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평소보다 어깨에 힘을 더 실었다. 아주 제대로,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그래야 어색하게 보일 테니까. 마치 억지로 힘을 내는 것처럼 보일 거고.
거기에 조급한 인터벌까지 곁들이니, 벌써부터 타자들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이걸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Nice Suck! 이게 Suck이지!”
“오늘 삼진 몰아서 담자! 아주 제대로 쓸어버려!”
팬들은 아주 신이 났다.
경기시작부터 시원스럽게 던지니, 마냥 좋은 거겠지.
다만 갑작스럽게 피칭 스타일이 바뀐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 같은 이들은 오히려 표정을 굳혔다.
아마도 그렇게 여길 거다.
어쩌면 내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르겠다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지만, 기세를 살릴 수 있을 정도로.
팬들마저 속이는 셈이니, 그건 좀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내 성적이 저 양반들도 기쁜 거니까. 아무튼 그렇다.
“체력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야? 위험할 것 같은데.”
“왜? 오늘도 노히터 하라고? 또 롤렉스가 탐나?”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
브루스는 조금 다른 걱정을 했다. 얘야 내 의도를 알고 있다지만, 시작부터 가쁘게 던지니, 금방 체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건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서 조절하고 있다. 내가 X신도 아니고, 진짜로 전력투구면, 저번에 인디언스전에서 트레버 바우어랑 다를 게 뭐야?
‘적당히 떡밥은 던져뒀으니, 진짜는 2회부터겠지.’
일단 미끼는 걸어뒀다.
상대도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는 것 같고. 남은 건 그걸 딱 물어주느냐, 아니냐는 것.
“아웃!”
공수교대 이후 2회 최.
우리 공격은 금방 끝났다.
대~충 우리 타자들 상태를 보아하니, 오늘 승리 따내긴 글렀구만.
이제 겨우 경기 초반이기는 한데, 우리 애들이 좀 기분파라서, 못 치는 날은 더럽게 못 치거든.
오늘은 못 치는 날이다. 딱 보이네. 스윙만 봐도 알겠어.
“미안, 나중에 점수 낼게.”
“에이, 이제 2회인데, 뭘 그렇고 보고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스리.”
“우리가 12승이나 올려준 거 알지? 네 피칭만 잘해. 알아서 떠먹여 줄 테니까.”
시원스럽게 아웃당하고 돌아온 타자들을 지그시 쳐다보니,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말은 욘더 알론소였는데, 팬들 앞에서 저런 말 했다간 욕 좀 먹을 거다.
ERA가 0점대인데, 누가 누굴 떠먹여 줘. 내가 억지로 멱살 잡고 이긴 거지.
‘트리플 크라운··· 가능할까?
퐁당퐁당 거리는 타자들을 보니, 트리플 크라운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우,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욕심이 했나봐. 진지하게 트리플 크라운을 탐내다니.
‘그보다는 일단 오늘 상대 타선을 잘 조지는 게 우선이지.’
정신 차리고, 다시 글러브를 든 채, 그라운드로 향했다.
화이트삭스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떤 노림수를 품은 건지,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것처럼.
떡밥은 열심히 던져뒀다고 생각했는데, 의심이 생각보다 강하네. 하긴, 진짜 물고기도 아니고. 덥석 물지는 않겠지.
‘ERA 0점대에, 전반기에만 200삼진 올릴 기세인 투수가 약하게 보여봤자, 얼마나 약하겠어.’
사자가 발톱 하나 빠졌다고 맹수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집중이 대단하네. 최근 성적이 좋았었지.’
2회 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오른 타자 역시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비세일 가르시아.
4번타자로, 우익수다.
최근 성적이 준수하지.
타율도 3할이 넘는데다가, OPS도 9할이니까. 턱걸이기는 하지만.
내가 어떤 짓을 하든지 절대로 속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주 단단히 정신무장을 하고서 들어왔는데.
“볼!”
“볼!”
