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근데, 진짜로 괜찮은 거 맞지? 저번 경기는 영 컨디션이 안 좋던데.”
비행기 안에서, 브루스 맥스웰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 다음 등판에서 함께 출장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내가 아무리 거뜬하다고 해도 마음이 안 놓아지는 거겠지.
노히터 한 뒤에, 모은 돈 털어서, 롤렉스 하나 사줬었는데, 그 이후로 나를 아주 극진히 모시거든. 역시 돈이 짱이야.
“말했잖아, 그건 그냥 X같이 내려간 거라고. 니가 보기엔 내가 진짜로 똘끼있는 팬 하나 때문에 망가질 놈으로 보여? 레이더스도 매번 보는데?”
이미 몇 번이나 더 들었던 물음이기에, 나는 시큰둥하게 답변했고. 브루스는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내 입장을 한번 생각해봐라.
그냥 피칭 사이클이 내려가고 있고, 피로가 많이 누적된 게 문제인데.
정작 팬이랑 언론은 나 대신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는 줄 알아?
“무슨 마녀사냥도 아니고···”
“네 팬들, 그, 레이더스? 그 양반들 몰골을 생각하면, 마녀사냥 같기는 하네.”
엄한 사람, 아, 엄한 사람은 아니지. 그 양반이 위험한 행동을 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냥 약간 엄한 사람? 불쌍한 사람? 아무튼 그런 사람한테 모든 죄를 덮어씌운 건데.
그런 행동에서 날 향한 오클랜드의, 언론의 광기가 얼핏 느껴졌다.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홈런 맞지 않을 거라고 광적으로 믿는다는 거지. 좀 무섭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만약 내가 이번 시즌을 정말 X나게 잘 보낸다고 해보자.
얼마나 더 미쳐 날뛰겠어.
브라이언에게 했던 말처럼, 시즌 끝까지 지금 기세를 유지해서 슈퍼스타가 된다면···
‘오, 나중에 나 죽으면 박제시켜서 콜리시움 앞에 전시도 해두겠는데?’
그 뭐야, 공산당 대장들 보면 그렇게 됐잖아.
어쩌면 먼 훗날 나도 그렇게 될지도.
뒷일을 생각하니, 조금 염려스럽지만, 어쨌든 그들의 그러한 광기가, 이번엔 내게 이롭게 작용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광기어린 마녀사냥에 가깝지만,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랑 동료들밖에 없잖아?
당장 얘를 봐. 브루스 맥스웰. 얜 그나마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내가 멀쩡하다는 것도, 지난 경기의 부진과 피홈런은 그냥 컨디션 저하라는 것도.
그런데도 여전히 한줌의 걱정을 못 놓고 있잖아? 이미 다 사정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즉,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생각보다 훨씬 더 타당하게 느껴지겠지.’
당장 지지난 경기에 노히터 한 투수.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의 성적을 올리고 있는 투수가 부진한다면.
컨디션 저하도 떠오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원인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 양반도 손쉽게 범인으로 몰린 거고. 제법 내용이 그럴듯하잖아?
아, 물론 나중에 더 심해진다 싶으면, 어느 정도 쉴드를 쳐줄 생각이다.
‘좀 불쌍하잖아.’
날 향한 팬심을 느낄 수 있게 돼서,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험한 행동이니,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딱 하면 되겠네.
아무리 그래도, 도로 한복판에서 사인받아갈 정도로 내 팬인데.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SNS가 없기에, 브라이언 통해서 짤막하게 인터뷰 정도 내보내면 되겠지.
아, 브라이언한테는 혼났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재깍재깍 자신한테 알려줘야지, 왜 그걸 혼자 숨기고 있냐면서.
‘민감한 사안이긴 하지. 정신적인 충격이란 게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하니까.’
구단은 오히려 별말이 없다.
