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10화 (110/316)

110화

“근데··· 아직 ‘그거’는 가능한 거 맞지?”

“어, 볼넷이었으니까. 아직 하나는 가능해.”

“허··· 내가 이런 경기를 직접 볼 줄은 몰랐는데···”

‘그거’는 깨졌다.

볼넷이 기록됐으니까.

하지만 아직 ‘그게’ 남아있다.

대체 그게 뭐냐고?

최소한 콜리시엄 안의 사람들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에둘러 표현했을 뿐.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가능할까? 조금 걱정-”

“X발 입 안 닥쳐? 부정 타게.”

“저번에 시범경기 때도 그···거 하다가 중간에 교체됐잖아? 이번에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만약 오늘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투수코치나 감독 둘 중 한 새끼는 내 손에 뒤진다는 거야.”

정말로 할 수 있을까? Go라면 가능할 거야. 만약에 하나라도 맞으면··· 괜히 내가 방정맞게 입 놀려서, 부정 타는 건 아니겠지? 그는 신이야! 등등.

기대감과 불안감. 그 두 가지 감정에서 비롯된 수많은 생각이 사람들을 휘둘렀다.

몇몇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몇 번이나 제 손등을 꼬집기도 했고.

“투구수는 아직 넉넉하지?”

“그냥 Go 자체가 쌩쌩해. 내가 저번에 레인저스 때도 원정 가서 아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

“그거야, 당연하지! Go는 점점 더 강해지는 Monster니까.”

레이더스마저도 오늘 만큼은 조용했다. 다만 겉모습은 여전히 똑같았기에, 여전히 시선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콜리시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걸 바라고 있었다. 그 꿈이 이뤄지기를. 자신들이 직접 목도하기를.

“아웃!”

아니, 최소한 한 명은 제외해야겠지. 오클랜드의 공격, 우익수는 훌쩍 날아올랐다.

높이 솟구친 타구를 낚아챈 그는 멋들어진 호수비를 해놓고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훑어봤을 뿐. 마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무언의 외침을 하는 것처럼.

“그래··· 쟤만 넘으면···”

저 새끼, 저 자식. ‘그’ 판사 등등. 어쩌면 Go만큼이나 수많은 수식어로 불리는 선수.

저 녀석이 아직 남아있다.

그렇기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분명 애슬레틱스 자신들이 보기에도, 녀석은 무언가를 저지를 것 같았으니까.

“아웃!”

“아웃!”

공격은 빠르게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자들이 공격을 빠르게 끝냈다.

최대한 투수의 리듬에 어떠한 민폐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경기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한 명의 투수였으니까.

또한 이미 승리를 위한 점수는 충분히 나왔기에, 그들은 기꺼이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6회 말이 끝나고.

공수교대를 마친 순간.

한 관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 이닝, 볼넷으로 ‘그거’가 깨진 것 때문에, 대기타석에는 벌써 그 녀석이 올라와 있었으니까.

아까 전, 호수비를 하며 보였던 눈빛보다, 2배는 더 뜨겁게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X발, 제대로 작정한 것 같은데···’

차마 부정스러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기에, 속으로 삭이기는 했으나, 불안함에 뒷목이 뜨거워졌을 때.

터벅터벅,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를 보자, 그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저 새끼, 타자 애런 저지가 2배는 더 뜨거웠다면.

‘아, 괜찮겠네.’

Go는 아까 전보다 3배는 더 차가웠으니까. 고고하게 마운드 위에 우뚝 선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애런 저지의 불꽃은 꺼지리라는 것을.

####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 상태를 확인했다.

누군가에게 묻는 것처럼,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유석아, 너 멀쩡하냐?

답은 빨리 나왔다.

어, 멀쩡해. 최고야.

그래,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네. 왜냐고?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 봤어?

다 멀쩡하다고 하지.

상식적으로 이제 7회, 앞서 6이닝을 던졌는데 멀쩡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야. 그렇기에 질문을 조금 바꿨다.

‘할 수 있냐? 할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답변은 이번에도 빨랐고, 그거면 충분했다. 할 수 있다고 하잖아?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사람은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도 있어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중요했다.

사람은, 특히 투수는 어느 정도는 나르시즘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각박한 세상을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유석을 믿었다.

아마 이 경기장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내가 제일 믿음이 굳건할걸?

