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27화 (127/316)

127화

전반기 모든 일정이 종료된 직후. 사람들은 팀을 응원하는 대신, 각자 좋아하는 선수를 소리쳤다.

그런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 다가왔으니까.

몇몇 조금 더 깊숙한 덕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본게임보다, 퓨처스 게임에 더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다만 애초에 올스타전 자체가 작년보다 흥미가 떨어지기는 했다. 작년을 끝으로, 올해부터는 승리한 리그에게 주어지던 월드시리즈 혜택이 사라졌으니까.

└멍청한 사무국이 올스타전을 재미없게 만들었어.

└이러면 솔직히 선수들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대체 왜 올스타전에서 열심히 해야하는 건데?

└난 오히려 순수하게 이벤트 매치가 돼서 더 좋더라.

비록 그에 대한 갑론을박은 제법 많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순수하게 올스타전을 기대했다.

문자 그대로 All-Star, 메이저리그의 모든 별들이 모이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별들 중에서도, 유독 더 밝게 빛나는 별도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고유석이었고. 현시점 리그 최고의 투수였으니까.

제법 많은 이들, 기존에 그의 팬이 아니었던 이들도 이번 올스타전을 주목했다.

그가 좋은 성적을 올릴수록, NL에서 은근히 얕잡아보고는 했으니까.

[#Dodgers]

[Go? 올해 데뷔한 루키한테 털린다는 것 자체가, AL이 허접하다는 뜻이지.]

└애너하임 애들은 그런 루키한테 털릴 거면, 앞에 LA좀 떼라.

└트라웃 트라웃하더니, 별거 없더만. 그런 녀석에게 밀리는 거 보면.

[#Cubs]

[화이트삭스 X신들, 어떻게 그런 애송이한테 탈탈 털려서, 200탈삼진을 내주냐? 시카고의 수치 같은 놈들.]

[#Giant]

[Suck인지 뭔지 잘나간다던데. 그래봤자 오클랜드 쓰레기지. 그런 놈한테 털리는 녀석들은 X잡고 반성해야 하고.]

올해 데뷔한 신인 투수.

심지어 100마일의 강속구를 가진 파이어볼러도 아니다.

아주 친숙하기 그지없는, 느려터진 구속을 자랑하는 투수지.

그런 녀석에게 한 리그가 정복되고 있는 모습은, NL 우월론자들에게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AL은 그저 NL의 주니어 리그 수준의 가짜리그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그렇기에 고유석이 기세를 이어갈수록, 제법 많은 이들이 AL의 수준 저하를 거론했다.

[#Nationals]

[···Suck 걔 X나 잘하긴 하던데.]

[#Braves]

[낭만을 모르는 X같은 놈이지만, 솔직히 무시할 투수는 아니야.]

[#Marlins]

[까놓고 말해서, 실력은 절대로 못 까지. 팬서비스도 좋은 편이라고 하고.]

물론 그를 직접 상대해본 NL 동부지구 팀들은 조금 떨떠름하게 여겼지만.

열다섯 구단 중 셋에 불과한 소수자(?)에 불과했기에, 같이 싸잡혀 조롱당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에 부들부들 떨었던 이들은 간절히 바랐다. 부디 AL이 이번에도 NL을 보기 좋게 두들기기를.

고유석 역시 그를 비하하고, 아메리칸 리그를 조롱하는 놈들에게 본인이 얼마나 X같은 놈인지, 내셔널리그에게도 똑똑히 보여주기를 말이다.

####

말린스 파크 주변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식축구, 그것도 대학리그의 인기가 워낙 압도적이라, 인기가 덜하다고는 해도.

막강한 타선의 화끈한 타격 덕분에 올해는 제법 괜찮은 인기를 자랑한 말린스지만.

최소한 오늘처럼 사람이 몰린 적은 이번 연도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 누가 MVP가···”

“어제 홈런더비 보면 저지가 아무래도···”

올스타전의 개최지였으니까.

최소한 지금 이순간 만큼은, 야구팬들에게 말린스 파크 정도의 관광지는 없었다.

스스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이들이 마이애미에 몰렸고.

설사 올스타를 배출해내지 못한 구단의 팬이더라도, 제법 많은 이들이 말린스 파크를 찾았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바글바글거리는 풍경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들은 있었다.

“와, 여기 무슨 슈퍼볼이라도 하나? 사람 더럽게 많네.”

“얌마, 슈퍼볼이 아니라, 이제는 월드시리즈라고 비유해야지. 아직 풋볼 물이 덜 빠졌네. 그래가지고 Suck 응원 하겠어? 너 이 새끼, 나중에 슈퍼볼하면 다시 레이더스 응원하겠다?”