날 방치한다기보다는, 그냥 괜히 들쑤셔서 더 악화시키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거 봐, 바깥에서 보기엔 얼마나 그렇겠어? 동료들이야 내가 멀쩡하다는 걸 알고 금방 식어버렸지만.
외부의 시선으로 보기에 나는 생각보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다. 이러다 훅 무너질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어, 진짜로 그런 거 아니야?’
원래 정신의 상처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던데.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이미 마음은 썩어가고 있는 걸지도?
“브루스, 나 좀 심각해 보이냐?”
“어? 어··· 아니? 진지한 척하는 애새끼- 아니, 어린애처럼 보이는데? 안 어울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라.”
“이 새끼가, 대배우님을 몰라보고. 아무튼 알았다. 잠깐 기다려.”
아무튼 나도 최소한 겉으로는 그렇게 행동할 예정이다. 묘하게 불안한 것처럼, 묘~하게 뭔가 아픔을 품고 있는 것처럼.
원래는 중간을 지키면서, 적당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때우는 게 목표였지만. 좋은 건수가 들어왔으니, 적극적으로 이용해야지.
‘이보다 약한 척하기 더 좋은 상태가 어딨어?’
약한 ‘척’이 아니라, 지금은 실제로도 약하지 않냐고?
내가 전보다 내려온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진짜 개X밥은 아니야. 최소한 타자들 조질 정도의 여력은 있어.
그보다도 더 약하게 보이게 하겠다는 뜻이지. 만약 이 방법이 잘 통한다면, 명분을 제공해준 팬에게는 소정의 상품을 드릴 예정이다.
나락에서의 구원.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앞으로 오클랜드에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것 같던데.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런데··· 요새 너무 잘 먹어서 그런가. 얼굴에 개기름이 다 껴 있네.’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때깔이 좋아. 개기름까지 꼈네. 메이저리거로서 주지육림을 누리면서, 배때기에 기름이 찼구만.
메이저리그 전세기라서 그런가, 좌석에 간략한 거울도 달려 있는데, 그걸 통해 살짝 얼굴을 보니, 안색이 너무 좋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젠 좀 어떠냐?”
“오··· 뭔가 미묘한 느낌이 드는데? Suck, 너 진짜 진로를 잘못 찾은 거 아니야?”
“요즘 들어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스카는 껌이었을 것 같은데.”
최대한 얼굴 표정에 심혈을 기울이며 다시 내보이자, 브루스는 그럴듯하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진짜 연기를 해야 하나?
물론 이건 분명히 통하긴 하겠지만, 완벽한 방법이라고 보기는 뭣하다, 그러니 또 다른 수도 준비해야겠지.
그렇게 사악한 계획을 담은 비행기가, 원정지, 시카고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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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야구팀.
이렇게 말하면 어디가 떠오를까?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컵스지. 컵스랑 뮤지컬 말고 시카고에 떠 뭐가 있는데?
물론 입밖으로 이딴 개소리 내뱉으면 X신 취급받겠지.
아무튼 시카고와 야구를 함께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컵스가 떠오른다.
컵스를 생각하면 염소의 저주가 떠오르고, 순종 때부터 우승 못 하다가, 작년에 막 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고.
그런 사이클이지.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이클 속에 ‘화이트삭스’는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이 경우는 화이트삭스가 비인기라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컵스가 너무 압도적인 인기팀이라는 게 크긴 하지만.’
어쨌든 시카고 지역 내에서도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그다지 대단한 지지를 받는 팀은 아니다.
다만 그래서 그런지, 그런 종류의 연고지 언더독 팀들이 흔히 보이는 열정 팬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열정 팬이고 나발이고, 레이더스 한 번 보면 간에 기별도 안 오지.’
조금··· 솔직히 많이 Crazy한 양반들의 극단적인 사랑을 받는 상황이라서, 그런 건 그리 와닿지 않았다.
뭐가 어떻든 간에 레이더스보단 덜하겠지. 비행기에서 내리고, 경기장,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로 향하니.
