 하하, 쉬고 돌아와서 그런지. 더욱더 강력하군요!

먼저 5회 초, 고유석은 다시금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을 때려잡았다.

마치 지난 이닝의 안타 자체를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폭압적이고, 강렬하게.

삼진 하나를 포함하여, 또다시 삼자범퇴로 빠르게 이닝을 지워버린 고유석은 마치 바톤을 넘기듯 코리 클루버에게 마운드를 넘겨줬고.

-2루에서 아웃! 그리고 1루에서~ 아웃! 더블 플레이!

-클루버, 위기를 노련하게 벗어납니다. 두 선발 투수들 때문에 타자들이 고생이에요.

코리 클루버는 비록 안타를 허용했지만, 이후 병살타를 유도해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5회, 이제 경기 후반에 접어드는 시기인데도, 여전히 기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두 투수들에 누군가는 한숨을, 누군가는 기쁨을 표출했고. 간혹 노골적인 분노를 토해내는 이도 있었다.

└Go랑 클루버가 확실하게 보여주네. 자기들 클래스를.

└드론맨은 지랄 떨지 말고, 자기 성적이나 올리라고 해. 이게 진짜 에이스들의 맞대결이니까.

└Suck한테 한소리 듣고는 완전 빡 돌았던데. 내일 너도 이만큼 해봐. 그럼 인정할게.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클루버 정도는 하고 개겨라. 넌 Go한테 X도 아니니까.

당연하게도 그 사람은 트레버 바우어였고 말이다. 꽤나 수준 높은 투수전에도 그는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성난 표정을 선보였고.

그건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었던 투수전에 웃음을 선사했다. 사실 비웃음에 더 가까웠지만.

####

“독하다, 독해. 어째 눈썹 하나 안 움직이네.”

저거 진짜 로봇 아니야?

이제 5회, 슬슬 체력이 소모됐을 텐데도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코리 클루버를 보니, 존경심마저 들었다.

“Suck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여기 너보다 더 독한 놈이 누가 있다고.”

“안타 못친 놈은 조용히 해.”

브루스는 그런 내 반응이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굴었는데. 팩트로 때리니까, 얌전히 입을 닫았다.

아무튼 역시나 예상처럼 코리 클루버는 끄떡도 없다. 그런 모습에 타자들은 기가 질린 것 같고.

대충 눈치 보고, 좀 흔들린다 싶으면, 이제부터 속도를 높여서, 더 압박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직 타이밍이 아닌 것 같네.’

지금은 오히려 내 체력만 닳겠지. 그래도 인디언스 타자들이 참 착해서, 내 투구수를 아껴준 덕분에 체력이 남아돌긴 하지만.

투구 간격 좁히기 시작하면, 그 남아도는 체력 닳는 게 한순간이니까.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야겠지.

“진짜 완봉해야겠네.”

한숨을 내쉬듯 말하니, 주변의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쪽팔리는 건지 괜히 먼 산을 보기도 하고. 질책한 거 아니니까, 괜히 찔리지 마슈.

“이번 이닝만 마치고 내려갈 생각은··· 당연히 없지?”

“예, 잘 아시네요.”

“···그래.”

진짜 친해졌다니까? 척하면 척이잖아.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슬쩍 물은 스콧 에머슨은 내 답변에 한숨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음, 내 잘못은 아닌듯함.

다 타자들 때문임. 나도 득점지원 넉넉했으면 무리 안 했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반대할 수는 없었던 건지, 스콧 에머슨은 날 고이 보내줬다.

“내가 방망이 들고 휘둘러도 너네보단 낫겠다!”

“공격도 잘 못 해놓고, 수비에서까지 실수하면, 내 손에 뒈지는 줄 알아!”

“Suck이 아니라, 너네가 Suck이다! 너네가 진짜 Suck이라고!”

팬들은 지금의 투수전이 못마땅한 것 같다. 이제 수비인데도, 야수들을 질책하는 걸 보면.

‘워워, 진정들 해요. 멘탈 터져서 실수하면 피보는 건 나라고.’

그런 의미를 담아, 살살 손을 흔들어주니, 다시 얌전해지네. 내 말은 참 잘 듣는단 말이야.

무슨 적토마도 아니고.

까칠하지만 주인은 인정한다 이건가? 주인이라니까, 좀 말이 뭐하긴 하네.

‘0대0. 좀 짜증나긴 하네.’

마운드에 오르기 전, 전광판을 보니 반겨주는 0의 행진.

인디언스 쪽에 찍힌 0은 참 뿌듯한데. 우리쪽에 찍힌 0은 화가 난다. 나도 사람인지라, 지원이 없으니까 쫌 빡치네.

브레이브스전에는 아예 상대가 노히터를 하고 있었지만. 차라리 그때가 더 낫다.

