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17화 (117/316)

117화

오늘 내 제구를 말한다면, 3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분할이지.

스트라이크존을 반으로 쪼개서, 안쪽 바깥쪽으로 나눴으니까. 정 중앙은 아예 무인지대처럼 내버려 뒀으니까.

타자들도 그에 익숙해졌을 거다. 들어온다 싶으면 무조건 들어오고, 나가는 공은 대놓고 나간다.

진지하게 이런 것도 구분 못 하면, 메이저리그에 있을 자격이 없는 수준이니까. 아무리 선구안이 안 좋아도 말이야.

“스트라이크!”

한번 생각해봐라.

그런 피칭에 익숙해졌고, 코스가 이미 눈에 익었는데, 갑자기 투수가 조금 더 세밀하게 분할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아슬아슬한 보더라인에 공을 걸쳐 넣는다면 어떨지 말이다.

‘오, 진짜 늘어났네. 그러게 왜 신성한 주심의 권위에 의심하고 그래. 꼴 받아서 진짜 막 판정하잖아.’

미치는 거지.

분명 이전보다 더 나간 코스다. 최소한 오늘 경기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스트라이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위치지.

그런데 그게 스트라이크가 되고, 주심은 당연하다는 듯이 판정을 내린다.

그렇게 되면 타자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내 제구가 늘어났다고 생각할까? 물론 그렇겠지. 내가 한 수를 숨기고 있었구나, 생각할 거다.

허나,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주심의 판정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게,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일정해야 하지만, 의외로 시시각각 변하거든.

기계로 판독하는 게 아니다 보니, 시간이 지나 정신적 피로가 쌓이고, 체력이 떨어지고,

거기에 약간의 감정까지 섞이다 보면. 조금씩 늘어나거나, 조금씩 줄어들지.

실제로 톰 글래빈처럼 제구력이 신에 달한 양반들은 주심을 속여서 존을 자기 원하는 대로 늘렸다고 하고.

“스트라이크!”

그러니 타자들은 혹시 이번의 경우도 그런 게 아닌가, 의심스럽겠지만. 허나 오늘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 존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저~기 주심 양반이 좀 짜게 잡아줘서 그렇지, 공정한 사람이더라고.

그저 지금까지는 내가 조금 깊게 넣거나, 아예 빼버렸기에, 걸친 코스에 대한 판정이 나오지 않았을 뿐. 딱히 변한 건 없다는 거지.

하지만 타자들이 보기에는 스트라이크 범위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니, 주심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거고.

“스트라이크 아웃!”

“What The-”

‘터졌네.’

그러면 주심도 감정이 상한다. 단호한 스트라이크 콜.

결국 참지 못한 타자가 분노를 토해내려다, 마지막 선 앞에서 꾹 참았다.

아마 F-word였겠지. WTF가 일반적인 감탄사(?)니까.

그거까지 내뱉었다면, 이미 심기불편한 주심은 두말 않고 바로 퇴장 시켰을 테고.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상황은 말이야. 나는 그냥 제구로 조지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판정에 대한 화이트삭스 타자들의 불만이 크더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사람이기에 감정이 있는 만큼, 주심 역시 그런 타자들의 불만을 놓치지 않았고. 공정한 사람이기에 더욱더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진짜 X같은 놈이면 찔려서라도 일부러 더 짜게 잡겠지만···’

오히려 원래 존이 짜디짠 사람이기에, 억울한 마음에 결국 진짜로 스트라이크존이 늘어났다.

정말로 늘어난 스트라이크존.

다시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제구하는 나. 그리고 앞서 딱딱하고 몰리는 감이 있던 피칭에 익숙해진 타자들.

“스트라이크!”

그 모든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경기 중반을 뒤흔들었다.

5회의 KKK. 6회 역시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자, 화이트삭스는 그제야 내게 속았다는 걸 깨달은 듯 얼굴을 찌푸렸는데.

