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05화 (105/316)

105화

게임은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중간에 역전을 허용했기에 승수는 올리지 못했다.

‘불펜이 제대로 불을 지르네. 이런 느낌인가?’

저 X같은 타선 상대로 쎄가 빠지게 던져서 막았더니. 불펜의 방화로 승리가 날아가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그래도 내가 원하던 건 다 해봤던 경기였기에, 아쉽긴 해도 그리 씁쓸하진 않았다. 뜻밖의 부수적인 수익도 올렸고.

“Hey, Go, 아니, Suck이라고 부르던가? 오늘 Fucking Cool이었어. 마지막에 날 거른 건 좀 짜증 났지만.”

“그야, 누가 봐도 날릴 것 같은 타자를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경기 때도 그렇더니, 브라이스 하퍼는 묘하게 나한테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 동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감이 좋네. 바로 담장 너머로 날릴 생각이었는데. 아무튼 간만에 재밌는 거 잘 봤어. 간만에 마음 맞는 친구 좀 만난 것 같은데, 번호나 교환하자. 어때?”

경기가 끝난 뒤, 복도에서 만난 브라이스 하퍼와 번호를 교환했거든

장족의 발전이지. 1년 전만 하더라도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던 천외천의 슈퍼스타랑 친목질하게 된 거니까.

“나야 거절 할 이유가 없지.”

당연히 번호를 고이 바쳤고, 만족스럽게 웃은 하퍼는 곧 사라졌다.

‘하퍼가 저럴 정도면··· 외부 반응은 뭐 볼 것도 없겠네.’

젊은 야구팬들의 입맛에 가장 가까운 선수는 브라이스 하퍼다. 그렇기에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거고.

지루한 야구를 탈바꿈 시킬 개혁가로서 그를 지지하는 건데, 그런 녀석도 흥겹게 생각했다면, 더 볼 것도 없지.

“Go, 인터뷰야.”

“제가요?”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응이 왔다. 하퍼와 헤어진 뒤, 다시 라커룸으로 돌아오자, 인터뷰가 반겨줬으니까.

잘한 선수 인터뷰야 당연한 거기는 한데, 약간은 의아했다. 6이닝 1실점, 거기에 8탈삼진이니, 잘한 건 맞는데···

‘철저하게 이슈 픽이지.’

내가 내려간 이후로 워낙 타자들이 화끈했었고, 역전애 재역전을 거듭했던 경기다.

그러니 상식적으로는 재역전 홈런의 주인공인 크리스 데이비스가 인터뷰하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평범한 경기가 아니니까.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한 뒤, 다시 그라운드로 나오자, 아직 떠나지 않은 홈팬들이 박수를 쳤다.

“휘이이이이익!”

“승리는 아쉽지만, 오늘 X나게 멋졌어!”

“다음에 또 누가 X같은 소리하면, 그땐 우리가 대신 벗을게!”

음, 그래, 여전히 광기군.

저 아저씨가 나 대신 벗는다니. 그건 보기 싫은데.

옆에 계신 아가씨라면 또 모를까.

그런 열광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리포터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으나, 인터뷰 내용 자체는 평범했다.

그냥 오늘 잘했다, 타자들 잡을 때 생각은 어땠냐? 성적은 어떻게 생각하냐? 등등.

무난하기 그지없지.

“···그리고, 이걸 안 물어볼 수가 없겠죠. 오늘 정말 뜻밖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는데. 혹시 어떤 생각으로 하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허나 그건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위해 남겨놓은 건지,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리포터는 기다렸다는 듯 그런 질문을 던졌다.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내가 또 폭탄 발언 같은 걸 하길 원하는 눈치다. 대놓고 저격한다거나, 언론이랑 대판 싸우는 거 말이야.

내가 입을 좀 잘 털잖아?

기대할만하지.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다.

‘계속 입만 털기보다는, 약간의 여유, 그리고 자신감을 보여줄 타이밍이지.’

원래 계속 당기기보다는, 능청스럽게 밀기도 해야 더 효과적인 법이거든.

