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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108화 (108/316)

108화

요란한 알람 소리가 수면을 깨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개운했으니까.

최고의 컨디션을 위해, 최대한 정확하게 조절된 수면 시간은 언제나 옳지.

‘시간 딱 됐네.’

최대한 수면에 지장 받지 않도록 쳐놨던 암막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을 지나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준비할 시간이라는 거지. 오늘도 저녁 경기니까.

“아, 깨우러 가려던 찰나였는데, 딱 맞춰서 일어나셨네요.”

“알람 성능이 죽여주네요. 어디 산 거예요?”

“동네 마트죠, 뭐. 원래 한번 쓰고 버리는 알람으로는 싸구려가 최곱니다. 음량 조절 같은 걸 전혀 안 해놓거든요.”

삶의 지혜를 얻었구만.

2층 계단에서 만난 대니얼은 어깨를 으쓱거린 뒤,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도 식단에 맞춰서, 식사를 준비하려는 걸 텐데. 개인 트레이너가 아니라, 보모 수준이네. 응애.

‘그래도 별말 없는 거 보면,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돈은 확실하게 주나 보네.’

트레이닝도 트레이닝이지만, 컨디션 조절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돈이라도 잘 받아야지. 나도 돈 벌려고 이 짓 하는 거고.

‘뭐, 오늘은 그보단 명예에 가깝지만. 아니, 인기라고 해야 맞나?’

어찌보면 똑같은 말이다. 명예가 있거나, 인기가 있는 사람에겐, 언제나 돈이 따르는 법이니까.

아직 잠을 덜 깬 건지, 개소리가 무럭무럭 떠오르는데, 대충 욕실에 들어가 간략하게 샤워를 마치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고 느껴졌다.

딱 원했던 수준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를 원했냐고?

‘최고지 뭐. 중요한 경기인데.’

12시, 컨디션은 단 1초의 차이조차 없이, 정확하게 12시 정각을 가리켰다. 빨딱 섰다는 뜻이지.

‘그러고 보니, 요새 몸 상태가 좋아서 그런가? 아무리 아침이라도, 오늘은 좀 우뚝···’

아무튼 그렇다.

그렇게 처음부터 느낌이 좋은 몸은, 식사까지 우걱우걱 마치자, 완전히 풀 충전이 됐다.

그게 겉으로도 드러나는 건지, 대니얼 역시 굳이 컨디션을 묻거나 하지 않고, 그저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컨디션 안 물어요? 매번 체크하더니.”

“제 경력쯤 되면, 그냥 딱 보면 압니다. 선수의 폼이 좋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제가 일을 제대로 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구만. 워크에씩이 아주 대단한 양반이야. 보고 배워야겠어.

“오늘은 트레이닝은··· 길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웬만하면···”

그렇게 집에서의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늘 듣는 대니얼의 트레이닝 설명을 들으며 경기장으로 향하자, 제법 사람이 많았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좀 그렇지만, 사실 평소에도 내 등판 경기에는 사람이 좀 몰린다.

막 다른 때의 2배까진 아니고. 그냥저냥 평소보다 더 많은 게 눈에 보이는 정도?

근데 오늘은 더하네.

억지 라이벌리라며 못마땅해 할 때는 언제고, 흥미롭기는 한가봐. 그리고···

‘양키스도 좀 보이네.’

용자들이구만.

무려 오클랜드 원정을 올 생각을 다 하고. 팀에 대한 애정이 아주 지극한 사람들이야.

나는 오늘 그런 열성 팬들에게 미안한 짓을 할 생각이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거든.

“Suck! 사인해 주세요!”

“저희 아들이 진짜 팬인데, 사진이라도 한 번만-”

“오늘 저지인지 뭔지 하는 새끼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버려! 난 Judge(판사)가 싫거든.”

지정 좌석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니, 벌써부터 알아본 사람들이 제법 몰렸다.

다만 뭣 모르는 아이들 위주고, 선발등판 예정인 투수를 배려할 줄 아는 어른들은 살짝 물러나 응원 정도만 하면서, 그런 어린애들을 부러워했다.