‘오히려 눈치가 좋다고 봐야 하나?’

아예 싹 다 틀린 건 아니다.

일부러 더 약한 척을 하기는 했고, 내가 속이려고 한 것도 맞기는 한데.

실제로 전보다 약해진 것도 사실이니까. 다만 피로가 쌓이면서 구위가 줄어들었을 뿐.

“스트라이크!”

제구는 멀쩡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다시금 스트라이크, 타자는 이를 가는 것 같다. 턱에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심리적으로 몰린 것도 눈에 보이고. 투 스트라이크 노볼. 카운트도 좋으니, 결정구는 정해져 있지.

‘바깥쪽으로 하나.’

짧은 호흡. 그리고 와인드업.

왼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슬쩍 코스를 확인한 타자는 스윙을 가져갔다.

이번엔 정말로 애매한 코스였는데, 바로 배트가 나오네. 투 스트라이크라고 해도 한번 참아볼 만도 할 텐데 말이야.

이해는 된다. 이미 약간의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존까지 정말로 늘어났고, 내 제구도 멀쩡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애매한 코스를 참는다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게 느껴지겠지. 자신 역시 앞선 동료들처럼 꼴사나운 루킹삼진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그런 타자를 놀리듯, 바깥쪽으로 멀게 날아가던 공은 급격하게 역회전하며, 더욱더 쭉- 꺾였다.

포수, 브루스가 원숭이처럼 팔을 쭉 빼고서야 간신히 캐치할 정도로. 대놓고 유인구였는데, 정신이 몽롱하긴 한가보네.

그걸로 다시금 삼진 하나

지난 이닝까지 포함하면, 다섯 타자 연속 삼진이다.

레이더스야 더 말할 것도 없고, 홈팬들은 분노를 토하는 것조차 힘겨운 건지, 그저 한숨 소리만 토해냈다.

‘오케이, 이 정도면 이미지는 충분히 박아뒀네.’

반응을 보니, 이번 이닝을 마지막으로 생각해도 괜찮겠어. 원하는 건 다 얻어낸 것 같으니까.

6회를 장식할 마지막 타자가 올라왔다. 꽤나 침착한 눈빛을 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당혹감이 느껴졌으니까.

“스트라이크!”

그걸 일깨워주는 바깥쪽 슬라이더. 백도어성이었는데, 솔직히 나도 애매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화이트삭스에 대한 감정이 상한 주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그 판정이 나는 타자를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터진 곳은 벤치였다. 우리 말고, 상대팀 벤치 말이야.

‘오··· 아주 용감하시구만.’

경기는 잠시 중단됐다.

스트라이크가 올라간 순간, 화이트삭스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그라운드로 뛰쳐나왔거든.

나는 그를 용감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감독쯤 되면, 지금 주심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텐데도. 팀을 위해 기꺼이 뛰어나온 거니까. 나온 뒤에도 꽤나 격렬하게 항의했고.

‘총대를 메셨구만. 좋은 감독이야.’

무모한 행위다. 아마 감독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거고. 하지만 중요한 건 타자들이 불만을 품었다는 거고, 의심을 하고 있다는 거다.

‘여기서, 주심이 옳고, 너네가 X신이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선수단 케미가 박살나겠지.’

전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다면, 타자들은 다른 이를 의심하는 대신, 스스로의 생각을 재고하려고 할 테니까.

자기검열이 들어가는 순간, 팀의 자신감은 그대로 꺾이는 거고.

그러니 차라리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고, 타자들을 지지하는 식으로 거칠게 나온 거다. 너희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래야 타자들의 자신감이 꺾이지 않을 테니까.

“퇴장!”

이미 불쾌감 Max였던 주심은 황소처럼 달려드는 감독에게 즉각적인 퇴장을 명령했고.

“우우우우우우!”

“거지새끼들한테 돈이라도 받아 쳐먹었냐!”

“꺼져 X발! 이딴 X같은 경기 할 거면 그냥 다 꺼져버려!”