“뭐, 제 생각이야··· 오늘 피칭으로 충분히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런가요?”

씨익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아니나 다를까, 관중들도, 리포터도, 카메라맨도 아주 뿅가죽네.

“네··· 그렇죠. 아주 멋지게 보여주셨죠.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걸로 마지막 유종의 미까지 확실하게 거뒀고,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올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완전히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브라이언에게 연락이 왔다.

-Go, 오늘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솔직히 긴가민가했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Go가 옳았군요.

“반응이 좀 좋나 봐요?”

-좀이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단언하건데, 오늘 Go는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퍼포먼스를 보여주셨습니다. 어쩌면···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 런처럼 전설로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예고홈런이라···

야구의 신, 베이브 루스가 가진 전설적인 일화 중 가장 첫손에 꼽히는 이야기다.

베이브 루스께서 가로되.

그의 신성한 나무(방망이)로 머나먼 낙원의 끝을 가리키며, 내 저 담장 너머로 사악한 타구를 날려 보내겠노라 하시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그를 비웃으니, 위대한 베이브 루스께오서 손수 기적을 행하시어, 사악한 투수와 공에 징벌을 내리시었다.

진실인지는 모른다. 사실 그런 저 없다는 게 정론이지.

허나 최소한 미국의 야구팬들은 그걸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 위대한 퍼포먼스에 근접했다라···’

확실히 예삿일은 아니겠지.

피곤한 터라, 대니얼이 대신 운전해줬기에, 슬쩍 휴대폰으로 반응을 살피니. 온통 내 이름뿐이네.

각종 기사는 물론, SNS와 인터넷 사이트, 심지어는 나한테 치를 떨고 있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팬 커뮤니티에서도 극찬이 나왔다.

‘뭐, 당연하겠지. 젊은 층은 이런 걸 좋아하니까. 특히 미국놈들은 정정당당함을 사랑하는 수준이고.’

약간 보수적인 이들은 상대팀에 대한 존중이 떨어졌다거나, 야구장을 자기 쇼맨쉽을 위한 공연장으로 만들었다거나 하며 오히려 떨떠름한 눈으로 보는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애초에 브라이스 하퍼만 보더라도 팬덤이 극명하게 갈리니까.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지.

물론···

[오늘 야구 봤어? 내 남자친구가 오클랜드? 거기 팬이라 가끔 나도 옆에서 보는데. WoW 이 선수 진짜 Hot하더라. 남자친구 옆에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니까? #Baseball #Athletics #Go]

└Go말이지? 원래 유니폼으로도 충분히 몸매가 드러나긴 하는데. 오늘은 셔츠 벗으니까 그냥··

└그 정도면 그나마 양호하네. 난 그거 보고 남자친구 재활용 봉투에 넣어서 버리고 싶던데.

└경기 끝나고 인터뷰에서 잔망스럽게 웃던데. 완전히 반했어!

이런 건 나도 예상 못 했다.

핫? 침을 삼켜? 잔망? 내가?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혹시나 해서 프로필을 살피니, 다행히(?) 여자 맞네. 이럼 괜찮지. 어우, 수염난 레이더스 아재들 생각했다가 식겁했네.

아무튼 인기가 올라갔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역시 난 대가리가 좋아.

‘슈퍼스타, 30경기도 필요 없겠는데?’

이미 반환점을 넘어섰으니까.

역대급 임팩트를 선사하며, 이미 돌풍을 일으켰던 나이기에, 어쩌면 오늘의 퍼포먼스는 마지막 퍼즐이 된 것 같았다.

브라이스 하퍼의 배트 플립이나, 앞서 언급한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런처럼.

‘고유석이라는 선수만 가진, 고유의 ‘전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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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이라는 이름이 토네이도처럼 미국을 휩쓸었을 때, 당연하게도 그 여파는 한국까지 닿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미 초월적인 수준이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기에 조금 의아하겠으나.

이번에 반응이 온 건 일반적인 야구팬과는 조금 달랐다.