이어진 볼 두 개에 눈썹을 씰룩였다. 음, 이게 안 들어가네. 의도한 건 아니다.
타격감이 좋은 타자이고, 조금 까다롭다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 어려운 코스로 던지기는 했지만. 살짝 나갔네.
아니, 나갔다기보다는, 주심 존이 좀 짜다. 1회에는 쭉 공격 일변도로 던져서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애매하네.
‘쯧, 이런 것도 안 잡아주면, 투수보고 뭘 던지라고?’
주심에게 괜한 짜증이 솟으려고 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얜 잡으면 말고, 못 잡으면 어쩔 수 없고 식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저 짜디짠 존이 더 도움이 될 거고.
“볼!”
쓰리볼.
타자의 눈이 흔들렸다.
진짠가? 하는 표정이네.
어쩌면 내 제구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일부러 힘주고 딱딱하게 던져서, 제구를 살짝 내려놓긴 했기에, 틀린 생각은 아니지.
눈앞에 놓인 정보만 따졌을 때는 그렇게 보일만도 하니까.
“스트라이크!”
그런 타자의 생각을 돕기 위해서, 나는 마치 억지로 영점을 잡는 것처럼 조금 위험한 코스로 과감하게 던졌다.
그러자, 아비세일 가르시아는 미동도 없이 공을 끝까지 지켜봤고,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노스트라이크 쓰리볼이었으니, 타자가 스윙을 참을 만도 했지만, 지금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
한 구를 기다렸다고 보다는, 내 상태를 파악하려는 것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이젠 어느 정도 생각이 기울은 것 같고.
“아웃!”
마지막은 밖으로 확실하게 뺐다. 느낌이 안 좋더라고. 제대로 장전하고 있는 것 같던데.
위험하게 들어갈 이유는 없지. 구위가 이전처럼 X나게 강한 것도 아니니까. 물론 지금도 평균 이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타자도 이번엔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건지, 스윙했고, 곧 조금 자책하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오, 이걸 쳐주네. 그냥 내보내려고 했더니.’
가만히 있었다면 볼넷이었을 텐데 말이야. 덕분에 볼넷 하나 아꼈네.
타석에서 물러난 아비세일 가르시아는 덕아웃으로 향하며, 후속 타자에게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은 타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타석에 입장했고, 그와 눈을 맞추며, 똥꼬에 힘을 빡 줬다.
‘토드 프레이저. 이번엔 진짜 조심해야겠네.’
빡센 놈이거든.
토드 프레이저. 지명타자다.
1루수나 3루수로도 종종 나오고.
올 시즌 성적은 그리 인상적인 편은 아니다. 타율은 2할 1푼에, OPS도 7할 1푼이니까.
상당히 낮은 편이지.
허나 그런 성적과 관계 없이, 펀치력이 확실한 타자를 상대로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작년에 40홈런, 재쟉년에 35홈런. 이 정도면, 무조건 파워는 갖췄다고 봐야겠지.’
40홈런을 찍은 타자는 무조건 펀치가 강하다. 설사 그게 뽀록이더라도, 홈구장이 쿠어스가 아닌 이상에야, 파워는 진국이라는 거지.
콜리시엄도 아닌데다가, 콜리시엄에서도 홈런을 맞을 정도로 구위가 떨어진 지금, 나한테 제일 위험한 타입은 이런 놈들이다.
뻥스윙 한 번 하면, 휙 넘어가거든. 그리고 지금도 대충 자신감이 만땅인 것 같고.
‘아비세일에게 볼넷을 하나 아꼈으니···’
로케이션을 새로 잡았다.
만약 어설프게 넣었다간, 아주 혼쭐이 날 테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가야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표정 관리는 놓지 않았다. 지금 내 밑천은 이 잘생긴 얼굴이니까.
“스트라이크!”
“볼!”
“볼!”
포심, 슬라이더, 서클.
내 주력구 3인방이라고 할 수 있는 구종을 나란히 던졌는데, 타자는 꾹 참았다.