팀 타자들도 X같이 발리고 있는데, 감독까지 퇴장 당하자, 당연하게도 홈관중들은 온갖 야유를 토했다.

뭐, 우리 레이더스분들은 그냥 공정한 심판이라며 박수를 쳐줬지만, 기세는 대단한데, 워낙 숫자가 적어서 금방 묻혔네.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 되어버린 그라운드. 이 상황을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정답은 스마일, 미소다.

‘이야~ 마운드에서 직관하니까, 진짜 개꿀잼이네.’

실제로 재밌기는 해.

티비로만 봤지, 직접 내가 당사자가 되니까, 실감나서 그런지, 아주 재밌어.

글러브로 얼굴조차 가리지 않고, 대놓고 웃자, 카메라가 날 찍는게 느껴졌다.

‘이걸로 이미지는 확실하게 만들었네. 좋은 방향은 아니겠지만.’

난장판이 된 그라운드.

퇴장당한 감독. 멘탈이 터지거나, 분개한 타자들. 그 속에서 웃고 있는 투수. 고유석.

이걸 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는 뻔하다. 이 모든 걸 내가 의도했고, 내가 원흉이라고 여기겠지.

누군가는 미친놈이라며 욕할 거고, 누군가는 영악하다며 칭찬할 거다. 최소한 화이트삭스 팬들은 죄다 내 안티팬으로 돌아서겠지.

허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앞으로 내가 어떤 피칭을 하든지, 얼마나 x같이 약하게 보이든지, X밥처럼 느껴지든지 간에.

‘의심하겠지.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확신이 들기 전까지 꾸준하게.’

어쩌면 그 모든 게 내 연기가 아닌지, 내가 의도한 게 아닌지, 덥석 물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한 10번쯤 물어본 뒤에야 결단을 내릴 거다.

그러다 보면···

‘전반기 끝나는 거고.’

그 사이 나는 후딱 치고 빠지면 된다는 거지.

“아웃!”

여섯 타자 연속 삼진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퇴장까지 결심한 감독에게 보답하려는 듯, 타자는 큼직하게 스윙했으니까.

다만 그 의지가 정확한 컨택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타구는 마운드 앞 땅볼로 그쳤다.

그것으로 6회 말 종료.

시작부터 욕하더니, 이젠 원수처럼 나를 노려보는 홈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덕아웃으로 걸어갔다.

“와··· 이젠 감독까지 퇴장시켜? 이러다 나중엔 뭐 할지가 무서울 정도네.”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감독을 어떻게 퇴장시켜? 그냥 어쩌다가 된 거지. 브루스 너도 수고했다. 오늘은 포구하기 좀 힘들었을 텐데. 잘 잡던데?”

“그게 내 일이니까. 다른 거 안 하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6이닝 7피안타 10삼진 1실점. 그리고 1볼넷. 그것으로 오늘 내 피칭이 막을 내렸다.

‘이 정도면, 오늘 인터뷰 좀 해줘야겠네. 덕분에 이득을 많이 봤으니까.’

두 자릿수 삼진도 올렸고.

이미지도 제대로 박아뒀고.

실점도 적절하게 막았으니.

이만하면 완벽하지.

승수 못 챙긴 것만 빼면.

1실점밖에 안 했지만, 우리는 그 1점조차 못 냈거든. 그나마 막판에 역전한 덕분에 패전은 면했는데...

이 X부랄 타자 놈들. 나중에 점수 낸다더니, 진짜 X나게 나중에 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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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 6이닝 1실점 10K! 경기를 지배한 화려한 삼진쇼!>

└처음에 좀 흔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작두 타더라

└메쟈 하부리그 쉑들ㅋ 고유석 공보고 얼 X나 타네

└경기 중반부터 영점 잡힌 건가? 갑자기 제구 좋아지던데

└ㄴㄴ 마지막에 웃은 거 못 봄? 그냥 가지고 논 거임

└갓유석 원래 저런 짓 잘함 현지에서도 루키가 X같이 연기한다고 여우라고 함ㅋ

경기가 끝나고, 고유석의 마지막 미소는 여러 가지 이슈를 낳았다. 꽤나 절묘했으니까.