“와··· 얘 진짜 개쩐다.”

“메이저리그에서 저런 짓거릴 하네. 무슨 김병헌 선배님도 아니고.”

“진짜 난놈이야, 난놈.”

사실 프로야구 선수들 사이에서도 고유석의 인지도는 꽤나 높았다.

비주류 고등학교 출신에, 미국으로 직행했던 터라, 관계가 있는 이들은 없지만.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꿈의 리그, 메이저리그에서 영화 같은 성적을 올리는 선수이기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86마일이면··· 138키로 아니야? 이런 게 메이저에서 통하네···”

“구위가 죽여주잖아. 사실 이쯤 되면 구속은 의미없지.”

“타이밍 잘 잡던데, 다음에 대표팀 오면 좀 물어볼까?”

“야이 씨, 타이밍은 감인데 그게 불어본다고 되냐?”

“왜? 혹시 알아? 나도 딱 배워가지고, 메이저리그 갈지.”

“꿈 깨라, 새끼야. 넌 어림도 없어. 나라면 또 모를까.”

특히나 투수들이 바라보는 고유석은 조금 미묘했다. 꿈의 무대라는 칭호에 걸맞게도, 메이저리그의 투수들은 괴물 같았다.

한국에선 최고구속으로도 보기 드문 150km/h, 93.2마일의 구속을 경기 내내 평균으로 찍고. 꿈에서나 던질 법한 100마일, 160km/h이 거의 경기 당 한 번 꼴로 나오는 수준이니까.

허나 고유석은 다르다.

평균 84~5마일(135km/h)에서 최고 89마일(143km/h) 밖에 나오지 않는 구속은 꽤나 친근했다.

프로야구 평균과 비교하더라도 비슷하거나, 오히려 살짝 느린 수준인데. 그런 구속으로 메이저리그를 때려잡는 고유석은 투수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나도 가능한 거 아니야?’

‘기술만 잘 갈고 닦으면··· 솔직히 구속은 내가 더 높으니까.’

어쩌면 자신도 저런 무대에 도전해서 저런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이렇듯 선수들, 특히나 투수들에게 고유석이 메이저리그에 대한 단꿈을 꾸게 만들었다면, 스카우트들에겐 새로운 일거리였다.

“어? 박프로는 여기 웬일이야?”

“김프로랑 사정 똑같지. 단장이 아주 들들 볶더라고. 고유석 같은 놈 데려오라고.”

“에이, X발, 그놈의 고유석. 그런 놈이 흔하면 프로야구가 진작에 메이저 대체했겠네.”

전면 재검토.

고유석의 등장 이후.

각 구단의 스카우트팀에 내려진 지시였다.

고교야구 시절, 고유석은 한국에서도 그리 대단한 유망주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4라운드 정도에 지명될 정도로 평가받았으니까.

한국에서 보기 드문 피지컬이라는 확실한 툴을 가지고 있어서. 구속이 오를 지도 모르니. 상황에 따라 투수팜이 약한 팀이라면 3라운드도 가능하고.

그냥저냥 1군 선발투수 정도는 기대해볼 만한 투수라는 평가였으나. 그런 투수가 메이저리그를 휩쓸었다.

“복권일지도 모르니까, 잘 긁어!”

“옛날 자료를 뒤져보니, 고유석한테 스카우트 팀이 책정한 계약금이 8천만원이던데, 이러니까 우리 팀이 이 모양이지! 그러고도 월급 받고 살고 싶어!”

“고유석 구위 봤지? 피지컬 좋은 놈들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니까, 구속 상관없이 무조건 확인해!”

“고유석 모교가 어디야? 저번에 인터뷰 보니까, 서클 체인지업 그거 고등학생 때 배웠다던데, 그쪽 한번 알아봐.”

어쩌면? 혹시?

기존에 저조한 평가를 받았던 투수들에 대한 시선이 조금 달라졌고, 특히나 원래도 스카우트에게 사랑받는 키 큰 투수들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더 올라갔다.

