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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124화 (124/316)

124화

내가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관중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한목소리로 외치-지는 않았다. 이 양반들 왜 이래?

평소라면 미리 KKK를 333으로 끊어서 우렁차게 소리쳐도 모자랄 텐데, 지금은 그냥 조용~하다.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그나마 눈에 띠는 게 있다면, 삼진 잡을 때마다 올리던 K 판넬이, 이미 아홉 개가 세워져 있다는 것 정도.

‘부담 안 주고 심플하게 딱 하나만 원하는 것 같아서 좋기는 한데. 좀 어색하네. 여기 콜리시엄 맞아?’

다른 때는 바라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완봉도 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멋진 삼진쇼도 보여달라고 하고, ERA도 0점대를 지켜야 하고. 기왕이면 승리도 챙기라고 하지. 아주 욕심덩어리들이야.

하지만 오늘은 간결하게, 딱 하나만 바라고 있다. 삼진 아홉 개. 그거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거지. 그렇기에 굳이 더 말하지 않는 거고.

그런 의지가 가득 담은 시선이 콜리시엄에 은은하게 깔렸고, 그것을 레드카펫 삼아, 마운드로 걸어갔다.

“Suck, 너 오늘 컨디션 좋다며? 예전이랑 비슷해?”

“어느 정도는. 한동안 편하게 공 받아서 좋았을 텐데. 아쉽겠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받는 맛이라는 게 있으니까. 아무튼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 바운드 돼도 내가 스트라이크로 만들 테니까, 믿고 던져줘.”

그 열기에 흥분한 브루스가 콧김을 흥흥 뿜으며 의지를 드러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진지하게 바운드 된 공을 프레이밍으로 스트라이크로 만든다면, 화이트삭스 쪽에서 심판을 고소할 거다.

아니면, 분노를 참지 못한 타자가 심판과 브루스 머리에다가 몽둥이질하던가.

“바라지도 않으니까, 오버하지 말고, 공이나 잘 잡아.”

“에이, 그건 이제 기본이지.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갈 거야? 폼도 돌아왔겠다. 평소처럼? 아니면-”

“다 태워버려야지. 확실하게.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뭐, 어차피 던지는 건 나니까. 넌 호언장담 하던 것처럼 잘 받기나 해라.

아리송한 표정의 브루스를 홈플레이트로 내려보낸 뒤, 가볍게 심호흡하자, 시선이 쏟아졌다.

이놈의 인기란, 참 귀찮단 말이야. 관중들이야 원래 내가 그라운드에 나오기만 하면 쳐다보니 그렇다 쳐도.

‘같은 선수인데, 뭘 그렇게 보고 그래. 나중에 경기 끝나면 사인해 줄 테니까, 얌전히 참고 기다려.’

명색이 같은 메이저리거인 화이트삭스 선수들까지 저렇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다니.

내 인기가 참 대단하긴 해.

개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대충 이글거리는 눈빛만 봐도 화이트삭스가 오늘 어떤 생각으로 나서려는 건지 알 수 있다.

아주 제대로 고춧가루를, 그것도 태국산 매운 고춧가루를 뿌릴 생각이겠지.

아주 심보가 못돼 처먹었어. 같은 동업자 입장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면 얼마나 좋아?

‘난 김치의 민족이다. 웬만한 매운맛으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괜찮다.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야 이미 예상했으니까.

아닌 말로, 아무리 대단한 기록이라고 해도, 그걸 당하고, 제물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선 쉽사리 박수를 치기 어렵지. 그러니 강제로 집행하는 수밖에.

물론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기대 이상으로 오늘 컨디션이 좋으니···

‘닥치고 조지다 보면, 아홉 개 정도는 나오겠지. 기왕이면 6이닝 전에 끊으면 좋고.’

드디어 폼이 올라왔는데, 바로 오버페이스 했다가 다시 맛탱이 갈 수는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빨리빨리 좀 가자.’

