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양키스 팬들이 바라보는 고유석은 보통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기분 나쁜 동양인 투수다. 최근 가장 이름값이 높아진 투수이자, 엄청난 성적을 올리는 초신성인 건 알겠지만.
그로 인해 애런 저지가 상대적으로 비하되었으니까.
물론 투수의 책임은 아니다.
투수 본인이 입을 뻥긋거린 적은 없으니까.
└애런 저지? 걔가 역대급이라고? 웃기고 있네. 진짜 역대급은 Go 같은 선수를 보고 하는 말이야. 급이 다르다고.
└포지션이 다른데, 비교 좀 그만해라.
└포지션 차이를 감안하고도, 솔직히 Suck이랑 저지랑 비교하는 게 좀 우습긴 해.
└양키스 프리미엄 빼고 보면, 비비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지.
문제는 그 투수의 개인 팬들, 같잖은 거지구단의 팬덤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팀 주제에, 웬 애송이 하나 터졌다는 이유로 아주 활개 치고 다녔으니까.
단순히 자신들이 그토록 추종하는 Go 혹은 Suck과 비교된다는 이유로 애런 저지를 깎아내리는 건 다반사였고 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 양키스 팬들은 고유석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빠가 까를 만든 셈이겠지.
[#Yankees]
[X발 저 새끼 지금 쪼개는 거야?]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애새끼네. 쳐 웃기나 하고.
└겨우 초반에 좀 잘 막았다고 낄낄거리는 거 보니까, 오래 가긴 글렀다.
└솔직히 X나게 털리고 있는데, 투수 입장에서 웃을 만하지···
└오클랜드 첩자냐? 안 꺼져?
그렇기에 이번 경기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기는 대단히 불편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판사님의 All Rise를 보고 싶었건만, 기선을 빼앗겼으니까.
그 이후로는 죄다 털렸고.
감정 표현에 솔직한 고유석의 모습에 적잖은 양키스 팬들이 분노를 느끼며, 욕설을 토했다.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렇게 철저하게 원사이드로 이어지는 경기 속에서 두 번째 부류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Yankees]
[진짜 더럽게 잘하긴 하네. 거지새끼들이 빨아주는 이유가 있어.]
└예전에 영상이나 하이라이트로 봤던 것보다 더 살벌한데?
└오클랜드는 저런 놈을 최저 연봉으로 쓰고 있네··· 누군 퐁당퐁당하는 잽스한테 2200만 달러씩 주고 있는데···
└다나카를 말하는 거면, 다나카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 지금 우리 선발진에서 쟤보다 나은 투수가 없지.
└X같네. 오클랜드랑 우리랑 페이롤이 얼마나 차이나지?
└몰라, 한 1억쯤 나나?
└1억을 더 쓴 건 우린데, 왜 털리는 것도 우리야···
└오늘 몽고메리도 좀 털리네. 참··· 비교돼서 X같아.
그들은 한 투수에게 압도적으로 털리는 양키스를 보며.
아니, 양키스를 때려잡고 있는 투수를 보며, 부러움과 탐욕을 느꼈다.
현시점의 양키스 선발진은 절대로 팬들이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좋은 투수는 많다.
재작년에 데뷔한 루이스 세베리노는 좋은 성적을 올리며, 한순간 양키스 선발진의 미래이자 희망으로 도약했고.
리빙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CC 사바시아 역시 올해 준수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올해 데뷔하여, 오늘 경기에서 고유석의 맞상대로 등판한 조던 몽고메리 또한 신인이라고 볼 수 없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 중이지.
이렇듯 선발진 자체만 놓고 본다면, 대단히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문제는 ‘에이스’의 부재였다.
└어린놈한테 에이스 자리 맡기길래, 빌리 빈도 이제 끝물이구나 싶었는데···
└쟤 아직 0점대라고 했지? ERA가.
└어, 탈삼진은 전반기에만 200개 잡을 페이스지.
└우리 Asian도 일단은 1선발 이기는··· 한데··· 올해는 참···
1선발이 없지는 않다.
그게 올해 퐁당퐁당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다나카 마사히로라는 게 문제지.