이번에도 여지없이 따라온 건지, 몇몇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지, 익숙한 얼굴이 아니라, 익숙한 복색이라고 해야겠지.
난 저 양반들 맨얼굴을 본 적이 없거든. 마스크나 페이스페인팅 벗겨 놓으면 의외로 정상적일 것 같아서 더 무섭다.
‘대체 돈은 어디서 나는 거야? 야구 보는 게 직업인 수준인데.’
어쩌면 겉으로 드러나는 광기와 달리, 성공한 인생을 즐기는 건실한 사람들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매번 내 원정 경기를 직관하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비행기 값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니잖아?
“참 대단한 양반들이야. 매번 나타나는 거 보면.”
“혹시 교대하는 거 아니야? 겉모습이 비슷해서 다 똑같은 사람들로 보이는 거지. 실제로는 2교대, 3교대로 직관하는 거고.”
“그럼 저 양반들이 전부가 아니라, 그에 두 배라고?”
“오··· 그건 좀···”
신선한 가설을 제기한 브루스는 내 말에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무튼 저 양반들이 있어서 그런가, 필리건 정도가 아니라면야, 강성 팬덤 따윈 간에 기별도 안 오고.
진짜 내 멘탈을 건드린 건, 화이트삭스 팬이 아닌, 홈구장이었다.
“와··· 상대적 박탈감이 장난이 아닌데? 여기 왜 이렇게 좋냐.”
“원래 그래. 신식 경기장 원정오면 기분이 좀 이상하다니까?”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는 겉모습도 멀끔했지만, 안쪽은 그보다도 더 좋았다.
콜리시엄이랑 비교하니까, 현타가 올 정도야. 이렇게 좋은 곳에서 야구하는 놈들도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곳에서 야구하는 걸까.
사실 여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식 구장들 가보면 죄다 이런 느낌이긴 한데. 아무튼 참 부러워.
“오늘은 좀 괜찮아? 몸이 올라온 것 같아?”
“그냥저냥 저번 경기랑 비슷해요. 아마 몇 경기쯤 이럴 거 같은데.”
“으음··· 그럼 오늘도 딱 6이닝 정도만 던지는 걸로 하자. 불만은 없지?”
“어우, 6이닝이면 감지덕지죠.”
아무튼 좋은 환경이라서 그런가, 대니얼과의 워밍업도 평소보다 조금 더 즐겁게 마무리 지은 뒤, 불펜으로 향했다.
투수코치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최근 들어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내가 무리를 안 한다고 하니, 참 기쁘면서도. 계속해서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으니, 괜히 쫄리겠지.
혹시라도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바로 1빠따로 날아가는 게 투수코치라는 자리니까.
거기다 코치로서 선수의 멘탈을 괸리하는 것도 주요 업무인데, 난 최근에 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으니까.
“나이스볼~”
확실히 구위는 여전하다.
불펜포수 반응만 봐도 그렇지. 늘 하던 립서비스를 해주기는 하는데, 거기엔 쏘울이 담겨있지가 않았거든.
무게감이 부족해서 그런가, 약간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기도 하는데.
언제는 너무 힘들다고 징징거리더니, 이젠 안 아프다고 아쉬워하네.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시원찮죠?”
“어? 에이, 이 정도면 된 거지. 여전히 다른 투수들보다 훨씬 묵직한데. 변화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혀가 기네. 손색이 있다는 뜻이지. 그래도 오늘은 괜찮다. 손색이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보여야 하거든.
그러니 딱 좋은 반응이야.
아마도 약한 척의 효과는 일시적일 거다. 다시는 안 통하겠지. 물론 내가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만약 정말로 먹혀서, 오늘 경기도 잘 넘긴다면···
‘그 뒤로는 의심이 더 심해지는 거지. 이것마저도 연기인가, 아닌가, 모든 게 의심스러워질 테니까.’
그런 목표를 가지고, 시간 맞춰 불펜을 나와, 그라운드로 나오자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우우우!”