“내가 돌았냐? 고향 배신하고 도망치는 놈들을 응원하게. 그 새끼들은 이제 영원히 내 인생에서 아웃이야. 선수들은 여전히 좋지만.”

“Suck은 참 좋지만, 이래서 야구 보는 샌님들은 싫다니까. 명색이 올스타전인데, 꼬라지가 저게 뭐야? 관광객도 아니고.”

“이참에 우리가 제대로 보여줘야지. 진짜 응원이 뭔지.”

한 무리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위를 비켜갈 정도로.

“저거 뭐야? 데스메탈 밴드 같은데? 설마 쟤들이 초청가수야?”

“그럴 리가, 저런 놈들한테 노래시키면 퍼포먼스로 성조기 찢을 텐데.”

“무슨 저런 꼴로 야구장을··· 아무리 올스타전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저런 꼴로 입장할 수가 있어?”

“위험 물품만 없으면, 가능할지도···”

사람들은 조용히 속삭이며, 그들의 정체를 추측했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해골마스크. 짙게 칠한 기괴한 페이스페인팅. 당장이라도 어딘가를 약탈할 것 같은 위협적인 차림새.

올스타전의 경우 팬들을 위한 축제였기에 종종 기괴한 복장을 한 이들이 얼굴을 비추기도 하지만.

저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명백히 선을 넘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이 주변을 휩쓸며 피보라를 일으킬 것 같은 모습들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 무렵.

올스타로 뽑힌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던 한 애스트로스팬이 그들의 정체를 밝혀줬다.

“레이더스 저 새끼들은 올스타전에서도 저러고 와? 미친놈들···”

레이더스. 유명한 이름이다.

야구팬이기는 해도, 대부분 슈퍼볼은 보는 편이니까.

그런 슈퍼볼에서 가장 강성한, 아니, 미쳐버린 팬덤을 가진 구단이 있다면. 단연 오클랜드 레이더스가 먼저 꼽혔다.

그리고 그들이 연고지 이전을 결정하면서, 레이더스 팬덤 일부가 유일하게 아직 연고지에 남아있는 애슬레틱스로, Go에게로 이동했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었고.

필리스보다 더욱더 미친 팬덤이라며 종종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직접 마주한 레이더스의 모습은 상상하던 것 이상의 위압감을 자랑했고, 사진이나 동영상 속 그들을 비웃었던 이들조차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왜 야리고 지랄이야, 사람 기분 나쁘게.”

“하여튼 너드 새끼들, 더럽게 음흉하다니까. 차라리 앞에 와서 당당하게 말하던가.”

“확 그냥! 눈깔 안 치워?”

레이더스 역시 기분이 나빴다. 자신들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대하는 것이 불쾌했으니까.

그에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졌고, 주변의 다른 이들이 자리를 피해야 하나, 걱정했을 때.

“야! 지금 Suck이 오클랜드 팬들한테 직접 사인해주고 있다는데?”

“사인? Suck이 직접?”

“어, 가까이서 사진까지 찍어준대. 빨리 가자.”

“그건 못 참지! 뛰어, 뛰어!”

“운 좋은 줄 알아라! 또 그딴 식으로 쳐다보면 아주 뒤질 줄 알고! 가자!”

한순간 그런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그들을 진정시키는 건 Suck, 그 이름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그가 손수 사인을 해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흉흉한 대치는 순식간에 풀렸고.

주변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던 레이더스는 어린 아이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꽤나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주변을 압도하던 존재감에 한순간 공백이 생기자, 잔뜩 긴장해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허탈한 한숨을 뱉었다.

“뭐야 대체···”

“Go, 성적이 다가 아니네. 대체 무슨 짓을 했으면, 저 흉악한 놈들이 저렇게 해맑게···”

“허··· 팬심 장난 없네. Go가 그렇게 매력적인 선수였나?”

“최소한 팬 하나만큼은 Go 걔가 MVP겠네. 저런 놈들을 누가 이겨.”

아직 올스타전이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흉악한 놈들마저 어린 아이처럼 만드는 고유석의 존재감에 압도됐다.

다만 그마저도 본게임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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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볼~”

팬서비스를 마치고. 대충 선수들과 인사한 뒤, 바로 불펜으로 향했다. 1회 말에 바로 등판해야 했으니까.

여긴 참 좋네. 이게 메이저리그 불펜이지! 원정 때마다 매번 이렇게 감탄한단 말이야.