아, 저기 계시는 우리 레이더스 분들은 빼고. 저 양반들은 믿음이라기 보단 신앙심에 가까우니까. 난 그 정도는 아니거든.

아무튼 지금까지 정말로 잘 해온 녀석이기에, 굳게 믿었다. 이번에도 잘할 거라는 걸.

‘투구수는 67개. 많이 아꼈네. 어깨도 괜찮아. 평소보다 전력투구를 좀 더 하긴 했지만, 오늘 몸 상태를 감안하면, 오히려 아껴 쓴 거야.’

그런 믿음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에서 고유석은 아직 괜찮다. 아니, X나게 좋다.

대놓고 하라면서, 등을 떠미는 것처럼 컨디션까지 완벽한데, 도리어 투구수는 평소보다 더 아꼈으니. 쌩쌩한 게 당연하지.

평소에는 4회, 못해도 5회부터 속도를 높이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건 체력이 심하게 빠지니까. 하지만 이번 이닝부터는 시동을 걸어야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저 녀석 잡고, 그때부터 달린다.’

대기타석을 흘끔 봤다.

어우, 살벌하다, 살벌해.

야구가 아니라, 살인이 하고 싶은 것 같은 눈인데?

덩치도 산만해서, 저기다 마스크 하나만 딱 쓰면,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겠네.

걔 이름이 제이슨이던가?

지치긴 했나봐.

멀쩡하다고 해놓고, 잡생각을 하는 거 보면. 아니지, 깡 좋네, 고유석. 이런 상황에 집중도 안 하고.

‘미친놈아,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어.’

다시 정신을 다잡았을 때, 타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작 타석에 있는 건 자신인데, 왜 다른 놈을 보냐는 거지.

거참, 수령각하나 되시는 분께서 더럽게 애정결핍이시네. 상식적으로 누구한테 집중해야겠어?

하여튼 인민들 고혈만 빨아먹을 줄 알지, 다른 건 영 젬병이시군.

“스트라이크!”

관심을 바라는 것 같아, 일단 하나 던져서 인사를 했다. 이제 만족하슈?

타자, 스탈린 카스트로는 좋아 죽겠다는 것처럼 힘이 빡 들어가 있었는데.

“교체!”

그런 준비가 무색하게도 교체 사인이 나왔다. 나는 당연히 아니고, 저쪽 상대팀 벤치에서.

스트라이크 하나 잡혔다는 죄가 너무 크구만. 스탈린 카스트로는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지만, 이해는 된다.

‘천하의 양키스께서 더럽게 나오시네.’

내 리듬을 끊으려는 거겠지.

사실 7회쯤 됐으면, 대타가 나올만 하기는 한대, 굳이 스트라이크 하나 잡은 상황에서 내보낸다는 건. 그런 용도가 더 클 거다.

어떻게든 내가 집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명문팀 양키스치고는 너무 조잡스럽구만.

어쩌면 명문팀인 만큼, 이런 종류의 방법에 더욱더 노하우가 쌓인 것일 수도 있고.

‘로날드 토레이스···’

성적은 기억 안 난다.

아마 잘 생각해보면, 자료를 보기는 했을 텐데, 머리에 열이 많아서 그런가, 잘 안 나오네.

하지만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건 확실하다. 애초에 내야 유틸리티 자원이니까.

그런 타자를 내세울 만큼 몸이 달았다는 건데, 하나 말해주자면, 기분 나쁘게 한 것 빼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다. 이번의 대타는.

왜냐고?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다른 놈들은 두 타석, 세 타석씩 봐도 맥을 못 추는데, 이제 처음 본 놈이 나와봤자, 뭘 할 수 있겠어. 막말로 내 타이밍, 릴리스 포인트도 모르는데.

깔끔하게 서클 체인지업 두 개. 그게 대타로 나온 로날드 토레이스가 본 모든 것이었다.

처음 보는 타자한테는 이게 직빵이지. 잔뜩 긴장하고 올라오는 게,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적군 사정 봐줄 거였으면, 이 성적 못 찍지.

‘후우··· 이제 시작이네.’

그걸로 원아웃.

곧이어 다음 타자가 올라왔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녀석.

쟤도 마찬가지겠지.

눈빛부터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진짜··· 더럽게 크네.’

원래도 큰 체구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지, 그 위압감 때문에 더 크게 느껴졌다.

커다란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거대한 곰 앞에 선 것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녀석 역시 마찬가지인지,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에서 일말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8부, 아니, 9부능선이지.’

