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올라간 삼진.
이번 경기 일곱 번째 삼진이다. 후련하게 헛스윙한 타자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타석에서 물러났고, 그것으로 5회가 종료됐다.
‘역시, 이젠 확실히 감을 잡은 것 같네.’
휴스턴 타자들에게선 전처럼 긴가민가한 의구심이 없었다.
약간의 자책과 분노, 그리고 탐욕 정도로 축약 가능하겠구만.
드디어 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깨달은 것 같은데···
“평소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뭐, 어차피 다음 이닝에 내려갈 건데요, 있는 힘 꾹꾹 담아서 던지는 거죠.”
“뒷일 생각 안 하고 우당탕당 던지고 내려가시겠다? 나쁜 생각은 아니네.”
그래서 어쩌라고. 너넨 이미 늦었어. 내가 말했던가? 앞으로 다시 컨디션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연기력이 중요하다고.
그건 맞는 말이다. 연기력이 중요하지. 최대한 타자들을 속여야 하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연기력이 웬만한 배우 뺨치기는 하는데, 진짜 배우는 아니잖아? 언젠가는 들통이 난다는 거지.
그때 필요한 게 스피드다.
타자들이 다 알아버렸을 때, 그래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날 잡아 잡수시려고 할 때-
‘딱 치고 빠지는 거지.’
4회까지 협잡질로 버티고, 그러다 속도 높여서 훅 쓸어 담은 다음에, 체력 떨어지기 전에 내려간다.
히트 앤 런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의미의 런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손가락 감각까지 둔해졌다면, 좀 힘들었겠지만. 그나마 다행이지.’
구종 많이 늘려놓은 보람이 있어. 워낙 선택지가 많고, 또 내가 아리까리하게 구니까, 타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스티븐도 수고했어요. 입을 얼마나 잘 털었으면, 아직도 의심하는 놈들이 있던데.”
“뭐, 그 정도는 기본이지.”
은근하게 추켜세워주니,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는구만. 이 양반 은근히 감정에 솔직하단 말이야.
하긴, 감정에 솔직한 양반이니까, 시범 경기 때 대놓고 루키 찌그레기랑 기 싸움을···
‘뭐,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 지나간 일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여러 가지 방법들 덕분에 일단 애스트로스는 멘탈이 터졌다. 이건 확실해.
타자들 얼굴 좀 봐라.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
마음잡고 자신감 있게 타격했으면, 더 두들길 수 있었던 투수를 상대로 괜히 쫄아서 시간만 날린 거잖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공략할 수 있다면, 그나마 속이라도 후련하겠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 초반 동안 적절하게 투구 간격을 조절하며 만든 타이밍은 그런 것조차 타자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휴스턴이 지나간 기회에 허탈해 했다면, 나는 반대로 확신을 가지고 공을 던졌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괜히 신비로운 척 할 필요 없이, 쭉 달리면 됐으니까.
나는 이런데, 타자들은 아무래도 이런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다.
‘아주 단단히 집중했구만. 뭔가 고상한 심리전 같은 걸 바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젠 그런 거 없어. 그러게 진작 잘했어야지.
“스트라이크!”
재빠르게 초구를 찔러 넣었다. 처음부터 하이 패스트볼.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의도한 코스는 아니다.
살짝 들어왔네.
잘못하면 한복판이 됐겠어.
제구력을 살짝 내려놓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제구가 흔들린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게 아니라, 잽싸게 때리고 튀는 거니까.
“볼!”
“스트라이크!”
“파울!”
‘이걸 쳐?’
숨 가쁘게 진행되는 승부에, 타자의 눈이 빙빙 돌았지만, 마지막 커터를 가볍게 커트했다. 자신감 있는 스윙.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잘못 잡았거나, 애매하게 제구를 잡으려고 했다면, 위력이 떨어져서 바로 정타가 나왔겠지
위험성이 높기는 해도, 지금처럼 가끔 무지성 돌격이 먹힐 때가 있단 말이야.
이번 파울로 나는 약간 호흡이 끊겼지만, 타자는 타이밍을 잡은 건지, 눈을 부라리며 단단히 집중하는데. 내가 그런 걸 두고 볼 상황이 아니라서.
