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강한 척. 다르게 말하면 허세다. 아니, 다르게 말할 필요 없이, 그냥 허세다.
난 지금 내 기량 이상의 모습을 상대 타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거니까.
근거가 있다면 당당한 자신감이겠지만, 근거가 없으면, 그냥 허세지.
하지만 때때로 그런 허세가 잘 먹히는 타이밍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아웃!”
좌익수, 라제이 데이비스는 차분하게 타구를 잡았다.
아니, 잡은 게 아니라, 공은 알아서 글러브로 들어갔다. 라제이 데이비스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현재까지는 브레이브스 타자들의 파워가, 딱 예상한 정도라는 뜻이지.’
기본 포지션에서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그것으로 1회 초 종료.
삼진 하나에 땅볼 하나.
그리고 좌익수 플라이 하나.
깔끔한 삼자범퇴가 만들어졌다.
‘최소한 정타를 맞더라도, 심하게 뻗지는 않는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야.’
다행이네. 제대로 맞은 순간 쭉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가슴이 철렁였지만. 겉으로는 평소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세는 치킨게임이거든. 겁먹은 티를 내는 순간 바로 와장창이지.
“타자들 어때? 감이 좀 와?”
“일단··· 이번에 잡은 셋은 좀 긴장했어. 약간 생각이 많아 보인다고 하나? Suck 네가 노리던 거 맞지?”
“어, 잘했어. 앞으로도 계속해서 체크해. 혹시라도 감이 이상한 놈 있으면 바로 사인 보내고.”
허세란 게 때때로 엄청 추해 보이지만, 때에 따라서 한 가지 이득을 가져다준다. 바로 상대가 한 번쯤은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
화끈하게 달려드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춰서,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는다는 거지.
공 하나, 스윙 하나로 결과가 결정되는 야구에서 그런 잠깐의 주저가 가진 영향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한 번으로 승부의 승패가 좌우되니까. 그런 허세가 최소한 지금까지는 먹혔다.
‘기왕이면 시작부터 삼진쇼를 했다면 더··· 아니지, 그럼 오히려 역효과가 났겠네.’
시작부터 몰아치면서 기선을 잡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건 오히려 타자들의 승부욕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1회 초는 적당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
“나이스 피칭! Go! 오늘은 딱 이대로만 가자!”
“Suck! 뭐하는 거야! 삼진을 더 잡았어야지! 200삼진 안 해? 좀 더 화끈하게 가자!”
뭐, 팬들은 불만인 것 같네.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전반기 200탈삼진을 채우려면.
각각 6이닝씩 던진다는 가정하에, 이닝 당 삼진 두 개쯤 잡아야 가능할 테니까.
진짜 욕심도 많으셔.
‘그래도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팬들도 어느 정도 내 상태가 정상적이라고 본다는 거니까.’
그런 팬들을 뒤로한 채, 덕아웃으로 들어왔는데, 동료들은 한술을 더 떴다.
“Suck, 오늘 확 퍼펙트 하는 건 어때? 아까 타구 잡은 거 봤지? 내가 웬만한 건 다 잡아줄 게.”
“클루버, 그 로봇이 이번 달 이달의 투수 뺏을 생각인 것 같던데. 퍼펙트로 찍어 누르자.”
“지랄 No!”
미친놈들이 뭔 퍼펙트야.
포수나 투수조의 경우 지금 내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포수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투수들은 같은 투수다 보니, 척하면 척이니까.
하지만 그와 달리 이 야수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아주 태평한 소리를 하는군.
“그딴 개잡소리 할 시간에 점수나 내라. 타자들 빠따만 잘 쳤어도, 이달의 투수 확정이었을 거니까.”
“Suck 너 요즘 점점 재촉한다? 원래 안 그러던 녀석이.”
“예예, 갑니다, 가요. 어우, 요즘 Suck 쟤가 우리 와이프보다 더 잔소리가 심해.”
훠이훠이, 손을 휘저으며 소리치니, 찔린 게 있는 건지, 개소리하던 타자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참고로 이번 6월 이달의 투수도 내가 유력후보기는 한데. 이전과 달리, 아예 확정 수준은 아니다.