마치 비밀작전에 성공한 요원과 같은 미소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번 경기 역시 그의 노림수였다고 여겼다.

아닌 말로, 초반에 실점한 것을 제외한다면, 다시금 두 자릿수 삼진을 올리며 준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줬기에.

그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계획이었다고 보더라도 무방했으니 말이다.

<부당한 판정에 퇴장당한 상대팀 감독을 비웃은 고유석, 존중이 결여된 행동!>

└지랄 났다.

└ㅋㅋㅋㅋ 네 글자로 기사 요악하네zz

└부당하긴 개뿔 처음에 스트라이크존 존나게 짜던데 부당한 건 그게 진짜로 부당한 거지

└솔직히 막판에는 좀 늘어나긴 했는데 그 정도는 보상 판정이라고 봐도 무방함

다만 대놓고 상대팀을 비웃는 듯한 뉘앙스였기에, 그에 대한 비판 역시 있었고.

특히 친 화이트삭스 적인 시카고 지역언론들은 고유석이 상대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고유석 본인도, 오클랜드 팬들도 딱히 신경쓰지 않았기에, 그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났다.

[#A’s]

[오늘 경기 보니까, 이제 진짜 마음이 놓이네. 아주 영리하게 피칭하던데. 뭐? 멘탈이 흔들려? 슬럼프가 시작돼?]

└한 가지 알아야 할 건. Suck이랑 슬럼프를 엮은 놈들은 지금까지 죄다 패배했다는 거야.

└워낙 잘하는 선수니까, 한 경기 망치면 그게 더 크게 느껴지는 거겠지.

└오늘 Go는 그런 놈들을 아주 대놓고 놀렸어. 경기 초반에 일부러 흔들리는 척하면서, 죄다 조지는 걸로 말이야.

└아까 전에 커뮤니티에서 Go가 피로가 쌓였다면서, 곧 망가질 거라고 호들갑 떨던 놈 있었는데, 지금 게시글 삭제하고 튀었네.

팬들은 그저 안도했다.

홈런 이후 혹시라도 흔들리지는 않을까, 싶었던 고유석이 다시금 거뜬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다만 무브먼트의 경우 이번 경기 역시 저조했기에, 전문가들과 분석가들은 여전히 위험을 이야기했으나.

그들 역시 그리 극렬하게 주장을 펼치지는 못했다.

최소한 타자들을 철저하게 제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던 모습은 지금까지 고유석이 보여준 것과 동일했으니까.

슬럼프 혹은 부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오히려 그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더 올라갔다.

그 어떠한 것도, 제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더라도, 그 모든 게 노림수일지도 모른다는 이미지가 생겨났으니까.

고유석이 바라던 것처럼.

<팬을 위해 행동에 나선 Go? ‘오히려 기뻤다. 너무 욕하지 말아주길···’ ‘다만 위험한 행동이니 앞으론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동안 죄인으로 찍혔던 이 역시 구원을 얻었고 말이다.

####

“Go, 혹시 남은 전반기 경기는 로테이션을 거르는 게 어떻겠어?”

화이트삭스전이 끝나고.

다시 홈으로 돌아온 뒤.

휴식을 마치고서 피칭 감각을 올리려, 천천히 불펜피칭을 시작했을 때.

대뜸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이 그렇게 물어왔다. 로테이션을 거른다고?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기는 하다.

내 이닝이 문제지.

올해 데뷔한 루키가, 전반기 끝나기 전에 벌써 112이닝이나 던졌으니. 아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까지 잘 굴려놓고 이제와서 뜬금없이 저런 말을 꺼낸다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다.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어?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직 루키인데, 너무 많이 던지기는 했잖아? 그래서 그렇지. 위에서도 조금 휴식을 주는 게 어떤가, 의견이 나오는 것 같고.”

