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 정도면 정기 인터뷰 아니야? 매달 초마다 인터뷰하는데.”
“몰랐어? Suck 쟤가 우리 팀 대변인인 거.”
원정팀을 받아들이기 전.
경기장의 기자회견실에서는 간략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다만 시간이 짧을 뿐, 사실상 오클랜드, 이스트 베이 지역의 대다수 언론이 참여했기에. 그 규모만 따진다면, 웬만한 우승팀 기자회견을 방불케 했다.
허나 이번이 세 번째였기에, 오클랜드 선수들은 그다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달의 투수, 그리고 이달의 신인. 수상할 때마다 이렇게 인터뷰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무덤덤한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새로 합류한 다니엘 고셋은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
‘Suck이 세 달 연속 이달의 투수라니···’
솔직하게 말하면.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요한 산타나. 그 정도 수준의 투수나 가능했는데.
그걸 Suck이 해냈다는 것이.
아니, 세 달 연속 이달의 투수 말고도 모든 것들이 다 어색했다.
Suck, 얘가 진짜 리그 최고의 투수라고? Suck이? 아니, 그 정도 수준을 넘어, 역사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Suck이?
트리플A에서 이미 지겨울 정도로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니엘 고셋은 매번 이렇게 되물었다.
그 혼자만의 의문은 아니다.
락하운즈 혹은 그 이하의 마이너리그에서 고유석과 어울렸던 이들은 대부분 이걸 마치 질 나쁜 농담처럼 여겼으니까.
‘시범경기에서 엄청나기는 했지만···’
솔바람에도 휘청거렸던 스터프가 괴물처럼 되었다는 것이야 이미 시범경기에서 직접 보기는 했고.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고유석을 보며, 예전의 그를 알고 있던 이들은 보통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질투하고, 어처구니없어 하거나. 혹은 희망을 가지거나.
소속됐던 모든 팀을 통틀어도, 그 팀에서 가장 약소한 스터프를 지녔던 투수였기에, 같은 투수들에겐 희망의 상징이었다.
“능숙하네, 인터뷰하는 게. 미들랜드에선 지역 언론이랑 인터뷰할 때도 좀 흥분하더니.”
“뭐, 과장 좀 보태서, 이런 인터뷰를 수백 번쯤 했을 테니까. 익숙해졌겠지. 원래 뻔뻔한 녀석이기도 하고.”
능숙하게 기자들을 다루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다니엘 고셋은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락하운즈에서도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었지만. 옆방 친구이자, 같이 마이너에서 구르던 동료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녀석이.
이제 갓 빅리그를 밟아본 자신과는 다르게, 정말로 멋진 메이저리거가 된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약간의 동겸심마저 눈에 깃들었고, 함께 인터뷰를 구경하던 맷 채프먼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번 시리즈에 그도 등판한다. 선발투수는 아니지만, 제법 길게 맡길 거라고 했지.
팬들에게, 그리고 구단에게 나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인데. 나도 Suck처럼 그 기회를 한번에 잡고. 그처럼 될 수 있을까?
다니엘 고셋이 스스로 되물었을 무렵. 인터뷰를 마친 고유석은 클럽하우스로 돌아왔고. 그를 보며 다니엘 고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기자들 말 더럽게 많네. 그놈의 전반기 200탈삼진, 200탈삼진, 무슨 돌림노래도 아니고. 진짜 부담스러워서 못해먹겠다.”
아, 그래, 이런 건 빼고. 내숭이 늘은 거지, 알맹이는 그대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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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인터뷰 끝내고 돌아왔더니, 우리 병아리 쉐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랄까,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색하고, 동경심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그럼 그렇지.’라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묘하게 기분 더럽네.
“다니엘 너, 오늘 등판이지? 코치한테 들었어. 마운드가 마이너랑 다르게 생각보다 단단하니까, 던질 때 조심해서 디뎌. 잘못하면 발바닥 깨진다.”
눈빛이 부쩍 마음에 안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같이 부대끼고 살았던 녀석이라, 대충 조언을 해주니. 멍청하던 표정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고마워. 새겨들을게. 다른 건 없어? 뭐, 타자 잡는 비법이라거나.”