“타임!”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리 둘 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안녕하세요? 저는 고유석입니다. 혹시 신사분께선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알렉스 브레그먼?
참 좋같은 이름이군요.
제가 마이너에 있을 때 아주 투수를 못 살게 굴던 밉살스러운 놈이 있었는데, 걔랑 이름이 똑같으시군요.
내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을 때, 타자, 알렉스 브레그먼은 뜬금없는 타임 선언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타이밍을 잡았다 싶었는데, 바로 끊고 나섰으니, 기분이 참 더럽겠지.
“왜?”
“쟤, 타이밍 잡아서요. 대충 시간 좀 개기다가, 내려가요,”
“쯧, 이젠 똥개훈련까지 시키네. 오케이, 딱 20초 있다가 내려갈게.”
혹시라도 나한테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지, 스티븐 보그트는 잔뜩 긴장해서 올라왔지만, 태연한 말에 혀를 찼다.
그래도 베테랑답게, 최대한 심각한 얼굴로 스콧 에머슨을 호출하는 척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했고. 가짜 사인이었기에, 코치 역시 시늉만 하다가 그쳤다.
“이십구··· 삼십. 오케이, 이제 됐네. 이만 집으로 돌아가슈.”
“그래, Suck 너 때문에 내가 별짓을 다 한다, 진짜. 이제 둘 남았으니까, 빨리 잡고 금방 내려가자.”
“바로 던질 거니까, 아닌 척 기다리고 있다가, 잘 잡아요.”
스티븐 보그트는 돌아갔다.
우리가 잡담이나 나누는 사이, 홀로 외롭게 배트나 휘두르고 있던 알렉스 브레그먼은 아직 감을 놓치지 않은 건지, 잽싸게 배터 박스로 들어와 타격을 준비했지만. 어리구만, 어려.
마이너를 숨풍숨풍 월반하고, 빅리그에 직행한 엘리트라서 그런가, 노련함이 떨어지네.
앞으로 주의해라. 이럴 때는 너도 타임을 요청해야 하는 거야. 어차피 흐름 깨진 거, 최대한 망쳐서 난전으로 유도해야지.
그렇게 대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배터박스로 들어오면-
“스트라이크 아웃!”
나처럼 X같은 놈한테 된통 당하는 거라고. 그걸 알아야 돼. 물론 니가 나보다 빅리그 선배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거라고.
1년 전만 하더라도 눈도 못 마주쳤던 슈퍼루키한테 훈계를 다 해보고, 팔자 폈네.
녀석이 배터 박스에 들어오고, 주심이 인플레이를 선언하는 즉시 나는 공을 던졌다.
와인드업까지 버리고, 세트 포지션으로.
순식간에 공이 날아오니, 잔뜩 준비하고 있던 것에 비해, 알렉스 브레그먼은 다소 허무하게 헛스윙했다.
내가 꼰대스럽게 말하기는 했는데, 조언만큼은 진짜다. 누가 봐도 몸이 닳은 것 같은데. 저걸 이용 못 하면 바보지.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후속타자까지 삼진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닝이 끝났고, 그것으로 오늘 내 피칭도 끝났다.
“나이스, 나이스.”
“원래 노히터 다음엔 하나 맞는 거지. 괜찮아!”
“까짓거 하나 맞으면 어때? 삼진 팍팍 잘 잡으면 되는 거지!”
6이닝 2실점 1피홈런 9K.
이 정도면 좋은 성적인데. 왜 위로를 하고 그러는 걸까.
홈팬들은 괜찮아를 연호하며 박수를 쳐줬는데, 기분이 미묘했다. 내가 저 양반들을 많이 배려놓기는 했어.
눈이 너무 높아졌단 말이야.
괜찮은 성적에도 아쉬워하는 거 보면.
“말했던 것처럼 이번 이닝이 끝인 거 알지?”
“예, 어차피 더 막을 밑천도 없어요.”
“그래, 오늘은 수고했고, 충분히 잘했으니까, 신경쓰지 마.”
다만 스콧 에머슨은 만족스러운 눈치다. 이 양반이야, 어떻게든 내 이닝을 줄이는 게 최대의 목적인 사람이니까.