출루율이 타율과 1할 정도 차이를 보이는 타자라서 그런지. 인내심은 확실하네.
꾹 참는 모습이 마치,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뒷목이 괜히 서늘했다.
“볼!”
세 번째 볼. 토드 프레이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게 나가네. X부랄거.
‘진짜 바깥쪽 X같이 안 잡아주는데? 나중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좀 X같네.’
쓰리볼 원 스트라이크.
이게 진짜 투수 피를 말리는 카운트다.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하는데. 이미 공을 네 개나 본 타자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노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제대로 얻어걸리면 끝장나는 거고. 다만-
“볼! 베이스 온 볼!”
스트라이크 잡을 생각이 없다면, 그냥 쉽고. 헛스윙 한 번 해줬으면, 그냥 승부하려고 했는데. 이걸 끝까지 참내.
‘아, 정말 아쉽다. 어떻게든 승부하려고 했는데, 주심이 이걸 망치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최대한 표정관리하자.
강한 인내심으로, 볼넷을 만들어낸 토드 프레이저는 무언가 확신한 것처럼 덕아웃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사인을 보내는 건가?
그가 보낸 사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곧바로 다음 타석에서 드러났다.
‘얼굴이, 아주 꽃이 폈네.’
멧 데이비슨.
2013년 첫 빅리그 데뷔를 한 선수지만, 실질적으로는 올해가 데뷔시즌인 선수다.
13년에는 31경기, 그 이후 다시 빅리그를 밟은 작년에는 딱 한 경기 나온 것이 전부니까.
올해는 제법 준수한 파워를 선보이며, 타선의 쓸만한 자원으로서 주전급이 된 선수인데. 타석에 들어온 그는 콧김까지 뿜어내며, 자신감을 드러냈고. 그걸 보며 확신했다.
‘물었네.’
화이트삭스가 미끼를 물었다.
예상보다 좀 더 빠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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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저 투수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화이트삭스 타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덤덤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티가 났다.
물론 1회 말은 강력했다.
모두가 다 아는 ‘그’ Suck이었지. 아주 강렬하게, 파괴적인 피칭을 선보였으니까.
아니, 그렇게 연기했다.
묘하게 딱딱한 동작과 억지로 힘을 내는 듯한 피칭. 그것의 여파인지 듣던 것보다 조금 더 몰리는 것 같은 제구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속았겠지.
“베이스 온 볼!”
“진짜 제구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니까? 나도 괜히 스윙한 게 문제지, 기다렸으면 볼넷이었어. 약간 영점이 흔들리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런 1회 말이 마지막 힘이었던 것처럼, 2회부터는 조금 흔들렸다. 시작부터 볼 두 개를 내주더니.
간신히 선두타자를 잡은 뒤, 곧이어 다음 타자에겐 볼넷을 내줬다.
먼저 덕아웃에 돌아온 아비세일 가르시아와 같은 걸 느낀 건지, 토드 프레이저 또한 사인으로서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자,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쟤 올해 데뷔한 녀석이었지? 이제 스물넷이면, 나이도 아직 어린 편이긴 하네.”
“하긴, 다르게 생각해보면, 거긴 오클랜드잖아? 오클랜드에서 누가 차 문 두들기면, 나 같아도 좀 놀랄 것 같은데?”
“거기다 저번 경기에서 홈런까지 맞았으니···”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개소리라고 취급했던 가설이 진지하게 논의됐고. 심지어는 타격코치 역시 은근하게 동조했다.
“와아아아아아아!”
그러는 사이 함성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이들과는 다른 목소리였고. 훨씬 더 크기도 했다.
홈팬들이었으니까.
경기 시작부터 투수에게 야유를 퍼붓던 홈팬들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기세가 좋던 원정 오클랜드 원정 팬을 아득히 넘어서는 환호성을 내질렀고.
그들의 보는 방향에는 배트를 집어 던지고, 황급히 내달리는 타자가 있었다.
“세이프!”
깔끔한 좌전 안타.