물론 가끔 다시 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들이 아는 모습으로 돌아와, 기대감을 주고 있고, 또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다른 투수들이 조금씩 분담하고 있기는 한데.
당연하게도 양키스의 드높은 기준은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야망을 위해선. 다시 월드시리즈를 노리기 위해선,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에이스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그토록 양키스가 바라고 있는 강력한 에이스가 오늘 티비 화면 속에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압도적인 삼진 능력. 더 말할 것도 없이 에이스의 자질이다.
-살짝 나간 것 같은데- 아! 보더라인에 딱 걸쳤네요.
-정말,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컨트롤입니다. Go를 제2의 톰 글래빈, 매덕스라고 칭하는 말이 많은데. 어느 정도 타당한 평가예요.
칼처럼 날카로운 제구력으로 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모습 역시 에이스의 자질이다.
-타구가 맞았는데- 높이 떠서, 1루수 욘더 알론소에게 잡힙니다!
-제대로 맞은 것 같은데, 이건 그냥 힘에서 밀렸네요. 수직 무브먼트가 상당하죠?
-서클 체인지업이 리그 최고의 구종으로 평가받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패스트볼의 파워 역시 대단한 투수죠.
그리고 힘 대 힘의 싸움에서 타자의 배트를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무브먼트는 더할 나위 없이 에이스다.
아니, 이런 것들은 어쩌면 다 쓸모없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 3이닝 만에 벌써 여섯 개의 삼진을 올리며, Go가 경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양키스에게 숨 쉴 여유조차 없이 몰아칩니다.
-대단히 공격적인 피칭인데, 오늘은 그런 공격성이 더 짙어진 것 같군요. 한 명의 투수가 그라운드를 지배하고 있어요.
아우라.
비록 중계 카메라를 통해 송출되는 영상을 티비 화면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화면 속 고유석에게서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 누구도 넘어 설 수 없는, 절대적인 에이스만이 가진 기운이.
마운드 위의 폭군처럼 군림하며,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양키스를 처단하는 모습은 꽤나 많은 양키스 팬들에게 어필됐다.
저 투수는 모든 게 완벽했다. 다만 핀 스트라이프가 아닌, 구려 터진 애슬레틱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
그걸 제외한다면, 굉장이 매력적이었다.
└쟤 트레이드 안 되겠지?
└절대로. 빌리 빈이 치매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
└가능은 할 거야. 한 5년쯤 지나서, FA 코앞으로 오면. 트레이드하겠지.
└그나마 오클랜드 같은 거지구단에서 저런 놈이 나온 게 다행이지. FA때 노려볼 수라도 있으니까.
└매끈하게 면도한 것도 그렇고. 멀끔한 외형도 그렇고. 핀 스트라이프가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꺼져 X발 놈들아! Go는 평생 우리랑 함께 할 거니까.
└훠이, 훠이. 너네 집으로 가.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평생 오클랜드랑 함께한다니, 그거 저주 아니야?
└저주지, 오클랜드랑 커리어 끝까지 한다는 건, X나게 망했다는 뜻이니까.
당장 품을 수가 없기에 어쩌면 더욱더 애가 타는 걸지도 모르고.
그렇게 제법 많은 이들이 고유석의 피칭에 매료되었고. 욕심을 품고, 그것을 포착한 오클랜드 팬들이 분노를 토해냈을 때.
└여기 양키스 커뮤니티 맞지? X발 근데 니네들은 왜 X같은 상대 투수만 이야기해?
└그렇게 좋으면 너네도 거지새끼들이나 빨아라.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부러울 게 뭐 있어? 다음 이닝에 저지한테 X같이 털릴 텐데.
대다수는 그런 반응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다. 물론 저 투수가 X나게 잘하는 건 맞고, 솔직히 욕심이 나는 것도 맞지만, 마치 이미 다 끝났다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불쾌감은 곧 기대로 전환됐다. 이런 엿 같은 분위기를 바꿔줄 선수가 있었으니까.
3이닝 퍼펙트. 그리고 6탈삼진. 뉴욕 양키스를 짓밟은 투수와 그에 홀린 ‘배반자’ 혹은 ‘머저리’들의 머리를 애런 저지가 후려쳐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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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친 기색은 없지?”