“그런 게 있으면 너한테 왜 알려줘. 내가 쓰지. 아, 마이너보다 바깥쪽 좀 덜 잡아주는 편이니까, 그것도 감안해라.”
첫 등판을 멋지게 하고 싶은 건지, 정신을 꽉 잡는 것 같기는 한데. 다니엘 고셋은 여전히 조금 멍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메이저리그 데뷔가 다가왔다. 야구선수라면 제정신일 수가 없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개막전 등판하기 전에 나도 딱 저랬을 거고.
내가 코치도 아니고, 피칭을 직접적으로 터치할 수는 없으니, 그냥 잡다한 것들을 가르쳐 주니, 다니엘 고셋은 잘 새겨들었다.
채프먼도 뭔가를 기대하는 듯 쳐다보긴 했지만, 뭘 봐. 넌 타격코치한테 물어야지. 왜 투수인 나한테 그래. 아니면 크리스한테 가보던가.
“진짜 고마워. 그리고 축하해, 세 달 연속 이달의 투수라니, 대단하네.”
“그치, X나게 대단하지. 그래서 그런가, 다들 부담을 팍팍 주는 게 문제지만.”
이달의 투수. 결국 전반기 싹쓸이했네. 세 달 연속인데, 듣기로 역대 네 번째라고 한다.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
04년의 요한 산타나.
15-16년의 제이크 아리에타.
다만 제이크 아리에타의 경우, 15시즌 8,9월, 16시즌 4월이기에, 단일 시즌만 따지면 역대 세 번째지.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재림이라···’
한 기자는 그렇게 표현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단일 시즌 투수 임팩트였던,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동등해진 거라고.
구속이랑 키는 좀 차이가 심하긴 한데. 죽여주는 서클 체인지업을 가졌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이전에도 종종 그런 평가가 있기는 했다.
스승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그보다는 매덕스와 더 많이 비교되고는 했지만.
‘지금 임팩트만 따지면, 외계인 수준이긴 하지.’
그래서 그런지, 전반기 200탈삼진을 거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던데. 솔직하게 말하면, 좀 부담스럽다.
지금 상황에선 달성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안 된다는 수준이었으니까.
살짝 한숨을 내쉬니, 내 감정을 읽은 건지, 다니엘 고셋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우, 내가 오늘 데뷔하는 놈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빅리그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야지.
“화이트삭스 별거 없으니까, 그냥 당당하게 던져. 결과 좋을 거니까, 쫄지 말고.”
내 말에 다니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다 잡혔다는 것처럼. 뭐, 이 정도면 과거 동료로서 도리는 다한 거고.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 남은 것은 모레,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철저하게 집중하는 것뿐이다.
‘아주 환장을 하고 있던데. 기자들이 저 정도면 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다행히 지금까지 컨디션은 좋다. 생각보다 많이 올라왔어.
아마 화이트삭스로선 죽어도 내 기록의 제물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인 만큼. 아주 기를 쓰고 막으려고 들 텐데.
‘어차피 전반기 끝나면 올스타전에 2이닝 던지는 거 빼면 휴식이니까. 나도 기를 쓰고 던지면,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지.’
전반기 200탈삼진. 그렇게들 이 기록을 바라고 있는데, 시바꺼 아주 똥칠을 해서라도 달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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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Go의 전반기 마지막 등판이 예정되어 있죠? Go는 전반기 믿을 수 없는 활약을 선보이며···
티비를 끄지 않고 잤던 건지, 일어나니, 더럽게 시끄럽다.
비몽사몽 리모콘을 찾아 볼륨을 줄였는데, 아직 잠이 덜 깬 듯, 소리가 주는 게 아니라, 채널이 돌아갔고.
-과연 전반기를 0점대 ERA로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이 이어지고···
-그의 탈삼진 능력은 상식을 넘어섰습니다. 마치 과거 랜디 존슨처럼···
-관건은 200탈삼진이죠. 0점대 ERA는 이미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죄다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앉아서 티비를 보는 취미는 없기에, 대충 미디어 반응이나 보려고, 스포츠 관련 채널만 나오도록 설정해 뒀더니. 이 지랄이네.
‘누가 보면 자기 일인 줄 알겠네.’