콜리시엄에서는 느낄 수가 없거든. 사실 누가 거기를 메이저리그 야구장이라고 보겠어.

물론 투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직접 받으니, 대단하긴 하네. 다른 타자들이 왜 그렇게 맥을 못 추리는지 알겠는데? 오클랜드 포수들, 이거 받느라 고생 좀 하겠어.”

연습피칭을 할 때마다, 공을 받아주던 포수는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립서비스 하는 꼴이 불펜포수 같겠지만. 무려 올스타시지.

“잘 잡아주니까 좋네. 우리팀 포수들도 너처럼만 해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아, 프레이밍은 빼고.”

“에이, 프레이밍은 원래 포수한테 쓸모없어. 잘 잡고, 잘 던지고, 그게 중요한 거지.”

살바도르 페레즈.

캔자스 시티 로열스 소속 포수인데. 올스타인 만큼 실력은 확실했다. 빠따도 잘 휘두르지만, 포구도 잘하네.

공격형 포수라고 해도, 수비가 어느 정도 준수하니, 애초에 올스타가 될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야. 아니라면 그냥 지명타자로 돌렸겠지.

‘프레이밍은··· 이러니까 팬그레프 WAR이 개판이지.’

그럭저럭 만족스럽기는 한데, 프레이밍은 확실히 듣던 대로 영~ 아니다.

브루스도 프레이밍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얘보단 낫겠네. 팬그래프에서 계산하는 WAR의 경우 포수는 프레이밍도 포함이 되는데.

처참한 프레이밍을 자랑하는 포수라서 그런지, 살바도르 페레즈는 fWAR과 bWAR이 아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선수 중 하나였다.

“이것 참··· 구종이 너무 많아서 외우기도 힘들겠데.”

“어차피 사인은 내가 낼 거니까, 그냥 대충 코스 보고 잘 잡기나 해줘.”

“듣던 대로 프라이드가 크시구만? 오케이, 나도 올스타전에서까지 머리 굴리고 싶진 않으니까. 그게 더 편하긴 하겠네.”

그래도 사람이 좋긴 하네.

쿨하게 승낙하는 걸 보면.

이거 봐, 잘난 놈들은 아량이 넓다니까? 물론 올스타전이라, 더 너그러운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오, 슬슬 시작하나보네.”

그렇게 한창 불펜 피칭에 집중하고 있을 때. 카메라가 우리를 잡았다. 바깥에선 소리가 들려왔고.

-중견수, 찰리 블랙먼!

-지명타자, 지안카를로 스탠튼!

선발출장 명단을 소개하는 건데. 내셔널리그 구장이라서 그런지, 이쪽부터 소개하는 구만.

듣는 것만으로 귀가 호화스러워질 정도의 이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특히 고릴라, 아니 스탠튼과 마르셀 오즈나의 차례에선, 말린스 파크답게 큰 환호성이 나오기도 했다.

-선발투수, 맥스 슈어저!

마지막 선발투수 발표까지 끝난 뒤, 차례는 아메리칸 리그로 넘어왔다.

“곧 호명될 겁니다. 카메라 의식하지 마시고, 지금까지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우리를 찍던 카메라맨은 그렇게 당부하며,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잡았고, 마찬가지로 여러 이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내 동료들이지.

-2루수, 호세 알투베!

-3루수 호세 라미레즈!

-우익수, 홈런더비 챔피언! 애런 저지!

-좌익수 조지 스프링어!

-유격수 카를로스 코레아!

타순으로 호명하는 건지, 앞선 소개와는 조금 다른 순서대로 이름이 하나하나 불렸다.

애런 저지는 어제 홈런더비에서 우승해서 그런지, 그것까지 언급해주네. 부럽구만.

왠지 칭호 같아서 멋지잖아. 왜 타자한테만 저런거 해줘. 투수들도 삼진 더비, 아니면 뭐, 병 맞추기 더비? 그런 거하면 안 돼나?

‘어깨 써야 하는데, 있다고 쳐도 출전할 투수가 없겠네.’

천천히 타이밍을 재면서 불펜피칭 할 때, 드디어 불펜으로 화면이 넘어왔다.

-포수 살바도르 페레즈!

일단 포수 먼저. 살바도르 페레즈는 짐짓 멋진 표정을 지었지만, 별로 안 멋있어, 이 친구야.

-선발투수! Go You-Suck!

카메라가 나를 잡았고, 구장 캐스터의 목소리를 신호탄 삼아 공을 던졌다. 후, X나 멋있어. 이게 올스타 선발투수지.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 장면에 꽤나 기괴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의미에선, 스탠튼이나 마르셀 오즈나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가.