마치 자신도 딱 20살만 어렸더라면, 저 사인을 내가 쟁취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표정이군.

‘그래도 오늘은 웬만하면 애들 정도만. 힘을 빼면 안 되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만 보는 어른이들에게도 사인 해주는 편이지만.

오늘은 나도 마음가짐이 남다르기에 어린 애들 정도만 사인해준 뒤,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괜찮아, 야구로 보답하면 돼. 그리고 오늘은 특히나 아주 효도관광 수준으로 보답할 생각이니까.

“좀 늦었네? 잠 푹 잘 잤나 봐?”

“뭐, 잠이야 늘 잘 자고. 오늘은 그냥 좀 더 정확하게 맞춰서 잤어요.”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니, 나를 본 몇몇 선수들이 아는 척했다. 대부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정도. 곧 등판할 투수니, 배려하는 거지.

“오~ 오늘 좀 자신 있어? 큰 거 노리나 봐?”

“예예, 그러니까 Old Man도 좀 성실하게 도와줘요.”

“Old Man이라고 해놓고 도와달라는 건 무슨 심보야? 뭐, 정 힘들다 싶으면 2루로 굴려. 최대한 잡아줄 테니까.”

다만 선수단 내에서 최고참인 제드 라우리는 오히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굴었다.

하긴, 괜히 어색하게 구는 것보다는 저러는 게 더 낫지.

투수마다 다르긴 하지만, 난 괜히 나까지 어색해지더라고.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탕탕 치는 제드 라우리를 뒤로한 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워밍업에 들어갔다.

“음! 확실히 오늘 폼이 좋네요. 코어도 이미 딱 잡혔고, 근육도 더 잘 가동되네요.”

평소의 워밍업은 보통 몸에 시동을 거는 방식이다. 자는 동안 굳은 몸을 천천히 깨우는 거지.

하지만 오늘은 반대로 조금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오히려 너무 쌩쌩해서 흘러넘치는 걸 최대한 제어하는 거지.

“Go, 오늘은 좀 어때? 밖에서 떠든다고 무리할 생각은 아니지?”

그렇게 한창 워밍업 할 때.

스콧 에머슨이 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론에서 엄청나게 주목하고 있으니. 내가 그에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거지.

이제 제법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데, 아직 날 모르는구만.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나, 당연히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스콧 에머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심이야?”

“저도 위험한 거 잘 아니까, 길게 말고, 딱 9이닝만 던질게요. 괜찮죠?”

“그래, 거참 절제력이 대단하기도 하네. 무려 연장을 안 나갈 생각을 다 하고.”

왜? 진짜야. 마음 같아선 연장 12회까지 던져도 멀쩡할 것 같은데, 적당히 코치 얼굴 보고 참는 거라고.

“그래서, 그럴 힘은 있고?”

“뭐, 지금 보시면 되겠네. 딱 됐죠?”

“네, 이젠 Go도 적응하셨네요. 딱 15분 됐습니다. 바로 불펜으로 가시죠.”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인 투수코치를 질질 끌고서, 불펜으로 향하자, 그는 조금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보다 내 상태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안 잡히는 거겠지.

내가 좀 탐욕스럽기는 해도, 오늘처럼 아주 뻔뻔하게 구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리고 곧 불펜피칭이 시작됐을 때. 불펜의 안에는 어떠한 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

심지어 불펜포수조차 립서비스를 자제한 채, 오로지 공을 받는 정도에만 집중했고.

이후 다음 구종의 그랩을 잡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 그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Suck,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불펜에서 전력투구하는 건 아니지? 그럼 못 써.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그렇지.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이제 70%에요. 본격적으로 던질 거니까, 똥꼬에 힘 빡 주고 잘 받으쇼.”

“Oh God···”

어딜 쉬려고.

공이나 받아라, 노예야.

조금 더 출력을 올리자, 묵직함을 넘어,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심지어 포심도 아니다.

슬라이더였으니까. 공 하나하나에 힘이 제대로 실린다는 거겠지.

긁히는 날이라··· 딱 좋네.

앞으로 아마 내려갈 텐데.