아주 턱살까지 부들거려가면서 열변을 토하는데. 저러다 혈관이 터져서 쓰러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다.
솔직히 저렇게 과장스럽게 구니까,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한데, 이해는 된다.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기록들을 세웠으니까.
‘일어나자.’
나를 찬양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자료 같은 방송을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잠이 좀 깬 건지, 정신이 돌아왔다.
“전반기 마지막. 벌써 그렇게 됐나?”
아직 시범경기가 끝난 것도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전반기가 끝났다니.
아, 물론 진짜 전반기는 좀 더 남았고, 그냥 오늘이 내 마지막 전반기 선발등판 경기라는 거지.
아무튼 시간 참 빠르네.
탄성에 힘입어 공을 던지는 사이 쏜살같이 지나갔어.
‘이제 겨우 반 왔네.’
모순되게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진짜 똥빠지게 던진 것 같은데, 이제 반환점 돌았다니 말이야.
확실히 풀시즌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길기는 한가보다.
하긴, 그렇게 힘드니까, 나도 순간 체력이 훅 떨어졌던 거겠지.
“퉤.”
화~한 치약 거품을 뱉고 입을 헹궈내자, 이제 완전히 정신이 또렷해졌고, 흐리멍텅했던 시야도 걷혔다.
“어깨 괜찮고, 투구폼 괜찮고.”
그대로 또렷해진 거울 속 내 모습을 통해 몸을 확인했다. 살짝 투구자세도 취했고.
어깨가 처지거나, 팔꿈치에 힘이 없거나. 자세가 묘하게 어색하다거나. 그런 걸 확인하는 거지.
자다 일어나서 조금 흐트러진 것 빼고는 아주 좋다. 특별히 어딘가 힘이 없는 곳도 없고.
‘거의 다 떨쳐냈네.’
이제 피로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는 뜻이겠지. 사실 생각해보면 걱정했던 부진은 없었다.
홈런 하나 맞은 것 빼고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잘 던졌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6월 성적이 5월 성적보다 좋거든.
삼진도 더 많이 잡았고.
다 양키스전의 노히터와, 저번 브레이브스전의 8이닝 무실점 덕분이지.
‘뭐, 성적이 그렇다는 거지. 난 죽을 맛이었지만.’
마지막 신체 확인까지 마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할 차례다.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만큼, 멋지게 가야지.
“오늘은 어떠십니까? 여전히 좀 저조한가요?”
“아뇨, 많이 올라왔어요. 다음 등판 때는 다시 궤도로 돌아올 정도로.”
“다행이군요.”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1층으로 내려가니 대니얼이 맞이해줬고, 그는 내 말에 씨익 웃었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양반이라니까.
피지컬 트레이너로서, 선수의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며 종종 자책하고는 했는데. 다시 돌아온 듯한 모습에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를 안심 시키기 위한 말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진짜로 피로가 다 떨어졌으니까.
물 먹은 솜 같았던 묘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냥저냥 평소에 컨디션 약간 안 좋은 날 수준?
‘불펜피칭을 해봐야 알겠지만··· 구위도 거의 돌아왔겠네.’
좋아, 그렇다면 낚시질과 묻어가기로 버텼던 고유석이 아니라, 다시 리그 최강, 역대 최고, 사상 최고의 투수 고유석으로 돌아갈 시간이군.
다시 정상적인 범주의 컨디션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괜히 기분이 High하네.
‘마운드에서도 이러면,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두들겨 맞겠지. 자중하자.’
좋은 기분을 억지로 억누르며,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집을 나서는 순간, 익숙한 차가 집 앞에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찬데 말이야. 유심이 바라보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왔고, 아니나 다를까.
“브라이언? 어, 웬일이에요?”
“전반기 마지막 등판인데. 직접 봐야죠.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하고 싶기도 하고요. 오늘은 제가 픽업해드리겠습니다.”
브라이언이 있었다.
못 본지 제법 됐는데, 오랜만에 보니 좋구만. 은은한 미소를 띤 그는 내려서, 직접 문까지 열어줬다.
이러니까, 몇 달 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 좋은 차를 모는 맛도 쏠쏠하지만, 역시 최고는 남이 운전해주는 거지.