“누구 다쳤나? 뭔 소리야? 무슨 짐승 울음소리도 아니고···”

“어허, 짐승이라니. 말조심해. 내 팬들이야.”

“아, 쏘리. 너에 대한 사랑이 참 지극한가 보네.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거 보면.”

“팬심 하나는 세계 최고인 사람들이지. 좀 과해서 문제지만.”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귀에 익은 목소리다. 레이더스지. 오늘도 봤잖아? 내 기를 살려주려는 건지, 아주 풀세팅을 하고 왔던데.

‘기는 내가 살려줘야지. 그러고 나타났더니, 내가 죽 쑤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기껏 마이애미, 이 먼 곳까지 원정을 왔는데 말이야.

잠시 뒤, 경기가 시작되려고 하자, 마지막으로 사인을 맞춘 뒤, 살바도르 페레즈는 덕아웃으로 떠났고.

홀로 남은, 아니, 사실 다른 올스타 투수들과 함께 남은 불펜에서 나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더럽게 어색하네. 그나마 입 좀 터는 포수놈이 있어서 적막하진 않았는데. 이놈의 투수놈들은 죄다 과묵하단 말이야.

자기만의 프라이드가 있어서 그런가, 누구 하나 먼저 살갑게 구는 놈이 없네.

크리스 세일. 엘린 베탄시스 등등. 하나 같이 내로라하는 투수들은 조용해진 불펜에서 눈알만 굴렸다.

‘뚫리겠다, 뚫리겠어.’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보고 있었다. 약간의 경쟁심을 담아서. 특히나 마찬가지로 사이 영 후보로 꼽히는 크리스 세일은 꽤나 도발적인 눈빛을 했고 말이다.

하나 같이 대단한 성적을 올린 투수들이고, 이번 시즌 가장 잘한 녀석들이지만.

“Go, 준비해.”

난 그런 놈들 중에서 1등이다.

가장 먼저 불펜을 나가는 사람이니까. 아메리칸 리그의 선발투수로서.

‘야수들이 이렇게 듬직한 적은 처음이네.’

불펜의 문이 열리고, 훤히 드러난 그라운드. 공수교대를 하던 야수들이 보였다.

오클랜드도 수비가 엄청나게 나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제법 준수하다고 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리그에서 제일 잘하는 놈들을 모아둬서 그런가, 역시 무게감이 다르구만.

일반적인 경기였다면, 저런 야수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옳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최소한 내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에는, 야수들이 움직일 일이 없도록 해야지.’

내가 노리는 건 MVP인데. 투수가 올스타전 MVP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

“써어어어어어어어어억!”

“네가 최고라는 걸 똑똑히 보여줘!”

“다 조져버려! NL인지 뭔지, 아주 싹 짓밟아버리는 거야!”

레이더스는 나를 발견하고 거의 절규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저러다 성대 결절 오겠네.

그 엄청난 외형에 질린 건지, 주변의 다른 관중들은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낯선 곳에서 잘 아는 사람들, 그것도 날 엄청나게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니까,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든든하구만.

“어떻게 갈 거야? 네가 알아서 던진다고는 했지만. 나도 뭘 알기는 해야지.”

“삼진. 그렇게만 알고 있어.”

아까 전, 먼저 불펜을 나갔던 살바도르 페레즈는 내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갓 데뷔한 놈이 간도 크다’ 이런 눈빛인데. 누누이 말하지만, 난 안 되는 일에 대가리 박지 않아.

이건 패기가 아니라.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다.

“파울!”

이거 봐, 못 치잖아?

몸쪽으로 묵직하게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 선두타자는 괜히 올스타가 아닌 건지. 공을 때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타격하지는 못했다.

타구가 홈플레이트 뒤로 강하게 날아갔으니까. 제대로 배트를 밀어냈다는 거지.

찰리 블랙먼.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로, 올해도 두 번째 올스타인데. 그는 손이 아리는 건지, 몇 차례 손바닥을 흔들었다.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지어져 있었고.

‘어디 이 산기꾼놈이 산 아래에서 내 공을 후려칠려고.’

쿠어스 필드라면 모를까. 최소한 산 아래에서는-

“스트라이크!”

어림도 없지.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쭉 빠진 포심 패스트볼. 한 차례 매운맛을 본 타자는 가만히 지켜봤지만,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여기까지 몰았으니.

마지막 3구는 트레이드마크로 가야지.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V1. 조금 기분이 이상하네.