6이닝만 딱 마치고 내려오니, 그냥 기분이 좋은 거겠지.
아마 앞으로는 쭉 그럴 거고.
‘6이닝 2실점이라··· 성적도 애매하게 찍히기는 했네. 두 자릿수 삼진도 못 했고.’
일단 경기는 끝났다.
내리막의 시작치고는 꽤나 완만한 성적을 찍었다고 볼 수 있지.
다만 홈런 하나 얻어맞은 것 때문에 말이 나올 텐데. 반대로 성적 자체는 준수하고, 지금까지 쌓아놓은 게 워낙 많다보니, 극단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런 분위기를 조장할 언론이, 이번 시즌 동안 나한테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니까.’
아무리 이슈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 여기서 더 엇나가는 순간, 신뢰도가 떨어지니까.
그러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다소 미묘한 밸런스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을 텐데.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는 방향이다.
‘얌전~히. 전반기 끝날 때까지 그렇게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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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클랜드가 결국 재역전해내지 못하면서- 경기가 막을 내립니다.
-중반까지는 페이스를 잘 지켜왔던 오클랜드인데, Go가 내려간 이후로 급격하게 점수를 내줬던 게 결국 패착이 됐네요.
경기는 끝났다.
고유석이 교체된 뒤. 막판에 울분을 토해내듯, 휴스턴이 점수를 쓸어 담았고.
결국 막판에 역전해내면서, 애스트로스가 승리를 가져갔지만. 경기의 승패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노히터 징크스에 걸린 Go! 휴스턴에게 첫 홈런을 내주다!>
<고유석, 결국 올라간 피홈런, 하지만 여전히 기세를 이어갔다!>
그보다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일이 있었으니까.
6이닝 2실점 9K.
사실 성적만 놓고 본다면, 꽤나 준수한 피칭이다. 선발투수로서 충분히 제몫을 다한 셈이지.
허나 그 1실점 중 하나, 피홈런으로 올라간 하나가 중요했다. 난공불락의 거벽이 처음으로 틈을 보였으니까.
준수한 성적과 첫 피홈런.
그 두 가지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경기 동안 애스트로스 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몰락의 전조? 확연히 줄어든 무브먼트! 최고의 루키는 혹사로 무너졌다!>
└진짜 슬슬 떨어지는 건가?
└다른 곳도 아니고, 콜리시엄에서 홈런 맞은 거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경기 영상 보니까, 확실히 패스트볼이 좀 약하더라.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하면.
5월의 폭주와, 6월의 파인타르 의혹 정면돌파 이후. 노히터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던 슬럼프라는 소재가 다시금 떠올랐다.
다만 이전의 눈초리가 그저 잘나가는 루키를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염려에 가까웠다는 게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2500~2600->2400rpm, 회전수가 급격하게 떨어진 Go?>
회전수. 처음으로 피홈런을 허용하면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포심의 회전수였다.
고유석의 경우 리그 최정상급의 회전수를 가진 투수였고, 압도적인 수직 무브먼트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평가받은 투수다.
시즌 개막 이후로 꾸준하게 상승했던 지표가 한순간 훅 떨어진 것은 전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저거 낮은 거야?
└사실 2400정도면 낮은 건 아니지. 리그 평균보다 훨씬 높으니까.
└근데 Go는 원래 그것보다 훨씬 더 높게 찍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물론 여전히 높은 수치기는 했다. 리그 평균이 2200~2300정도인 걸 감안하면, 그보다는 훨씬 높으니까.
허나 어찌 됐든 갑작스럽게 떨어진 회전수는 사람들의 걱정을 자아내기 충분했고, 몇몇은 그 원인을 혹사에서 찾기도 했다.
<106이닝, 상대 타석 380. 0점대 ERA와 리그 전체 1위 탈삼진에 가려진 어둠!>
<제2의 마크 프라이어! 빌리 빈이 그토록 강조했던 메디신 볼은 어디에?>
<혹사는 선수를 망치는 지름길! Go의 붕괴는 이미 시작됐다!>
└지랄 났네, 이게 무슨 혹사야? 겨우 106이닝 밖에 안 던졌구만.
