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쟤는 대체 왜 나를 꼬라보는 걸까. 딱히 도발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상대 투수, 마이크 폴티네비치는 매 이닝이 끝날 때마다 날 쳐다봤다. 구몬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 받는 어린애처럼.
그게 도통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대충 어떤 상태인지는 훤히 보이지만, 생각은 잘 읽히지가 않네.
‘혹시··· 정정당당, 멋진 승부, 뭐 그런 걸 바라는 건가?’
어쩌면 그런 걸지도.
아닌 말로 지금 상황만 놓고보면, 진짜 멋진 장면이지.
양 팀의 선발투수가, 서로 자존심을 걸고 아주 화려한 승부를 벌이고 있으니까.
한쪽은 완봉을, 다른 한쪽은 무려 노히터를 걸고 말이야. 어? 생각해보니, 진짜 좀 멋있다?
‘뭐,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정말로 그런 걸 바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난 그 정도로 조뺑이 칠 생각 없거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어, 정신 못 차릴 대, 최대한 빠르게 치고 빠지자. 이번 이닝은 싹 다 전력투구로 갈 거니까, 힘 빡주고 잡아.”
“솔직히 최근에는 굳이 힘 안 줘도 쉽게 잡- 열심히 잡을게. 근데 진짜 이번 이닝이 끝이야 뭔가 좀···”
브루스는 무언가 찝찝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왜, 새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7이닝 무실점 중인데 말이야. 혹시 자존심 상하냐?
딱 보니 그런 것 같다. 하긴, 노히터 대 완봉이라니. 앞서 말했듯 X나게 멋진 승부지.
그런데 그런 승부를 내 쪽에서 먼저 중도포기 한다니, 약간 아쉬운 말 하겠지. 그런 브루스를 달래주기 위해, 하지도 않던 매덕스 놀이를 했다.
“저 투수, 지금 망가졌어.”
“저주라도 하는 거야? 너무 추잡한데?”
“그런 거 아니야, 새꺄. 잘 봐라. 절대로 정상 아니야. 노히터에 홀려서 억지로 버티고 있는 거지. 아마도 8회까진 무난하겠지만···”
딱 보인다. 지금까지 모든 문제를 노히터라는 글자 하나로 죄다 억누르고 있는 게.
같은 투수라서 알 수 있다.
투구폼도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데, 여전히 공이 좋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
피로감, 고통, 압박감, 그걸 죄다 누르고 있는 건데, 그게 단순히 누른다고 해서, 눌러지나.
‘결국 언젠가는 터지는 거지.’
그게 경기 끝나고 터진다면, 그냥 노히터가 되는 거고. 중간에 터지면 그대로 끝이다. 딱 그 정도의 차이지.
대충 타이밍이 예상됐다.
“9회, 딱 첫 타자부터 맛이 갈 거야. 지금 볼넷이 세 개니까. 다음 이닝 깔끔하게 마친다고 쳐도. 1번부터 시작이지?”
“어, 맷 조이스야.”
“그래, 그렇지.”
저건 긴장 놓으면 끝이다.
이제 마지막이라면서, 조금이라도 안도하는 순간, 바로 한방 맞는 거고.
‘X같이 발리고 있기는 해도, 공을 많이 본 만큼, 우리 타자들도 죄다 타이밍은 잡았어. 압박감에 제대로 스윙이 나오지 않는 거지. 그러니 약간 삐끗하기만 한다면···’
작살날 거다. 아주 제대로.
우리 타자들이 일관성이 없어서 그렇지, 한방은 진짜 죽여주거든. 이 공갈포 새끼들.
“그러니, 뒷일은 걱정 말고, 이번 이닝이나 잘 마치자. 오케이?”
“오케이.”
내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건지, 브루스 맥스웰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약간 우러러보는 것 같기도?
이거 재밌네. 전설 속 현자가 된 기분이야. 매덕스가 왜 다른 동료들한테 막 예언하고 그랬는지 알겠어.
물론 틀리는 순간 진짜 X나 쪽팔릴 텐데, 어차피 죄다 Suck이라고 불러대는데, 그보다 더 떨어질 이미지도 없지.
‘어디보자, 이번엔 누구부터였더라? 오, 그래. 여기부터구만.’
8회 초. 타선은 딱 좋았다.
8-9-1로 이어지니까.