“이제 겨우 3이닝인데. 그럴 리가 있나. 성적 보니까, 체력도 좋은 놈이던데.”
3회 말.
오클랜드의 공격이 저지되고, 다시 공격을 준비할 때. 양키스의 덕아웃에는 한숨 소리가 흘렀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기쁜 마음으로 공격에 나섰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빈틈조차 없었으니까.
마치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시험을 맞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진짜 타석에서 보니까 X같던데. 서클 그거 구분하는 방법 없어? 대체 어떤 게 떨어지는 거고, 어떤 게 역회전하는 거야?”
“분석팀에서 습관 같은 거 못 알아냈나? x발 하는 일이 없어, 그 새끼들은.”
“그딴 게 있었으면, 다른 놈들이 진작 후드려 팼겠지. 저 성적 되기 전에.”
몇몇은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저 투수의 습관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물론 가능성은 없다.
이제 전반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전체 시즌의 3분의 1 이상 달려온 셈이지.
습관이란 게 있었다면, 진작 다른 팀들이 발견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이 지랄맞은 성적을 유지 중이라는 건, 애초에 그딴 게 없다는 뜻이다.
“갑갑하네···”
“Hey, 서기장 동지. 넌 변화구 잘 골라내잖아. 감 안 와?”
“감? 오지, 당연히.”
“오, 뭔데?”
“보자마자 구종 하나하나가 참 X같다는 감이 팍 오더라.”
어쩌면 그런 요행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저 투수를 인정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런 것조차 없다면, 공략하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다음 타석에 나갈 준비를 하던 애런 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 타석, 팬들이 기대하고 있을 테니, 하나 날려야 될 텐데···’
그는 다음 타석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과연 뭘 노려야 할까? 어떤 공을 노려야 할까?
허나 마땅히 떠오른 건 없었다. 포심은 제아무리 저지 자신이더라도 손쉽게 받아치기 힘들 정도로 더러웠고.
서클 체인지업은 솔직히··· 조금 보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손조차 못 대겠지. 아예 눈앞에서 사라지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미리 코스까지 제대로 찍어서 미리 기다린다면, 충분히 담장 너머로 날릴 수 있겠으나. 애초에 그런 전제조건이라면, 못 칠 공이 없다.
‘이번 타석은 힘들어.’
그렇기에 그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이번엔 힘들다. 직전 타석에서 어떠한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으니까.
그저 저 투수가 듣던 대로 굉장하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정보겠지.
‘그래도 끈질기게 보다 보면, 하나쯤은 눈에 걸리겠지. 적응하기 힘든 구속도 아니니까.’
조금 던지고 내려갈 투수는 아니다. 기색을 봐서는··· 9회까지도 던지겠지.
그러니 최소한 기회는 두 번이 더 남았으니,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공을 보는 정도로 사용해도 되겠지.
그렇게 한다면, 조금 더 뒤의 애런 저지 자신이라면, 충분히 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재능이 있는 선수니까.
“너무 조급하게 배팅하지 말고, 최대한 투구수를 끌어내.”
“네네, 그래야죠.”
타격코치 역시 별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타자들에게 그런 말밖에 해주지 못했다.
그런 우울한, 아니,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4회 초가 시작됐다. 어째서 흥겹냐고?
“다시 X될 준비됐냐?”
“쯧쯧, X신 새끼들. 레드삭스가 너네보다 훨씬 낫더라!”
“이제보니, Suck이 아니라, 너네가 Suck인 것 같은데?”
절대다수가 흥겹지 않은가?
양키스라고 해봐야 원정팬까지 합쳐도 수백 정도에 불과할 텐데, 그 외의 모든 이들이 즐거워하니. 분위기 자체는 흥겹다.
그저 자신들이 이런 축제의 희생양이 됐을 뿐.
레드삭스와 비교하며 조롱까지 해대는 홈팬들에, 몇몇 선수들은 이를 빠득 갈기도 했고, 투쟁심이 차올랐다.
“저 X같은 새끼들한테, 아주 제대로 보여주자고.”
“오클랜드 같은 x신 팀은 줘도 안 갈 텐데, 애새끼 하나 잘났다고, 지들이 신났네.”