한 가지 더 위안이 되는 건. 저 산만 넘어서면, 그 뒤는 정산이라는 거다. 종착지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거든.

확실하다. 쟤만 잡으면 끝이다. 그래도 양키스인데, 다른 놈들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어, 무시하는 거야.

쟤만 조지면, 어떻게든 가능하거든. 온갖 똥꼬쇼를 다 하면. 그렇기에 애런 저지는 마지막이자, 가장 큰 위험이었다.

‘그거··· 던져야겠지.’

무기는 쥐고 있다.

뒷주머니에 몰래 숨겨뒀지.

남은 건, 그걸 저 목에 꽂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뿐.

그것 역시 쟤도 마찬가지겠지. 확실한 마지막 한 방을 이미 장전해뒀을 테니까.

서로가 조금 스쳐도 치명타라는 것을 알기에, 잠깐 소강상태가 이어졌고, 주심마저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오늘 같은 날, 괜히 날 건드렸다가는, 다음날 변사체가 될 테니까. 진심이야. 여기가 오클랜드라는 걸 잊지 마라.

매일 아침 식사하면서 신문 보면, 누가 죽었다거나, 총격전이 있었다거나 하는 소식이 무조건 실리는 동네인데, 그거면 말 다 한 거지.

‘그게 도움이 되기도 하네.’

그런 도시에서 언터처블의 존재가 있다면, 바로 나다. 시비도 자주 걸린다고 하던데. 난 얼굴 보면 무조건 프리패스더라고.

사실 이 덩치를 보고도 시비를 거는 용자가 별로 없기도 하지만.

심지어, 대니얼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더라. 나랑 같이 대화를 나누는 게 몇 번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는데.

내 트레이너라는 게 널리 알려진 건지, 얼굴 보면 인사하거나, 아는 척한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그 덕에 잠깐 숨 고를 시간을 얻었고, 모든 준비는 마쳤다.

‘투 스트라이크. 가장 최고의 상황에서 던진다. 그게 아니라면, 힘들어.’

짧은 심호흡.

그리고 피칭.

“파울!”

바깥쪽 패스트볼에 바로 배트가 나왔다. 다행히 파울이지만,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빗맞은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거야. 이거, X될 뻔했다.’

포심, 제대로 맞았다.

파워로 누르지도 못했고.

전력투구를 했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아, 아직 힘이 떨어진 것도 아닌 듯한데.

그냥 격파됐다.

‘너무 잘 빨아당겼어.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된 거고. 만약 적절하게 커트했다면, 이거 넘어갔다.’

실제로 저 멀리 관중석 펜스를 넘은 타구는, 한참을 더 날아간 뒤에야 떨어졌다.

코스만 좋았더라면, 홈런 정도야 우스웠겠지. 그렇게 되면 히트, 런, 둘 다 깨지는 거고.

‘예상은 했어. 아주 제대로 집중했던데, 최근 타격감이 최고인 타자니, 당연히 타이밍 잡았겠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내 포심, 문제가 좀 있잖아?

구속이라는 크나큰 문제 말이야. 선구안이 좋은 타자니, 금방 눈에 익을 수밖에.

좋은 코스였다는 걸 깨달은 건지, 애런 저지는 아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양키스 팬들, 특히 여자 팬들은 섹시하다며 난리를 쳤겠지만, 사내새끼가 저러는 거 보니까 좀 토가 쏠리네.

혹시 저것도 멘탈공격인가?

‘그래도 스트라이크 하나는 잡았고. 이제 남은 것도 하나다.’

투 볼. 거기까진 허용된다.

그 이상은 안 돼. 오늘 감각이 좋긴 했지만, 제대로 제구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니까.

어차피 그거, 깨졌으니까, 그냥 말하자. 퍼펙트는 이미 저번 이닝에 나가리 돼서, 볼넷 준다고 달라지는 게 없기는 한데. 아무튼 조심해야지.

내가 원하는 건 ‘그거’지만, 추가로 애런 저지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것도 있으니까. 그래야 더 멋있잖아?

라이벌한테 볼넷 내주고 기록 달성했다는 개소리는 듣기 싫거든. 못 잡을 타자도 아니니까.

“볼!”

한번 더 바깥쪽.

나간 코스다.

어차피 카운트 잡을 생각은 없다. 테스트 용도니까.

선구안도 제대로 날이 섰어.