“조금만 참지, 그랬냐! 첫 홈런은 우리가 만들어주려고 했더니!”
아니,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우리랑 화이트삭스가 라이벌도 아닐 텐데? 내가 알기론 아마도 그렇다.
‘딱히··· 여기랑 접점이 없는데. 왜들 지랄이야?’
몇 번 쥐어박은 팀이면 이해라도 하지, 니넨 나 오늘 처음 보면서 왜 그래?
원정에서 야유당하는 거야, 나처럼 쩔어주는 선수한테는 일상이긴 한데. 뭔가 X나 억울하네.
‘아, 생각해보니, 한번 본 적 있기는 하네. 그것도 아주 찐하게.’
시범경기. 캑터스 리그에서 한 차례 맞붙기는 했는데. 그거 말곤 없는데?
설마 겨우 시범경기에서 7이닝 퍼펙트 했다고 이러는 거야? 더럽게 째쨰하네. 정규시즌 경기도 아닌데.
‘아, 하긴 짜증나긴 하겠다. 자기들 제물로 삼아서, 입 털었으니까. 퍼펙트 할 수 있지만, 일부러 포기한다는 식으로.’
화이트삭스전은 나한테 있어서 뜻깊은 경기다. 그 덕에 개막전 선발을 쟁취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또 다르게 본다면, 화이트삭스 팬들은 조금 내가 X같이 보일만도 하다.
마치 화이트삭스쯤은 손쉽게 퍼펙트로 조질 수 있지만, 특.별.히. 참아준다는 식으로 느꼈을 테니까.
그때의 짜증, 상대팀 선발투수라는 타이틀이 주는 기본적인 적개심, 거기에 잘 나가는 다른 팀 선수가 괜히 미워 보이는 것까지 겹쳐졌으니.
야유할 만하긴 개뿔.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이건 강성 팬덤이 아니라, 그냥 또라이 아니야?’
이유 없이 지랄 맞게 구니까, 나도 같이 컹컹 짖고 싶은데, 꾹 참았다. 아니, 오히려 표정을 무너뜨렸다.
“X까 X발놈들아! 어딜 x신 새끼들이 우리 Suck한테 지랄이야?”
“컵스한테 쳐발린 X새끼들 주제에, 어딜 아가릴 처 열어? 안 닥쳐?”
“야구 보기 싫으면 꺼져 X발!”
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우리 든든~한 레이더스가 알아서 지랄해 주니까.
“Suck! 이 X새끼들한테 아주 본떼를 보여줘!”
“이 새끼들이 너 홈런 하나 맞았다고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누가 King인지 똑똑히 알려주자고!”
그게 참 좋기는 한데.
오늘은 이런 부탁을 못 들어줄 것 같다. 최소한 경기 초반에는. 일단 혼을 쏙 빼놔야 했으니까.
‘1회와 2회가 가장 중요해. 다행히 제구는 살아 있으니. 먼저 적당히 이미지부터 박고, 그다음에 조지자.’
흘끔 상대팀 덕아웃과 대기타석, 그리고 올라오는 타자를 훑었다.
미안하지만 시범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쪽들은 내 이미지 구축을 위한 제물이 되어줘야겠어.
아니꼬우면 X나게 두들겨서, 마운드에서 쫓아내면 돼. 쉽지?
####
저 ‘루키’가 웬 거지 같은 팬에게 시달렸다는 소식은 벌서 시카고에도 퍼졌다.
어찌나 전파가 빠른지, 다리가 아니라, 아주 날개가 달린 듯이 온 사방팔방에 퍼져나갔지.
그만큼 저 녀석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전혀 상관없는, 아니, 그냥 고깝게 보고 있는 곳들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명실상부 이번 시즌, 2017년이 낳은 최고의 라이징 스타 중 한 명이니까.
“핑계도 좋네.”
“어린 녀석이 나쁜 것만 배웠어. 홈런 하나 맞았다고 징징 짜기나 하고.”