마지막 마운드 테스트 겸 영점조절까지 마치자, 경기장이 적막해졌고, 침 삼키는 소리만이 흘렀다.

팬들은 애가 탄다는 듯 주심을 봤는데, 주심은 이미 한참 전에 달아오른 사람들을 조련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중요한 경기라서, 나한테 피해를 끼칠 수 없으니. 대놓고 욕하지는 못하고, 얼굴 표정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관중들의 모습에 피식 웃은 주심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플레이볼!”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통 같은 목소리가 고요한 그라운드를 일깨웠고. 그 뒤에는 다시 적막이 이어졌다.

음, 보통은 저렇게 안달복달 하고 있었으면, 환호성 지르는데, 생각보다 우리 팬들 인내심이 대단하네.

‘그보다는 나에 대한 팬심이라고 해야 맞나?’

뭐든 간에, 한 가지는 잘 알겠다. 수만 명, 평소보다 훨씬 많으니, 3만 명쯤 되겠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호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인데,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지.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첫 삼진의 주인공이 되어주지 않으련?

너도 올해 데뷔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둘이 입사 동기나 다름없는데.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고, 한번쯤 도와줘도 되잖아? 그럼 내가 다음에 안타 하나 줄게. 어때?’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이러면 승부조작이네. 아무튼 그런 뜻을 담아서 첫 번째 타자, 애덤 엥겔을 봤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내 애틋한 마음이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말없이 무뚝뚝하고. 그러면서도 잔뜩 긴장해서 배터박스로 들어왔으니까.

‘됐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적한테 뭘 바래. 그냥 내가 알아서 해야지.’

결국 그렇게 알아서 해나가면서-

“스트라이크!”

지금까지 온 거니까.

초구는 스트라이크다. 깊숙한 몸쪽 포심 패스트볼. 경기를 시작하기엔 이게 최고지.

구위가 떨어졌을 때는 던지면서도 조금 긴장했는데, 다시 자신감 있게 찔러 넣으니 좋구만.

‘거참 이상하지? 며칠 전에, 시카고에서 만났을 때랑 너무 다른 게.’

타자는 눈이 흔들렸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겨우 공 하나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저번에, 자기들 홈에서 봤을 때랑 너무 다르니. 얼마나 당혹스럽겠어?

그때 애덤 엥겔은 경기에선 9번타자였다. 오늘은 한칸 더 밀려서, 다시 한바퀴 돌아 1번으로 나왔네.

그러니 오늘이 두 번째 조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트라이크!”

처음 보는 셈이다.

배터박스로 오면서 보여줬던 의지, 기세는 단 두 번의 와인드업에 박살 났다.

이번엔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애덤 엥겔은 스윙을 참았지만, 어차피 나도 안으로 넣었어.

구위가 다시 든든해져서 그런가, 제구에도 자신감이 붙네. 까다로운 코스였는데, 다행이 잘 잡아주네.

‘아까는 홈팬들 맛깔나게 조련하더니, 이거이거, 우리 주심 양반도 친Suck파였구만.’

솔~직하게 말하면. 좀 나간 것 같은데. 이걸 잡아주네. 날 좋아하나봐. 우리 주심님도.

뭐, 브루스가 나도 모르는 아주 절묘한 프레이밍을 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

‘어쩌면 밀어주기일 수도 있고.’

그럴듯한 기록 혹은 수상이 걸린 타이틀 매치는 마냥 중립적이지는 못하다.

비바람이 불고, 태풍이 휘몰아쳐도 항상 중도를 유지해야 하는 게 심판의 본분이라지만. 비즈니스지, 비즈니스.

유도리를 아는 심판들은 흥행을 위해 조금 넉넉하게 굴고, 반대로 FM인 양반들은 더 빡빡하게 군다.