그리 긴 타구는 아니었던 건지, 타자와 주자는 1,2루에서 멈췄지만. 최소한 기세를 이어가는 한 방인 건 확실했다.
숨 가쁘게 끝났던 1회와 달리, 기세를 이어가는 2회, 그리고 나란히 베이스에 선 두 동료 선수를 보며, 덕아웃의 이들도 자신감을 얻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비록 다시금 힘을 짜낸 투수로 인해, 2회의 찬스는 계속 이어가지 못했으나.
이젠 완전히 딱딱해진 투수의 얼굴과 약간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가 확신을 줬다.
“자, 자. 상대 투수 지금 제구 흔들리고 있으니까, 웬만하면 스윙 참고. 길게 가자.”
“체력이 좀 후달려 보이던데. 길게 끌면 훅 주저앉을 걸?”
“구위가 생각보다 덜하더라. 회전수인지 뭔지가 줄었다더니. 진짠가 보던데?”
덕아웃에는 활기가 깃들었고, 3회 초의 수비마저 또다시 무탈하게 끝나는 것으로 불이 붙었다.
곧이어 3회 말.
“Hell Yeeeeeeah!”
홈팬들은 다시금 함성을 터트렸고, 그건 지난 이닝의 환호성보다 조금 더 길고, 웅장했다.
“세이프!”
첫 득점이 올라갔으니까.
선취타점의 주인공이 된 멜키 카브레라는 힘껏 손을 들어 올리며 분위기를 더욱더 띄웠고. 고개 숙인 투수의 모습은 맛있는 안주처럼 곁들임으로 완벽했다.
“제대로 맛이 갔어. 제구가 엄청 흔들려.”
“맛이 간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최소한 정상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래, 아직 햇병아리인데. 원래 저 시기에는 정신적인 타격이 좀 더 세게 다가오거든.”
“그 도로에서 사인 받은 미친놈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를 위해서 큰일 했네.”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제구였다. 2회에도 흔들린다 싶더니, 3회 역시 조금 미묘했으니까.
허나 그렇기에 타당하게 느껴졌다. 다른 건 몰라도, 감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구는 멘탈의 영향을 크게 받으니까.
“그런 일도 있었는데, 심지어 저번 경기에서는 홈런까지 맞았으니, Boom! 아주 제대로 터졌네.”
비록 이후 추가득점을 내지는 못했지만, 그런 걸 신경쓰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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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삭스전을 보는 시선은 생각보다 많았다. 오클랜드나 고유석의 팬과 그 외의 이들, 모두에게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니까.
└오늘은 괜찮겠지?
└당연하지, 저번 경기는 그냥 일시적인 부진이야.
└사실 부진이라기도 뭐하지. 홈런 빼면 그냥 좋았으니까.
└그 홈런이 중요한 거야. 이 멍청한 오클랜드 거지들아.
└니네 Suck 진짜로 Suck이 되려는 것 같은데?
└하여튼, 오클랜드 너넨 진짜 X신이야. 기껏 쩌는 유망주 나왔더니, 직접 니네 손으로 망치냐?
└너 레인저스지? 다음에도 완봉이니까, 잘 기억해둬라.
└내가 그딴 X신팀 응원할 것 같아?
└그럼 양키스네. 레인저스보다 더한 X신인 건 걔들 밖에 없거든. 다음엔 퍼펙트다.
└이런 개···
첫 피홈런. 약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던 고유석. 그리고 흘러나온 미묘한 이슈.
지난 경기에 대한 대다수의 의견은 일시적인 부진 정도였지만, 만약 그게 오늘까지도 이어진다면, 어쩌면 슬럼프의 시작일 수도 있었으니까.
팬들은 그가 오늘 경기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를, 그 외는 이제 제발 좀 박살이 나길 기원하며 경기를 봤고.
[#A’s]
[에이, Suck 멀쩡하네.]
└어, 그냥 평소 같은데?
└그럼 그렇지. Go가 어떤 녀석인데, 겨우 그런 걸로 흔들릴 리가 있나.