“저런 개소리 듣고도 화 안 나는 Chicken은 없지? 있으면 고추 떼라.”
프로 선수에게 투쟁심은 때때로 부스터가 되기도 한다. 감정의 영역이라는 게, 뜻밖의 힘을 내게 만들거든. 집중력을 더 올려주기도 하고.
양키스 타자들은 자신들을 향한 날선 조롱에 그런 투쟁심을 끌어 올렸지만, 애런 저지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안 좋을 텐데···’
힘을 좀 낸다고 상대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다. 타격코치가 괜히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니까.
차라리 응어리진 감정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표출한다면, 그나마 좀 낫겠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냈다가는-
“스트라이크 아웃!”
제대로 가지고 놀겠지.
마운드의 투수는, 무섭도록 흐름을 잘 읽는 녀석이니까.
리드오프로서, 투구수를 뽑아내는 영역에선 만점이라고 할 만한 브렛 가드너가,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브렛 가드너는 투수들에겐 굉장히 짜증나는 상타자다, 매 타석 끈질기게 버티며, 투구수를 뽑아내는 타자니까,
그런데, 그런 타자가 오늘 두 타석 동안 상대한 투구수는 겨우 네 개였다.
“Fuck···”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온 브렛 가드너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고.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지독한 무력감에 가까웠다.
‘스탈린은··· 힘들겠지.’
그다음은 스탈린 카스트로.
앞서 덕아웃에서 동료들과 주고받았던 만담처럼, 그는 투수의 공이 X같다는 걸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아웃!”
쭉 뻗는 스윙 대신, 힘없이 무기력한 타격을 선보이며, 내야땅볼로 물러나는 것으로.
‘이제 내 차례군.’
또다시 투 아웃.
흘끔 관중석을 보니, 원정팬들은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 시작 이후, 매 공격마다 똑같은 장면을 봤으니까.
허나 애런 저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라면 어떻게든 해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그래, 내가 해야지.’
내가 해야 한다.
맞다, 영웅심리다.
동료들을 믿지 않고, 자기자신에만 집중한 아주 저열한 감정이지.
허나 애런 저지는 굳게 믿었다. 내가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힘들 테니까.
이번 타석은, 다음을 위해 바치는 용도로 결정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다.
최선을 다해야지.
“···열심히 해봐.”
타석에 들어서니, 포수가 은근하게 말했다. 무슨 뜻이지? 트래쉬 토크인가?
상대팀 타자를 응원하는 듯한 말은 듣는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웃기고 있네.’
그런 포수를 무시한 채, 그는 오로지 투수만을 눈에 담았다. 저 녀석과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가 다 제3자니까.
물론 포수는 어느 정도 관계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듣기로 저 투수는 직접 볼배합을 주도하는 성향이라고 했으니. 이 녀석은 그저 공을 받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그냥 포구용 로봇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무리가 없겠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로봇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본다. 최대한 눈에 담는 거야.’
호흡을 가다듬은 순간, 공이 날아온다. 오늘은 항상 저런 식이었지.
평소에는 경기 초반의 경우 느긋하게 던진다고 했는데, 오늘은 아마 저 투수 역시 마음가짐이 남다른 것 같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포심. 역시- 조금 덜 떨어져.’
그런 의미의 덜 떨어진다는 게 아니다. 수직 무브먼트를 이야기한 것이니까.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말이야 익히 들었지만, 직접 마주한 포심은 들은 것 이상이다.
진짜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저 덜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하지만 느려. 그 덕에 잘 보이고. 문제는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느냐는 것.’
89마일. 전력투구라는 게 믿기지 않는 구속이지만, 어쨌든 위력은 남다르다.
볼끝이 더럽고, 떠오르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괴이한 무브먼트를 가졌으니까.
다만 그것을 제외하면 느린 공이기에, 눈에 익히는 것 자체는 쉽다. 정확하게 때리는 게 어려울 뿐.
“볼!”
2구는 서클 체인지업.
이번엔 떨어지는 녀석이다.
한 구종을, 두 가지 구질로 나눠서 던질 수 있다니. 만화 같은 이야기나 다름없으나.