거기에 변변찮은 성적 탓에 그간 드래프트 시장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고유석의 모교 역시 반사이익을 누렸고.

“저거 스카우터 아니야?”

“스카우트, 이 무식한 새끼야, 스카우트.”

“아, 뭐든 간에, 스카우트 아니냐고?”

“맞는 것 같은데? 아니··· 근데 왜 우리 학교에···”

“고유석 선배님 때문 아니야?”

선수의 학부모, 지인 정도를 제외하면 언제나 텅 비었던 경기장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큼직한 카메라를 장착한 이들이 늘어났다.

“···저, 분명 작년에 올해까지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예? 아~ 하하, 아무래도 우리 감독님이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 올해라는 말은, 올해로 재계약을 하자는 뜻이었는데. 맞죠?”

“아, 그럼요. 이래서 한국말은 쪼오끔 어렵다니까요. 서로 해석이 달라지니···”

늘어난 야구부에 대한 관심.

바글거리는 스카우트.

활짝 열린 프로의 길.

그리고 메이저리그를 휩쓸다 못해, 아예 정복하고 있는 야구부 출신 선수까지.

‘얼씨구? 아주 뻔하다, 뻔해. 제자 하나 잘 둔 덕분에, 팔자 폈네, 팔자 폈어.’

저조한 성적을 이유로, 올해를 마지막으로 야구부 감독직을 내려놓기로 했던 박감독 역시 때 아닌 재계약 제안을 받았고 말이다.

이렇듯 고유석이라는 이름이 미국 야구팬의 심장을 저격했다면, 한국은 그보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야구계에 자체에 영향을 끼쳤고.

그 여파는 조금 이를지도 모르는 곳까지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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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표팀이요? 올해 대회가 있던가?”

-네, APBC라고, 찾아보니 이번에 갓 신설된 국제대회입니다. 24세 이하, 프로 3년차 이하만 가능하지만, 와일드카드 제도가 있더군요.

브라이언에게 연락이 왔다. KBO 사무국쪽에서 입질이 왔다고 하더라고.

APBC, 아시안 프로야구 챔피언십에 내가 와일드카드로 승선할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 같은데.

솔직히 처음 들었다.

이런 대회도 있구나.

야구 은근히 국제대회 많네.

이번 11월에 열리고. 이번이 첫 번째 대회라는데, 대충 한국 쪽 커뮤니티 뒤져보니, 예상 로스터는 대부분 유망주 위주다.

‘솔직히 내가 끼면 안 될 거 같은데.’

갓 데뷔한 유망주 혹은 2군 선수들의 국제대회 경험을 위한 건데. 까놓고 말해면 내가 거기 끼어도 되는가 싶다.

갓 신설된 대회에 메이저리거가 나가면··· 좀 그림이 이상할 거 같은데. 실제로 한국 반응만 봐도 내 이름은 언급도 안 되고 있으니까.

“내가 거길 왜- 아!”

허나 사무국에서 내 승선 의향을 묻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큰둥하게 말하던 찰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내년에 있을 대회 말이야.

‘아시안 게임.’

자카르타-팔레방 아시안게임. 이게 왜 연결되느냐면, 일종의 명분 쌓기다.

‘그래, 아시안 게임이 있었지. 뭔 개소린가 싶더니, 그거 때문이었어.’

처음 오클랜드랑 계약하고, 나한테 관심을 가지던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에게 미리 통보했을 때, 한 스카우트가 그랬다.

너 그렇게 미국가면, 메이저리그에서 정말 잘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국대 못 간다고.

군면제는 어림도 없고, 영주권이라도 따야 할 거라고.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그때는 그냥 허접한 협박으로 생각했는데. 대가리 굵고, 듣는 말이 많아진 뒤에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찌됐든 국가대표도 사무국의 입김이 들어가고. 사무국은 당연히 자기 나와바리인 프로야구에 기울 수밖에 없다.