오늘 피칭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딱 좋다고 볼 수 있지.
가장 먼저 제이스 피터슨.
8번타자이자, 1루수다.
그리고 올해 성적이 아주 대단하지. 나쁜 의미로.
‘타율이 1할 8푼이던가. 오늘 좀 올랐겠네.’
이 정도면 더 설명할 필요 없지? 그래도 출루율은 높다. 무려 2할 7푼으로, 타율보다 약 9푼 정도 높으니까.
장타율은 그보다 3푼 낮고.
그야말로 다른 의미로 충격과 공포스러운 성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안타 하나를 쳤다.
뭐, 야구가 그런 거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자한테 한 방 얻어맞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니까.
‘그래도 감을 잡은 눈치는 아니야.’
안타를 때리긴 했는데, 타이밍을 확실하게 잡아서, 멋지게 휘두른 건 아니다.
집념으로 날렸다고 해야하나?
구위가 한창 좋을 때였다면, 그냥 찍어 누르고, 파울이나 외야 팝 플라이였을 텐데.
뭐, 그런 가정은 의미없지.
‘지금 확실하게 잡으면 되는 거니까.’
마지막 이닝.
상대보다 먼저 내려가는 건데, 그마저도 더럽게 끝낼 수야 없지.
‘생각보다 눈이 좋아서, 체인지업은 잘 골라내는 것 같지만, 슬라이더는 전혀 손을 못 썼지.’
결정구를 미리 정해둔 뒤, 차근차근 공을 던졌다.
“파울!”
먼저 바깥쪽으로 커터 하나.
제이스 피터슨이 곧바로 타격했지만, 살짝 꺾이는 무브먼트에 배트가 밀렸다.
살짝만 더 코스가 좋았다면, 초구만에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네.
그래도 효과는 뛰어났다.
어차피 힘을 남겨둘 필요가 없기에, 아주 제대로 찍었는데, 타자가 느끼기에도 무게감이 다른 건지, 눈동자에 씌어 있던 긴장이 더 짙어졌거든.
‘다시 몸쪽으로 하나.’
바깥쪽 던졌으니, 이제 다시 집어넣어야지. 몸쪽으로 하나. 이번에는 포심으로.
“스트라이크!”
깊은 코스에 그는 몸을 살짝 움찔거렸고, 스윙을 참았지만, 주심은 내 손을 들어줬다.
그래, 딱 거기더라고.
‘85마일. 최대한 찍었는데, 확실히 좀 지치긴 했네.’
투구수는 생각보다 많이 소모하지 않았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진 건지. 전력투구인데도 구속이 저조하다.
이 정도면 경기 초반에 완급조절 할 때랑 비슷한 수준이네. 많이 떨어지긴 했어.
‘그나마 구위는 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질질 끌리면 위험하겠네.’
그러니 빨리 끝내야지.
마음 같아서는 다시 속도를 높이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중간에 뚝 끊어버렸으니, 다시 연결하기가 힘들거든.
뭐, 그래도 그 덕에 2이닝 더 던지게 됐고, 삼진도-
“스트라이크 아웃!”
열한 개 채웠으니.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번 더 몸쪽으로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과감한 코스였는데도, 타자는 때려내지 못했다.
약간 타이밍이 늦었거든.
그걸로 삼진이 올라갔다.
200개 채우려면, 남은 두 경기에서 경기 당 열한 개 잡아야 한다고 했었지? 오늘은 간신히 채웠네.
‘오늘 할당량은 채웠고. 이제 잘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말이야.’
제이스 피터스는 물러났다.
그리고 올라온 9번타자. 댄스비 스완슨. 작년 8월에 데뷔한 친구인데, 엄청난 성적을 올렸다.
유격수인데 수비도 잘하면서, 타격도 준수해서, 본격적인 풀타임 시즌인 올해에는 신인왕도 탈 수 있을 거라는 평가도 받았지.
‘뭐, 지금까지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이지만.’
근데 올해는 좀 아니다.
방금 잡은 제이스 피터슨보다는 약간 낫기는 한데. 준수했던 타격이 아주 폭삭 내려앉았지.
‘그래도 패스트볼은 곧잘 받아친다고 했지. 오늘도 안타는 없지만, 그런 면모가 보였고.’
그렇다고 해도, 드래프트 전체 1픽의 위엄이 사라지는 건 아닌 건지, 재능은 눈부시다.
