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다시 모자와 벨트를 찬 뒤, 셔츠 단추를 잠갔다. 목적은 끝났으니까.
마음 같아선 안에 티셔츠까지 벗어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너무 풍기문란 같잖아.
“···”
그런 과정속에서 경기장은 한없이 조용했다. 허접한 찌라시 따위 신경 안 쓴다는 듯, 더욱더 과장되게 소리를 내질렀던 관중들이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만 봤으니까.
그럴 수밖에, 설마하니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파인타르 의혹 좀 생겼다고, 옷 벗을 생각한 놈이 어딨겠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이기에, 반응 역시 나오지 못했다. 마치 이런 걸 마주했을 때의 행동강령은 배운 적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심지어 항상 3루 관중석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팬들, 레이더스조차 마치 무언가에 압도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보면 전기의자에 앉히기라도 한 줄 알겠네.’
얼굴도 새빨갛게 물들어서,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반응.
허나 점점 그들의 얼굴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래, 치사량을 넘어선 뽕맛이 주입됐으니까.
‘카메라맨도 얼어붙었네.’
중계 카메라를 잡고 있던 카메라맨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실 내가 처음 다가갔을 때도 좀 당황한 눈치였는데. 아예 눈앞에서 스트립쇼 비스무리한 일까지 해버렸으니. 머리가 하얗게 물든 거겠지.
예상한 대로의 반응들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고, 그런 카메라맨과 중계 카메라를 뒤로한 채, 덕아웃으로 들어가니.
사전에 통보를 받았던 동료들이 반겨줬다. 이걸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갔는데, 그동안 벤치에 앉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000불이 아깝지 않은 스트립쇼네. 그 정도 값어치였어. Suck, 뒷주머니에 팁 좀 꽂아줄까?”
“캬~ X나게 멋있네. 다음에 나도 한번 해볼까?”
“Suck, 너 직업 잘못 찾은 거 아니야? 스트리퍼했으면 온 세상 돈 다 긁어모았겠네.”
“나도 약간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오늘 하루라도 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구만.
퍼포먼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건지, 하나둘, 감탄사를 내뱉으며 손을 뻗었고.
나는 그들과 가볍게 하이파이브하며 벤치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장면이 전광판에 잡혔을 때.
“와아아아아아아아!”
“X발 이게 남자지!”
“파인타르? X까고 있네! 어디 한번 구석구석 뒤져봐!”
“Suck 최고다! X발 내 야구인생 최고의 퍼포먼스였어!”
그제야 해동이 풀렸다.
일련의 가정이 예정된 퍼포먼스라는 걸 깨달은 관중들이 꾹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으니까.
그 웅장한 환호성에 넋이 나갔던 카메라맨도 정신을 차린 건지, 직업정신을 발휘해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왔다.
이젠 그마저도 광기에 휩싸여 기이한 열망이 담긴 카메라 렌즈를 향해 말없이 손을 쭉 뻗었다.
‘이래도 내가 부정투구야?’
딱히 송진가루도 사용하지 않기에, 손바닥은 피칭하느라 흘린 약간의 땀을 제외하면, 티끌 한 점조차 없었다.
이걸로 게임 체인지다.
기정사실로 못 박아 놓고, 아주 열심히 떠들던데. 쪽팔려서 어떡하나 몰라?
‘미안하지만, 내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은 없거든.’
물론 단발성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기왕 시작한 거, 그냥저냥 재밌는 이슈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제대로 들이받아야지.
곧바로 다음 이닝.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확실히 처음과는 눈빛이 달라졌다.
“크하핳하핳, 파인타르 강속구 가자!”
“Suck! 노벨 화학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파인타르를 어떻게 만든 거야?”
“휘이이이익~ 이번에도 시원하게 잡아버려! 개소리 지껄이던 놈들, 아주 토마토가 되버리도록!”
의혹에 시달리는 날 응원하는 게 아니라, 흥겹게 오히려 대놓고 파인타르를 언급하며 소리를 높였으니까.
사실 오클랜드 팬들이야 날 무조건적으로 믿는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찝찝했을 거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을 텐데, 그게 완전히 해소됐으니, 이제 축제 시작이지.
‘그래도 끝까지 유지해야지.’
화끈한 퍼포먼스를 보이긴 했으나, 집중을 놓지 않았다.
아주 못을 박아놔야 하니까.
의혹이 나오니까 오늘은 안 썼다는 둥, 어딘가 몰래 숨겨뒀다는 둥하는 개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2회 초 선두타자는 4번타자, 라이언 짐머맨. 내셔널스의 리빙 레전드로, 이번 시즌 성적이 미쳤다.
비율스탯만 놓고 보면, 앞서 상대한 브라이스 하퍼보다도 훨씬 높으니까.
4월 이달의 선수 수상에, OPS가 1.1에 장타율이 7할이면 말 다 한 거지.
그야말로 크레이지 모드.
타격감도 좋은데, 제대로 맞으면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겠네. 아무리 콜리시엄이라고 해도 말이야.
