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고유석의 경기는 언제나 시청자를 모았다. 단순히 오클랜드 팬들을 넘어.
거의 전국적인 시청이 이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인 선수였으니까.
[#GoSucksGo!]
[Go 오늘은 그냥 평소 같네.]
└거봐, 홈런 맞은 건 그냥, 일시적인 부진이라니까.
└패스트볼은 여전히 폼이 안 올라온 것 같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
└두 자릿수 삼진은 힘들어 보이는데. 좀 아쉽다.
[#GoSucksGo!]
[Go 오늘도 6이닝만 던지려나? 투구수는 넉넉한데.]
└아마도, 그렇겠지. 요즘 오클랜드에서 관리해주는 느낌이던데.
└사실, 지금도 좀 늦었지. 이제 데뷔한 투수인데, 벌써 120이닝도 넘겼으니까.
└그러면 11K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러면 전반기 200탈삼진 가능한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아직 로테이션상 아직 한 경기 더 남았으니까. 그리고 Go는 한번 감 잡으면 미친 듯이 삼진 잡는 스타일이고.
└다음 경기 등판한다고 해도, 0점대 ERA는 확정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경기를 보던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당연히 탈삼진과 ERA였다.
워낙 압도적인 기록이고, 언론에서도 연일 기록 도전에 대해 떠들었으니까.
그들이 바라보는 오늘 경기는 조금은 지루한 투수전이었다.
고유석 역시 기대했던 대로 준수한 피칭을 보여주며, 성적을 올렸고.
상대 선발투수인 마이크 폴티네비치도 예상외의 호투로, 묘하게 최근 들어 고유석의 경기에서 득점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오클랜드를 압도했지만.
양쪽 다 대단히 화려하다고 보기에는 조금은 손색이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5회가 끝났을 때였다.
[#GoSucksGo!]
[어··· 지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지? 지금 브레이브스 투수가-]
└그거 맞으니까, 언급하지 마. Suck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존중은 해야지.
└상황이 좀 이상해졌는데?
└상대 투수야 그거 깨지지 않는 이상, 내려갈 일 없고. 그럼 Go도 더 던지려나?
└글쎄, 아직은 모르지. 먼저 내려가면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는 것도 조금 그러니까.
두 투수가 5회를 나란히 끝냈을 때.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고유석이 내준 피안타 세 개와 마이크 폴티네비치가 기록한 볼넷 두 개가 전부였다.
그것 이외에는 모두 다, 0이었고. 안타도, 득점도, 실책도. 전부 다.
그 순간 지루했던 경기에 묘한 긴장감이 서렸고, 인터넷상에서도 약간의 신경전이 일어났다.
[#Braves]
[마이크 오늘 미쳤는데? Suck, Suck, 노래를 부르더니. 마이크가 더 낫네!]
└삼진은 걔가 하나 더 잡기는 했지만. 적어도 오늘은 마이크가 훨씬 대단하지.
└콜리시엄이 ‘그거’ 명소라며? 우리도 가자!
└Go라는 놈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브레이브스 팬들은 일단 기뻐했다. 상대 타선을 자신들의 선발투수가 완전히 압도했고. 리그 최고의 투수를 상대로, 선발투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까.
고유석 역시 여전히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고, 브레이브스 타선을 수월하게 막기는 했지만.
오늘 마이클 폴티네비치는 그런 고유석이 얼마 전에 보여줬던 최고의 퍼포먼스를 콜리시엄에서 다시 재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A’s]
[아 진짜, 타자들 뭐하냐고! Suck한테 득점지원 못하는 것도 모자라서, 노히터까지 당하냐?]
└그거 그렇게 막 언급해도 되나?
└뭔 상관이야. X발 Suck이 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징크스로 깨지는 게 낫지.
└이상하게 Go 등판일에는 타자들이 마음에 안 드네.
└Go는 이제 내려가겠지? 6이닝만 채우고.
└그나마 Go가 브레이브스 타자들도 조지고 있어서 다행이지. 내려가면 괜찮으려나?
