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전반기가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르자, 언론은 간략한 리뷰를 내놓았다.
누군가는 엄청난 상승세를 보였고, 또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부진을 겪었으니까.
그런 언론에서 이번 시즌, 가장 놀라운 약진을 보인 팀을 꼽을 때,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휴스턴 애스트로스다.
<휴스턴, 정상으로의 로켓 추진! 목표는 월드 시리즈?>
더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지독한 탱킹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건지,
작년 아쉬운 순위로 마감했던 것과 달리, 이번 시즌은 AL 서부지구 1위를 굳건하게 지키며.
충분히 월드시리즈도 노려볼 만한, 컨탠더급 팀으로 도약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애스트로스의 다음으로 손꼽히는 건 놀랍게도 애슬레틱스였다.
<빌리 빈의 ‘Magic’! 여전히 AL 서부지구 2위를 유지 중인 애슬레틱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 오클랜드, 와일드카드 가시권!>
작년 2016시즌, 서부지구 꼴찌. 아메리칸 리그 전체 13위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몰락했던 것과 달리.
기대를 아득히 넘어선 대약진을 보이며, 서부지구 2위와 와일드카드 선두권으로 등극했으니까.
‘빌리 빈 매직이라.’
테이블을 가득 채운 신문을 흘끔 훑은 빌리 빈은 피식 실웃음을 지었다.
제법 많은 언론에서, 지금의 상승세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과거, 영광의 시기처럼, 자신의 ‘매직’이 또다시 발휘됐다는 거지.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흔히 ‘머니볼 2기’라고 지칭됐던 도전이 실패하면서, 바닥을 직은 뒤.
언론은 당장 올해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퇴물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제는 안면몰수하고 다시 ‘마술’이 시작되었다며, 스몰마켓 팀 운영의 선구자라고 칭송하고 있으니. 우습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다고는 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든 당장의 결과는 좋으니까.’
어이가 없고, 또 한편으론 역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런 언론의 반응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선수단, 로스터를 만드는 건 프런트의 역할이고, 올해 애슬레틱스의 프런트는 처참했던 선수단을 아주 멋스럽게 탈바꿈 시켰으니까.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우리 역시 예상한 건 아니지. 정규시즌이 개막했을 때조차도, 이 정도일 줄은 모르니까.’
허나 세부적으로 보자면, 솔직히 조금은 기꺼웠다. 지금의 분위기는 프런트는 물론, 내로라하는 전력 분석팀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니까.
빌리 빈 자신의 부임 이후, 최악의 분위기를 예상했던 마케팅 역시도 급격한 주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그 모든 파란의 중심에는 한 선수가 있었다. 5인 로테이션조차 제대로 가동할 수 있을까? 싶었던 선발진을, 리그 최고수준의 원투펀치로 만들어낸 선수.
‘Go···’
오클랜드의 약진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였다.
데뷔 직후부터 팀의 에이스로서,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며, 지금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니까.
페넌트레이스에서 선발투수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그리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라고는 하나.
완벽한 에이스의 영향력은 한 팀을 바꿔놓기 충분했다. 단순히 성적 이외의 영역에서도.
‘내년부턴, 조금 숨통이 트이겠어.’
여러 스폰서 제안이 들어왔다. 기존에도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지만, 잘 나가는 성적에 더욱더 A’s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있지만.
‘Go’라는 이름의 슈퍼스타 하나만 보고, 그 마케팅 가치를 기대하는 곳들도 적지는 않았다.
당장 South Korea 쪽 기업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그의 인기를 등에 업고, 미국 시장에 밟을 넓힐 찬스로 보고 있지.
현재까지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야구선수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런 절대적 에이스가,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현시점 오클랜드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선수. 그것을 만들어낸 신화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무브먼트의 저하. 저조해진 스터프.‘
처음 현장의 보고를 받았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둘 다 부상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구속은 여전히 똑같기는 하지만, 갑작스러운 스터프의 저하는 부상의 가장 흔한 전조였으니까.
다행히 그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나, 상황이 나빠진 건 변함 없다.
빌리 빈 그 역시도 야구선수였기에, 투수에게, 그것도 구속이 느린 투수에게 구위가 얼마나 중요한 영역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지. 지금까지의 전설이 단 하루아침에.’