└솔직히··· 혹사 맞지. 이제 갓 데뷔한 투수니까.
└루키 시즌인데 선발 로테이션 딱딱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혹사이기는 하지.
└106이닝, 진짜 많이 던지긴 했네. 아직 전반기 끝나려면 조금 더 남았는데.
고유석은 애스트로스전을 포함하여, 전반기 동안만 106이닝을 던졌고, 그건 분명 루키라고 보기에는 비정상적인 이닝 소화였다.
대부분 루키 선수들이 아무리 선발투수로 데뷔한다고 쳐도, 풀시즌 기준 180이닝이 제한선이라는 걸 감안하면.
고유석은 그 절반 이상을 전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화한 셈이니까.
드디어 나온 피홈런. 저조해진 무브먼트와 회전수. 단순히 노히터의 후유증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었기에, 그런 반응이 나왔지만.
<홈런의 아쉬움에도, 굳건함을 뽐낸 Go! 삼진쇼로 애스트로스를 격파!>
<부진의 시작? 그저 운이 없었을 뿐! Go는 여전히 강력하다!>
반대의견도 적지는 않았다.
회전수 저하가 조금 도드라지긴 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서 피홈런을 제외한다면,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성적이었으니까.
또한 경기 후반부터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타이트한 인터벌을 바탕으로 한, 스피디한 피칭을 선보였다는 것 역시 주요했고.
마치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으니까.
[#Rangers]
[그래서, Suck 걔가 맛이 갔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죄다 말이 다르네.]
└그게 애매하다는 거지.
└무브먼트랑 회전수 보면, 드디어 좀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근데 또 막상 안타 좀 맞은 거 제외하면, 타자들 잘 잡던데?
└여기 레인저스 게시판 맞지? 니들 왜 걔 경기 찾아보고 있냐.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의 정보를 알아야지.
└사실 X나 멋지지 않냐. 우리한테 완봉한 개자식이긴 한데, 솔직히 너무 내 취향이야. 구속도 빨랐으면 완벽했을 텐데.
└그래, 잘 알겠다. 그럼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A’s 게시판으로 꺼져.
그 기이한 간극이 경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고유석 본인이 바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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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의 분위기이기는 한데, 내 생각보다 반응이 조금 크기는 했다.
난리도 아니더라.
고작 홈런 하나 맞은 거 가지고, 왜들 그리 유난인지. 누가 보면 내가 몹쓸 짓이라도 당한 줄 알겠어.
아주 온갖 곳에서 괜찮냐, 별일 아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힘내라 등등.
온갖 종류의 연락이 왔다. 누가 보면 내가 만두라도 큼직하게 먹은 줄 알겠네.
만두가 뭐냐고? 그··· 있잖아. 그거 말이야.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은 거.
아무튼 그런 게 있다, 매국노가 되기는 싫으니,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아야지.
“Suuu- 아니, Go? 맞죠? 경기 잘 보고 있어요. 언론에서 개소리하던데, 그런 건 그냥 무시해버려요!”
“그쵸, 개짖는 소리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 사인 해드려요?”
“예! 정말 감사- 아니, 아닙니다. 괜히 귀찮게 해드릴 수야 없죠. 정말로 괜찮습니다.”
“? 뭐, 예, 그러세요.”
바람이나 쐬려고, 드라이브 하거나 동네 마트에 갔을 때도, 알아보는 사람마다 죄다 조심스럽게 구는데. 그것 말고도 눈치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는 내가 사인펜이라도 들었다 싶으면 죄다 달려들었는데 말이야.
내 사인을 마다한다고? 오클랜드 사람이?
스타병아니다. 오클랜드 시민이라면 누구나 내 사인을 원하거든.
개소리 같지만, 명백한 진실이지. 그런데 내가 직접 사인을 해준다고 해도 마다하다니. 혹시 뭔가 문제라도 있나?
사실 내 사인이 희소성이 많이 떨어지긴 했는데, 막상 진짜로 거절 하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저번에는 도로 한복판에서도 받아가더니.’
오클랜드를 옭아매던 광기가 사라진 건 아닌 것 같다. 여전히 도시 전체에 내 얼굴이 가득한 걸 보면.