단순히 승부욕만 넘치는 게 아니라, 쟤도 확실한 기회, 확실한 코스를 노린다는 거겠지.

‘그래, 아주 미동도 안 하네. 거기까진 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거지?’

X같다, 진짜.

나도 나지만, 쟤도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시즌 50홈런도 때릴 파워를 가진 놈이, 눈까지 좋으면 어떡해?

투수보곤 뭘 어쩌라고?

타자의 실력을 보니, 괜히 짜증이 솟았지만, 애써 화를 다스리며, 다음 공을 준비했다.

“볼!”

다시 볼 하나.

이번엔··· 몸쪽으로 넣어봤다.

솔직히 존안으로 넣기는 조금 빡세고, 파울이나, 혹시나 모를 헛스윙을 유도하려고 한 건데. 타자는 그저 가볍게 물러났다.

어쩌다 보니, 위협구가 됐네.

볼도 하나 내줬고.

이제 쓸 수 있는 볼은 다 줬다. 남은 건 어떻게든 파울을 만드는 것뿐.

‘아니지, 다르게 생각하자. 쟤도··· 겨우 볼로 만족하지는 않겠지? 삼진 두 개에 볼 하나인데. 그건 완패니까.’

내가 그걸 원하는 것처럼, 저 녀석도 홈런을 원할 거다.

최소한 장타라도 하나 날려서, 내 페이스를 깨고 싶겠지. 그래야 판정패 정도는 되니까.

볼넷을 얻어내봤자, 간신히 출루만 하나 찍힐 뿐, 쟤 입장에서도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그러니···

‘오케이.’

낚아야지.

사인을 냈다.

포수 마스크 사이로 브루스의 눈이 휘둥그래 졌지만, 또 그러다가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니야 새꺄.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야 타자가 더 잘 속을 테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유명한 격언이잖아?

“볼!”

세 번째 볼.

그게 나온 순간, 애런 저지는 처음으로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왜냐고? 포수가 거의 일어서서 잡을 정도로, 엄청 높이 떴거든. 타자는 절대로 못 칠 정도로, 그래 마치···

‘거르는 것 같겠지.’

브루스에게 뭐라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다.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면. 그만큼 당황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브루스는 입이 꿈쩍도 안 하는 걸 보아, 그냥 개무시하는 것 같고.

그러다 다시 내가 사인을 보내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했다는 표정으로.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표정이네.’

쟤는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생각을 한다니까. 안 멋있어, 새꺄. 내가 볼배합하는 거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통하지도 않을 거고.

아무튼 준비는 됐다.

코스는 바깥쪽. 멀게.

조금 아니다, 그냥 멀게다.

솔직하게 말하면···

‘까놓고 말해서, 내보낸다 쳐도 내 입장에선 큰 상관없지. 약간 찝찝하다는 걸 제외하면.’

몇몇 언론에서는 내가 승부를 피했다며 소리치기도 할 텐데, 그거야 나 싫어하는 놈들은 매번 하는 소리고. 볼넷보다 고의사구가 많다면서.

그러니 그런 개소리 듣는 거야 이골이 났으니, 약간의 임팩트 손해를 보는 걸 제외하면, 딱히 손해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을 던졌지만, 아무래도 타자는 그런 방식의 승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파울!”

이번에도 파울.

하지만 힘은 초구보다 훨씬 약하다. 애초에 원숭이처럼 팔을 쭉 빼서 간신히 건드린 거니까.

그래도 타격기술이 좋아서, 라인 밖으로 걷어내기는 했는데, 자칫 내야 땅볼이 됐겠지.

타자, 애런 저지는 그런 도박마저 감수했다. 이대로 이 승부를 넘기기 싫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구만.

‘꼬라보지마 새꺄, 정들어.’

그러고는 다시 타석에 돌아와 자세를 잡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주 도발적으로. 어떻게든 나를 흥분시키려고.

그 의도가 뻔히 보여서, 오히려 귀엽게 보이는구만. 어이구, 우리 귀염둥이, 그렇게 나한테 홈런 치고 싶으셨쪄요?

‘아, 그럼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난 분명 그냥 내보내려고 했다? 니가 먼저 정정당당 승부를 요청한 거야? 그러니까, 이제 와서 절대로 스윙 안 하거나 하면 안 돼, 알지?’

그렇게 타자에게 신신당부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진지하게, 엄숙하게. 아주 영웅적인 표정으로.