└사실 Suck은 신경도 안 쓰고 있을걸? 그에게는 그냥 타자들 조지는 것만 중요할 테니까.
└Suck 망하는 걸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놈들은 좀 아쉽겠네~
첫 시작은 팬들의 승리였다.
지금까지 쭉 봐왔던 것처럼, 아주 강렬하게, 폭압적으로 타자들을 찍어 눌렀으니까.
그것을 보며 팬들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고유석에 대한 걱정 대신, 타자들을 향한 채찍질을 했지만.
두 번째 이닝부터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무브먼트가 줄어들어도, 생각보다 컨디션이 저조해도. 좀 얻어맞더라도.
언제나 굳건했던 제구가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베이스 온 볼!
└어··· Suck 왜 이러냐. 갑자기.
└진짜 문제라도 있는 건가?
└겨우 볼넷 하나인데 뭐.
└조금 컨트롤이 이상하긴 하네. 약간씩 어긋나.
└이건 주심 잘못이지. 존이 진짜 더럽게 좁아.
볼넷. 어쩌면 홈런만큼이나 어색한 단어였다. 최소한 고유석에게는 말이다.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던 제구가 뒤이어 볼넸가지 이어졌고, 불안감이 솔솔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2회 자체는 무탈했다.
└아··· 쓰읍- 이게 맞네.
└그냥··· 타자가 잘했어.
└저 X발 X새끼가!
└제구가 이번 이닝도 좀 흔들린다. 영점을 못 잡은 건가?
이른 타이밍의 실점은 지난 이닝부터 불안했던 팬들의 마음에 바윗돌을 얹어놓았다.
절대불변일 것 같았던 선수에게 어쩌면, 정말로,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오늘 Go의 컨트롤이 조금 아쉽네요.
-컨트롤의 경우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아무래도 Go에게 최근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죠.
-네, 그리고 리그 최고의 투수이긴 하지만, 역시 아직은 루키인 선수니까요. 첫 피홈런의 충격도 조금 클 수밖에 없겠죠.
가벼운 잡담에 불과했지만, 중계진 역시 불길한 말을 했기 때문인지, 그런 분위기는 더욱더 짙어졌다.
그들은 부디 고유석이 다시금 화끈하게 타자들을 잡으며, 자신들의 걱정이 그저 기우로 만들어주길 바랐으나.
-2루에서- 세이프! 다시금 득점권 주자를 허용하는 Go!
-아무래도 조금 흔들리는 것 같네요. 선두타자에게 장타를 내줬습니다.
4회는 시작부터 위기가 시작됐다. 선두타자에게 좌중간을 가르는 안타를 허용했으니까.
시작하자마자 2루에 주자가 채워진 상황에 중계화면 속 레이더스마저 침묵했고.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위기를 넘기는 Go!
-이런 점이 대단한 투수죠. 위험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이후 안타 하나를 더 내줬음에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며, 실점을 허용하진 않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팬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A’s]
[오늘은 그냥 5회 끝나고 바로 교체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적당히 승리투수 조건만 채워도 괜찮기는 하지.
└타자들이 못 쳐서, 승리투수 조건도 못 채울 것 같지만 말이야.
└그래, 가끔은 좀 짧게 던져서, 쉬는 날도 있기는 해야지.
그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아쉽더라도 빨리 내려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이들이 조기 교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을 무렵.
그런 팬들의 바램을 이뤄주려는 듯, 경기의 분위기가 다시금 바뀌었다.
####
“하아, 죽겠다.”
마운드에 오르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야구하는 게 언제나 즐겁기는 한데. 조금 숨이 찼다.
확실히 요즘 컨디션이 말이 아니야. 겨우 4이닝 던졌는데, 벌써 조금 지친 걸 보면.
그래도 서서히 나아지고는 있으니까, 참고 버텨야지.
그런 의미에서, 마운드 위에 올라, 다시금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는데.