‘그땐 그나마 무조건 실패할 거라는 게 훤히 보였으니까.’

무리하고 있다는 게 여실하게 보였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지. 언젠간 박살날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노히터가 아니긴 하지만. 코리 클루버는 그냥 명백히 완봉 페이스였다. 아니, 그 페이스 자체가 안 보인다.

언제 내려갈지도, 정말로 내려가긴 할지도, 이대로 끝까지 갈지도, 아무것도 모르지.

‘벽이랑 싸우는 기분이네.’

타자들이 이해가 되네.

투수인 나도 이런데, 직접 상대하는 입장에선 오죽하겠어.

그러니 깝깝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스트라이크!”

나도 상대 타자들에겐 마찬가지의 존재라는 것. 이닝 선두타자는 8번타자 타일러 나퀸.

중견수인데. 작년 AL 신인왕 3위를 할 정도로 유망한 자원이었지만. 올해는 부상으로 시즌을 반 이상 날렸다.

4월에 여섯 경기 나온 뒤로 쭉 회복하다, 어제부터 다시 선수단에 합류했지.

‘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던데.’

성적이 처참한데, 경기수 자체가 적은 만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조금 뭐하고.

일단 오늘 상대해본 느낌으로 따지면, 인디언스 타자들 중 최악이다. 작년에는 주전 중견수인데도 타격이 준수해서 각광받았던 선수였는데.

그만큼 부상으로 날려 먹은 동안 감이 많이 떨어졌다는 뜻이지. 즉 손쉬운 먹잇감이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2구는 살빡 뺐는데. 감이 많이 떨어진 건지 스윙이 나왔다.

“파울!”

3구, 바깥쪽 슬라이더는 가까스로 쳐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4구째, 낮게 깔아 던진 서클 체인지업에 크게 헛스윙했다. 이걸로 다시 삼진 하나.

“You Suck!”

익숙한 구호와 함께 판넬이 하나 더 올라갔다. 이제 여덟 개네. 10개 채우면 반대로 뒤집겠지. 아니면 다시 하나씩 내릴 수도 있고.

‘에릭 곤잘레스.’

9번타자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야 유틸자원. 즉 백업이지. 타격은 안 좋더라.

‘게스히팅 하는 것 같은데.’

나쁘지는 않지. 어차피 빠따 나쁜데, 괜히 지랄발광할 바에는, 그냥 하나 정해놓고 때리면 편하잖아?

“스트라이크!”

뭘 노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난 다른 거 던질 생각 없다. 오직 포심. 강력하게.

뭐하러 딴 거 던져? 포심 대처가 아예 안 되더만. 구속이 느리니, 타이밍 잡으면 칠 수야 있겠지만.

“파울!”

기본적인 파워가 부족한 타자다 보니, 치더라도 정타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그냥 마음 편하게 조지는 거지.

“아웃!”

초구는 간신히 파울. 허나 두 번의 행운은 없는 건지. 높이 뜬 타구를 브루스가 일어나, 가볍게 잡았다. 다시 투아웃.

경기 빠르다 빨라.

굳이 투구 간격을 좁히지도 않았는데, 타자들이 너무 잘 죽어주네.

‘너도 그럴 거지?’

이제 다시 타순이 돌아 1번.

브래들리 짐머는 내 부탁에 입술을 씹는 것으로 화답했다. 사람이 정이 없네.

“스트라이크!”

초구는 다시 스트라이크.

커터를 살짝 박았는데, 타자는 배트를 참았다. 음, 뭔가 노리고 있나?

“스트라이크!”

아닌 것 같기도? 그냥 쫄았나? 2구는 조금 더 넣어서, 투심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

과하게 긴장한 건가?

들어올 때는 입술을 씹더니, 이젠 표정이 없네. 코리 클루버 따라하는 거야 뭐야.

‘너클 커브로 잡자.’

내가 치매가 아니라면. 오늘 얘한테는 안 던졌으니까. 잘 통하겠지. 거기다 좌타자잖아?

그런 의미에서 사인을 보냈더니.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얘가 웬일이래?

공을 잘 받기만 하던 녀석이 이러니까, 좀 당황스럽네.

‘그런 순한 녀석이 저럴 정도면 뭔가 있다는 거지.’

무시할 수는 없다.

안 그러던 녀석이 사인을 거부했다는 건, 뭔가 꺼림칙하다는 뜻이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편이기는 해도. 타자와 제일 가까운 포수의 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

그리고 이제까지 말 잘 들어준 녀석이니까, 한번쯤은 나도 따라줘야지.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너클 커브 대신, 바깥쪽으로 살짝 들어오도록 서클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큼직한 헛스윙이 나왔다.