저 투수는 그 만화 속 이야기를 직접 해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컨트롤까지 하면서.
다만 이번엔 유인구의 목적이었는지, 살짝 빠져나갔고, 공을 끝까지 지켜본 애런 저지는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스윙을 참는다.
3구가 날아왔는데, 구속은 포심보다 살짝은 느린 것 같지만, 꽤나 빠르다. 그런데 이건···
‘커터?’
슬라이더는 아니다.
다른 선수들에게 던졌던 것과 변화에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보다는 각이 작으면서, 조금 더 급격하고, 빠르다. 구속은 84마일 정도.
아마도 커터겠지.
분석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지만. 어쨌든 커터가 맞을 거다.
저 투수의 더럽게 많은 구종 중 하나인데, 간혹 던진다는 말은 들었으니까. 많이는 아니지만.
‘패스트볼로 보였으니, 혹시라도 투심이나 포심으로 착각하고 배트를 냈다면···’
빗맞았을 게 확실하다.
투수도 그걸 노렸을 테고.
이제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아직은 부족하다. 더 견본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기에-
“···오.”
배트를 짧게 잡았다.
어쩌면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은 것이기도 했다. 자신은 언제나 장타를 노렸으니까.
허나 지금은 정확하고 큼직한 한방보다는, 더욱더 긴 승부, 많은 투구수가 필요했다.
나중의 한방을 위해서라도.
포수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으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바깥쪽을 던지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선구안이 좋은 편이고, 또 기본적으로 리치가 기니까.
“볼!”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한번 빼는 투수. 억지로 스윙을 억누른 애런 저지는 공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슬라이더가 아닐까? 백도어 슬라이더를 자주 던지는데, 만약 스윙을 참는다면, 루킹 삼진을 당하는 건가?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날아온 공은 패스트볼. 살짝 바깥쪽으로 말리면서, 약간 떨어지는 무브먼트를 보아, 투심이다.
혹시라도 슬라이더를 걱정하고 스윙했더라면, 빗맞거나 헛스윙했겠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행운이 그에게 따라주는 것에 감사하며, 애런 저지는 끈질기게 버텼다.
“파울!”
“파울!”
“볼!”
이후 세 구를 더 뽑아냈고.
투수는 눈썹을 씰룩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앞에 사람들한테 짧게 던졌으면, 나한테라도 대신 갚아야지. 안 그래?’
이제 풀카운트.
과연 투수는 어떻게 나올까?
자연스럽게 배트를 쥐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투수, Go라면, 분명 들어온다. 잡기 위해서. 그가 타격을 준비했을 때.
“힘 좀 빼지 그러냐.”
“···”
“트래쉬 토크 아니니까, 새겨들어.”
불쑥 포수의 말이 들렸다.
처음 타석에 입장할 때, 나불거리던 걸 제외하면, 내내 닥치고 있던 녀석이 말이다.
흐름을 끊는 건가?
하지만 이번에도 진심이 담겼다. 마치 자신의 이런 노력이 무가치하다는 걸, 굳게 믿는 것처럼.
“내가 직접 공을 받는 입장이라서 아는데. 절대로 못 쳐.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내가 많이 받아본 건 아니지만, 오늘이 최고거든.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그 노력 그냥 다른 경기에서 해라.”
선배의 조언처럼 따스한 말이었지만, 애런 저지는 코웃음 쳤다. 저딴 개소리를 듣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다니.
‘팬들도, 선수들도. 완전히 사이비 광신도군.’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 투수, 무슨 최면이라도 거는 건가? 콜리시엄을 가득 채운 오클랜드의 팬들도 그렇지만.
포수마저도 마치 굳은 신념을 가진 광신도처럼 절대적인 믿음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묘하게 역겹게 느껴져서, 가볍게 무시한 애런 저지는, 다시 집중을 올렸다.
‘서클.’
서클이 머릿속에 맴돈다.
역회전이 강한 녀석.
이번 타석에서는 던지지 않았지. 그것을 떠올리며, 그는 마지막 공을 기다렸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아아···”
“괘- 괜찮아! 그래도 투구수 많이 봤어!”
“다음 이닝에 하나 날려!”