다시 올라가기 전까지 약빨이 안 떨어지도록, 확실하게 인상을 심어둬야 했으니까.

“오늘 완봉 갑니다.”

내 말에 스콧 에머슨은 대답이 없었다. 늘 하는 개소리기는 하지만, 오늘은 진심이 담겼다는 걸 아는 거겠지.

진지하게 가능하다는 것도.

그렇게 오늘의 구질 점검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시험 삼아 하나를 던졌고-

“오.”

제법 괜찮게 들어갔다.

이거 잘하면 쓸만하겠는데?

제구도 적당히 잡히고.

‘레퍼토리에··· 아니, 일단은 아끼자.’

혹시 모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비밀병기 하나쯤은 쥐고 있어도 괜찮을 테니까.

그것으로 불펜피칭을 마친 뒤, 드디어 문이 열렸고.

“You-Suck!”

“양키 새끼들한테 제대로 보여줘! 누가 King인지!”

“Judge인지 뭔지, X같이 빨아주던데, 제대로 Suck it 시켜버려!”

엄청난 소음이 한순간 훅 들어왔다. 오우, 오늘은 한층 더 강력하네. 아주 제대로 열이 올랐어.

그 소리에 생각 정리를 끝낸 듯, 내내 말이 없던 스콧 에머슨도 입을 열었다.

“다 조져버려. 저~기 네 팬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지고 나발이고. 죄다.”

오케이, 목줄도 풀렸네.

마지막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이제 남은 건 쪽팔리지 않도록 실천하는 것뿐.

불펜의 문턱을 넘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당당히 그라운드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번 경기의 주인공으로서.

####

오늘 파트너는 브루스 맥스웰이었는데, 얘는 지가 더 긴장한 것 같네.

“후우, 오늘 분위기 장난이 아니네. Suck, 자신 있지?”

“자신 있으니까, 넌 힘 좀 빼라. 뭘 그렇게 쫄아있냐. 원정도 아니고, 우리 홈인데.”

“···홈이 더 무서워. 관중들 얼굴 좀 봐.”

그건 인정.

원정에서는 그나마 좀 잔잔한 편이지, 안방의 오클랜드 팬들은 그야말로 여포가 따로 없다.

특히 레이더스들의 경우 원정이 ‘그나마’ 얌전한 수준이고, 홈에선 아주 비주얼이 끝장나지. 저거 봐, 오늘은 해골까지 뒤집어썼네.

요즘 들어서는 저거 잘 안쓰더만. 기선제압을 하려나보다.

“Fuck Tha Jugde!”

“X이나 까라!”

“정숙할 준비 해라 X발놈아! 진짜 법정이 시작되니까!”

뭐가 그리 악에 받친 건지, 벌써부터 Fuck Tha Police를 개사한, Fuck Tha Judge를 부르면서 소리치고 있는데. 저 꼴을 보니, 겁먹을 만도 하네.

“그래도 쫄지 말고, 공이나 잘 받아.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경기니까.”

약간 얼어있던 브루스 맥스웰은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건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잡기만 할게.”

“그래, 그리고 손 안 다치도록 조심하고.”

한층 더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데, 아무튼 잘 알아듣게 말했으니, 이제 내려보냈다.

그렇게 홀로 남은 마운드.

천천히 상대 팀을 훑었다.

뉴욕 양키스. 악의 제국.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팀이자,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프로야구팀.

솔직히 나도 어렸을 때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핀 스트라이프를 입고, 마운드에 서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상상 말이야.

다저스랑 양키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기는 했는데, 어쨌든 그게 꿈이었지. 뭐, 지금은 에이스의 에이스가 됐지만.

그토록 엄청난 역사와 명성을 지닌 명문 구단이지만···

‘지금은 조금 미묘하지. 악의 제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니까.’

지금의 양키스는 솔직하게 말하면, 엄청나게 강팀은 아니다. 물론 리그 최고의 슈퍼슈퍼 빅마켓이라서 선수단 자체야 뛰어나지만.

내가 기억하는 악의 제국 시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

‘슈퍼스타가 없으니까.’