느린 구속은 타자들에게 손쉽게 익숙해진다. 타이밍도 금방 잡히지. 그런데 스터프마저 약해진다면. 80마일대의 패스트볼은 그저 배팅볼로 전락한다.
그나마 마이너 시절처럼 아주 처참한 수준까지 떨어지진 않았고, 여전히 리그 상위권 투수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게 다행이지만···
‘Go가 이제까지처럼 절대적인 에이스는 아니게 됐다는 거야.’
그 시작은 홈런이었다.
노히터로 정점을 찍은 뒤, 한순간 훅 내려왔지. 기록 이후 난타를 당하는 거야, 흔한 일이라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 같았던 투수였기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후 화이트삭스전에서도 비록 대량실점까진 하진 않았지만, 손쉽게 타자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언론과 팬들은 그저 Go가 종종 보이는 특유의 영악한 ‘작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최소한 전문가들은, 심지어 오클랜드의 스카우트와 분석관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묘수를 쓴다는 것 자체가, 본인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지.’
지금 Go는 추락했다고. 그것도 몇 계단 이상, 아주 급격하게.
여전히 변화구는 대단하다. 제구도 똑같지. 최소한 감각의 영역은 문제가 없다는 뜻.
“심하게 소모하기는 했어··· 그것도 아주 급격하게.”
빌리 빈은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년, 시즌 말. 버두치 리스트를 운운하며, 막바지의 등판을 막을 때는 언제고.
올해는 아직 9월도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작년 소화한 140이닝까지 단 20여 이닝밖에 남겨두지 않았다.
만약 풀시즌을 소화한다면, 200이닝은 간단하게 넘겠지. 그러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팀의 에이스라는 막중한 부담까지 짊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선수를 위해서도, 그리고··· 팀을 위해서도, 쉬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 젊고 호기로운 투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투수코치의 말로는 욕심이 많다고 했지.
탐욕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가난한 오클랜드에게 따박따박 렌트비를 뜯어내는 것이나, 듣기로 모든 스폰서 제안을 죄다 검토 중이라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물욕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명예, 그리고 성취. 그 두 가지에 다른 오욕이 튀는 걸 싫어하는 거겠지.’
그 이상의 욕심이 가득한 투수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그러니 남은 건, 지금까지처럼 계속해서 기적을 이어나가기를 기도하는 것뿐이겠지.’
긴 한숨을 뱉은 빌리 빈은 온갖 종류의 이야기로 가득한 신문을 한쪽으로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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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다. 인터리그 매치업이지.
근데 또 홈에서 하네.
“간만에 빠따 좀 치고 싶은데, 영 허락을 안 해주네.”
“응 뭐라고? 너희나라 말 한 거야?”
“어, 우리나라 말이야. 너 욕한 거니까, 뜻은 몰라도 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상태에 만약 타석까지 서야 했다면, 오우 쉣.
아주 체력이 쭉쭉 녹았겠지.
괜히 타석에 올랐다가, 혹시라도 데드볼 맞아서 부상당하면, 진짜 골 때리는 거고.
그러니 조금 아쉽기는 해도, 온전히 피칭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겠지.
‘걘 그걸 어떻게 하나 몰라. 이도류라니. 무슨 베이브루스도 아니고.’
걔가 누구냐고? 있잖아. 요즘 유명한 녀석. 오타니 쇼헤이.
아주 핫하다. 투타겸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프로무대에서, 그것도 NPB에서 직접 저지르고 있고. 심지어 제법 결과도 내고 있으니.
뭐, 더 말할 것도 없지.
한국 인터넷에서도 엄청나게 많이 거론되더라. 프리미어 12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던 만큼, 인상에 깊게 남았나 봐.
‘듣기로 내년 포스팅 대비해서, 구단들이 돈다발 싸들고 있다던데. 참, 부럽다, 부러워.’
나는 쥐꼬리만한 계약금 받고 넘어와서, 마이너에서만 5년 조뺑이 친 뒤에야, 간신히 실링 긁혀서 빅리그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누구는 빠따도 잘 휘두르고, 구속도 100마일씩 나와서, 아주 신명나게 자국리그 초토화한 뒤에 크루즈 타고 미국 입성하네.
이런 거 보면 인생 참 X같아. 빠따질도 잘할 거면, 나한테 구속이라도 한 5마일 정도 떼주지. 그럼 진짜 평생 모시고 살 텐데.