“계약 건은 다 마무리됐습니다. 올스타 게임 전에 계약서를 가져다 드릴 테니. 확인하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제안 온 거 전부 다 맞죠?”
“녜, Mr.Go 본인이 그렇게나 강력하게 원하셨는데. 당연하죠. 아, 계약 기간 역시 아쉽지만 모두 단기간으로 잡았습니다.”
아무래도 버프를 주려고 온 것 같다. 자본주의 버프 말이야, 이거만한 게 없지.
한, 두 건이 아닐 텐데, 정말로 그걸 정말로 다 진행하다니. 어쩐지 좀 핼쑥하더라. 고생 많이 했겠네.
욕심 많은 클라이언트 만난 탓에 괜히 고생한 것 같아, 약간 안쓰럽기도 했지만, 브라이언은 오히려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을 했고.
“대니얼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최근 컨디션이 안 좋으셨다고 하던데,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혹시라도 부담될까 싶어, 언급하지 않았는데. 조금 걱정이군요.”
“네, 뭐, 멀쩡해요. 이제는.”
“다행입니다.”
콜리시엄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 위에서, 그는 마치 감회가 새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마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이름 빼고 전부 다.’
그때 나는 잠깐 반짝하고 있지만, 언제 플루크가 꺼질지 모르는 80마일짜리 투수였고.
브라이언은 그런 불확실한 투수를 본인의 야망인지, 아니면 먼 훗날을 위한 장대한 계획인지, 한번 키워 보겠답시고 계약서 들고 찾아왔던 에이전트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수십 다발의 스폰서 계약을 헤아리는 에이전트가 됐고, 난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됐다. 세상 일 모르는 거지.
‘1년 만에 진짜 많이도 달라졌어.’
동화 같은 이야기니.
계속 동화처럼 이어져야지.
저 멀리서부터 보이다가, 점점 더 커지는 콜리시엄을 보니, 정신이 딱 잡혔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오셨으니, 부담감에 무리하지 마십시오. Mr.Go는 이미 최고의 투수니까요. 굳이 전반기 기록에 얽매일 필요는 없죠.”
선수 전용 주차장에 차가 선 뒤, 주섬주섬 내리자, 브라이언은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매번 No무리 Yes자제를 강조하는 투수코치가 덧씌워져 보이는구만.
“이제 코치 다 되셨네. 아시다시피 제가 안 되는 거에 괜히 낑낑거리는 타입이 아니라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당하게 말하니,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뒤로한 채, 클럽하우스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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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왔어? 좀 빨리 왔네. 근데, 오늘 표정 좋은데? 컨디션 괜찮나봐? 한동안 별로 안 좋더니.”
“무슨 독심술사에요? 얼굴 보고 컨디션 맞추게.”
“에이, 딱 보면 알지.”
들어가니, 제드 라우리가 맞이해줬는데. 아주 도사 다됐네. 사람 얼굴보고 컨디션까지 척척 맞히는 걸 보면.
하긴, 슬슬 야구도사 될 나이기는 하지. 생각해보면 거의 삼촌뻘인데, 내가 어르신을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니야?
“기분 나쁜 생각하지 마라. 혼난다.”
“독심술사 맞네.”
매덕스도 저러더니.
야구 짬밥 쌓이면 사람 생각도 읽게 되나보네. 대단하구만.
“Suck, 왔어? 오늘 열심히 할 테니까, 걱정 하지마.”
조금 더 들어가니, 우리 New Kid가 보였다. 맷 채프먼 말이야. 고셋은 좀 늦는가 보다. 아니면 이미 나갔던가.
채프먼은 다니엘 고셋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리즈 1차전에 데뷔했는데,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타격도 적당히 멀티히트 깠고, 수비야 원래부터 진국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래도 콜업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제집 안방처럼 있네. 이래서 요즘 것들은···
나 때는 말이야, 신인이라고 하면 선배들 앞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어.
물론 주전포수 손바닥 아작낸 뒤로는 미친놈으로 인정받고, 루키 헤이징도 바로 건너뛰었지만.
오늘도 출장하는 건지, 맷 채프먼은 단단히 긴장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쳤다. 뭐든지 잡아내겠다는 것처럼.