패스트볼 대처가 뛰어난 게 분석자료에서 강점으로 꼽혔는데, 오늘도 괜찮은 타구를 잘 만들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수비도움을 좀 봤지. 코스만 좀 더 좋았더라도 안타가 됐을 거고.
‘슬라이더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딱히 그런 모습은 없었어. 내가 좌완이라서 그런가?’
약점으로는 슬라이더가 꼽혔지만, 우타자이고, 나는 좌완투수라서 그런 건지. 딱히 그리 효과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작년에 데뷔한 녀석답게, 브레이킹볼을 잘 고르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볼!”
‘이걸 고르네.’
이젠 감을 좀 잡은 건가?
바깥쪽으로 서클을 던져봤지만, 떨어지는 걸 가만히 쳐다만 봤다.
초구가 볼이면 항상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특히 후딱후딱 끝내고 싶은 경기 후반에는 더 짜증나고.
‘서클을 골랐다기보다는. 바깥쪽 코스 자체를 아예 손도 안 대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정보는 얻어냈다.
단순히 구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예 미동조차 없는 걸 보면. 이쪽 코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는 거겠지.
몸쪽으로 들어온 걸 제대로 저격할 생각인 것 같네.
‘그럼 한번 봐야지. 뭘 노리고 있는지.’
저렇게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한 번쯤은 들어주는 것도 예의겠지.
몸쪽으로 바짝 붙여서 던졌다. 역시 기다리던 코스였던 건지, 웅크린 자세를 쭉 펼치며 댄스비 스완슨은 스윙했고.
“스트라이크!”
참고로 다시 한번 서클이다.
똑같이 떨어지는 걸로.
초구와 코스만 다르게.
근데 냅다 휘두른다.
그것도 아주 멋진 스윙으로. 흔히 말하는 그거지, 그거. 영웅스윙.
‘몸쪽 패스트볼이구만.’
속도를 보아, 딱 패스트볼 타이밍인데. 단순히 몸쪽만 바란 게 아니라, 패스트볼도 노리고 있던 것 같다.
바라는 것도 많다.
코스만 노리던가, 아니면 구종만 저격하던가 해야지. 거참 더럽게 까다롭네.
여기가 무슨 멋진 레스토랑도 아니고, 셰프한테 별걸 다 주문하고 있어. 대충 먹고 갈 것이지 말이야.
“스트라이크!”
내 식당의 룰은 간단하다.
닥치고 메뉴 통일. 앞에 놈이 삼진이었으니, 너도 그냥 그거나 먹고 가라.
볼 거 봤으니, 요리는 쉽다.
바깥쪽 싫다며? 원래 싫어하는 것도 골고루 먹고 그래야 쑥쑥 자라는 거야.
나보다 먼저 데뷔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보다 어린놈인데. 두루두루 먹고 커야지.
바깥쪽으로 딱 붙여서 그토록 바라던 패스트볼을 던져주니, 짙고 거친 눈썹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아이 좋아. 아이 행복해.
‘고집이 심한 것 같은데. 이럴 땐 극약처방이 답이지.’
여전히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확실하게 보내줬다. 한번 더 바깥쪽.
이번에는 제법 멀리 나간 코스에, 타자의 폼이 느슨해졌다. 너무 대놓고 거르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거 안 던졌었지. 그러니 이해는 하는데, 내가 이걸로 잡은 삼진이 좀 많거든.
“스트라이크 아웃!”
완전히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쭈우우욱 들어오는 공. 슬라이더다. 슬라이더에 약한 거 맞긴 맞네.
뭐, 백도어 슬라이더의 경우, 슬라이더 자체의 위력이라기보다는 수싸움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어.
스트라이크존을 스치듯 들어온 공을 바라보며, 댄스비 스완슨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는 편식하지 말고, 두루두루 다 때릴 수 있는 좋은 타자가 돼라. 전체 1픽인데, 그 값은 해야지.
‘이제 마지막인가.’
그리고 마지막 타자.
수미상관이다. 1번타자니까.
대타도 낼만 한데, 상대팀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긴, 자기들도 지금 노히터 중인데, 굳이 먼저 우리를 자극 해서 괜히 난장판을 만들고 싶진 않았겠지.
‘자꾸 보니까, 정들겠네.’