‘클루봇, 나도 나지만, 이 양반도 참 잘한단 말이야.’
경쟁자로 부상한 인디언스의 코리 클루버가 X나게 잘하고 있거든. 내가 없었다면, 이 양반이 이달의 투수 확정이었겠지.
물론 여전히 성적 자체는 내 쪽이 더 좋지. 삼진도 더 잡았고, ERA도 아직은 더 낮으니까. 거기다 결정적으로 노히터 했잖아. 이거면 끝이지.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수상할 거라는 평이 주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승수다.
‘다섯 경기 나왔는데 2승이라.’
오늘 경기를 제외하고, 나는 이미 6월에만 다섯 경기를 등판했다. 근데 2승이야.
그 2승은 심지어, 8이닝 무실점했던 템파베이 레이스전, 아예 그냥 노히터인 양키스전이고. 즉 그 외에는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좀 쳐라, 쳐! 나오자마자 아웃당하지 좀 말고!”
“왜 Suck이 등판하면 X같이 못 치냐고! 갑자기 왜 그래!”
“득점지원만 더 좋았어도, Suck이 전반기 15승까지 했겠다!”
그 이유는 당연히 지금 욕을 옴팡지게 처먹고 있는 타자들이고.
날 피해서 황급히 타석으로 가더니, 그세 아웃당하고 있네.
‘상대 투수, 오늘 기세가 좋네. 마이크 폴티네비치라고 했던가?’
성이 굉장히 독특한데. 우리 타자들을 아주 갈아 마시고 있다. 흔히 긁히는 날의 투수처럼 공도 꽤나 날카롭고.
대충 보니, 오늘도 점수 내긴 글렀구만. 초반에는 참 좋았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는, 내 등판일 때만 영 부실하단 말이야. 승수 못 챙기겠네. 하긴, 꼬우면 완봉해야지.
‘승리는 됐고, 나도 상대 타자들이나 잘 조져야지.’
다행히 그건 가능해 보였다.
금방 끝났던 1회 초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1회 말이 끝난 뒤.
다음 이닝을 위해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브레이브스 야수들, 이젠 타자가 될 친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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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에 오르기 전. 딱 붙지 않는 배트에 타르를 조금 더 발랐을 때. 타격코치가 다가왔다.
“맷, 저 투수, 무브먼트 떨어진 건 들었지? 아마도 너한테는 바깥쪽 위주로 승부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최근 팀에서 그나마 펀치력이 가장 좋은 자신이고. 또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으니.
긴장한 타자들을 대신해서, 한 수 보여 달라는 뜻이겠지.
투수의 정보야 이미 숱하고 들었고, 또 분석팀의 자료도 지겹도록 읽었기에,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한방 제대로 날려서, 머리 좀 흔들죠.”
호언장담에 타격코치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부진을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그 같은 타자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리는 게 조금 우스운 일이니, 그제야 실책을 깨달았다는 거겠지.
허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타격코치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고, 다시 한번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으니까.
‘잔뜩 긴장했네. 겨우 한 이닝 지났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타석으로 나가기 전, 덕아웃을 둘러보니, 긴장감 가득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한 이닝 막혀놓고, 앞서 삼자범퇴 처리된 세 명을 제외하곤, 제대로 타석에 서보지도 않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나 겁나는 걸까.
이해가 안 되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그 역시 긴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성적을 올린 투수가 오늘의 상대니까.
‘전반기 200탈삼진이라. 꿈도 크네.’
전반기에만 200탈삼진을 잡으려고 하는 투수. 여전히 평균자책점이 0점대인 투수.
그거면 말을 다 한 거겠지.
삼진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적은 볼넷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거고.
그나마 최근에는 흔들린다는 소식이 있더니,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말이 나왔다.
‘다만 실제로 무브먼트가 떨어졌다고는 하는데···’
그나마 스터프가 약해진 건 사실 같기는 하다. 분석팀에서도 그걸 지적했지.
리그 최고였던 회전수와 수직 무브먼트가 그냥저냥 수준급으로 추락(?)했으니까.
‘Go You-Suck. 이름 참···’
어쩌면 이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강렬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건.