날아온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야속하게 빗나간 스윙에 원정팬들이 아쉬운 탄식을 뱉다가, 그를 위로했다.
타석에서 물러난 그는 그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수고했어, 그래도 네가 제일 낫긴 났네. 역시 판사님! 아주 항소를 계속 하던데?”
“덕분에 그래도 투구수 많이 뽑았으니까.”
동료들도 그를 위로했다.
상심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투수에게, 두 타석 연속으로 삼진을 당한 것이니까.
허나 단 한 사람, 애런 힉스는 알만하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밍, 잡았어?”
“어, 잡았어. 볼 것도 다 봤고.”
모든 구종을 다봤다.
커브도 던진다고 하던데.
그걸 제외하면 전부 다.
그리고 그 모든 구종이 두 눈에 똑똑히 담겨, 머릿속에 저장됐다.
‘다른 경기에서 노력하라고? 아니, 충분히 날릴 수 있어.’
마지막 기회.
그것을 꿈꾸며, 애런 저지는 얌전히 숨을 가다듬었다. 최강의 경쟁자에 대적하기 위해선. 최고의 상태로,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
####
“스트라이크 아웃!”
“어우, 오늘 진짜 미쳤는데? Suck, 너 뭐 좋은 거 먹냐?”
“얜 어째 가면 갈수록 더 잘해지네. 동방의 신비, 뭐 그런 건가?”
이닝이 마칠 때마다, 동료들의 호들갑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게, 오늘 내가 좀 미치긴 했잖아?
“좋은 건 무슨. 혹시라도 도핑 비슷한 거라도 걸리면 바로 물어뜯을 게 뻔해서, 먹는 것도 조심해서 먹고 있는데.”
“에이, 솔직히 누가 널 도핑으로 의심해? 구속이 겨우··· 어우, 타격 준비해야지, 타격.”
개소리에 반박하니, 이번엔 X같은 소리로 응대하는 제드 라우리를 지그시 노려보니, 냉큼 자리를 회피했다.
이거이거, 요즘 야구 잘 돌아간다. 나 때는 말이야! 피칭 중인 선발투수랑 야수는 겸상도 못 했어! 벤치 대신 땅바닥에 앉았다고!
그런데 어디 하찮은 2루수 나부랭이가 신성한 선발투수님 구속을 운운하나!
물론 제드 라우리가 나보다 한 열 살쯤 많긴 한데, 아무튼 난 투수니까. 그것도 X나게 잘하는 투수니까. 이래도 돼.
“양키스 새끼들, 또 조져지는구나~”
“쟤들은 진짜 야구하기 싫겠다. 내가 쟤들 입장이었으면··· 어우, 차라리 한 대 맞아서 벤치클리어링 하는 게 낫지.”
“쟤들도 그런 눈치긴 하네. 얼굴 봐봐. 도축장 끌려가는 소 같은데?”
아무튼 워낙 압도적인 경기고, 이미 점수도 나와서 그런가, 분위기가 늘어져 있는데.
그런 농담 소리는···
“스트라이크 아웃!”
이닝이 이어질수록.
“아웃!”
하나 둘씩, 사라졌다.
아니, 내 주변에 다가오는 선수 자체가 확연하게 줄었다.
계속 귀찮게 말을 걸던 제드 라우리마저, 어느 시점부터는 은근하게 날 피하기 시작했고.
“진짜··· 미쳤는데?”
“아니, 이거 이래도 되나?”
“얜 진짜··· 다른 것도 아니고 양키스인데-”
심지어는 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뜰 정도였다.
심지어 몇몇은 자신들이 압도된 것처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눈빛을 나한테 보내기도 했다.
경이로움. 그렇게 불러야겠지. 그런 감정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브루스.”
“어? 어··· 왜?”
“오늘 잘하고 있으니까. 끝까지 그렇게만 해라.”
“그럼, 당연하지. 최선을··· 다 할게.”
브루스 맥스웰은 묘한 사명감마저 느끼는 것 같았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6회 초.
“스트라이크 아웃!”
기본 골자는 이전과 똑같다.
양키 놈들은 나한테 썰렸고.
아무런 대처도 못했으니까.
“베이스 온 볼.”