오늘 주심께선 아마도 전자 같다. 경기 시작 전에 관중들 농락하는 솜씨가 일품이더라니. 역시 FunFun한 양반이었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약간 이득 본 건 맞지만, 어차피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

좀 오글거리긴 하는데. 더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난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싶었고, 그렬 능력이 있으니, 그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삼진이었을 테니까.

‘이렇게 말이야.’

구위가 다시 돌아왔으니, 멋들어지게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고 싶었지만, 더 좋은 코스가 있었으니, 참았다.

똑같이 바깥쪽,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낮게 공을 깔아 던지자, 앞서 판정이 떠오른 듯, 애덤 앵겔이 황급히 배트를 냈지만, 그거 쓰리핑거야.

오프 스피드가 맛깔스럽지.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의 큼직한 헛스윙.

보통 헛스윙의 경우 무조건 스트라이크라서 굳이 큼직하게 콜을 하지는 않지만.

역시 스타성이 뛰어난 주심은 아주 요란스럽게, 온 동네방네 다 들으라는 것처럼 소리쳤다.

이야, 브루스 쟤 오늘 고생하겠네. 마운드에서도 데시벨이 높은데, 바로 뒤에서 들리면 경기 다 끝날 때쯤 되면 귀가 멀겠는데?

“You-Suck!”

“You-Suck!”

이미 주심에게 조롱 아닌 조롱을 당한 타자였지만, 역시 가차없군.

오늘은 아주 제대로 풀세팅을 하고서 나타난 레이더스는 마치 사형선고를 하듯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타자를 비웃었다.

그러지마요, 그러다 빡 돌아서 각성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거, 저런 용도였네.’

소리에 이끌려서 자연스럽게 흘끔 관중석을 보니, 불펜에서 나왔을 때 봤던 K 아홉 개 중 하나가 사라졌데. 이제 여덟 개다.

내가 삼진 아홉 개를 잡는 게 확정적인 사실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줄 알았더니. 이런 시스템이구만.

보통은 삼진을 잡으면 K 판넬을 세우지만, 지금은 미리 세워놓고 하나하나 내리는 카운트다운 방식이 됐다.

‘미니게임 같아서 좋네.’

저런 소소한 맛도 재밌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으니, 자신들을 봤다는 걸 깨달은 듯.

판넬을 내리던 관중은 아주 황홀한, 약간 가버리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우야, 이건 좀··· 아저씨 왜 그래요.

본능적인 구역질이 샘솟았을 때,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근데 만약 아홉 개 모두 다 내렸는데, 삼진 더 잡으면 그땐 다시 세우려나?’

과연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까? 솔직히 내 팬이면, 그냥 200탈삼진 하나만 보고 있을 것 같은데. 괜히 궁금하네.

‘궁금한 건 또 못 참지.’

소소한 목표로 삼아도 되겠어. 관중석에서 시선을 뗀 뒤, 다시 자세를 재정비했고. 앞서 울면서 쫓겨나간 애덤 엥겔과 똑같은 표정을 한 다음 타자가 이미 올라와 있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곧 그도 똑같이 눈물을 삼키며 내려갔다. 그 뒤로는 관중석을 보지 않았다. 그저 후련하고 시원한 감각을 느끼며 공을 던졌을 뿐.

그렇게 던지다 보니, 1회 초는 금방 끝났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길, 다시 흘끔 관중석을 봤다.

“뭘 그렇게 재밌게 봐? 예쁜 관중이라도 봤어?”

“그런 거 아니야, 새꺄.”

K는 여섯 개가 되어 있었다.

벌써 3분의 1이 날아갔네. 목표까지 3분의 1을 채웠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Suck it! 화이트삭스 X신들아!”

“그렇지! 이래야 Suck이지! 질질 안 끌고 바로 들이박는 거야!”

“Go는 무적이고, Suck은 신이다! 깝치지 마라!”

조용했던 관중들은 3분의 2 이상이 들썩거렸다. 그래, 이게 한국식 You교 야구지! 더럽게 시끄러운 게 딱 좋네.