정말이지, 하나하나 빼놓을 수가 없는 단어들인데, 그런 독특함이 성적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으니 말이야.
천천히 타석에 올랐다.
포수도 어린 녀석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흘끔흘끔 눈치만 볼 뿐, 딱히 다른 행동은 없었다.
그 덕에 배터박스로 차분하게 입장했지만, 무혈입성은 아니다. 올라 선 순간, 날카로운 칼 같은 시선이 푹푹 몸을 찔러댔으니까.
‘그래, 니가 여기 대장이다 이거지?’
오클랜드 콜리시엄.
아마도 그가 경험한 모든 야구장을 통틀어 가장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곳.
그곳의 주민들은 그를 이미 퇴물이라는 것처럼 얕잡아봤고, 콜리시엄의 왕은 사납게 노려봤다.
듣던대로 지배력이 아주 대단하시군. 타고난 폭군이야. 그래, 이런 느낌이어야 맞겠지.
‘클레이튼이나 재키랑은 약간 느낌이 다르네.’
몇 년 전, 그는 현시대를 대표할만한 두 명의 투수와 같은 팀에서 뛰었다. 그리운 팀, 그리운 시절에 말이야.
클레이튼 커쇼와 잭 그레인키. 서로 다른 느낌의 에이스들이었지.
커쇼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현재를 대표하는 정점이고. 잭 역시 명예의 전당은 확실해 보이는 현재 진행형 레전드다.
같은 그라운드 위에 서서, 마운드를 지켜보고 있으면, 경기장 전체를 압도하는 기세를 뽐내고는 했지.
저 투수는 그런 과거의 동료들과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달랐다. 아마 저 녀석만의 고유의 기세겠지.
실제로 저 녀석 역시 파워피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 둘과는 조금 스타일이 다르기도 하고.
‘Ryu도 구종이 많았는데. 코리안들은 그런 편인가?’
제법 어울렸던 같은 국적 투수도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는데, 어쩌면 국가적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자, 어디 그 대단하다는 공 좀 보자. 얼마나 대단하면 라이징 패스트볼이야?’
무브먼트가 약해졌다고는 하나,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니.
일단은 봐야겠지.
배트를 돌리며 초구를 기다렸고, 타격코치의 말과는 달리-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들어왔다.
확실하게 스트라이크.
제대로 찔렀다. 위협적이면서도, 딱 스트라이크를 잡아줄 정도로만.
‘바깥쪽 위주는 무슨.’
겨우 한 구지만, 딱 알겠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돌아갈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될 녀석이니까. 루키이기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무브먼트는··· 이게 떨어진 거라고?’
숨을 고르고 지켜본 공은 약간 의아함마저 자아냈다.
지금 패스트볼은 최소한 웬만한 투수들보다는 훨씬 좋았다. 89마일이라는 느린 구속의 족쇄가 있긴 하지만.
분명 확실한 데이터가 있으니, 거짓말은 아닐 텐데. 이게 떨어진 거라면, 대체 예전에는 어땠다는 거야?
‘괴물이었겠지. 그러니까 저런 성적을 찍은 거고.’
경계심은 조금 더 올라갔다.
말로는 약해졌다고 하지만, 정작 그조차도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됐으니까.
물론 아예 못 칠 정도는 아니지만, 저 녀석에겐 이것 외에도 수많은 무기가 있으니까.
바로···
“볼!”
이것처럼.
이번엔 진짜로 바깥쪽 코스.
한 차례 배트를 내려다, 문득 낌새가 수상해서 스윙을 참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급격하게 꺾인다.
그토록 자랑하는 서클 체인지업. 그것이 주는 충격감은 앞서 준수했던 패스트볼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최소한 지금 서클만 놓고 따진다면, 0점대 ERA인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아예 Zero가 아닌 게 의문스러운 수준이다.
몇 년간 부진하면서, 폼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조건 헛스윙이었겠지.’
오랜 경험 덕분에 꼴사나운 모습은 피했지만, 상승한 긴장감이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공 하나하나에 수십 가지 의미를 담는 투수라고 들었다. 사소한 행동조차도 모두가 의도한 거라고 했지.