“뭐? 팬 때문에 멘탈이 털려서 홈런을 맞아? 요즘은 악성 팬들이 손목 인대라도 자르고 가나보지?”
물론 그걸 믿는 사람은 없다.
저 녀석의 광적인 팬들을 제외한다면, 솔직히 죄다 개소리, 그것도 아주 질 나쁜 개소리로 여기고 있지.
상당한 개자식, 또라이라는 거야, 이미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선 정평이 난 상태고.
최소한 예사 멘탈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투수다.
그런 녀석이 뭐? 겨우 팬 하나한테 겁을 먹어서 멘탈이 흔들렸다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경기를 망쳤고?
지나가는 개 한 마리 잡고 물어봐도, 그건 무슨 멍멍 짖는 소리냐며 되물을 거다.
“근데 홈팬들 왜 이래?”
“누가 보면 컵스랑 붙는 줄 알겠는데? 살벌하네.”
“쟤 때문이지, 쟤. 이상하게 밉상이잖아.”
코웃음 치며, 바짝 집중을 올린 그들과 달리, 홈팬들, 자랑스러운 시카고의 시민들은 꽤나 격렬했다.
일생의 원수까지는 아닌데, 그냥저냥 적대감을 대놓고 표출하고 있는데. 화이트삭스 선수들 역시 그게 조금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한 대 때리고 싶은 투수의 얼굴에 다들 이애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도 저번 경기 보니까, 좀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하던데. 그치?”
“모르지. 원래 노히터 한 다음에는 좀 망치는 법이잖아? 오늘은 또 다를 수도.”
“멜키! 간만 보고 와, 간만.”
격렬한 팬들. 고요한 선수단.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그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1회 말, 첫 공격이 시작됐다.
1번타자 멜키 카브레라는 동료들의 기대를 짊어진 채, 배터박스에 들어섰고, 이내 눈썹을 씰룩였다.
‘뭔가··· 시범경기에서 봤을 때랑은 약간 다른데?’
시범경기에 출전했었다.
7이닝 퍼펙트에 일조했지.
자신이 저 루키의 신화에 한몫했다는 것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그걸 바탕으로 해서, 개막전에 등판하게 됐고, 1선발이 됐고, 에이스가 됐고. 결국 여기까지 온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땐 마치 만물의 위에 선 절대자처럼 내려봤다면,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었다.
흘끔흘끔 관중석을 보기도 하고. 왠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것 같기도?
‘저 새끼, 지금 저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코웃음 쳤다.
저 녀석이 낚시질을 해서, 레인저스를 완봉으로 털어먹은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모르는 선수가 없지.
그런데 또 약한 척을 하시겠다고? 우리가 믿을 것 같아? 우리가 X신인 줄 아냐?
무시당한 것 같아서, 약간의 불쾌감이 피어날 정도다. 그것을 오로지 집중으로 치환한 멜키 카브레라는 초구에 다시금 눈썹을 까딱였다.
“스트라이크!”
제대로 들어왔다.
아주 묵직한 몸쪽 코스.
저 녀석의 주특기지.
다만 무브먼트가 떨어진 건 사실인 건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라이징 패스트볼은 아니다.
구속을 빼고 평가한다면, 꽤나 준수한 포심 정도. 구속까지 포함하면, 그렇게까지 뒤어난 건 아니다.
‘자신감 있게 던지기는 했는데··· 왜 이상하냐.’
분석 영상 속 Go는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투수다. 언제나 항상 자신감 있게. 아주 당당하게. 미친 짓거릴 하는 녀석이었지. 시범경기에서 봤던 모습도 그랬고.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힘겹게, 마치 억지로 쭉 넣은 것처럼, 공 끝이 무디다.
정말로? 혹시? 어쩌면?
슬금슬금 차오르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킨 멜키 카브레라였지만,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씹-’
“스트라이크!”
2구는 빨랐다.
구속이 아니라, 타이밍이.