아니나 다를까, 애런 저지는 조금 안심한 건지, 표정이 누그러졌고, 다시 얼굴에 집중이 감돌았다.

‘어쩌면··· 쟤도 알고 있으려나?’

내 시크릿웨폰 구종 말이야.

효과는 죽여주지. 작년 6월, 실링이 터지기 시작한 이후로, 거의 백발백중이니까.

물론 많이 안 던지긴 했는데. 아무튼 메이저에서도 효과는 있었다.

만약··· 양키스의 전력분석팀이 꼼꼼하고, 유능하다면, 그것마저도 이미 분석해뒀을 수도 있겠지.

설사 그렇다고 쳐도, 애런 저지가 그걸 눈여겨 봤을지는 의문이지만.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 로또 3등 정도는 되겠네. 1등은 좀 그렇고.

‘뭐, 상관없지.’

뒷짐을 지고서, 그립을 잡았다.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지만 감각이 익숙해지게.

최고로 들어갸야 했으니까.

최고로 제구돼야 했고.

그것으로 준비는 마쳤다.

와인드업. 길게 다리를 뻗으며, 지면을 내디뎠다. 콱-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아주 강하게. 발바닥과 발뒤꿈치가 찡~할 정도로.

그리고 애런 저지 역시 마찬가지로 타격을 준비했다. 다만- 굉장히 느리게.

‘너··· 알고 있구나?’

던지는 순간 깨달았다.

저 녀석, 알고 있다.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내 비밀병기를 알고 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왜냐고? 만약에···

‘나한테, 커브가 있는 거.’

혹시라도 내가···

‘근데 말이야.’

리암 헨드릭스에게 이걸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건 비밀병기V2야. 1은 폐기처분 예정이지. 이게 너무 성공했거든. 특히 오늘은 더더욱.’

지금 이 순간, 커브를 던졌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무조건 던졌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애런 저지의 꿈이 이뤄졌겠지. 타구는 저 멀리, 담장 너머로 날아갔을 거고, 녀석은 영웅이 됐을 거다. 그래, 분명히 그랬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던진 건, 종종 던지던 느려터진 똥볼 커브가 아니라, 손가락을 세워서 꾸욱 누르는-

“스트라이크 아웃!”

너클 커브였다.

차원이 다른 녀석이지.

바깥쪽 몸쪽으로, 사선으로 스트라이크존을 가르면서 떨어지는 공을 보며, 애런 저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승부는 끝났다.

이걸로 3대0. 내 완승이다.

팀도 못 해본 스윕을 내가 다 해보네. 아이 좋아.

다음은 없냐고? 없어.

이제 마지막 발악까지 조져놨으니, 관뚜껑에 못 박을 생각이거든.

내려가는 애런 저지를 보며 씨익 웃은 뒤, 그동안 펄떡거렸던 감각의 목줄을 풀었다.

7회 초 투아웃.

남은 타자는 일곱.

죄다 쏟아붓기 딱 좋네.

####

“스트라이크!”

조용하다.

미치도록 조용하다.

양키스 선수들은 이 적막이 정말이지 싫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

덕아웃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다 똑같은 죄인이니까.

원정 팬들은 자리를 떠났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종종 핀 스트라이프가 보였는데, 이젠 오로지 오클랜드로 가득했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우렁찬 콜은 마치 지옥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이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8회는 끝났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삼진 15개. 이것만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굴욕적인 결과물이겠지만···

그보다 더 큰 절망이, 악몽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따위 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수비 준비들 안 해? 다들 정신 차려!”

그나마 벤치코치(수석코치)가 호통을 치며, 정신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그 역시 알았다.

이미 꺾였다는 것을.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었던 애런 저지조차, 전처럼 투지가 불타는 눈빛 대신, 자책감과 허탈함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전용기를 타고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열정이 있었다.

사랑받는 루키를 위해, 기꺼이 주자가 되겠다고 말한 베테랑, 자신이 먼저 피홈런을 만들어줄 거니까, 넌 2호나 때리라던 익살꾼.

오늘 루키의 전설을 우리 손으로 끝내자며 소리 높였던 리더 등등.

모두가 최고의 결과를 의심치 않았고, 누구나 ‘양키스’처럼 행동했지만. 지금 덕아웃을 나가는 선수들은 그저 ‘패배자’였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상대팀 타자들은 그저 적절한 시간만 유지했다. 적당히 흐름이 끊기지 않는 선에서, 투수가 휴식할 수 있을 정도로.