오늘 네 번째 타석인데. 계속 보니까, 이제 막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야. 괜히 반가운 척하고 싶고.
하지만 타자는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하기는, 앞서 세 타석 내내 꽁꽁 틀어막혀서. 아무것도 못했으니.
나한테는 중간중간 아웃카운트 만들어준 고마운 놈이지만, 저쪽은 날 갈아 마시고 싶겠지.
지금의 대치를 9회까지 끌고 가고 싶지는 않은 건지. 의지가 돋보였다. 제대로 악에 받쳤어.
‘중견수면 힘 빼지 말고 수비나 열심히 할 것이지. 괜히 타격에 힘 빼지 말고.’
결국 노히터라는 것도 동점이 깨져야 가능한 거니, 어떤 의미에선 마이크 폴티네비치를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것이기도 하다.
‘서클에 아주 정신을 못 차리던데. 이젠 타이밍 잡았겠네.’
세 타석이나 봤으면, 아무리 옹이 눈이라도 적응할 시기지. 그러니 새로운 걸 꺼내야 할 시기고.
“스트라이크!”
먼저 포심 하나.
오우, 스윙 좋네.
바깥쪽으로 쭉 뺀 덕분에 안 맞았지만, 들어가거나 타자의 배트가 조금 더 길었다면, 제대로 날아갔을 것 같다.
그래도 흥분이 심하구만.
이런 공에 손이 나오다니.
그 의지가 제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 경기 동안 보였던, 약간의 주저도 사라진 것 같고.
어떻게든 때려서, 균형을 깨트리겠다는 목적이 딱 잡혔으니, 잡념이 사라진 거겠지.
그것이 참 위험하면서도-
“파울!”
달가웠다. 서클 체인지업. 꺾이는 무브먼트를 따라 다시금 배트가 휘둘러졌다. 저걸 끝까지 따라가네.
“파울!”
“볼!”
“파울!”
타자는 그 뒤로도, 두 개의 파울과 볼 하나로, 3구를 더 뽑아냈다. 아무래도 알아차린 듯하다.
‘질질 끌겠다 이거지?’
내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조금 더 승부를 끌면, 돌파구가 나온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어떻게든 나한테 고춧가루를 뿌리겠다는 건가? 더럽게 나오시는군. 그래도 괜찮아.
이거 하나 남았거든.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아빠와 캐치볼을 하는 것처럼. 오늘 경기에서 가장 편안한 공을 던졌고. 코스는 높았다.
둥실둥실 날아오는 공을 타자는 멍하니 쳐다만 봤다.
제법 높은 코스. 정확하게 컨택한다면 장타로 이어질 테니, 한방 때려볼만 할 텐데, 실제로 타격자세도 이행했지만. 그는 결국 휘두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쓰리핑거 체인지업.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고 가볍게 던진 공에 타자는 그대로 정지했다. 타이밍이 망가졌으니까.
시동이 꺼진 기계처럼 그대로 뚝 멈춰버린 타자는 주심의 삼진콜이 나온 뒤에도 얼마간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역시 박수가 없네.’
그런 타자를 홀로 남겨두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니,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세 타자 연속 삼진. 그것도 두 명은 루킹삼진으로 잡았는데. 너무들 하시네.
평소라면 아마도 귀청이 터질 법한 환호성이 터져나왔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럴 수밖에. 그들 입장에선 한 이닝이 더 남았으니까. 내 완봉까지 말이야.
그러니 다음 이닝에도 멋지게 마무리 하면 그때 박수치고 소리지를 생각인 것 같은데.
다음은 없어, 이 양반들아.
“쟤, 열심히 보고 있는데, 너도 그러지 말고 한번 눈이라도 좀 맞춰주지, 그러냐.”
“뭐하러?”
브루스 맥스웰은 흘끔 상대팀 덕아웃을 보더니 그렇게 속삭였다. 그래, 시선이 느껴진다.
또 뚫어지게 보고 있겠지.
마이크 폴티네비치가.
경쟁심과 승부욕. 그리고 약간의 동지 의식? 뭐 그런 걸로 가득한 눈동자로 말이야.
허나 나는 아니다.
널 왜 봐, 내 상대도 아닌데.
내 상대는 어디까지나 타자들이다. 드론맨처럼 괜히 툭툭 건드리는 게 아닌 이상. 상대 투수는 나랑 상관없지.