‘뭐, 아마도 NL 쪽으로 갈 테니까, 내년에 바로 온다고 해도, 자주 볼 일은 없겠네.’
투타겸업이라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일단 등판일에는 무조건 타석이 보장된 NL로 가겠지. 빠따질 하고 싶다면 말이야.
막말로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지명타자나, 전문야수 몰아내고 타석에 오르지는 않을 테니까. 설마 그 정도겠어?
아무튼 부러운 놈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중요한 건 내 성적이지. 다른 놈이 베이브 루스든, 배리 본즈든지 간에.
일단 내 성적이 좋아야 하니까. 그리고 나도 투타겸업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업에 도전해야 하거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나쁘지 않네.’
전반기 종료까지 남은 경기는 둘. 그중 첫 번째 상대는 앞서 말했듯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다.
“브레이브스, 나 어릴 때는 진짜 브레이브스 좋아했거든. 야구 시작한 것도 브레이브스 때문이고.”
브루스 맥스웰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했다. 대니얼을 보는 것 같네. 한창 내 워밍업 준비하고 있을 그 양반도 브레이브스 열성 팬인데.
“사실 우리 정도 나이면 다 그렇지.”
사실 브레이브스의 팬은 대단히 많다. 전국적인 인기팀에, 미국 남동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팬덤을 가지고 있으니까.
심지어 플로리다 쪽에서도, 말린스보다 브레이브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걸?
‘90년대의 팀이니까.’
메이저리그에서 90년대의 팀을 꼽는다면, 당연히 브레이브스가 가장 먼저 불린다.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
듣기만 해도 바지가 흥건해지는 사이 영 삼인방을 중심으로 한, 역대 최강의 선발진으로 NL 동부에 군림했던 슈퍼팀이니까.
‘뭐, 월드시리즈 우승은 한 번이지만.’
사실 그런 레전드들 다 가진 것 치고는, 왕조도 못 세웠으니, 결과가 좀 시원찮기는 하지.
어쩄든 그런 엄청난 영광시절을 뒤로하고, 삼인방이 해체된 뒤, 2000년대에도 강팀으로 불리운 브레이브스지만.
최근 기세는 그리 좋지는 않다. 특히 작년은 아주 대차게 말아먹었지. 탱킹 시즌으로 분류될 정도로.
‘내셔널리그 전체 14위였던가? 심하긴 하네.’
지구우승과 포스트시즌 진출을 밥 먹듯이 했던 팀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아주 처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우리도 작년에 AL 전체 13위인데, 우리랑 비슷한 급이라는 거잖아?
우리가 작년에 69승을 했고, 거기가 68승을 했으니, 진짜로 우리보다 못했네.
‘그런 것치곤, 팀 전력 자체는 아주 나쁘지는 않지.’
다만 비슷한 성적을 찍기는 했어도, 브레이브스와 애슬레틱스와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인기팀이고, 빅마켓이다.
순수하게 연고지 규모만 따져도 상대가 안 되지. 대도시인 애틀랜타를 끼고 있으니까. 전국적인 인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타선도 제법 준수하다. 엄청난 폭발력을 자랑하는 팀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타자들 컨택이 좋은 편이니까, 웬만하면 조심해. 특히 저번 경기처럼, 막 집어넣다가는, 무조건 정타라고 봐도 되고.”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컨택들이 좋지. 주전급 타자들 중에서, 셋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죄다 3할이거나, 3할에 근접한 타율을 가지고 있으니까.
요즘 세이버메트릭스가 대두되면서, 타율을 아주 개X밥 스탯으로 보는데.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진 거지, 3할쯤 되면, 그조차도 아니다.
그런데 타선 태반이 3할에 가깝다는 건, 진짜 X나게 빡세다는 뜻이다.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거지.
“프레디 프리먼은 아직 회복 중이죠?”
“어, 듣기로는 회복 기간이 조금 더 길어져서, 다음 달에나 복귀한다고 하더라.”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이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프레디 프리먼, 팀의 가장 핵심 타자가 손목 부상으로 아웃이라는 것 정도.
이 양반까지 있었다면 진짜 빡셌을 텐데, 그나마 나가리된 덕분에 타선에 틈이 생겼다.
‘컨택은 다들 좋지만, 지금 상황에선 맷 켐프를 제외하면, 파워풀한 타자는 없어.’