그만큼 수싸움에 뛰어나고, 심리전에 능하다는 건데. 그런 투수를 상대하는 건 언제나 까다롭다.
예전처럼 실력에 의지해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서클은 하나 썼고. 다시 한번 패스트볼? 하이 패스트볼도 즐겨쓴다고 했지. 오늘도 하나 던졌고. 하지만, 그건 웬만하면 결정구 찬스 때만 꺼낸다고 했는데···’
밝혀진 수가 많기에, 더욱더 머리는 복잡했다. 원 앤 원.
아직은 무난한 카운트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밀린다면, 그땐 진짜 파국이겠지.
완벽한 핀포인트 제구, 화려하기 그지없는 변화구, 묵직하고 강건한 패스트볼.
그 모든 재능에 더해서. 타자를 확실하게 잡아내는 본능까지 지닌 투수니까.
“스트라이크!”
생각이 깊어진 사이, 투수는 준비를 끝내고, 공을 던졌다.
코스를 읽고, 재빨리 스윙을 냈지만, 배트는 헛돌았고,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여기서 서클을 하나 더.’
그래, 이것도 있지.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같은 구종, 두 개의 구질.
저 녀석이 어떤 투수인지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다.
워낙 대단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녀석이라, 애틀랜타 언론에서도 종종 녀석을 주의깊게 다뤘다.
저런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함을 빗대어, 종종 트릭스터라고 부르기도 했었지.
‘진짜 더럽네.’
더럽다. 욕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다. 이건 타자가 투수에게 보낼 수 있는 최상급의 칭찬이니까.
까다롭다, 껄끄럽다, 그보다 한 단계 윗줄에 있는 찬사지.
그는 눈앞의 투수에게 그런 평가를 내렸다. 정말이지, 타자로서 상대하기 더러운 녀석이라고.
머리는 이미 복잡하다.
무언가 결단을 내리려고 할 때마다, 녀석의 눈빛이, 기세가, 분석 자료가, 그냥 관련된 모든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한방을 먹일 수 있을까, 무수한 그림을 그려도, 확신이 드는 것 하나가 없었다.
“볼!”
다행히 가볍게 한 구를 뺀 투수 덕분에 한숨을 더 벌긴 했지만. 오히려 승부가 더 길어진 만큼, 머리는 더욱더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래, 패스트볼이야.’
바깥쪽으로 낮게. 아주 절묘한 코스로 날아오는 공을 보며, 뒤늦은 결단을 내린 그였지만, 그 순간마저도 변형 패스트볼이 머리에 스쳤다.
투심도 종종, 꽤나 자주 던진다고 했지. 땅볼을 유도하는 용도로. 그러고 보면 포심과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그 약간의 생각이 타이밍을 늦췄고, 다시 집중하며, 끝까지 배트를 쭉 뻗었다.
‘아, 커터.’
그래, 이것도 있었지.
살짝 안으로 파고든 공. 열심히 파인타르를 발라, 착 붙은 배트였기에,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웃.”
칠판을 긁는 유리조각처럼, 거칠게 나무방망이를 긁고 지나가는 타구의 느낌이.
빗맞은 타구가 3루로 흘렀고, 최대한 달렸지만, 1루를 몇 발 앞뒀을 때, 이미 송구가 들어왔다.
‘다음 타석··· 다음 타석에는···’
아쉬움에 혀를 찬 뒤, 투수를 봤다. 씨익 웃는 녀석.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잘 나오지 않았다.
당당하게 다음 타석에는 두들겨 줄 거라고 다짐하고 싶지만, 직접 마주한 실력은 역시나 듣던 대로였으니까.
‘에이, 힘들겠네. 폼이 떨어지긴 무슨,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구만.’
전력분석팀을 씹으며, 그는 덕아웃으로 물러났고. 그 혼자 부끄럽지 않게 해주려는 건지. 뒤이어 동료들도 나란히 돌아왔다.
####
“스트라이크 아웃!”
이닝이 끝났다. 꽤나 빠르게.
이번엔 그래도 안타 하나를 올리긴 했지만,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다.
“하아··· 뭐가 날아올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차라리 머리 비우고, 그냥 막 휘두르는 게 낫지. 어설프게 머리 쓰면 오히려 말려.”