에이스의 팬들은 일단 짜증이 났다. 양키스전만 하더라도, 환호하고, 광기에 휩싸였건만.
막상 자신들의 그 기록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물론 이제 겨우 서로 5이닝씩 주고받았을 뿐이고, 아직 이닝은 한참이나 더 남았지만. 한 눈에 봐도 타자들이 영~ 감을 못 잡고 있었기에, 지금의 분위기가 쉬이 깨지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또한 고유석 역시 이닝 관리를 위해, 6이닝만 딱 채우고 내려갈 것인 만큼. 그토록 사랑하는 에이스가 승수를 챙기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약간 밀리는 듯한 뉘앙스가 된다는 것도 그들로선 불쾌했다.
└Go도 멋지게 받아쳐 줬으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이닝을 너무 많이 소화하긴 했지. 이젠 좀 살살할 타이밍이야.
└이미 X나게 많이 던진 투수한테. 우리 자존심 상한다고 더 던져달라는 것도 좀 그렇긴 해.
그럼에도 고유석에게 매달리지 못하는 건 양심의 가책이었다.
올해 데뷔한 투수에게 에이스를 맡긴 뒤, 그야말로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굴렸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또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조금 더 무리하고 말하는 건, 죄책감 때문에라도 힘들었다.
그나마 직관 중인 홈팬들은 무언의 시선이라도 보냈지만. 경기장 밖에서 중계 방송으로 경기를 시청하던 이들은 그저 씁쓸한 얼굴로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그들이 분노와 황당함을 곱씹고 있을 때. 6회 초가 시작됐고, 느낌이 바뀌었다.
└Go가 다시 속도를 늦추는데?
└어, 갑자기 뚝 끊겼네. 원래는 못해도 2이닝은 유지하지 않나? 오늘은 조금 늦게 5회부터 시동 걸었는데, 벌써 멈췄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고유석은 5회부터 속도를 높였다. 잔뜩 경계하고, 긴장했던 브레이브스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막판에 모든 걸 쏟아붓고, 잔뜩 뒤흔들 생각이었는데. 그 질주가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끊겼다.
6회부터는 다시 이전처럼 느슨하고, 여유롭게 승부를 이어나갔으니까.
그 모습에 혹시 부상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팬들은 걱정했지만, 곧 차분한 모습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A’s]
[아무래도 Suck도 끝까지 가보려는 것 같네. 지금 완급조절 하는 거야. 길게 던지려고.]
└X발 그래! 이게 에이스지!
└오클랜드의 에이스는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지!
└노히터? 그건 이겨야 가능한 거지! Suck이 완봉하면 그만이야!
팬들의 바램처럼, 자신 역시 지금의 투수전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듯, 고유석은 다시 차분해진 모습으로 천천히 타자들을 요리했다.
-세이프!
다시 나온 안타 하나.
그것에 순간 팬들의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곧이어 후속 타자를 내야 팝-플라이로 잡아내며, 고유석은 능숙하게 팬들을 조련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 타자는 특유의 하이 패스트볼로 압도하며, 스트라이크를 올렸고. 다시금 이닝이 끝났을 때.
그는 평소 피칭을 마칠 때처럼 후련하게 웃거나, 스트레칭하듯 찌뿌둥한 몸을 풀지 않았다.
다시금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 최대한 몸에 이상이 없도록, 침착하게 착석했을 뿐.
아이싱은 없었다. 슬슬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굳이 점퍼를 입지도 않았고.
그저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듯이 그라운드를, 반대편 덕아웃에서 다시금 주섬주섬 준비하던 맞상대를 바라봤다.
적어도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 중,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A’s]
[Go가 치킨게임을 걸었네. 끝까지 가보자는 거야.]
고유석의 도발과도 같은 제안을, 마이크 폴티네비치는 당연하게도.
-스트라이크!
흔쾌히 받아들였다.