그러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그거 뭔지 알아차린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Suck, 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크리스한테만 말하고 입을 꾹 다무냐.”
“남자다운 것도 좋기는 한데, 너무 혼자 속으로 삭이는 것도 안 좋아.”
“그건 뭔 개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뭘 삭여?”
원정을 떠나기 전.
클럽하우스로 향하니, 보는 선수마다 죄다 개소리였다.
내가 뭐 어쨌다고?
내가 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니까, 그걸 뭐 어떻게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대견하게 보기도 했고.
아니 그니까 x발 뭔 소리냐고. 말을 해, 말을. 왜 니들끼리 알고, 니들끼리 감탄하고 그래. 나도 좀 알자.
“어? 진짜 모르는 눈치인데?”
“뭐야,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그러게, 얘 걱정을 왜 해? 또라이라서 우리랑은 마인드가 다르다니까?”
“난리도 아닌데, Suck 너 인터넷 안 보고 사냐? 그러게 SNS 좀 해라. 젊은 놈이, 원시인도 아니고. 별건 아닌데, 이거 진짜야?”
그러다 갑자기 내 욕을 하더니, 그제야 전말을 이야기해줬다.
광팬? 레이더스 말하는 건가? 그 양반들을 보다보면 조금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 하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정도 맨날 찾아오는 양반들인데, 이렇게 욕하면 쓰나.’
기사 제목에 당연히 레이더스가 떠올랐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일전에 있었던, 도로 위의 사인볼 수여식을 담고 있었으니까.
‘이건 또 어디서 퍼진 거야?’
대충 보아하니, 나한테 사인볼 받은 그 양반이 내 인성을 찬양하려고 팬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것 같은데.
그게 처음에는 그저 슈퍼스타를 향한 열성 팬의 기괴한 팬심 정도로 여겨졌지만.
‘홈런 맞으면서 변질됐네.’
문제는 지난 경기였다.
첫 피홈런도 맞고, 이전과 다르게, 조금 미묘한 모습을 보인 것과 연관된 거지.
괜히 날 놀라게 만들어서, 내가 집중력이 떨어졌고, 그것 때문에 홈런 맞았다는 건데.
이게 뭔 개소리야 싶었다.
‘그냥 피칭 사이클이 내리막이라서 그런 건데. 뭔 과도한 팬심 어쩌구저쩌구···’
이런 거에 영향 받을 거였으면, 진작 레이더스 때문에 멘탈 터지고도 남았겠지.
솔직히 처음에는 차량강도인 줄 알고 심장이 철렁이긴 했는데, 그보다는 해골바가지에 기괴한 페이스페인팅 하고서 내 이름을 외치는 레이더스가 더 놀랍다.
항상 새롭고. 볼 때마다 늘 짜릿하지. 그 양반들, 분명 야구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자기들 코스튬 자랑하려고 경기장 오는 거야.
“아무튼, 네가 괜찮다니까, 뭐, 다행이지만···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내가 그런 거에 휘둘릴 놈으로 보여?”
“절대로 아니지.”
“알면 됐네.”
시큰둥한 내 반응에 동료들은 머쓱한 듯 물러났지만, 그런 선수들과 달리, 인터넷 반응은 꽤나 격렬했다.
‘이제 보니, 기사도 한두 개가 아닌데?’
나한테 사인받은 양반은 천하의 둘도 없는 역적이 됐고, 지역 언론과 오클랜드 팬덤의 맹포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눈물의 고해성사를 하며, 본인 SNS에 사과문까지 올린 것 가은데.
어쩐지, 사람들이 사인을 다 마다한다 했다. 저렇게 되기 싫다는 거였구만.
사방팔방 공격받는 게 좀 불쌍해서 지금이라도 입이라도 열까 싶었지만···
‘아니지, 이런 거 용납하는 순간, 도로 위가 바글바글거릴 거야. 내 차 볼 때마다 달려올 거고.’
따라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으니,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과도한 팬심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 그것이 불러온 일시적인 부진. 그림이 그려지는구만.’
중요한 건,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라는 거였다. 이거 잘하면 써먹을 만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