‘잘 이용했네. 같이 달리니까 좋구만.’
그냥 딱 이용하기 좋았을 뿐.
그래도 덕분에 삼진 잘 잡았네. 타자들이 바짝 쫄아가지고 말이야.
오늘 열세 개 잡았으니까, 다음 등판에 딱 아홉 개만 더 잡으면 되겠어. 역시 숙제는 미리미리 몰아서 하는 게 최고라니까.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냈으니, 이제 상대 투수가 뭘 하든지 상관없다. 뭐, 설사 진짜로 노히터 한다면 약간 찝찝하겠지만.
‘그거야 타자들이 빠따맞을 일이고.’
아무튼 이 뒤에 일어날 일은 내 잘못은 아니니까. 그렇게 오늘의 피칭이 끝났지만. 경기장은 여전히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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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온 볼!”
조금 집중이 안 됐다. 그 약간의 집중력 저하가 볼넷을 만들었고, 그제야 다시 정신을 다잡았지만. 여전히 찝찝한 감정이 들었다.
“스트라이크!”
8회 초를 끝낸 뒤. 그쪽 투수코치와 짧은 대화 이후 Go는 덕아웃에서 사라졌다.
그런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다. 화장실이 급했거나. 아니면 트레이너에게 가서, 아이싱을 받는 도중이거나.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끝내버린다고?
이 승부를, 이런 식으로?
걔는 자존심도 없나? 아니, 완봉이 아깝지도 않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노히터를 이어오며 한계를 넘은 정신력이 억지로 지탱해줬다.
“스트라이크!”
주자가 나가자, 타자들은 약간의 희망을 품은 것 같으나. 그건 그저 약간의 실수였을 뿐.
“아웃!”
공은 아직 멀쩡했다.
빗맞은 타구가 바닥을 굴렀고, 3루수가 잡았지만, 살짝 애매한 코스였기에, 1루를 포기하고 2루로 송구했다.
그렇게 다시금 아웃 하나.
슬슬 머릿속엔 매직넘버가 떠오른다. 기록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이제 단 네 개.
‘거의 다 왔어.’
이런 상황에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팔다니. 그럴 수야 없지. 찝찝하고 나발이고, 지금은 어떻게든 이닝을 끝내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
마지막 타자일 예정인 녀석.
다시금 타순이 돌았기에, 1번타자가 올라왔고, 여전히 의지가 가득했다.
그래, 아직도 부족하다.
우리 타자들과는 전혀 달라.
여전히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탈삼진을 여덟 개를 잡았고. 노히터를 유지 중인데도.
“볼!”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해진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 언질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이번 이닝에서 타자들은 대단히 침착한 모습을 타석에서 보여줬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배트를 내기 급급했건만, 이젠 여유롭게 공을 골랐으니까.
그 모습이 불쾌해서, 그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조금 더 어깨에 힘을 실었다.
“스트라이크!”
또다시 스트라이크가 올라갔지만, 타자는 여전히 똑같았고, 오히려 포수, 타일러 플라워스가 조금 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노히터는 투수만의 기록이 아니니까. 포수의 역할도 지대하고, 야수들도 중요하지.
그러고 보면 다른 동료들도 잔뜩 긴장한 눈치이기도 하고. 그런 모습에서 약간의 걱정이 들기도 했다.
‘만약··· 다음 이닝에도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0대0이 유지돼서.
경기가 연장전까지 이어진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10회에도 올라야 하나?
어쩌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정규이닝 내에 노히터를 달성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한다니.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타자들이 원망스러울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잡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8회도 채 끝나지 않았건만.
벌써 그다음을 생각하다니.
‘일단, 하나하나, 계속해서 잡자. 끝까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공을 던진다. 어깨는 이제 아무런 감각조차 없어졌다.
아까 전엔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이젠 그냥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라면 부상을 걱정하고, 두려움이 엄습했을 텐데. 지금은 도리어 그게 기꺼웠다.
“볼!”
“파울!”
“아웃!”
볼 하나를 고른 뒤. 연달아 스윙을 한 타자. 둘 다 파울이었지만, 두 번째 파울은 높이 떴기에 손쉽게 잡혔다.
그것으로 8회 말 종료.
이제 마지막 정규이닝만이 남았고, 경기장은 얼핏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동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죄했을 뿐.