애초에 기록이 시작된 순간부터, 그는 절대로 내려갈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투수들이 잘하는 것도 있지만, 타자들이 못한 것이 컸기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졌던 투수전이 뜨겁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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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들, 지금 맛이 갔지?”
“어, 완전. 아예 타석에 집중을 못 하는 눈치야. 아니, 집중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생각이 복잡한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
브루스는 희소식을 전했다.
예상대로 브레이브스 타자들은 온전히 타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명타자인 맷 켐프를 제외하면, 이전보다 수비에 어느 정도 기울 수밖에 없지. 노히터니까.
‘당장 양키스 때 우리 타자들도 그랬고. 초반에 점수를 내긴 했지만. 노히터가 대두된 뒤로는 완전히 타격을 놓았었지.’
그것에는 홈에서 노히터를 만든다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거기에 그때 우리 팀과 달리, 저쪽은 초반에 점수를 내지 못했고, 현재까지 양쪽 다 무득점에 그치고 있으니.
더욱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타격에선 아무리 봐도 멀쩡하고, X나게 까다로워 보이는 나를 어떻게는 넘어야 하고.
수비에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아니, 차라리 실수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안타가 아니라, 실책으로 판정되도록.
오늘 경기는 어설픈 실수야 말로 가장 최악의 결과물이었다.
“Go, 분명 무리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 그렇게 들었는데.”
“무리 아니에요. 투구수 적은 거 아시면서?”
“그래, 그렇지. 하지만 계속 그러다 보면, 폼이 올라오는 것도 점점 더 더뎌질 거야.”
스콧 에머슨은 약간은 착잡한 눈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에이스가, 팀의 자존심을 위해서 상대 선발이랑 한판 붙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뜯어말려? 홈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러니 최대한 경고를 하는데 그쳤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이런 게 쌓이다 보면, 한순간 훅 가는 법이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지금 상태로 봐서는 아마 다다음 경기쯤이면 폼이 올라올 거고. 거기다 올스타 브레이크도 중간에 있으니까.’
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달려들었다 이거야. 내 당당한 표정에 스콧 에머슨은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고. 나는 그를 달래주기 위해, 슬며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완투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로.”
믿는 눈치가 아니지만. 이건 진짜다. 중간에 노히터가 끊어진다면, 당연히 내려갈 거지만. 설사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끝까지 달릴 생각은 없다.
‘딱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는 게 목적이니까. 언제나 목적을 잊어선 안 되지.’
팬들에겐 미안한데. 난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에이스로서의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서, 상대 투수와 겨루는 게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이라도 힘을 주는 순간, 와장창 깨트려질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 나한테 도움이 되기에 선택을 내렸을 뿐.
6회 말 역시 깔끔한 삼자범퇴. 나갔던 타자들은 죄인처럼 덕아웃으로 들어오다, 나를 보며 흠칫 놀랐다.
‘내려갈 줄 알았나 보네.’
같이 살 부대끼는 작자들이라서 그런지, 나를 아주 잘 안다. 굳이 팀의 자존심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내려갈 기미 없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
아이싱 안 하는 거 보고 딱 알았어야지. 그렇게 살짝 놀랐던 세 명은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Suck, 부탁한다.”
“어떻게든 뚫어볼 테니까, 끝까지 버텨줘.”
“오글거리니까, 그렇게 굴지 말고. 공이나 잘 잡아.”
되지도 않는 명장면을 연출하는데, 어림도 없지! 이 트래쉬 놈들이, 어디서 멋진 척하려고. 노히터나 당하는 주제에!
아니지, 지금 같은 경우는 트래쉬라서 고맙다고 해야겠지.
‘말이 없네. 썩썩 거리는 것도 안하고. 상대 투수를 배려할 리는 없고. 나 때문이구만.’
그런 타자들, 아니, 야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자, 적막함이 반겨줬다.
양키스 때와 비슷하다.
그때는 4회 이후로 아주 조용했지. 뒤에 볼넷 하나 내주기 전까지는 퍼펙트였으니까.