‘끝까지 그렇게 가봅시다.’

어딜 아닌 척 점잔을 빼면서 맥주나 홀짝이고 있어! 누구보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인 거 뻔히 다 아는데.

1회 초가 끝났고, 세 타자 연속 삼진이 올라가자. 콜리시엄은 원래 뜻처럼 ‘콜로세움’으로 변했다.

다만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나오는 검투사들에게 무조건 K(ill)을 외친다는 건데. 뭐, 나한테 그러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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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X된 것 같다.

오늘 상대 선발투수의 폼, 구질, 스터프, 무브먼트. 그 외 기타등등 요소들까지.

모두 종합하여 나온 결과는 그거였다. 단단히 X됐다고.

“분석팀, 이 Fucking Asshole 같은 Nerd 새끼들은 대체 하는 일이 뭐야?”

“무브먼트가 떨어져? 저번에는 그냥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게 문제였어? 오늘은 집중해서 타격하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해? X까고 있네!”

“이래서 스윙 한 번 못해본 새끼들은 야구 얘기하면 안 된다니까! 직접 와서 쳐보라고 해! 저 무브먼트가 별로인지.”

일단, 최근 등판경기의 스탯캐스트 정보를 통해 분석한 자료는 모두 불쏘시개가 됐다.

가장 큰 단점이자,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저조한 무브먼트’가 개소리라 판명됐으니까.

RPM이 200가까이 떨어졌고, 수직 무브먼트도 줄었으며. 여전히 준수하긴 하나, 충분히 공략할 만하다고 이야기했던 포심은···

“스트라이크!”

그냥 괴물이었다.

이전에 언론에서 그렇게나 떠들어댔던 ‘떠오른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했으니까.

물론 그들도 알고는 있다.

직접 상대했으니, 모를 수가 없지. 분명 저번 경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 분석 자료를 그때에 대입시킨다면, 정확도가 100%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지난 등판인 브레이브스전의 분석 영상에서도, 준수한 성적과는 다르게, 패스트볼의 스터프는 떨어진 이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번 경기를 앞서서 갑자기 폼이 좋아졌거나, 아니면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구위를 다시 소생시켰다는 건데.

그걸 더러 분석팀을 욕하는 건 너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타자들에겐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다.

“스트라이크!”

그렇지 않는다면, 그대로 정신이 무너질 테니까. 물론 그 분노를 저 투수에게 토해낼 수도 있다. 사실 그래야하는 게 맞겠지.

명색이 메이저리거라면, 빅리그의 타자라면, 다른 핑계를 찾는 게 아니라. 오직 투수만을 바라보며 의지를 불태워야 했으니까.

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기에는 저 투수가 너무 무섭다. 씩씩거리며 덕아웃을 나서다가도 타석에 올라 눈이 마주치면, 그 용기가 한순간 사그라질 정도로.

“왜 웃고 지랄이야···”

“그야, 이제 네 개 남았으니까.”

“닥쳐, 혼잣말이니까.”

“나도 혼잣말이야.”

빌어먹을 새끼.

3회 초, 8번타자로 타석에 오른 케반 스미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운드의 존재가 두렵다면, 바로 옆의 놈은 짜증스러웠다.

저 녀석이 볼배합도 혼자서 하고, 공도 알아서 던지고. 아주 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야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포수가 하는 거라곤 포구, 약간의 프레이밍. 그게 전부지.

도루저지도 해야 하겠지만. 애초에 저 투수는 출루 자체를 잘 안 내주는 터라 그런 것도 없고.

그러니 기껏해야 포수 글러브나 깔짝거리는, 아무것도 아닌 놈 주제에, 투수의 실력에 기대어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짜증스러웠다.

어쩌면 같은 포수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후, 신경쓰지 말자. 트래쉬 토크에 말리기까지 하면, 그땐···’

진짜 끝이야.