타자들은 계속해서 한숨을 토해냈다. 도통 공략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비록 자신은 타석에 오르지 않지만, 같은 투수라서, 오늘 자신의 맞상대가 어떤 느낌인지는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다.
‘힘들겠지. 버거울 거고.’
아마 커다란 산처럼 보이지 않을까? 너무 높아서, 오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벅찰 정도로, 까마득한 산 말이다.
한번 투수에게 압도되기 시작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계속해서 망령처럼 발목을 잡아대지.
그렇게 말리다 보면, 그대로 경기도 망치게 되는 거고.
허나 그나마 다행이게도.
“우우우우우우!”
오늘 자신도 마찬가지다.
마이크 폴티네비치는 자신을 향한 야유를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귀는 조금 시끄럽고, 노려보는 눈빛이 거슬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오늘은 느낌이 좋다.
어쩌면 상대 투수 덕분이기도 하다. 딱 좋은 타이밍에 바톤을 넘겨주는 덕분에,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는 앞서 상대 투수, Suck을 상대하던 동료들, 지금은 최대한 수비에 집중하고 있는 야수들과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봤다.
마치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흘끔 덕아웃을 보며 면목이 없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조금 민망하기는 하겠지. 기껏 선발투수가 잘 막아주고 있는데, 정작 지원다운 지원을 못 해주고 있으니까.
‘양키스를 상대로, 얼마 전에 했었지. 저 녀석도.’
그는 돌아선 타자를 따라, 덕아웃으로 시선을 보냈다. 한쪽 벤치를 통째로 점거한 채, 포수와 잡담을 나누는 투수.
분명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도, 아주 여유롭다. 하긴, 저 녀석에겐 일상적인 경기일 테니까.
이번 시즌 내내 지금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니. 가볍게 느껴질 수밖에.
‘저런 괴물의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는 것도, 제법 느낌이 있겠지.’
우습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힘이 더 샘솟았다.
덕분에 목표가 생겼으니까.
“스트라이크!”
뒤이어 올라온 타자는 앞선 동료와 똑같은 눈빛을 했다.
잔뜩 긴장하고, 두렵고.
그리고 걱정하고 있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경기 초반에 불과하니까.
“스트라이크!”
한번 더 스트라이크.
이젠 조금 달라졌다.
최악의 결과가 떠오른 건지, 다시 집중이 깃들었으니까.
헌데 좋은 컨디션은 이런 곳에도 영향을 끼치는 건지. 오히려 그런 집중이 반갑게 느껴졌다.
“아웃!”
어떻게 잡아야 할지가 훤히 보였으니까. 두 번째 아웃.
빨간 불이 두 개가 올라왔고. 관중들은 타자에게 온갖 종류의 질책을 던졌다.
극성인 것 같지만, 만약 여기가 애틀랜타였다면 우리 팬들도 똑같았을 것이기에, 그리 보기 흉한 건 아니다.
그저 열기가 느껴졌고. 또 흥분됐을 뿐. 저토록 열정적인 사람들의 앞에서.
“스트라이크!”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에이스의 위업을.
“스트라이크!”
자신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올라간 삼진.
마이크 폴티네비치는 살짝 어깨를 돌렸다. 4회가 끝났고, 몸은 아직 멀쩡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싱싱했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흘끔 다시금 상대팀 덕아웃을 봤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잡담을 나누던 투수, Go는 이젠 똑똑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 묘한 눈빛으로. 마치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삼진이 올라갔고. 5회가 끝났다. 다음 이닝이 마지막인데. 아직까지 실점은 없다.
“0점대는 확실하네.”
“그렇겠지,”
일단 전반기 0점대는 ERA는 사실상 확정됐다. 다음 경기에 진짜 푸짐하게 똥을 싸지 않는 이상, 무조건이지. 그러게 성적관리 필요 없다니까.
초반부터 열심히 잡은 덕분인지, 타자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경계가 가득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짙어졌다. 지금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있으니, 아주 확신하는 눈치거든.
아무튼 전반기를 0점대 ERA로 마치는 거야, 이제 확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남은 하나가 문제네.