재빠르게 하나 던졌는데. 그 빠른 타이밍에 코스를 잘못 판단하여, 멜키 카브레라는 헛스윙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몰리자, 그는 연기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여전히 찝찝함이 감돌았다.
‘포심, 슬라이더. 그렇다면, 이번엔 서클이나 쓰리핑-’
“볼!”
‘거.’
애써 타석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투수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분명 저 투수의 속도가 빨라지는 건 4회 이후로 아는데. 오늘은 어째서 처음부터 급하게 달리는 거지?
마치 무언가에 쫒기는 것처럼. 아니, 쫒길 리가 있나? 저렇게 성적이 좋은 녀석이.
사이 영을 넘어서, MVP까지 거론되는 놈인데. 대체 뭐가 아쉽다고?
급격한 투구간격과 가쁜 피칭은 멜키 카브레라의 머릿속을 뒤흔들었고. 마지막 4구 역시-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나 빨랐다.
서클 체인지업. 녀석의 트레이드마크. 정말이지 괴물 같다. 시범경기 이후로 본 적이 없기에, 머릿속에서 잊혀졌고. 영상으로 봤을 때는 그저 X같은 공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냥 완성도가 달랐다. 이런 걸 던지면서 약한 척을 한다고? 그게 먹히긴 먹혀?
‘근데··· 뭔가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투수를 흘겨봤지만, 투수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몸이 닳은 사람처럼 다음 타자를 봤을 뿐.
“You-Suck!”
“빨리 꺼져! 괜히 시간 개기지 말고!”
“우우우, X신 새끼! Suck한테 쳐발리니까 기분이 어떠냐?”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거라기보다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눈치였으니까.
‘루키, 그래, 어린놈이기는 하지.’
어쩌면, 그래, 어쩌면?
처음 작은 불똥처럼 시작했던 생각은 점점 덩치를 키웠고, 그것을 품은 채 그는 타석에서 물러났다.
“어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냥 그래요. 공이 좋기는 한데, 데이터처럼 괴악한 수준은 아닌 것 같던데.”
“음, 그러면 진짜 슬슬 체력이 떨어진 건가? 아니지, 영리한 투수라고 했으니··· 타석에서 봤을 때 느낌은 어땠어?”
“그냥 뭐랄까···”
맞이해준 타격코치와 대화하던 멜키 카브레라는 이내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보냈다.
어느덧 시작된 승부.
투수는 자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달렸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굉장히 빠르게. 아주 거칠게. 아니, 그보다는···
“조급···하다고 해야 하나?”
“조급?”
알쏭달쏭한 말에 타격코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덕아웃으로 보내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삼진이 올라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Suck!”
“그래, 이게 Suck이지! 저번은 그 X같은 새끼 때문에 그랬던 거야! 이게 원래 Suck이라고!”
원정 팬들은 좋아한다.
저 녀석이 삼진 잡을 때마다 타자에게 조롱의 의미로 ‘You-Suck’이라고 외치는 게, 선수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데. 생각보다 기분이 더 더럽다.
다만 지금은 그들이 언급한 ‘X같은 새끼’가 더 귀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를 말하는 거겠지.
저 녀석이 홈런을 맞았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버린 불쌍한 인간 말이야.
멀쩡한 사람 하나 나쁜 놈 만들어 놓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웃!”
이젠 잘 모르겠다고 멜키 카브레라는 생각했다. 1회 말은 빠르게 끝났다. 아주 눈 깜짝할 사이지.
삼진 두 개를 곁들인 삼자범퇴로, 타자들을 시원스럽게 때려잡은 투수는 분명 화이트삭스도 잘 알고 있는, 그 대단하다던 Suck의 모습이기는 했지만.
듣던 것처럼, 그리고 영상으로 보던 것처럼, 시원스럽게 던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억지로, 어떻게든 빨리 내려가려는 것 같잖아. 이건.’
결국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그 약간의 불똥이, 조금씩 불씨를 키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