철저하게 포식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투수의 눈빛에 케반 스미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금 긴장한 걸 제외하면, 아직 빈틈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투수는 그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처럼 내려봤다.

똑같은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숫자’를 채워 줄 머릿수 정도로 여기는 거겠지.

그 빌어먹을 오만함을 박살내고 싶은데, 그런 오만함을 보장하는 실력이, 그것을 자신감으로 탈바꿈 시켜, 화이트삭스를 억눌렀다.

‘FuckFuckFuckFuckFuck’

케반 스미스는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F-word를 되뇌며, 다시금 자신감을 찾으려고 했지만.

“스트라이크!”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공이 들어오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새하얀 백지처럼. 그대로 백치가 돼버린 것처럼.

‘이러니까··· 다들 넋을 놨지.’

경기 전만 하더라도, 다들 으쌰으쌰했었다. 어떻게든 우리가 기록을 저지시키자고.

저 오만한 애송이에게, 꽃길만 걸어온 빌어먹을 엘리트(?)에게 쓴맛을 보여주자고.

그렇게 의지를 불태웠던 동료들은 이제 없다. 먼저 만난 동료들은 이미 고개가 꺾였고. 점점 다가오는 차례에 뒤의 이들도 조금씩 얼어갔으니까.

자신 역시 거의 꺾였으니, 남은 건 9번 타자뿐이지. 아마···

“스트라이크!”

조금 있으면 그도 똑같은 꼴이 될 거고.

케반 스미스는 오늘 저 투수를 처음 상대했다. 홈에서 맞붙었던 경기에 그도 대타로 출장하긴 했지만. 저 투수가 이미 내려간 뒤였지.

그러니 어떻게 보면 다른 동료들보다는 나은 입장이다.

다른 동료들의 경우,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며 호소하고는 했는데. 자신은 그걸 느끼지는 못하니까.

‘차이고 나발이고, 그냥 X나게 잘하는구만. 그딴 게 뭔 상관이야? 서클, 그냥 눈앞에서 사라지네. 이걸 어떻게 쳐?’

다르고 지랄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저 투수가 던지는 공이 괴물 같다는 게 문제지.

“볼.”

리그 최고의 투수. 트리플 크라운. MVP, 사이 영, 신인왕 삼관왕 등등.

투수가 받을 수 있는 상은 모조리 언급되는 선수인데. 이제는 이해됐다.

어째서 그런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건지.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성적을 올렸던 건지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냥 잘한다. 온갖 미사여구가 필요 없이, 그냥 잘했다, 저 투수는 상대하는 입장에서 미칠 정도로.

다시금 삼진이 올라갔고, 하이 패스트볼에 시원스럽게 헛스윙한 케반 스미스는 그를 조롱하는 홈팬들의 목소리에 도망치듯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Three!”

“Threeeeeeeeeeeeeeeeee!”

돌아가는 등 뒤로, 관중들은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뜬금없이 왜 숫자놀이냐 싶었으나, 곧 깨달았다.

‘네 개 남았다고 했으니, 네 개 여섯 번째지.’

이제 남은 건 셋.

정말로 가시권이 들어왔으니.

이제부턴 목소리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다는 뜻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행여 괜히 부담을 주고, 부정이 탈까, 최대한 조심스러웠던 관중들이었는데.

이젠 그들도 확신한 거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늘 안에 세 개는 무조건 올릴 수 있다고.

자신들을 때려잡는 투수를 보며, 굳건한 믿음이, 미신 따윈 코웃음질 칠 정도의 믿음이 생겼다는 거겠지.

“Fuck.”

덕아웃 안으로 입장하며, 케반 스미스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리다, 화들짝 놀랐다.

작년에 데뷔했지만, 7경기밖에 출장하지 않았기에, 올해가 사실상 루키시즌이다.

짓궂은 루키 헤이징은 사무국에서 금지했다지만, 루키가 덕아웃에서 대놓고 욕설을 지껄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기에 눈치를 살폈지만.