‘지금까지 여섯 개. 다음 이닝에 세 타자 연속 삼진 잡는다고 쳐도 아홉 개.’
가장 베스트로 마무리 짓는다고 쳐도, 다음 경기에서 열세 개를 잡아야 하네.
불가능한 건 아니다.
노히터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을 기록했던 양키스전을 포함해서, 총 다섯 경기에서 13삼진 이상을 기록했으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지, 불가능한 건. 그냥 존나게 어려워서 그렇지.
‘삼진 몇 개 더 잡겠다고 몸 축낼 수는 없으니, 그냥 다음 이닝에 내려가는 게 맞기는 한데···’
시즌 막바지도 아니고, 아직 경기가 한참은 더 남았는데, 굳이 그러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그러니 이번 경기도 6회로 끝이라고 봐야 하고. 남은 건 그 6회를 앞서 언급한 최상의 가정으로 만드는 게 베스트다.
평범한 경기였다면 말이야.
내 이닝이 끝나는데도 경기장은 고요했다. 조금 소란을 떠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야이 X새끼들아!”
“좀 치라고!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대다수는 조용하지.
과묵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양반들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지. 한계에 다다른 분노, 그리고 걱정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브레이브스 타자들이 잔뜩 경계하고 있다고 했던가?
사실 우리 쪽도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의 경우는 경계가 아니라, 약간의 걱정, 혹시나 싶은 공포라고 할 수 있겠지.
점수 못 냈거든. 단 한 점도.
그 덕에 여전히 0대0이고, X발 아주 멋진 투수전이야.
이것만 해도 타자들이 지탄받아 마땅하겠지만··· 진짜는 따로 있다.
“아웃!”
‘또 못 쳤네. 볼넷 하나 간신히 얻어냈어.’
무안타거든.
타선 전체가.
볼넷 두 개. 그게 오늘 우리 타선이 기록한 것들이다.
그래, 얼마 전, 양키스를 상대로 내가 저질렀던 게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지.
첫 이닝부터 기세가 좋기는 했다.
딱 봐도 긁히는 날 같았지.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대편 입장에서 보니까, 진짜 느낌이 다르긴 하네. 노히터 중인 투수는.
‘원래라면 내려가는 게 맞는데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내려가고 싶다. 6이닝을 끝으로. 딱 다음 이닝만 더 던지고 내려가는 거지.
나도 안타를 세 개 밖에 안 맞고, 볼넷은 없어서, 오히려 투구수 자체는 저 투수보다 내가 더 적다.
그러니 조금 더 던져도 되겠지만, 굳이 몸 안 좋을 때,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 원래 계획은 딱 6이닝만 던지고, 치고 빠지는 거다.
그 이상 던지다가, 자칫 감 잡은 타자들한테 두들겨 맞으면···
‘기껏 허세 부린 것도 다 날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원래대로면 내려가는 게 맞는데. 5회 말이 종료된 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홈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보냐고. 얼마 전에 이미 노히터 한 사람한테.’
0대0. 한쪽은 노히터. 한쪽은 3피안타이지만, 어쨌든 완봉페이스. 그러니 기대할 수밖에.
내가 에이스로서의 의무를 다해주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소니 그레이 왔을 때, 얌전히 자리 넘겨주는 건데.’
괜히 내 자리도 아닌 거 욕심내가지고, 온갖 부담은 다 떠안고 있네.
그래도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노히터,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노히터로는 선배라서 잘 알아. 진짜 X나 빡세거든.
솔직하게 말해서, 난 컨디션이 정점일 때 해본 거라, 좀 쉽게 한 편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야수들도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지.’
투수가 노히터나 퍼펙트를 5이닝이 넘도록 이어가면. 그때부터 모든 야수들의 중점은 타격이 아니라 수비가 된다.
전타석 삼진을 당하더라도, 실책 하나,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 안 하는 게 가장 중요해지지.
‘거기다 지금은 서로 0대0이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 나를 향한 경계심. 거기에 무실점을 깨트려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아주 디버프란 디버프는 죄다 중첩되는 건데. 이걸 또 다음 이닝만 치고 빠지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이거, 잘하면 기록도전에 동료나, 다른 야수가 아니라, 상대 선발투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