대부분 장타율이 준수하지는 못하지. 그런 상황에서 팀의 중심으로서 확실한 한방을 때려 줄 타자가 줄었다는 건 분명 희소식이다.
“느낌 어때요?”
“음,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서서히 다시 올라오고 있기는 하네.”
구위는 아직도 조금 저조하다. 그나마 바닥을 찍은 뒤에, 다시 올라오고 있으나. 여전히 조금은 애매하지.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파워가 약간은 떨어지는 브레이브스 타선에게 장타를 쉽게 허용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콜리시엄이잖아. 홈이 좋긴 좋아.
지난번에 한번 장벽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든든하다.
‘중요한 건 타자들이 흐름을 타지 못하게 하는 거겠지.’
컨택이 좋은 타선이니,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하위타선이 올라올 때까지, 진짜 미친 듯이 털리겠지.
그러니 오늘은 저번 경기로 구축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첫 이닝이 가장 중요하겠어.’
“오늘도 약한 척할 생각은 아니지?”
“에이, 너무 자주 그러면 약빨 덜어져요. 오늘은 약한 척이 아니라, 허세가 필요한 타이밍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다시 물었다.
최대한 집중을 발휘해서, 한 구를 던진 뒤, 슬쩍 스콧 에머슨을 보자, 그는 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지금은 좀 어때요?”
“무게감이 살짝 떨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느낌은 있네. 나쁘지는 않겠어.”
눈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믿어도 되겠지. 그것으로 불펜 피칭을 마친 뒤, 그라운드로 나가자, 수만 명의 시선이 느껴졌다.
“Suck!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22개 잡아버려!”
“난 저런 무식한 건 안 바라고, 그냥 딱 11개만 채우자. 다음 경기도 어차피 홈이니까, 그때도 보러 올게!”
“내가 일찍 와서 구장 관리인한테 단단히 말해뒀어! 저 X발놈의 담장 쭉 밀어놓으라고. 그니까, 홈런 걱정은 하지 마라!”
역시나 부담을 팍팍 주신다.
한 경기에 탈삼진 22개라니, 그거 신기록인데요. 차라리 퍼펙트가 더 쉽겠네.
저번에 홈에서 내가 홈런 맞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은 건지, 펜스를 밀어놨다는 대단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관중석을 쭉 훑은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금 더 늘었어.
‘나중에 되면 살 떨려서 공 못 던지겠네.’
200탈삼진, 그리고 0점대 ERA. 최소한 오클랜드 팬들은 내가 그 둘 다 달성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무조건 가능하다는 거지.
그런 역사적인 장면을 직접 보겠다는 건지, 관중이 평소보다 더 늘어난 게 보였다.
프런트는 신났겠네. 경기장 수익이 점점 늘어서. 내 몫이 크니까, 나한테 조금 나눠주면, 내가 진짜 열심히 던질 텐데.
“차라리 벼룩의 간을 떼먹고 말지.”
오클랜드한테 경기장 수입까지 뺏는다니, 그건 참 못할 짓이기는 하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운드에 오르자, 브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브레이브스에 대한 팬심을 열렬하게 드러내더니.
지금은 제법 프로답게, 진지한 눈을 하고 있군. 나쁘지 않아.
“준비됐어? 오늘은 저번이랑 다르게, 잘 넣어줄 테니까, 쫄지 말고 잘 잡아라.”
“에이, 그때도 잘 잡았잖아?”
이젠 좀 친해진 건지, 너스레도 떠는구만. 어디서 허세야. 프레이밍도 못 하는 놈이.
아니지, 못하는 프레이밍, 꾸역꾸역해서 괜히 스트라이크 날리는 것보다는 그냥 안 하는 게 낫긴 하겠네.
“1회에는 평소처럼 갈 거야.”
“평소처럼? 그러니까··· 예전처럼 말이지?”
“어, 일단 1회에는 그렇게. 타자들 잘 살펴보고, 최대한 관찰해. 어떤 분위기인지.”
“롸져댓.”
오늘 묘수는 없다.
최소한 첫 회에는 없어.
그냥 평소처럼 무난하게 피칭할 생각이지. 그래야 정확하게 드러날 테니까.
내 이미지 메이킹이 잘 먹혀서, 나를 경계하고 있는지. 아니면 속지 않고 자신감 있게 나오는지 말이야.