휴식이라. 솔직하게 말하면, 내 입장에선 땡큐다. 화이트삭스전 덕분에 X밥처럼 보이지 않게 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컨디션이 저조하니까, 말이야. 물론 조금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미미하지.

그러니 차라리 남은 경기 거르고 푹 쉰다면, 나로서는 더 좋겠지만. 왠지 조금 찝찝했다.

‘단순히 휴식 때문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권유 정도니까. 괜히 피칭 리듬을 깨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게 말하고 넘기기는 했지만, 어색한 스콧 에머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내 휴식을 가장 바라는 건 이 양반일 거다. 어떻게든 내 이닝을 줄이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런 양반이 휴식을 권유하면서, 묘하게 찝찝한 감정을 풍긴다는 건. 단순히 휴식이 아니라···

‘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 정확하게는 프런트가 뭘 노리고 있는 건지.

<남은 등판은 둘! 과연 Go의 200탈삼진 가능성은?>

화이트삭스전 이후. 자주 나오는 기사들이다. 외부에서 나한테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이 두 가지지.

전반기 200탈삼진.

그리고 전반기 0점대 ERA.

둘 다 이례적인, 아니, 역사적인 기록이기에, 오클랜드 팬들뿐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은근히 바라는 눈치더라.

리그의 흥행을 높여줄 흥미로운 이슈가 될 테니까. 히어로 마케팅은 언제나 잘 먹히는 법이잖아?

‘지난 경기로 삼진이 지금 178개였던가? X나게 많이 잡기는 했네. 내 기록인데도 좀 어이가 없을 지경이야.’

일단 둘 다 지금 성적만 놓고 보면 가능성이 꽤 큰 편이다.

대충 로테이션을 따져보면, 전반기 동안 두 경기 정도 더 등판할 텐데. 경기당 11탈삼진씩 잡으면 200탈삼진이네.

그게 말처럼 쉽지 않기는 한데. 내 9이닝당 탈삼진이 14니까. 얼추 가능하긴 하지.

‘ERA는 그보다 더 쉽고. 그래, 훨씬 더 쉽지. 내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왜냐고? 거르면 되거든.

남은 등판 경기들을.

피로 누적이라는 이유로.

시즌 기록도 아니고, 전반기 기록이니. 규정이닝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러니 남은 두 경기 걸러버리면, 0점대 ERA는 그냥 달성이지. 이미 0점대니까.

사실 두 경기쯤 거른다고 쳐도, 이미 전반기 동안에만 112이닝, 16경기를 던졌으니까, 사람들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조금 찝찝하기는 하겠지만.

‘그래, 이거였구만.’

알 것 같았다. 왜 팀이 나한테 휴식을 권하는 건지.

“성적관리라···”

“응? 뭐라고? 공 안 던져?”

“아아, 예 갑니다, 가요.”

성적관리. 스탯관리라고도 하지. 어차피 같은 말이니까, 뭐, 아무렇게도 불러도 되겠지만.

사실 프로스포츠와 성적관리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성적이 곧 연봉이 되고, 인기가 되니까.

그건 단순히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특별한 기록을 가진 슈퍼스타는, 선수 본인만이 아니라, 소속 구단에게도 돈다발을 가져다주거든.

‘팬들은 기왕이면 둘 다 하길 바라겠지. 둘 다 충분히 가능해 보이니까.’

대충 남은 두 경기 동안 삼진 열한 개씩 잡으면서, 경기마다 2실점만 하면 된다. 물론 6이닝 이상씩 소화해야 하고.

퀄리티 스타트 이상을 하면서, 삼진도 두 자릿수 이상을 꼬박꼬박 찍어야 한다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X나게 어렵기는 한데···

‘솔직히 지금 내 성적 보면, 그냥 하고도 남지.’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이 보기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뜻이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것 같았으면, 이슈 자체가 안 되거든.