더 말할 것도 없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데릭 지터.

약이긴 한데, 어쨌든 관심을 몰고 다녔던 A-Rod 아니, Roid 등등.

내가 양키스 하면 떠올리는 슈퍼스타들은 다 은퇴했고, 지금 양키스에는 그런 느낌을 주는 선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양키스 팬들이 애런 저지에게 더 각별한 걸지도 모르고.’

그런 계보를 이어받을 새로운 슈퍼스타이자, 제국의 차세대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본다면, 나는 그런 로열로드를 틀어막은 사악한 악당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콜리시엄인데도 곳곳에 양키스 팬들이 보였다. 원정팬인 걸 감안하면, 생각보다 많네.

깡도 좋아, 야구 좀 보겠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오클랜드 원정 올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오클랜드에 거주 중인 양키스 팬일 수도 있겠네. 양키스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전국구 인기 팀이니까.

‘그토록 사랑하는 애런 저지가 날 이겨내고 당당히 우뚝 서는 걸 보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의 목표는 간단했다.

그런 양키스 팬들의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황태자와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그게 오늘의 내 목적이었다.

왜냐고? 왜긴 왜야, 그냥 주목받고 있을 때 제일 잘하는 거지. 내가 무슨 양키스에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것도 아닌데.

‘관종 맞네, 관종 맞아.’

그것으로 잡념은 지웠다.

마지막 연습피칭으로 커맨드와 마운드 감각을 올린 뒤. 곧바로 나오는 타자를 봤다.

오늘의 첫 타자는 브렛 가드너. 좌익수인데, 전형적인 리드오프에 가까운 타자다.

선구안이 좋고, 컨택도 좋으니까. 헛스윙 자체를 잘 안 하는 편이지.

다만, 스윙도 꾹 참으며, 투구수를 많이 뽑아내는 타격 스타일 탓에 루킹 삼진은 자주 당하지만.

‘나가면 껄끄럽겠지. 파워를 올리면서 도루가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까다로운 주자니까.’

물론 나갈 수 있다면 말이야.

타자를 보니,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봤다. 노련한 놈들은 대부분 저런 편이다.

워낙 신기한 성적을 찍고 있으니, 마치 상상 속 동물을 보는 것처럼 보더라고.

‘스윙을 참는 편이라고 해도···’

이것도 참을 수 있을까?

주심의 플레이볼 선언이 나오는 즉시, 공을 던졌다. 원래라면 사인을 교환하고, 코스 잡고 하면서 시간이 소모되지만. 오늘은 그런 게 없으니까.

갑작스러운 피칭에 놀란 듯, 황급히 자세를 잡은 브렛 가드너는 심하게 번뇌했다.

먹음직스러울걸?

‘애매하지?’

아마도 내가 몸쪽 패스트볼을 사랑한다는 거야 잘 알 거다. 자주 던졌으니까.

도끼병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워낙 유명한 놈이라서, 그런 게 죄다 분석됐을 거거든.

이번에도 몸쪽이긴 한데. 약간은 조금 더 들어왔다. 거의 한복판에 가까울 정도로.

투수가 첫 이닝에 제구 미스를 범하는 거야 흔한 일이고, 애초에 몸쪽 자체가 위험한 코스다 보니, 이런 경우가 흔하다.

차라리 아예 들어왔다면, 의심이라도 했겠지만, 생각보다 흔하게 몰리는 코스 중 하나라서 더 골치 아플 거고.

‘그쪽 이젠 파워도 좋잖아? 막 10개도 넘게 때리더만?’

결국 참지 못한 듯 예상보다 이르게 스윙이 나왔고, 배트를 뻗는 순간에는 타자는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결단을 내린 거니까.

다만 공이 맞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을 뿐. 패스트볼은 맞아, 포심이 아닐 뿐.

‘투심, 불펜에서보다도 더 좋네. 역시 난 실전파야.’

투심 패스트볼.

정점을 찍은 컨디션은 이것 역시 확실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순간 살짝 떨어지면서 안쪽으로 쫙 말리는 무브먼트는 배트를 비스듬히 지나치기 충분했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때린 타구는 그대로 2루수 쪽으로 굴러갔다.