‘맷 켐프는 4번에 있고. 나머지는 파워가 저조하니까. 첫 사이클 정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몇 차례 연습피칭으로 마운드의 감각과 제구 감각을 파악한 뒤. 우두커니 서자. 주심은 우렁찬 목소리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올라온 1번타자.
엔더 인시아테.
중견수인데, 수비력도 뛰어나지만, 데뷔 이후로 꾸준하게 괜찮은 타격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두 자릿수 홈런도 못 찍어본 만큼, 파워는 떨어지지. 그러니 딱 알맞다.
‘몸쪽, 아주 강하게. 최선을 다해서.’
와인드업.
길게 발을 뻗으며, 오늘으 첫 공을 던졌고, 당연하게도 포심이다. 아니, 조금 오랜만이지. 이렇게 과감한 몸쪽 포심은.
원래는 경기 시작하면, 무조건 이거부터 박고 시작했는데 말이야.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착 감긴 공은 쭈욱 뻗으며 목표한 위치로 날아갔고.
“스트라이크!”
타자는 살짝 몸을 움츠러뜨리며, 타석에서 약간 물러났다.
딱 걸쳤는데, 더 빠진다고 생각했나 보네. 좌타자라, 같은 손이니까, 더 위험하게 보일 만도 하지.
그런 타자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오케이, 일단은 먹혔다.
‘이제부턴 최대한 느낌을 살려야지.’
굳이 감정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건 원래 내 방식이 아니니까. 좋으면 웃고, 기쁘면 웃고, 짜증나면 혀를 차는 게 나지.
포커페이스? 그것도 좋긴 하지만, 때때로 감정에 충실한 것이 타자에게 더 혼란을 주기도 한다.
“스트라이크!”
바로 지금처럼.
한번 더 스트라이크.
이번엔 낮은 서클이다.
좌타자이기는 하나, 떨어지는 V1은 잘 먹히지.
서클 체인지업이라기보다는, 스플리터나 포크볼 같은 브레이킹볼에 가까운 느낌이니까.
타자는 크게 헛쳤고, 눈에는 긴장감이 깃들었다. 침을 삼킨 건지, 목울대도 움직였고.
이제 남은 건 하나.
이 승부를 가장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방법이지. 구위가 좋아진 이후로, 자주 던진 방식이기도 하고.
‘과감하게 가자. 잘 받아라.’
브루스에게 당부를 남긴 뒤, 약간의 호흡을 고르고, 가볍게, 하지만 정확하게 던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
마찬가지로 지난 두 경기에서는 조금 빈도가 줄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좀 쫄렸거든.
구위가 떨어졌는데, 이런 거 막 던졌다가 하나 얻어걸리면, 진짜 훅 넘어가니까.
제대로 묵직하게 던진 포심도 뜬금없이 넘어가서 그런가, 약간은 자제하게 되더라고.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나는 가장 잘 던졌을 때의 고유석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야···
‘긴장을 하겠지.’
헛스윙 삼구삼진.
바닥을 때릴 듯이, 뚝 떨어지는 서클 뒤에, 곧바로 던진 하이 패스트볼에 타자는 대처하지 못했다.
다만 확실히 조금 간격이 좁기는 하네. 원래는 하이 패스트볼이 제대로 먹힌다면. 배트와 공의 거리가 제법 멀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라이징 패스트볼인지 뭐시긴지 하는 착시 효과 때문이고.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가깝다. 타자가 조금만 더 집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제대로 봤다면, 잘하면 맞췄을 정도로.
‘그래도 효과는 똑같지.’
물러나는 타자. 그리고 올라오는 후속타자. 그 뒤에 덕아웃의 브레이브스 타자들.
그들을 차례대로 쓱 훑었다. 흘끔 보는 게 아니라, 대놓고, 쭉. 아주 당당하게.
그리 표정들이 좋지는 않네.
누군가는 미묘하게 긴장한 듯 살짝 딱딱하게 굳기도 했고, 또 누구는 승부욕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첫 타자 삼진으로 잡으면 대부분 저런 표정이다. 경계심, 경계심이 아주 짙어지지.
듣던 대로, 대단한 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처음보는 데다가, 다른 리그라서 그런가, 약빨이 제대로네.’
그런 반응들로 확신했다.
일단 이미지 메이킹은 먹혔다. 저 타자들의 눈동자에 비친 마운드의 투수는, 이전과 똑같이 리그 정점에 올라선 투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