스윙 궤적을 보아, 너클 커브를 노리고 있었구만. 예측하고 있었던 건가?

얘도 게스히팅이네. 자칫하면 식겁할 뻔했어. 좌타자에게 효과가 좋은 구종인데. 자신에겐 안 던졌으니. 하나 던질 거라고 생각했나봐.

“감 좋네?”

“흐흐, 얼굴에 훤하더라고.”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게 기쁜 건지, 브루스는 씨익 웃었다. 두툼한 녀석이 웃으니까, 복스러워서 보기 좋군.

“뭐가 좋다고 쳐 웃어!”

“웃지만 말고 좀 쳐라!”

“나만 갖고 지랄이야···”

다만 팬들이 보기엔 아니었나 보다. 안타 하나 못친 놈이 웃으니까, 꼴보기 싫었나봐.

툴툴거리는 브루스를 잘 다독여주며, 덕아웃으로 들어가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코리 클루버가 보였는데.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살짝 호흡을 고르는 듯 길게 숨을 뱉었다. 어깨를 돌리기도 했고.

‘이제 좀 사람 같네.’

비록 사소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이제까지는 저러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뜻은 간단했다.

드디어 저 로봇 새끼가 지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 말인, 즉 타이밍이 됐다는 거지.

“브루스.”

“Suck 네가 나 대신 팬들한테 말 좀 해주라. 난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이야. 서러워서 못 살겠어.”

“그래그래, 네 마음 다 알아. 그러니까, 다음 이닝부터는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럼 사람들도 네 수고를 알아줄 거야.”

“뭐? 그건 뭔소리야?”

“투수 조지자고. 투구 간격 좁힐 거니까, 다음 이닝부터는 공 던지고 바로 자세잡아.”

“투수가 아니라, 날 조지는 거겠지. 오늘은 좀 건너뛰고 편하게 가나 했더니··· 어휴···”

브루스는 조금 뒤의 고생이 예상되는 건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투덜거리는 건 멈췄네. 더 큰 시련 때문이긴 하지만.

####

힘들다. 그런 생각이 코리 클루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아차렸지만, 예상보다 조금 더 힘겨웠다.

‘투구수는 77개. 넉넉하지는 않지만. 9회까지 가능은 하다.’

그나마 체력은 아직 괜찮았다. 몇 차례 안타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짧게 잘 막았으니까.

다만 그런 투구수와는 별개로 평소 다른 경기보다는 약간 더 버거운 건 사실이었다.

자신 역시 수월하게 막았지만, 상대는 그보다도 더 간편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닝을 끝냈으니까.

거기다 여전히 무실점, 그리고 무득점이라는 것의 압박감도 있었고.

“아웃!”

“아웃!”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텼고, 다시금 상대 타선을 봉쇄했지만. 곧 코리 클루버는 고유석의 피칭에서 깨달았다.

‘알아챘군.’

그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평소보다 조금 뒤늦게. 그리고 절묘하게 속도를 높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순식간에 빨라진 인터벌.

원래도 휙휙 지나갔던 이닝이 한결 더 속도가 붙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한순간 바뀌어버린 투구 간격과 피칭 타이밍에 타자들은 발 빠르게 대처를 하지 못했다.

애초에 투구 간격이 평범했을 때도 공략하지 못했던 투수이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아웃!”

7회 초가 끝났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3분? 아니, 그보다 더 짧다. 체감상 타석 하나 당 수십 초밖에 소모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나아.’

벤치에 잠깐 앉은 사이, 다시금 이닝이 찾아왔지만. 코리 클루버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비록 조금 힘겹기는 하지만, 상대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으니. 지금처럼 꿋꿋하게 버티기만 한다면. 오히려 상대의 체력을 소모시킬 수 있을 테니까.

사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9이닝은 채울 것 같았지만.

“하아··· 쪽팔리네.”

“타깃을 바꿨어. 우리가 아니라, 코리로.”

하지만 타자들은 그 빠른 피칭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레, 고유석은 목표를 바꿨다.

타자들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에이스, 코리 클루버를 내릴 심산이겠지. 그들은 그저 깔고 가는 거고.

그 사실이 미치도록 쪽팔렸다.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타자가 아니라 같은 투수를 노리는 거겠어?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웃!”

그나마 코리 클루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굳건하게 버티면서. 7회 말마저도 잘 막아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부끄러웠다.

팀의 에이스가 저렇게나 멋진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고작 한 점의 득점지원조차 못 해주고 있다니.

“어떻게든 한방 먹여. 저러다가 하나 맞으면, 그때부터 힘이 쭉 빠지거든.”

“그래, 역시 경험자라서 잘 아나 보네.”

“경력직이 다르긴 달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 고맙다.”

“X이나 까라. X새끼들아.”