반대로 관중들은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 Suck이 널 이길 거야.’라고 말하는 듯. 확고한 믿음이 느껴졌다.
그 두 가지 감정이 하나가 된 건, 브레이브스가 모두 나온 뒤, 다시금 애슬레틱스가 그라운드로 나오면서.
“어?”
그와 함께 불펜의 문이 열렸을 때였다. 불펜이 열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What The-”
그것을 본 순간 욕설을 참지 못했다. 결국 이닝이 끝날 때도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이 빌어먹을 새끼는 정말로 다른 놈에게, 신성한 승부의 마지막을 넘겨버렸다.
‘Fuck···’
오늘의 페이스메이커이자.
승부의 경쟁자가 사라진 그라운드는 미치도록 허무했다.
함께 멋진 승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진다는 동질감이 조금이나마 힘을 줬건만.
이젠 그저 외딴 섬에 홀로 쓸쓸하게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 미칠 것 같은 허탈감이 닥쳐왔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니, 많이 기뻤다.
‘그래, 내가 이긴 거야.’
자신은 내려갈 생각이 없다.
먼저 링에서 내려간 이가 패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그러니 이번 승부는 자신의 승리다.
그토록 치열하게 겨뤘던 상대가, 먼저 수건을 던졌으니까.
페이스메이커가 사라진 탈력감과, 승부에서 이겼다는 성취감이 한데 찾아왔고.
그때 콜리시엄은 웅성거렸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으니까.
‘그래, 내려갈 수밖에 없겠지. 난 무조건 노히터를 할 생각이니까.’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똑똑히 보여주는 것.
그것 하나를 바라보며, 의지를 불태웠지만, 균형을 유지했던 무게추 하나가 사라지면서. 균열이 시작됐다.
“아··· 망할.”
“돌겠네 진짜···”
“기껏 타이밍 다 잡았더니···”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흥분에 휩싸인 마이크 폴티네비치와 달리, 타자들은 그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8회 동안 그들을 억압했던 폭군이 떠나기는 했으나. 이미 착취를 당하며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쌩쌩하고, 어색하고, 새로운 놈에게 맞서 싸워야 했으니까. 지금까지 잡았던 타이밍은 모두 내려놓고서.
다시 처음부터.
####
“스트라이크 아웃!”
“이야, 션 진짜 신나게 때려 잡-”
아, 아무도 없지.
션 두리틀은 내가 조져놓은 타자들을 아주 신명나게 잡았다. 이미 다 탈진한 지 오래이니, 그냥 때리는 족족 넉아웃이거든. 얼마나 즐겁겠어?
특유의 뭔가 간지나는 선글라스를 낀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며 중얼거리다.
홀로 남겨진 걸 깨닫고 다시 입을 닥쳤다. 옆에서 쫑알거리던 브루스가 없으니, 영 심심하구만.
‘그나저나, 주인공께서는 아주 머리가 돌으신 것 같네.’
오늘의 주인공, 마이크 폴티네비치. 아이싱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보니, 얼굴이 이상하더라.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빡친 것 같기도 하고, 희열감도 보이고.
영락없는 미친놈이지.
어쩌면 그런 복잡기괴한 감정이야말로 오늘 그의 피칭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게 지금은 더 심해졌다.
하긴, 션 두리틀이 브레이브스 타자들을 아주 개잡듯이 잡고 있는데. 오죽하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두 개에 땅볼 하나.
9회 초가 끝났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전광판은 여전히 0이 찍혀 있었고. 정규시즌 내에 노히터는 사라졌다는 뜻이지.
설사 마이크 폴티네비치가 9회마저 노히터로 잡는다고 치더라도, 한 이닝을 더 던져야 정식 기록이라는 거고.
‘나였으면 진짜 타자 새끼들 줄빠따 쳤다.’
아닌 말로, 억장이 무너질 걸? 이렇게 잘했는데 0대0이라니.
경기장에 총 못 들고와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총기난사 났을 거다.
“혹시, 아까 전에 했던 아직 유효해?”
불쌍한 놈을 보고 있을 때, 어느덧 다들 덕아웃으로 돌아온 건지,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
마지막 이닝의 선두타자.
맷 올슨. 얼마 전에 콜업한 쌔삥이다. 사실 데뷔는 작년에 해서 나보다 선배기는 한데. 아무튼 얼라지, 얼라.