“···수고했어. 가서 앉아.”

“하···”

그 누구 하나, 그를 질책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거나, 그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런 모습이야말로 지금 화이트삭스를 가장 잘 설명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아웃!”

그 카운트다운이 이번 이닝에 Two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물론 그걸 기쁘게 받아들이는 선수는, 최소한 이쪽 덕아웃 안에는 없었다.

####

간만에 빠따가 밥값을 했다.

무려 3점씩이나 내줬네. 아주 성은이 망극할 지경이야.

‘진작 이렇게 했으면 2승은 더 올렸겠네.’

정작 폼이 올라오니까, 다시 점수를 내는 꼴이 참 어이가 없으면서, 짜증스럽지만.

그래도 든든하긴 하네. 사랑한다, 빠따놈들아.

“오늘 3점이면 충분하지?”

“고마운 줄 알아, 특별히 Suck 네 전반기 마지막 경기라고 점수내준 거니까.”

“이야~ 양심이 성감대인가? 3점 가지고 생색을 내네.”

“거, 말이 좀 심하네.”

취소다. 꼴랑 3점 내놓고, 이거면 충분하냐는 듯이 보는데, 그 모습이 아주 꼴 받는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다.

뒤에 불펜이 알아서 잘 막아준다는 가정하에. 적어도 오늘은 3점이면 충분할 테니까.

‘생각보다 더 맥을 못 쓰네. 아직 풀컨디션도 아닌데. 그만큼 저번 경기랑 차이가 심하다는 거겠지.’

나도 나지만, 화이트삭스 타자들이 심각해. 이미 다 놓아버린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지금 내 상태가 정말로 안타 하나 못 낼 정도는 아니거든. 정신만 제대로 잡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퍼펙트로 막히지는 않았겠지.

이전과 달리, 전혀 예상치 못한 구위가 나오니까 그에 대한 충격이 큰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계속 주저앉아 있도록 조져야지.’

감각은 이미 올라왔다.

긴 이닝을 던질 생각은 없으니. 마음 놓고 때려 박는 것만 남았지.

“브루스.”

“어? 아···”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브루스를 부르니, 녀석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예견된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람처럼. 그래, 그거다.

“힘 빡주고 잘 받아라.”

“아, 이제 좀 살만하다 싶었더니··· 또 시작이네···”

“엄살은.”

“니가 직접 니 공 받아봐, 이게 엄살인가, 아닌가. 바로 알 테니까.”

어디, 이 포수 백정나부랭이가 하늘같은 투수님에게 눈을 부라려? 확 제구까지 놓고 힘만 오지게 넣어서 던져버린다?

그런 뜻으로 쳐다보니, 이번에는 생각이 전달된 건지, 떽떽거리던 브루스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옳지, 그래야지.

“자~ 드가자~”

포수에게 당부도 내렸으니, 이제 남은 건 선수입장이지.

“Suck! X발 오늘 X나게 쩔어준다! 매번 이렇게만 했으면 전반기 200삼진이 아니라, 300삼진도 우스웠을 텐데!”

“기왕 이렇게 된 거, 퍼펙- 아니, 그거까지 가버려!”

“파바박, 알지? 질질 끌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후딱 마무리 하자!”

그래, 다시 욕심들이 차오르셨군. 아주 탐욕스러워. 삼진만 바랄 때는 언제고,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게 풀리자, 역시나 다른 것도 바라고 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퍼펙트를 말하려다, 주변의 눈치에 황급히 둘러말하기도 했다.

역시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이라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말하는지는 나도 잘 알겠지만, 다 들어줄 수는 없다. 그 대신-

“스트라이크!”

처음 바라던 건, 확실하게 이뤄드려야지.

초구 스트라이크. 한 바퀴 타순이 돌아서 다시 만난 애덤 앵겔은 아까 전, 1회 초에 타석에서 쫓겨날 때보다 더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타석이니, 어느 정도 적응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던데.