그 뒤로도 노히터였고.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날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간절함이 보였다.
나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간절한 기대가 말이다.
‘그리고, 저쪽도 마찬가지고.’
마운드에 오르고, 타자를 봤다. 5번타자 타일러 플라워스.
꽃이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그리 화사하지는 못했다. 나를 보는 홈팬들보다도 더욱더 간절한 표정이었으니까.
눈치가 보이겠지.
자기네 선발투수가 노히터 중인데. 자신들도 영봉으로 묶였으니. 사람이라면 투수한테 미안하지.
어떻게든 한 방 날려서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겠다는 게 절실하게 느껴지는데. 그걸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절박함, 민망함, 긴장과 경계, 그리고 혹시나 싶은 두려움. 아주 오만가지가 다 똘똘 뭉쳤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그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수없이 중첩된 무거운 상황들이 브레이브스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자기 마음조차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타자. 그것보다 더 손쉬운 상대는 없다.
“스트라이크!”
이렇게 살짝만 푹 찔러도. 이미 균형을 잃은 멘탈이 와르르 주저앉으니까.
낮은 투심 하나.
정확하게 걸친 공에 타자는 아직도 내 제구력이 여전하다는 걸 깨달은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브레이브스 타선의 앞에서 내가 한 일은 간단하다. 어떻게든 유지하는 것.
이미지에서 비롯된 위압감과 여유로움을 말이다.
쓸데없이 복잡해진 머리는 타자들이 그런 허세의 빈틈을 찾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스트라이크!”
그러니 그들로선 갑갑할 수밖에. 우리 투수는 노히터 중이고, 점수는 아직 0대0이다.
그런데 눈앞에는 리그 최고의 투수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고, 자신들은 그걸 어떻게든 뚫어내야만 한다.
절벽의 끝에 몰린 기분이겠지. 어느 쪽으로든 힘겨울 테니까. 거기에 투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다시 낮게 하나.
똑같은 코스, 똑같은 공에도 타자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투 스트라이크에, 타일러 플라워스의 얼굴이 대충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심하게 요동쳤다.
‘일단 몰아넣었고. 잡는다치면 이번이 아홉 번째인가?’
여섯 개에서, 이전 이닝에 두 개를 더 잡았으니. 현재까지 탈삼진은 여덟.
상대 투수 덕분에 브레이브스 타자들이 알맛게 조리되었으니. 맛있게 집어먹어야겠지.
다시금 코스를 조준했다.
선택은 이미 내렸다.
조금 위험하긴 하겠지만, 타자의 상태를 보아 통할 것 같다. 또 이전 타석에서 그걸로 삼진을 잡기도 했고.
‘일단 하나.’
공은 날아갔고, 코스를 확인한 타자의 두 눈동자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세 개 연속으로 같은 코스였으니까. 머리가 복잡해도, 한참은 더 복잡해졌겠지.
설마 진짜로 또 패스트볼인가? 아니, 대체 왜 세 개를 연달아 똑같은 걸로만, 혹시 브레이킹볼을 던진 건가?
그런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난 얼굴은 이내 결단을 내린 것 같았고, 그의 배트는 예상지점 보다 조금 더 낮게 휘둘러졌다.
‘그렇지.’
서클 체인지업을 예상한 것이리라. 지난 타석에서도 그거에 삼진을 당했었으니까.
다른 타자들도 잘 속았고.
그러니 같은 코스의 패스트볼 두 개로 미리 속이려는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은데.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난 그렇게 꼬아서 피칭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우직하게, 어? 같은 곳으로 세 개 던지니까, 얼마나 편하냐.
배트가 헛돌았고, 삼진이 올라간 순간, 타자, 타일러 플라워스의 눈동자가 탁해졌다.
이걸로 확실하다. 멘탈 터졌네. 뭐, 어차피 다음 타석이 없는 만큼, 그걸 이용할 수는 없겠지만.
간접영향은 있다.