나이도 나보다 어리고.
재능은 확실한 녀석이고, 특히 파워가 아주 강력한 녀석인데, 그렇게 묻는 얼굴에는 욕심이 깃들어 있었다.
예언이라. 브루스 이 새끼, 아주 여기저기 다 말하고 다녔네. 혹시라도 틀리면 나 쪽팔리라고 말이야.
“직접 봐. 딱 보일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
덕아웃에서 나오는 마이크 폴티네비치를 보니, 딱 보였거든. 쟤도 욕심이 가득하네.
아마 제 딴에는 이미 결심한 것 같다. 다음 이닝, 10회에도 등판할 결심을 말이다.
그런데 말이야···
‘앞만 보고 달려야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렇게만 해도 벅찰 텐데···’
그 뒤까지 바라보다니. 꿈이 너무 크시구만. 내 턱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맷 올슨은 잘 알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어우, 힘들어. 드디어 끝나겠네.”
“연장까지 갈지도 모르지.”
“에이, 그렇게 호언장담 해놓고, 왜 또 그러실까?”
맷 올슨이 그라운드로 떠난 뒤, 브루스는 다시금 슬쩍 다가와 내 옆에 딱 앉았다.
이미 경기 끝났다는 눈치네.
포수가 투수를 믿어주니, 참 고맙기는 한데.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나 몰라.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는 진짜 받들어 모시겠네. 아주 좋아.
잠시 뒤, 9회 말이 시작됐다.
마이크 폴티네비치의 피칭은 이전과 똑같았다. 아주 강력하고 저돌적으로. 대가리 박는 거지.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몰아넣은 순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 행복한 상상을 펼치는 것 같은데.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어. 마지막 4구, 공이 날아갔다. 그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카운트가 좋고, 타자의 기세가 날카로우니, 한 구 빼서, 한 차례 숨을 골라도 괜찮을 텐데.
이미 10회라는 미래를 상정해버린 투수는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급하게, 최대한 투구수를 절약하고 싶어 했고.
그런 감정이 진득하게 담긴 몸쪽 공을-
“갔네.”
맷 올슨은 곧은 스윙으로 받아쳤다. 빠악-하는 청명한 타격음. 워낙 조용했던 콜리시엄이기에, 더욱더 선명하게 들렸다.
높게, 높게, 잘도 날아가네.
타자는 배트를 던졌고. 투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X바아아아아아알!”
“이거지 X새끼야! 어딜 여기서 그딴 짓을 하려고!”
“맷 X발 니가 우리 팀 맷 중에서 최고다! 니가 최고라고!”
적막했던 콜리시엄에는 다시 소리가 덧씌워졌다. 꾹꾹 눌러뒀던 한을 토해내듯.
관중들은 아까 전부터 강제로 거세됐던 성대를 아낌없이 혹사했다.
“미친··· 이게 진짜 되네.”
브루스는 날 기괴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는 그저 투수를 봤다. 역시 노디시전이구만.
물론 끝내기 홈런으로 패전투수가 됐으니, 노디시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걸 패자라고 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
나는 나대로 이득을 챙겼고. 저쪽은 저쪽대로 아쉬움을 챙겼으니까. 딱히 누가 이겼다고 보긴 어렵다.
‘뭐, 결과적으로는 내 쪽이 훨씬 더 이득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아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겼네. 무슨 개소리냐고 하고 싶겠지만. 한번 잘 들어봐.
상대 투수가 9회에 마운드에 오르긴 했지만, 결국 아웃카운트 못 잡았으니까, 나랑 똑같이 8이닝이다.
근데 쟨 1실점에 홈런 하나고, 난 무실점이고, 삼진도 열세 개로, 다섯 개나 더 잡았으니. 내가 더 낫다는 거지.
아무튼 그렇다.
“X발 우린 루키로 일낸다!”
“요즘 애새끼들은 뭘 처먹었길래 다 이렇게 X나게 잘해!”
“일로 와! 내가 날리려고 했더니, 그걸 홀랑 빼먹어?”
경기의 종지부를 찍은 맷 올슨은 천천히 홈으로 들어왔고, 우린 당연히 덕아웃을 뛰쳐나갔다.
그는 홈 베이스를 밟았고, 그것으로 경기는 완전히 끝났다.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또다른 기록의 발판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