사무국 입장에서 해외로 튀어버린(?) 괘씸한 놈한테 귀중한 국대자리 주기 싫으니까.

‘애초에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별로 없긴 하지만, 어쨌든 면제 걸린 대회에 대표팀 승선하려면, 그 전에 한번 나가야 하지.’

그렇다고 해서, 메이저리거들을 아예 안 뽑을 수는 없으니, 면제가 걸린 대회,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승선하고 싶으면.

그 대신 다른 대회, WBC 같은 대회에 먼저 참가해서, 일종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한국 야구에 아무런 도움도 안 주는 놈이 메달만 홀랑 따고 튀면 안 되니까,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거지.

‘WBC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아시안 게임 전까지 다른 대회는 없고. 그러니··· 나한테 이거라도 나와서 명분을 만들라는 거네.’

개짓거리 같아 보여도.

다르게 보면 사무국에서 먼저 나한테 손길을 내민 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U-24대회에 X발 메이저리거가 나가면 좀 이상하잖아? 분명 한국에서도 말이 나올걸?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괜히 메이저리거 배려해준다고 욕하고, 모르는 사람들은 국위선양하는 메이저리거한테 쓸데없이 부담 준다고 욕하겠지.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내 의향을 묻는다는 건, 내년 아시안 게임을 위해 나한테 미리 명분을 만들어주겠다는 뜻. 예외는 있어선 안 되니까.

그러니 사무국 입장에선 꽤나 관대한 조치를 해준 건데···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애가 탔다는 거지. 한국에서 내 인기가 생각보다 더 큰 거 같은데?’

고압적이기로 유명한 한국야구위원회 분들께서 먼저 그렇게 나왔다는 건, 그만큼 지금 내 성적이 X나게 쩔고, 인기가 대단하다는 거다.

출신 성분 따질 정도를 넘어섰다는 뜻이지. 그렇기에 궁금했다.

“브라이언, 8월 말쯤 되면 대충 알 수 있겠죠? 사이 영 가능성을.”

-···네, 보통 그 정도쯤 되면, 확실한 후보군이 생성되죠.

“네, 그럼 됐어요. 일단 확답은 피하고, 서로 감정 안 상하도록, 여지만 줍시다, 여지만.”

브라이언의 말에 의하면 예비 엔트리 발표는 8월 말이고. 최종 엔트리 발표는 10월이다.

사무국에선 웬만하면 예비 엔트리 발표 전까지 내가 선택해줬으면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일단 간만 볼 생각이다.

‘11월이면 아마 월드시리즈 가서, 몇 번 취소경기 나오지 않는 이상 오프시즌일 텐데. 웬만하면 겨울에 공 던지는 건 피해야지.’

사무국이 이례적으로 날 배려한다는 건 잘 알겠지만, 어쩔 수 없다.

11월이면 어깨에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을 텐데. 그때 공 던지다가, 자칫 잘못하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러면 다음 아시안게임을 위핸 명분이 날아가는 셈이지만···

‘막말로 내가 사이 영 탄다 치면, 자기네들이 어쩔 거야?’

그깟 명분 때문에 사이 영 위너를 국대에서 거른다면, 사람들이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할걸?

‘뭐, 혹시나 일 잘못 돼도, 다음 올림픽이 있으니까. 일본에서 개최하니, 무조건 야구가 있을 텐데. 그때 가서 석고대죄라도 하지 뭐.’

나이가 조금 빠듯하기는 해도.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찬스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사람들의 주목과 그것이 불러온 재밌는 이슈와 함께, 원정 비행기는 탬파베이로 향했다.

탬파베이 레이스. 그들이 이번 시리즈 상대였으니까.

“아··· 진짜 X같다.”

“두탕 뛰는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죽을 거 같은데.”

“에이, 설마. 감독님이 알아서 교체해주시겠지.”

“에휴, 좋~다 했더니. 딱 X같은 일이 닥쳐오네.”

탬파베이 원정을 떠나는 비행기 안은 선수들의 한숨으로 가득했다.