“3루쪽으로 오는 공은 죄다 잡을 테니까, 언제든지 나한테 보내.”
‘오늘은 특히나 야수들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수비력 좋은 3루수 있으면 좋지.’
수비는 진짜 믿고 맡길 만한 녀석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래, 부탁 좀 하자. 락하운즈 때처럼만 잡아줘.”
그때 정도만 해도 충분할 테니까. 채프먼을 남겨두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워밍업에 들어갔다.
“컨디션이 돌아오셨다고 했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가볍게 가도록 하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니얼의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며, 서서히 몸을 달아 올리자, 경기감각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역시 평소보다 빠르네.
저번 경기만 하더라도 평소보다 조금 더 하드하게 몸을 굴려야, 등판하기 좋은 상태가 됐는데. 오늘은 스무스하네.
불펜피칭이 기대되는구만.
“12분 됐습니다. 자세 푸십시오.”
“후우~”
당장이라도 공을 던지고 싶지만, 조급하게 굴 수는 없기에, 최대한 정확하게 워밍업을 마친 뒤. 조심스럽게 불펜으로 향했다.
“Go, 전반기 동안 수고 많았다. 오늘도 기대해도 되지?”
“어우, 그럼요. 마음 같아선 완봉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넵.”
스콧 에머슨은 슬쩍 내 모습을 보더니, 대충 컨디션을 알아차린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컨디션 안 좋았을 때는, 최대한 나한테 부담 주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믿을 만하다는 거겠지. 물론 개소리를 하니 바로 커트하기는 했지만. 조금 아쉽군.
‘마음 같아서는 바로 포심 던지고 싶은데. 이럴 때일수록 루틴을 지켜야지.’
기껏 컨디션 돌아왔더니. 루틴 안 지켜서 부정타면 어떡해?
불펜에 입장한 뒤, 평소처럼 서클 체인지업을 시작으로 피칭을 시작했다.
“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출력을 올리자, 불펜포수 역시 이전보다 말수가 줄었다.
과하게 립서비스하며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대신, 적절하게 감탄사 정도만 하며, 오직 공 잡는 것에만 집중했고.
“음! 오늘은 좋네.”
“저번에도 좋다더니?”
“그거야, Suck 너 기죽지 말라고 그런 거고. 이제 좀 니 공 같다.”
드디어 포심을 던지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이전에 좋다좋다 했던 건 빈말이었구만.
조금 눈을 좁히긴 했지만, 나도 만족스럽기는 했다. 손안에 묵직한 감각이 감돌았고, 포구 소리도 다시 대포 같아졌으니까.
오랜만에 다시 느끼니, 눈물이 나올 정도네. 우리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하자, 구위야. 내가 더 잘해줄게. 그러니까, 다신 떠나가지 마.
야구공을 꼬옥 쥔 손가락에게 속삭이듯 말하자, 다들 미친놈처럼 보는데, 난 진심이야.
이 느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아?
“점점 출력 높일 거니까, 긴장 빡하고 잡아요.”
“그래, 오늘은 그래야겠네. 간만에 이런 거 받으니까, 좀 어렵네.”
내 사랑을 왼손에 속삭여준 뒤, 조금씩조금씩 출력을 높이자, 불펜포수의 말소리가 부쩍 줄어들었다.
불펜에는 오직 가죽이 터지는 듯한 피격음만이 날카롭게 흘렀고, 어깨가 완전히 달아올랐을 무렵. 불펜피칭은 끝났다.
그래, 아직 100%는 아니지만, 거의 다 돌아왔네. 거의 다 돌아왔어.
“장타, 잘 안 나오겠죠?”
“그냥, 예전 같겠지.”
“그럼 됐네요.”
돌아온 구위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멋지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말이다.
삼진 아홉 개. 그 정도야 껌이지. 오늘 상대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다. 딱 좋지.
‘아마도 저번 경기 내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텐데. 오늘 아주 제대로 식겁하겠네.’
지난 경기에서는 극한의 연기력을 발휘하고, 온갖 함정을 다 파놓으며 피칭했지만.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으로 불펜피칭이 끝났고.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위해, 불펜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