‘이게 빠지네.’
다만, 8번타자 크리스 카터에게 살짝 삐끗하면서 볼넷이 되긴 했는데. 볼넷도 오랜만이네. 타이밍 참 공교로워.
“X바아아아아아알!”
“야이 X새끼야! 그게 왜 스트라이크야!”
“X같은 X발놈아!”
볼넷 하나 가지고 왜들 이러시나 몰라. 걸어 나가는 타자를 보며, 관중들은 주심을 향한 욕설을 토했다. 아주 저주에 가깝네.
솔직하게 말하면, 정당한 판정이다. 약간 나가긴 했으니까. 애초에 내가 쓰리볼까지 주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고.
‘저러다 삔또 나가면 내가 더 골치 아파지는데···’
타자가 올라오기 전, 날 너무 사랑하는 팬들을 대신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역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동료들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빡친 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볼넷이라··· 좀 X같긴 하지만, 내 잘못이니까.’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뒤에는, 이전과 똑같았다.
“아웃!”
그냥 조지는 거지.
볼넷이야 말 그대로 살짝 실수한 거고, 체력은 아직 쌩쌩하니까. 투구수를 많이 아낀 덕분에.
‘오늘 투심이 잘 받네.’
확실히 긁히는 날이라서 그런가, 다르긴 달라. 그렉처럼 엄청난 마구는 아니지만,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고.
최소한 변형 패스트볼로서는 만점짜리였다. 지금까지는 백발백중 수준이니까.
그것으로 다시 투아웃.
그다음으로 올라온 건 브렛 가드너. 이번이 세 번째 타석인데, 내가 보기엔 영 글렀다.
“스트라이크!”
‘타이밍 못 잡았네.’
그도 그럴 것이, 앞선 두 타석에서 겨우 네 개 봤는데, 타이밍을 잡아도 이상하지.
거기다 평점심도 잃었고.
약간 안도한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정상으로는 안 보였다. 경기 내내 농락당한 후유증이겠지.
“스트라이크!”
주심은 홈팬들에게 자신의 무오를 설명하듯, 최대한 성심성의껏 콜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야.
뭐, 듣기는 좋네.
“파울!”
“아웃!”
그래도 이번 타석에선 4구까지 승부를 끌었지만, 결국 찍어누르는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가 밀렸다. 범타 두 개에, 삼진 하나.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삼진만 두 개인 타자들도 있으니까. 뭐, 본인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 6회 초도 종료.
평소라면 홈팬들이 열심히 소리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저 묵묵하게 바라볼 뿐.
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히터지, 아마.’
노히터거든. 아까 전까지는 퍼펙트였고. X발 덕아웃 돌아오니까, 아쉽긴 하네. 그게 왜 삐끗해가지고.
“···수고했어.”
덕아웃으로 들어가니, 스콧 에머슨이 마중을 나왔는데, 평소 6이닝쯤 던지면, 교체의사를 묻고는 했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노히터 중인 투수에게 교체될 거냐고 묻는 미친 투수코치가 어딨어.
씨익 웃어주니, 억지로 한숨을 참는 게 보이는데, 그런 스콧 에머슨을 뒤로하고 덕아웃에 들어가자, 홍해가 갈라지듯 선수들이 길을 비켰다.
내 자리까지 고속도로구만.
그래, 이 맛에 노히터하지.
무소불위의 권력. 얼마나 좋아? 스탈린과 카스트로는 평생 이런 느낌이었겠지?
‘이제 물러설 곳은 없구만.’
나도, 애런 저지도 말이야.
단순히 신인왕&MVP 라이벌 매치업을 넘어. 노히터가 걸려 있으니까.
슬쩍 원정팀 덕아웃을 보니, 수비를 위해 걸어 나오는 양키스 선수 중, 애런 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도 나를 바라봤다.
‘날이 제대로 섰네.’
그래, 아까 전에 보니까, 얼추 감을 잡은 것 같던데. 어떻게든 홈런 하나 쳐맥이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것 외에는 필요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오늘로 결정이 나겠지. 쟤가 날리든, 내가 성공하든. 어느 한쪽은 다음 승부까지 패배자가 될 테니까.
물론,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