‘호언장담 하더니, 잘 잡아주네. 믿어도 되겠어.’

2루수 제드 라우리는 아까전에 했던 호언장담처럼, 가볍게 타구를 낚아챘다.

“아웃!”

그것으로 원아웃.

투구수 많이 뽑기로 유명한 타자한테, 공 하나로 아웃 잡았으니, 훨씬 남는 장사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패배자를 뒤로한 채 올라오는 타자, 스탈린 카스트로.

평소에는 이보다 조금 뒤에, 4번이나 5번 정도에 위치하는 타자인데, 오늘은 2번으로 나왔다.

‘변화구 대처가 좋은 타자고, 난 변화구가 더럽게 많으니. 그걸 노려본 건가?’

뭐, 저쪽 감독 생각이 있겠지.

아무튼 입장하시는데, 이름 한번 진짜 죽여주기는 하네.

내가 수업 때 잠만 자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탈린이랑 카스트로는 안다.

그런 이름을 둘 다 가지고 있다니, 아주 내추럴본 빨갱이구만.

저저 살 포동포동한 거 찐 것 좀 봐, 인민들을 얼마나 착취했으면, 턱에 알이 두둑히 차올랐네. 아주 시뻘갱이야, 시뻘갱이.

‘근데 양키스네.’

그런 본투비 코뮤니스트가 양키스 소속으로,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서 뛰는 게 좀 웃기긴 하네.

듣기로 신시내티 레즈 팬들은 꾸준하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 완벽한 빨갱이가 되자고. 거기로 FA나 트레이드되면 딱이긴 하겠지.

아무튼 그건 그렇고.

스탈린 카스트로, 심심한 타자는 아니다. 한때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유망주니까.

컵스의 핵심 코어로 떠오르며, 데뷔전 데뷔 타석에서 홈런을 때리고, 6타점을 기록하며, 데뷔전 최다 타점 기록까지 세웠었지.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못 큰 편이지.’

물론 못하는 건 아니다.

기대보다 덜하다는 거지.

준수한 정도는 되니까.

히스패닉 특유의 탄력을 이용한 파워도 나쁘지 않고. 앞서 말했듯 유망주 시절부터 변화구를 잘 공략하는 것이 특징이었던 선수인데.

“스트라이크!”

어림도 없지!

내 변화구는 평범하지 않거든. 그리고 그쪽은 우타자잖아?

바깥쪽으로 딱 붙여서 서클을 던지니, 순간 배트가 나왔지만, 쭈우우우우우우욱- 멀어지는 공을 보며 인민의 어버이께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지하게 오늘은 페드로 마르티네즈···라고 치자. 아무튼 그럼.’

절정에 올라선 컨디션.

그리고 원래도 리그 최고로 칭송받은 서클 체인지업.

그것이 어우러진 결과물은 고대의 괴물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주 넋을 놓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야 감사하지.

“스트라이크!”

한번 더 서클.

하지만 이번엔 떨어진다.

오늘은 유독 힘이 좋기에, V1도 평소보다 역회전이 심한데, 최대한 낙차가 있도록 컨트롤하며 던지니.

앞전과 똑같은 구속에 다시금 배트를 냈던 스탈린 카스트로는 큼직하게 헛스윙하며 반 바퀴쯤 돌았다.

그걸로 투 스트라이크.

이렇게 됐으니 뭐···

‘한 구 빼자.’

가볍게 던지는 거지, 가볍게.

바깥쪽으로 조금 멀게.

코스를 확인한 듯, 타자는 이번에는 배트를 멈췄지만, 그의 선택은 이번에도 틀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슬라이더거든.

백도어성 슬라이더.

삼진이 올라가며 이제 투아웃. 몽롱한 표정의 수령 각하를 뒤이어, 드디어 그 녀석이 올라왔다.

“Fuck Tha Judge!”

“우우우우우우!”

“넌 Suck 발꿈치 때보다도 못해! 비비긴 어딜 비벼!”

“너 좀 배트 좀 놀리던데,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양키 고홈 X새야!”