진짜 오랫동안 던진 구종인데, 이걸 올스타전에서 던지게 될 줄이야.

그는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따라 크게 스윙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헛스윙 삼진.

‘이 고릴라 새끼··· 평생 말린스에서 살아라.’

그다음은 고릴라.

지안카를로 스탠튼.

다른 거 다 떠나서, 그 파워 하나만으로 진짜 엿 같은 타자다. 심지어 자기 홈이니까, 감정도 편안하겠지.

홈에서 열린 올스타전인 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어림도 없다.

초구는 낮게 깔리는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존을 스치는 코스에 스트라이크가 올라갔지만, 포수, 살바도르 페레즈가 조금 아슬아슬하게 캐치했다.

그리고 약간 얼굴을 찡그렸고, 좀 힘든 것 같네. 설마 불펜에서 던진 게 내 최대 출력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하나 치려고 하겠네.’

“스트라이크!”

다음 공은 아예 밖으로 쭉 빼는 포심 패스트볼. 고릴라답게 시원하게 후렸지만, 스치지도 않았다.

‘참을 것 같으니까, 푹 찔러 줘야지.’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니, 그제야 제정신이 든 건지, 스탠튼의 눈빛이 맑아졌는데.

이미 늦었어, 이 양반아.

‘잘 잡아라, 이게 진짜 최대 출력이니까.’

잠깐 숨을 가다듬은 뒤, 그립을 쥐었다. 살바도르 페레즈에게 주의하듯 쏘아보자, 거뜬하다는 듯 글러브를 치는데. 이게 말이야.

‘포수 손바닥 깨먹는데 일품이거든.’

오직 높은 코스 하나만 잡고서, 나머지 제구는 포기한 채, 모든 힘을 담아 포심을 쏘아보냈다.

그 정도의 각오는 넣어야, 큰 걸 안 맞을 테니까. 저 고릴라를 상대로는 말이야.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니나 다를까, 먹음직스러운 하이 패스트볼에 스윙이 나왔지만, 떠오르듯 높이 치솟은 공에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살바도르 페레즈는 손이 아픈 건지, 입술을 꽉 깨물었고.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일단 둘 넘겼고. 하퍼는 그냥 쉽게 가자.’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 브라이스 하퍼. 또 보네. 아직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번호도 교환한 사이라서 그런가. 하퍼는 친근하게 웃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트라웃급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녀석이지.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 타자라고 확신하느냐면.

“파울!”

“파울!”

‘타격감 살아 있네. 그럼 이것도 쳐봐.’

가장 위험한 놈인 만큼, 비밀병기를 얘한테 쓸 거거든. 오늘도 딱 하나만 던질 거고.

낮은 코스를 조준하고 사인을 보내자, 살바도르 페레즈는 이미 겪은 게 있는 만큼, 이번엔 잔뜩 집중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그립을 잡았다. 이제는 제법 손에 많이 익었는데, 그립은 여전히 적응 안 된단 말이야. 너무 이상해.

‘그 이상함 덕분에-’

그래도 힘껏 뿌리치니, 원래 내가 마이너에서 던지던 방식과 어느 정도 비슷해서 그런지.

‘이렇게 착 감기는 거지만.’

제대로 긁혔다.

브라이스 하퍼는 타격을 준비하려다, 이내 몸을 웅크렸다. 데드볼처럼 들어왔으니까.

내가 아무리 공이 죽여준다고 해도, 무조건 맞겠구나 싶었겠지.

하지만 그런 브라이스 하퍼를 놀리듯, 공은 쭈우우우우욱 꺾였고, 그와 동시에 가파르게 하강했다.

웅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시선은 공을 따라간 브라이스 하퍼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멀~리 우측 외야 필드에서도 누군가가 시선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너한테 던진 거 맞아.

“스트라이크 아웃!”

너클 커브. 확실하게 완성됐네. 신무기인데, 괜히 올스타전에서 던져서 주목받는 게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확신하는데, 서클이랑 동급이거든. 최소한 몇 번 보고, 분석하는 정도로는 절대로 못 친다는 거지.

“미친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진 모른다. 아마도 정규시즌에서 나한테 당한 놈이겠지. 알투베일수도?

그 경악스러운 감탄사가, 어쩌면 지금 피칭을 가장 잘 설명했다.

‘삼진만 잡으려고 했더니. 어쩌다 보니까, 무결점 이닝이 됐네.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

의도치는 않았지만, 해버린 기록이 깃발처럼 말린스 파크에 제대로 꽂혔다.

MVP 내가 가져간다. 불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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