타석에 올라오던 타자는 아무래도 그런 내 행동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뭘 봐? 숨 쉬는 거 처음 봐?’
힘들어서 그런지, 괜히 전투력이 올라서, 시비를 걸듯 노려봤는데, 타자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아니, 넌 날 X도 몰라.’
날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시범경기 때 출장하지도 않았으니, 오늘이 초면일 텐데.
괜한 말은 아니다.
오늘 화이트삭스 타자들은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저 녀석처럼 내 심리를 알겠다는 것처럼 굴었고.
‘꼴랑 1점 내놓고, 아주 대단들 하시네.’
난 솔직히 2점까지도 감안하려고 했는데. 그 반타작 했으니, 오히려 이득이다.
예상대로, 타자들은 핀트를 잘못 잡았다. 일부러 그렇게 유도하긴 했지만.
‘체력을 좀 썼으니까, 인터벌은 그냥 유지하자.’
이미 경기 초반에 좀 달렸었는데, 다시 또 시동을 건다면, 과부하가 걸릴 거다.
또, 오늘은 타이밍 자체를 일부러 빠르게 당겼기에, 그리 효과적이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인터벌은 잠시 내려놓고. 오히려 조금 느리게, 천천히 숨을 고르듯 던졌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
씨익 웃던 타자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 참 이상하다, 그치?
그러더니 슬쩍 주심도 보는데. 넌 양심이란 게 없냐? 저거 웃긴 새끼네.
이미 더럽게 좁은 존인데, 여기서 더 줄이려고? 주심도 어이가 없는 건지, 타자를 강하게 노려봤다. 그러니 깨갱하게 다시 정면에 시선을 두는 타자.
아마 진짜로 판정에 못 마땅했던 건 아니고, 그냥 확인이 필요했겠지.
“스트라이크!‘
이해가 안 될 테니까.
이번엔 서클 체인지업.
좌타자라서 떨어지는 걸로 던졌다. 방금 전의 의심을 떨치려는 듯, 타자는 스윙했지만. 뚝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배트가 헛돌았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이제 쇼타임이다.
‘자, 제대로 하나 넣자.’
구위는 이전이랑 똑같다.
아니, 오히려 좀 떨어졌지.
투구수를 소모했으니까.
브레이킹볼도 여전하고.
그런데 타자 입장에선, 훨씬 더 날카롭게 느껴질 거다.
왜냐하면-
“스트라이크 아웃!”
제구가 다를 테니까.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박혔다. 그것도 조금 낮게. 좌타자이니, 얼추 크로스 파이어 같을지도?
이전까지는 바깥쪽 코스가 대부분, 아니, 전부 다 볼이었으니, 타자는 당연하게도 참았지만. 딱 꼭지점에 박힌 코스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봐. 너넨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아주 실력이 개차반이었을 때도. 제구 하나 만큼은 자신 있었던 사람이거든.
“스트라이크 아웃!”
허망하게 물러난 선두타자를 시작으로, 처음과는 정반대로, 조금 힘을 빼고, 철저하게 공을 컨트롤했다.
손가락 끝에 착 붙여서, 원하는 곳에 아주 정확하게. 존 파악은 이미 마쳤다. 이제 5회인데, 스트라이크존도 파악 못 했으면 투수로서 직무유기지.
‘리버스 인터벌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하게 그어진 네모난 스트라이크 존. 그 선에 걸치는 공.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지금은 큰 거 안 맞는 선에서 힘을 유지한 채, 거의 모든 공을 존 안으로 넣었으니까.
볼이나 유인구는 확실하게 뺏었고. 그러니 그런 피칭에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그 중간 지점을 공략하는 지금은 마치···
‘존이 늘어난 것 같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세 개의 삼진이 올라갔다.
KKK, 세 타자 연속 삼진에, 힘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던 레이더스는 벌떡 일어났고, 홈팬들은 반대로 타자들에게 진심이냐고 묻는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왜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잘 문 거 아니야?’
세 명 다 루킹삼진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