트레버 바우어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으로 타자들을 격려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7회보다도 더욱더 빠른 속도로 타자들을 몰아쳤으니까.

포수가 공을 던져주는 즉시 다시금 날아오는 모습은 얼핏 캐치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화가 나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리듬을 끊어보려고 가까스로 스윙하면.

“스트라이크!”

기가 막히게 오프스피드가 들어오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경기 내내 꺼낸 적도 없었던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헛스윙한 6번타자 카를로스 산타나는 허탈하게 웃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헛스윙하는 즉시 자세를 가다듬고, 집중을 올려야 그나마 속도에 따라갈 수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사실 어떻게든 따라가더라도 답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웃!”

그렇게 8회마저 다시금 지워졌을 때. 팽뱅하게 유지됐던 살얼음판에 금이 갔다.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다시금 마운드에 오르며, 코리 클루버는 처음으로 살짝, 아주 살짝 눈썹을 움직였다.

지난 5월, 트레버 바우어의 심정이 이해됐다. 그래, 이런 압박감이었겠지.

물론 그때는 트레버 바우어가 먼져 달렸고, 중간에 힘이 빠져, 제발에 걸려서 넘어진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결정타를 날린 건, 오늘과 마찬가지로 고유석의 속도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목을 비트는 것처럼 확인사살을 가했지. 트레버 바우어는 그 속도에 결국 주저앉은 그대로 무너져버렸고.

‘이번엔 내 차례군.’

타이밍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경기 후반, 이미 체력이 많으 소모된 상황에서, 약간의 휴식마저 제거된 순간. 피로감이 한순간 몰려 왔으니까.

그것의 결과는.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 이거지! 이제 좀 정신 차렸네!”

“한방 더 날려! 아주 죽여버리라고!”

투수전의 종말이었다.

내내 이어졌던 0의 행진은, 오클랜드에서 먼저 깨졌다. 그들의 점수판에 1이라는 숫자가 드디어 올라갔으니까.

그것을 미치도록 바라고 있었던 홈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환호했고.

“아웃!”

그나마 그 이상의 실점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났다. 코리 클루버의 피칭은. 8이닝 1실점 그리고 10K.

사이 영 위너다운 성적이다. 패전투수가 된다면, 타자들의 멱살을 잡더라도 무방하겠지.

“아직··· 아직 한 이닝 남았어.”

“어떻게든 우리도 한 점만 내면 되는 거야.”

“큰 거 하나면 돼. 큰 거 하나면.”

그토록 열심히 던진 에이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지만. 인디언스 역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니까. 한 이닝이 더 남았으니까.

야구는 한 이닝, 단 한번의 공격으로 1점이 아니라. 5점, 10점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스포츠고 말이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의지를 불태운 인디언스였지만.

“아···”

“올라오네.”

“It Go Time!”

“Gooooooooooo!”

“You-Suck! You-Suck!”

유유히 마운드 위에 우뚝 선 선수는 그 최후의 의지마저 잠깐 눌러놓기 충분했다.

“무리하네.”

“우리가 아무리 X으로 보여도 그렇지···”

“차라리 똥볼 계속 보는 게 나아.”

그 위압감에 짓눌렸음에도, 애써 부정하듯, 인디언스 타자들은 거리낌 없이 폄하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경기 내내 80마일 대의 구속을 봤는데, 95마일 이상의 파이어볼러가 뒤이어 올라왔다면. 정말 힘들었을 테니까.

거기다 이제 9회이니. 분명 이전보단 지쳤을 것이기에. 잘만 한다면. 먼저 내려간 그들의 에이스처럼, 그 역시 끌어내릴 수 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희망을 불태운 인디언스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건 무슨 개소리냐고 묻는 것처럼.

“아웃!”

고유석은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과 희망까지 확실하게 짓밟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아웃카운트이자, 삼진이 올라간 순간. 콜리시엄은 잠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강렬하게 진동했다.

9이닝 무실점 15K 1피안타 무볼넷. 무사사구 완봉.

경이로운 성적을 완성한 채, 고유석의 후반기의 첫 등판이 막을 내렸고.

“마이클, 너 알고보니 되게 큰일했네. 욕 먹을만 했어.”

“그러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솔직히 빗맞은 거였거든.”

패배자로서 주저앉은 인디언스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다시 돌이켜보니. 만약 4회 초 마이클 브랜틀리의 안타가 없었다면. 퍼펙트를 당했을 테니까.

“후반기에도 X같겠군.”

“X같겠지. 엄청나게.”

“우린 오늘이 마지막이지?”

“어, 아마도. 다행스럽게도 말이야.”

짧은 휴식을 뒤로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 콜리시엄의 왕은 당당히 선언했다. 후반기 역시도 자신의 것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