멘탈이 터져버린 동료를 보면서, 다른 놈들의 긴장이 더욱더 극심해질 테니까.
‘저거 봐. 효과 확실하잖아.’
멘탈 터진 동료를 보며, 벌써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다음타자.
대니 산타나.
오늘 경기에서 현재까지 삼진 하나와 내야땅볼 하나를 기록 중이다.
스위치 히터인데도, 오늘은 내 서클을 의식한 건지, 이번 경기는 오히려 좌타석에만 섰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전형적인 유틸리티 자원으로, 아주 오만 포지션을 다 소화하는 만능 수비요원인데.
그래서 그런지 타격은 별로지. 데뷔 시즌은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뒤로 폭삭 주저앉은 케이스다. 흔히 말하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아주 제대로 당한 거지.
‘툴은 제법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아직 만개하지 못했어. 파워도 조금 약하고.’
거기에 약간 두려움까지 느끼는 것 같으니.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지.
“스트라이크!”
깔끔한 스트라이크 하나.
스트라이크존을 가로지르는 크로스 파이어가 제대로 꽂혔다.
대니 산타나는 살짝 미동만 보였을 뿐 스윙하지는 못했고. 그것으로 원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2구는 살짝 뺀 투심을 던진 뒤, 곧바로 연이어 윽박지르듯 던지자, 그의 배트가 움직였지만. 이번엔 슬라이더다.
큼직하게 헛스윙한 대니 산타나는 앞서 아웃됐던 타일러 플라워스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당할 상이라는 거지.
다시 한 번 바깥쪽. 나름대로 인내심과 선구안을 발휘하며 스윙을 참았으나. 곧 공은 역회전하며 들어왔다.
난 좌타자 상대로 떨어지는 서클만 던지는 게 아니라, 이것도 종종 던지니까, 기억해둬라. 아마 좀 오래 뒤에 다시 만나겠지만. 어쩌면 월드시리즈에서 만날지도 모르고.
멍하니 쳐다만 보면서 루킹삼진. 그것으로 두 자릿수 삼진을 올렸다.
“아웃!”
마음 같아서는 거기서 하나를 더 올리고 싶었지만, 7번타자, 요한 카마르고는 악착같이 배트를 휘둘러, 공을 맞췄고, 쭉 뻗은 타구는 유격수가 간신히 다이빙 캐치하며 잡아냈다.
‘오우야, 식겁했네.’
이건 좀 위험했다.
확실히 죄다 맛이 간 건 아니야. 깔끔한 직선타였으니, 잘못했으면 제대로 뚫렸으리라.
“뚫렸으면 장타였는데, 덕분에 살았어.”
“이런 거라도 해야지. 타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기껏 잘해놓고 자책하진 말고.”
조금 심장이 철렁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삼자범퇴.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슬쩍 상대팀 벤치를 훑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남자.
마이크 폴티네비치. 명실상부 오늘 경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투수는 똑똑히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라운드 전체를 보고 있었고. 그 두 눈동자에서 극도의 집중력이 느껴졌다.
“하, X발 살벌하네.”
“솔직히 느낌만 따지면, 저번에 양키스전 때의 Suck 얘보다 더 심해.”
타자들은 살기가 가득한 폴티네비치를 보며 앓는 소리를 했고, 뒷일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홀렸네, 아주 구미호한테 제대로 홀렸어.’
나는 보였다.
그의 노히터를 망칠 요소가.
다행히 원하던 대로 되겠어.
‘딱 8회까지만 던진다. 그게 마지막 한계선이야.’
그 이상은 진짜 문제가 생길 거다.
먼저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겠지. 선발투수 싸움에서 밀린 것처럼 보일 거고.
그게 사실이니까.
만약 노히터까지 한다면, 아주 완벽한 완패가 되겠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못 이기면, 노디시전이 제일 좋지.’
승자가 될 생각은 없다.