홈을 떠나, 머나먼 동부로 원정을 가는 것도 힘들긴 한데, 이번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더블헤더. 야수들 죽어나겠네.’

3연전 중 2,3차전이 더블헤더 경기거든. 쉽게 말해서 하루에 경기 두 번 하는 건데, 그쯤 되면 벤치에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다.

경기에 나가야 하는 선수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왜 남일 하듯이 하냐고?

‘뭔 상관이야? 난 투수에다, 심지어 선발투수인데.’

그거야 야수들 이야기고.

투수는 문제없어. 그냥 좀 덕아웃에 오래 있느라 지루하다는 걸 제외하면.

거기다 나는 2차전, 그러니까 더블헤더 첫 경기에 등판 예정이니, 가장 사정이 좋지.

“Suck, 너 몸 좋은데, 3차전에 나 대신 지명타자로 나가는 거 어때? 별거 아니야. 그냥 방망이 휘두르면 돼. 넌 힘 좋으니까, 홈런도 날리겠네.”

“크리스, 저도 마음 같아선 그래 주고 싶은데, 제가 2차전에 등판해서요. 딴 사람 알아봐요.”

“X발, 그렇지, 참.”

팀의 중심 타자인 만큼, 두 탕 뛰는 게 확정된 크리스 데이비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기내를 서성였다.

그래도 이 양반은 사정이 낫지. 2차전이야 포지션대로 좌익수로 나가겠지만, 3차전은 지명타자로 나갈 테니까.

물론 하루에 타석에만 열 번가량 서는 것도 고역이겠지만. 그래도 수비는 안 하잖아?

‘진짜는 쟤지.’

크리스 데이비스가 그나마 사람 몰골을 하고 있다면.

내야 유틸자원이라, 2차전에는 유격수로도 나가고, 3차전은 2루수로도 나갈 예정인 채드 핀더는 이미 모든 걸 달관한 듯한 표정을 했다.

아직 탬파베이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하얗게 질렸구만.

그밖에도 다른 야수들 역시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그걸 보니 새삼 투수가 짱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역시 야수나 포수 같은 천것들이랑 다르다니까.

‘그나저나, 상대팀도 조금 압박이 되겠지. 아무리 홈이라고 해도.’

더블헤더 경기는 적절한 체력 분배가 가장 중요하다.

첫 경기에 빡세게 했다가, 체력 다 써버리면, 두 번째 경기에서 박살날 수도 있으니까.

특히 두 탕이 확정된 타자들은 더욱더 몸을 사려야 하고.

‘기왕이면 두 번째 경기에 나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뭐, 그건 이미 로테이션이 글렀으니까.’

최상은 앞에 경기로 힘 다 빠진 타자들 상대로 두 번째 경기에 올라 다 쓸어 담는 거지만. 선발 로테이션상, 난 첫 경기에 나간다.

그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데블헤더만의 특별함이 있으니까.

‘3차전에는 소니가 나가지? 1선발도 고이 양보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좋은 일 좀 해줘야겠네.’

레이스 타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지. 어설프게 체력 아낄 생각은 말아야 한다는 걸.

안 그러면 뒤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씨익 웃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우, 내가 요즘 기세가 너무 등등하긴 하네.

‘인기가 올라가서 그런가, 점점 자신감이 더 강해진단 말이야. 이러다 나중에는 진짜 카메라에다 대고 욕 박는 거 아니야?’

인기가 사람을 미치게 하나봐. 질풍노도 사춘기 때도 무탈하게 넘겼던 중2병이 이 나이 먹고 찾아왔네.

보통 이렇게 뽕이 가득 찼을 때 한 방씩 맞는데 말이야. 조심하자,

난 쓰레기다, 90마일도 못 던지는 쓰레기다. X발 그러고 보면, 1마일 진짜 더럽게 안 오르네. 죄다 좋아졌는데, 어떻게 그거 하나 안 오르냐.

‘아, 좀 진정되네. 효과 직빵이구만.’

역시 뽕 빼는데 구속 만한 게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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