압도적인 야유.

홈이 좋긴 좋아.

나 대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사실 난 아무렇지 않은 게 함정이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홈런 날리고 멋진 척 노려봤던 모습인데, 지금도 그때와 비슷하다.

용사의 등장처럼 대단히 결연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타석에 입장했으니까.

애런 저지가.

‘솔직히··· X나 까다롭긴 하네.’

MVP 레이스의 선두그룹 중 한 명이자, 압도적인 루키 시즌을 보내고 있는 선수니까.

물론 나를 제외하고.

파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강하다. 마지막까지 공을 보고 휘둘러도, 쭉 뻗을 정도니까.

선구안도 엄청나게 좋은 편이다. 애초에 길게 지켜보는 타입이기도 하고. 어쨌든 눈이 좋다.

타격 기술은 뭐, 상당하다.

저렇게 홈런을 까면서도, 타율이 높은 이유가 있지.

그것이 종합된 애런 저지라는 타자는 솔직하게 말하면 X나게 쎄다. 진짜 X나게.

‘거기다 오늘은 뭔가 단단히 준비한 것 같고.’

앞서 말했듯, 아주 집중력이 대단한데, 사실 다른 때에 저런 타자를 만났다면 조금 쫄렸겠지만. 오늘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지지 않고 노려보자, 저지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의 대치. 그것을 깨트린 건 주심의 재촉이었다.

명장명 하나 만들려고 했더니, 산통을 깨시네그려. 요즘 사무국이 경기시간 당긴다고 지랄하던데. 심판까지 이러네.

아무튼 그래도 멋진 장면 하나 땄으니, 이젠 승부에 집중할 차례.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스트라이크!”

‘힘 좀 빼지, 그러냐. 첫 타석은 절대로 못 칠 텐데.’

이번 타석은 내가 잡는다.

내 공이기는 한데, 솔직히 처음 보는 정도로는 아무리 쩔어주는 재능이라도 못 칠 테니까.

과감한 몸쪽 패스트볼.

대부분 경기에서 첫 투구는 이거였는데, 오늘은 얘한테 처음 던지는구만.

애런 저지의 배트가 아래를 헛돌았다. 어찌나 묵직한지, 여기까지 바람이 불어오네.

“크하하하, 그게 뭐야?”

“어우, 시원해! 여름이라고 부채질 해주는 거냐?”

관중들의 조롱 속에서도 애런 저지는 다시 차분하게 타격자세를 취했지만, 눈동자에서는 당혹감이 느껴졌다.

어때? 상상이상이지?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뭘 상상했던지, 오늘의 내 공은 그보다 조금 더 X같을 테니까. 왜냐고? 그야···

“파울!”

오늘이 제일 잘 긁히는 날이라서 그렇지. 다시 한번 더 패스트볼. 이번엔 바깥쪽이다.

그래도 놀랍긴 하네. 벌써 배트가 따라오는 걸 보면. 하지만 틱-하는 소리를 내며 타구는 뒤로 날아갔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후딱 가자. 나 오늘 오래 던져야 하거든.’

상남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투 스트라이크 잡았으면, 승부도 끝을 봐야지. 아마 쟤도 알고는 있을 거다. 내가 뭘 던질지.

앞에 타자한테 무지막지한 게 날아갔고, 그게 투수의 주력구인데, 더 말할 것도 없지.

잔뜩 긴장한 듯, 배트를 꽉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는 닿지 않았다.

거의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듯하다가, 아예 존 밖으로 나가는 상식 외의 공에 애런 저지의 기다란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오, 팔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끄트머리에 걸쳤겠네. 저걸 따라가? 실력도 좋은데, 최근 얘도 정점에 다다른 타격감을 자랑해서 그런지. 빡세긴 하네.

뭐, 결국 내가 이겼지만.

1승0패. 손쉬운 승리였지만, 아직 승부는 한참이나 더 남았다. 내 이닝이 무수하게 남은 것처럼.

그러니 애런 저지에게도 아직 기회가 많이 남은 셈이지만, 나는 한 세트조차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으로 1회 초, 전초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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