원래, 출루하는 건 쉬워도, 아웃당하는 건 타자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8회 말이 끝났을 때.

경기장에는 나직한 말이 흘렀다. 구장 캐스터가 정숙을 요청하는 것 같다. 중요한 순간이니까.

사실 그럴 이유는 없었을 텐데. 이미 모두가 조용했으니까. X같은, X같은 적막이 이미 아까 전부터 흐르고 있었으니까.

양키스를 위한, 그들을 위한 장례식이라도 열린 것처럼.

“···할까요?”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입을 연 선수는 브렛 가드너였다.

6회에 나온 금쪽같은 볼넷 하나 덕분에, 9회에도 타석에 오를 선수.

어쩌면 양키스에서 유일하게 네 번째 타석을 맞이할 타자는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고.

비록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번트. 굴욕을 막기 위한, 최악의 수단. 설사 그렇게 기록을 깨더라도, 오히려 더 큰 지탄만 받는 행동.

그런 조잡한 방법을 꺼낸 브렛 가드너였지만, 선수들은 그를 이해했다. 그 정도로 정신이 흔들렸다는 뜻이겠지.

허나 조 지라디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브렛 가드너에게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양키스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그 시선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브렛 가드너 역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되.

굴욕을 당하더라도, 신사답게. 그리고 명예롭게 받아들이자.

감독의 이번 경기 마지막 명령이나 다름없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존엄사···라고 하던가.’

양키스는 존엄사를 택했다.

이닝은 시작됐고. 투수는, 여전히 지치지 않고, 마운드 위에 우뚝 선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마운드 위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쪽이 더 어울릴 텐데 말이다.

마지막 예우라도 해주는 건가? 자신의 희생양으로 간택된 양키스를 위해서.

그런 생각이 양키스 선수들의 머릿속에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스트라이크!”

공이 너무 매섭다.

난간에 기대어, 거무죽죽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지켜보고 있는 애런 저지가 삼진으로 물러난 뒤.

투수는 거칠게 몰아쳤다.

마치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양키스의, 다른 타자들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았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16번째 탈삼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2개를 더 올린다면, 또 다른 신기록이 세워지니까.

“아웃!”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것만큼은 아직 허락되지 않은 건지, 그나마 범타가 나왔지만. 양키스에게 허용된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번트라는 불명예를 각오했던 브렛 가드너는 스스로의 추태를 지우려는 듯 맹렬하게 타격했고.

“파울!”

“볼!”

“파울!”

드디어 그의 장기를 보여주듯, 투구수를 뽑아내며, 승부를 8구까지 끌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그는 경기의 첫 타자이자, 마지막 타자로서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경기 종료,

급하게 준비한 건지, 폭죽이 터졌고, 관중들 역시 참아왔던 함성을 그제야 터트렸다.

“이예에에에에에에에에!”

“진짜 했어! Suck이 진짜로 해버렸다고!”

“노히터! 노히터! X발 이젠 말해도 되지? 노히터다, X발!”

“You-Suck! You-Suck!”

9이닝 17탈삼진 볼넷 하나.

그리고 무실점, 무안타.

노히트 노런. 거기에 노히터 최다 탈삼진 타이까지.

최악의 패배는 미치도록 쓰라렸고, 최고의 승리는 미치도록 황홀했다.

환호하며 뛰쳐나온 오클랜드 선수들과 조금이라도 이 공간을 더 빨리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짐을 싸는 양키스 선수들.

그 두 가지 입장의 대비가 꽤나 절묘했으나, 그 어떠한 카메라도, 눈동자도, 그런 것을 담지는 않았다.

“X발 들어! 빨리 들어!”

“아냐, 아냐! 들지 마!”

“미쳤냐! 혹시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생채기라도 하나 나면, 우리 다 그날로 총살이야!”

“이 치킨 새끼들, 저리 비켜! 내가 들 거니까, 난 오늘 타구 X나게 잡아서 괜찮아.”

“꺼져! 노친네 숟가락 들 힘도 없으면서, 얠 어떻게 들어? 그러다 놓치지. 내가 든다.”

“이 미친 새끼! 니가 사람이냐! 이거, 그렉 매덕스가 변장하고 있는 거 아니야?”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욕설을 내뱉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선수에게 향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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