노히터 투수를 상대로 멋들어지게 달려들어서, 기세를 꺾고 이기는 건 물론 멋있겠지만. 굳이 그 정도로 무리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렇다고 해서 패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지금 상황을 이용해, 내가 챙길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챙기고, 그 어떠한 기록도 나오지 않는 노디시전이니까.
대충 눈치를 보아.
그렇게 될 것 같네.
####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저 녀석, 저 괴물 같은 투수가 어째서, 그렇게도 열심히 성적을 올렸던 건지를.
이제 갓 데뷔한 루키이니, 조금은 자제할 법도 한데도, 어째서 그렇게 사력을 다했던 건지 말이다.
기록, 그것이 풍기는 마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감히 멈추는 걸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마이크, 괜찮아?”
“네? 네··· 네! 아직 멀쩡합니다. 투구수도 충분하고. 솔직히 오클랜드 상대론, 아직 거뜬하죠.”
투수코치는 불안한 듯 시선을 보냈다. 어쩌면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신은 정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잘 알고 있다. 이건, 명백히 오버페이스다. 이제 7회, 이미 6이닝을 던졌는데도 아직 멀쩡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지.’
욕심은 점점 더 강해졌다.
어쩌면 상대 투수가 자신에게 어울려줬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마치 페이스메이커처럼. 꿋꿋하게 같이 달려줬으니까.
이미 저보다 앞서서 도전하고, 결국 이루어낸 동반자가 있으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그렇지는 진지하게 믿었다.
단순히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내일 아침, 피로에 찌든 몸 때문에 욕지거리를 뱉으며 잠에서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가자.”
공을 던지면 던질수록. 오히려 더욱더 힘이 차올랐으니까. 내일의 것을 당겨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지만.
약간의 미래를 바쳐서, 이걸 해낼 수 있다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착잡한 표정이네.’
그라운드에 나서자, 홈팬들이 보였다. 분노 대신, 이제는 조금 착잡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노히터 달성과 피폭을 둘 다 이루는 아주 이색적인 기록을 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젠 저 사람들도 정말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거지.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거고.’
마운드에 오르자, 바짝 집중한 눈으로 타자가 입장했다.
조금 전, Go에게 당했던 동료들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다.
그들에겐 아직 체념이 씌워지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묘하게 불쾌했다.
‘아직 부족하다고?’
Go는 브레이브스를 꺾었는데, 지금 노히터 중인 자신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물론 그것에는 오늘의 퍼포먼스 외에도, 그가 지금까지 올린 압도적인 성적이 뒷받침해 줬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스트라이크!”
그런 그를 부추기듯, 어깨는 한없이 가벼웠다. 어떠한 피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엔도르핀이라고 하던가?
극도의 흥분상황이면 몸이 분비하는 호르몬이.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렬하다고 했지.
어쩌면 그게 마약성 진통제처럼 몸의 고통을 억눌러준 걸지도 모르겠다.
“스트라이크!”
다시 한번 공을 던지면서, 간절히 바랐다. 부디 그게 마지막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지금 이 순간이 끊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속되기를.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한번 더 스트라이크 하나. 삼진이 올라갔고, 오클랜드 타자들의 얼굴은, 동료들의 그것과 조금 닮아갔다.
“아웃!”
그것을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던지고, 또 던졌고. 오로지 포수가 보내는 사인만을 눈에 담으며. 이닝을 삭제시켰다.
“아웃!”
마지막 세 번째 아웃카운트가 올라가자, 가빴던 숨이 한순간 탁 풀렸다. 다시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으니까.
마음 같아선 이대로 쭉 몰아서 던지고 싶다. 계속 타자들이 올라왔으면 좋겠고.
지금 이 느낌이 유지되도록.
‘이제, 다시 네 차례야.’
그런 아쉬움에도 마운드에서 물러날 수 있었던 건, 마찬가지로 가쁘게 달려줄 사람이 있다는 것 때문이겠지.
다시 벤치로 돌아가며, 상대 덕아웃을 봤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도 나오려는 건지.
Go는 가볍게 목을 돌리면서,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글러브를 다시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