“스트라이크!”

그런 건 없다. 초구가 날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날아든 2구. 드디어 시작됐다는 듯, 타자의 얼굴이 조금 질려들었다.

“파울!”

그래도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닌지, 한 차례 공을 커트하며, 삼구삼진은 면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극단적으로 투구간격을 좁혀서 난사하는 공은 언제나 옳다. 타이밍을 놓친 건지, 타자는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투구 타이밍은 빠른데, 정작 공은 느려터진데다가, 구위도 날림이니, 그 언밸런스함이 타이밍을 완벽하게 망쳤다.

“Two!”

그러자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투! 나한테 삼진당한 타자에게 던지는 You-Suck마저 버려둔 채. 관중들은 한 마음, 한목소리로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마치 12월 31일, 새해를 남겨두고 카운트다운 할 때와 비슷한 기대감, 그리고 행복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2번타자 멜키 카브레라. 카운트다운에 제물이 된 그는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귓구멍도 막고 싶었겠지.

“One!”

그래봤자, 3만여 명의 관중들이 함께 소리쳤기에, 다 뚫고 고막에 박혔겠지만.

이제 남은 건 라스트 원.

마지막 하나. 올라오는 타자를 보며, 숨을 골랐다. 그래, 199, 이제 딱 하나 남았어.

‘다른 투수 시즌 기록을 전반기만에 해보네.’

보통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시즌 200탈삼진을 잡으면, ‘이야~ 고놈 참 삼진 잘 잡네!’라고 부른다.

이닝이터의 기준인 200이닝처럼, 파워피처의 조건이지.

그런데 난 그 200삼진을 벌써 한 개만 남겨두고 있는 거고. 미치긴 했어.

‘과연 지금 시즌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번이 내 최고의 전성기이자, 커리어 하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이 뒤로는 쭉 내리막이고.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없으니,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시즌 다 끝난 뒤에 걱정해야 하고. 지금은 그저-

‘눈앞만 보고 달려야- 이런 개-’

삼진을 잡아야 하는···데.

초구를 던진 순간 뭉툭한 타격음이 귀를 때렸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콜이 아니라 타격음?

3번타자 호세 아브레유는 마치 그 마지막 제물이 자기가 되는 건 절대로 싫다는 것처럼, 맥을 끊었다.

기왕이면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달성하려고 했더니···

“아웃!”

3루 방향으로 둥실둥실 날아간 타구는 아슬아슬하게 3루수, 채프먼을 넘길 듯했지만, 훌쩍 점프한 채프먼은 간신히 타구를 낚아챘다.

안타성 타구였는데, 저걸 잡네. 호언장담하더니. 역시 수비는 일품이라니까.

아무튼 그걸로 삼자범퇴. 4회 초가 끝났는데···

“야이 개색-”

“저- 저저 눈치 없는-”

“이 쓰레기야! X같은 쓰레기 주제에 왜 갑자기 맥을 끊고 지랄-”

당연하게도 그걸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그렇고, 관중들도 그렇고.

심지어 다른 야수들과 직접 타구를 잡은 채프먼까지, 죄다 표정이 미묘했으니까.

아니, 원래 그림 상으로는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멋지게 달성해야 맞는 건데···

‘저, 저저- 저 새끼 저거 좋아하는 것 좀 봐. 동료한테 토스해놓고. 자긴 살았다는 거지?’

비록 1루 근처도 못가고 아웃당했지만, 3번타자 호세 아브레유는 그 누구보다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자긴 통과했다는 거지. 제물에서 벗어났다고.

‘더럽게 찝찝하네.’

아무튼 탈삼진 여덟 개.

여전히 하나를 남겨뒀고, 6회에 내려간다고 쳐도, 못해도 타자가 여섯 명이나 더 남았으니, 거의 확실하긴 한데.

왠지 큰 거 싸고 뒤를 안 닦은 것처럼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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