그러니 팬들과 언론이 보기엔,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겠지만···

“나이스볼!”

“예예, 그렇겠죠.”

‘구단이 보기엔 아니지.’

불펜포수는 매번 나이스볼을 외친다. 불펜코치와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도 마찬가지지.

좋은 성적이라고. 아주 훌륭하다고. 네가 최고라고. 기세를 계속 이어가자고. 온갖 말을 다 한다.

즉 혀가 길어졌다는 거다.

그들이 보기에도 지금 내 상태가 예전보다 못하기에, 오히려 더욱더 격려를 하는 거지.

예전엔 안 그랬어. 오히려 살살 해라, 적당히 해라, 너 너무 무리한다 등등. 격려가 아닌, 걱정을 했으니까.

밖에서 볼 때 나는 여전히 완벽하다. 피홈런을 맞으면서, 조금 금이 가기는 했지만. 지난 화이트삭스전으로 다시 증명해냈지.

난 X나게 쩌는 놈이라는 걸 말이야.

그러니 기록을 바라고 있는 거겠지만, 자세한 컨디션을 파악하고 있는 구단의 입장에서는···

‘둘 다 놓칠 바에, 차라리 하나 버리고, 남은 하나라도 확정을 짓고 싶겠지.’

애슬레틱스는 유례없는, 이건 좀 과장이고, 아무튼 기대이상의 인기를 끌도 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내가 있고. 아니, 내 몫이 70%라고 봐도 무방하지. 참고로 이건 과장이 아니다.

브라이언도 진지하게 내 현재 마케팅 가치는 오히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팀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라고 이야기했으니까.

내 에이전트이기는 한데, 괜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얼추 진실에 가까울 거다.

그런 슈퍼스타를 전반기 0점대 ERA라는 타이틀로 더욱더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건데.

‘어림도 없지!’

라고 외치고 싶지만.

솔직히 조금 끌리기는 한다.

전반기 0점대 ERA! 얼마나 간지나냐. 200탈삼진은 좀 아쉽긴 하지만, 솔직히 그건 풀 컨디션이어도 애매하지.

‘삼진은 나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라, 타자들도 짝짜꿍을 해줘야 하는 거니까.’

당장 가장 성적 좋았을 때도, 10탈삼진 이상 못한 경기가 제법 있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이기도 하고. 어차피 올스타는 확정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때까지 푹 쉬고, 올스타 브레이크에도 휴식을 한다면. 오버페이스의 피로는 완벽하게 떨칠 수 있겠지.’

그 뒤에는 남은 7,8,9,10월을 화려하게 불태운 뒤, 사이 영이든 뭐든 상까지 탄다면 그야말로 완벽하겠지.

그러니 제법 혹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만든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런 식으로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닝을 많이 소화했으니, 큰 반발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결국 욕하는 놈들도 있을 거고.

명색이 1선발 에이스라는 놈이 성적을 위해서 등판을 거른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지금 좀 힘들기는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최소한 반반은 되지.

성공확률 100%의 반쪽짜리 성공과, 50대 50의 확률의 두 마리 토끼. 남자라면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배팅해야지.

설사 둘 다 놓친다고 해도, 큰 손해는 없다. 약간 아쉬운 걸 제외하면. 오히려 멋진 도전이었다며 박수만 받겠지.

‘그러니, 굳이 먼저 꽁무니 뺄 필요가 있나.’

전반기 종료까지 남은 등판은 둘. 비록 여전히 몸이 조금 저조하긴 하지만, 한번 걸어볼만 했다.

그리고 어차피 남은 두 경기를 잘 조지기 위해서, 화이트삭스전을 불태웠던 건데. 아까워서라도 이름값 해야지.

‘그 이름값이 Go가 될지, Suck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나이스볼~ 힘 좀 실었나본데? 묵직~해서 딱 좋네.”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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