허나 상관없다. 적어도 오늘, 마운드 위에 있을 때는···
“스트라이크!”
나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할 생각이었으니까.
저쪽은 이달의 선수 한 번. 나는 두 달 연속 싹쓸이. 내가 꿇릴 것도 없잖아?
제구가 살짝 삐끗한 건지, 약간 애매하긴 했는데, 그래도 의도한 대로 들어갔다.
몸쪽 높은 포심 패스트볼.
라이언 짐머맨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설마하니 자기한테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아웃!”
허나 당황이 오래가지 않은 듯, 비슷한 코스로 다시금 날아오는 공에 자신감 있게 스윙했으나, 타구는 유격수의 글러브로 들어갔다.
‘오케이, 싸게 잡았네.’
투심이었거든.
근성을 담아서 던져서 그런가, 투심도 좋네. 오늘은 웬만하면 포심 위주의 전력투구로 찍어 누를 생각이지만, 중간중간 섞어야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그 뒤로 5번타자 다니엘 머피와 6번타자 앤서니 렌던을 나란히 처리하며 다시금 삼자범퇴를 올리자.
당연하게도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다른 선수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는 다시금 카메라 앞에 섰다.
혹시 못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모두가 다 확인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해야지. 원래 이런 건 철저하게 해야 하는 법이거든.
‘이젠 그렇게 당황은 안 하네.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키메라맨은 전처럼 얼어붙는 대신, 묘한 흥분에 휩싸인 눈으로 봤다. 진짜 스트리퍼가 된 기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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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 숱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00년대 최고의 신인은 Cheating으로 탄생했다! ‘He Is Suck!’ Go에게 분노한 팬들!>
<숱한 의혹에도 로테이션 유지! 성적을 위해 스포츠맨쉽을 저버린 Go와 오클랜드?>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의혹.
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런 해명조차 하지 않는 선수와 구단.
사실상 무언의 인정이나 다름없었기에, 불은 점점 더 타올랐고, 당연하게도 그간 고유석을 별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던 이들은 물만난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Rangers]
[저런 놈한테 완봉이나 당하다니, 치욕적이네.]
└저런 치터새끼는 빨리 영구제명이나 시켜버려야 해!
└X같은 코리안, 어쩐지 잘한다 했다.
└야구로 보답하려나봐? 평소엔 아주 자신만만하더니, 갑자기 묵묵~하네.
[#Angels]
[좀 추하네. 트라웃한테 입 털더니, 고작 파인타르?]
└그게 진짜 자기 재능이라는 것처럼 굴었던 걸 생각하면, 좀 역겨워.
└오클랜드는 약쟁이도 넘쳐나더니, 이젠 부정투구까지. 아주 치터들의 천국이네.
└딱 그런 동네에 어울리는 선수들이지.
고유석에게 털렸던 서부지구 팀들의 팬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당장이라도 그를 퇴출시켜야 한다며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BauerOutage]
[OooooooMG!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당연하게도 조금은 추하기 그지없는 패배자 역시 기뻐 날뛰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브라이스 하퍼마저 삼진으로 잡는 Go!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데요?
-멘탈이 단단한 투수죠. 어떤 식으로든지 루키다운 선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반응들은 고유석이 1회 초를 마친 순간, 더욱더 심해졌다.
마치 보란 듯이 평소보다 더 강력한 공을 던졌으니까.
오클랜드 팬들이야 실력으로 돌파하는 것이라며 그저 좋아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외의 이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절대로 정상은 아니야.
└오늘은 아주 대놓고 쓰는데? 무브먼트 봤어?
└손가락 끝이 좀 번들거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D
이젠 그냥 대놓고 쓰겠다는 건지,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준 고유석을 보며, 사람들의 의심이 확신이 됐을 무렵.
└···쟤 지금 뭐하는 거야?
└옷··· 벗는데?
└미친···
뜻밖의 스트립쇼가 공식 중계 방송을 통해 송출됐다.
파인타르가 묻어 있을 법한 곳들을 죄다 벗거나 까뒤집는 고유석을 보며, 하늘 끝까지 치솟았던 분위기는 한순간 차디찬 얼음물처럼 싸늘해졌다.
└어···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깨끗하네?
└다른데 숨겨둔 거 아니야? 벨트 안쪽이라던가.
└지금 벨트도 벗어서 보여주는데?
└셔츠도 가능하지.
└그것도 벗고 있어.
└X발 야구장이 무슨 지네집 욕실이야? 죄다 쳐벗고 있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의, 아니, 처음 의혹을 제기했던 헤이터들의 머리가 멍해졌을 무렵.
누구보다 먼저 급변한 분위기를 읽은 이들이 있었다.
<1회 초, KKK를 기록한 Go, 의혹에 당당한 정면돌파!(사진첨부)>
계속되는 의혹에 동조하며, 불을 점점 키웠던 언론은 한순간 돌변했다.
이슈에 민감한 만큼,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 역시 금방 캐치했으니까.
분명 3분 전만 하더라도, 선발등판을 감행한 고유석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를 내비친 기사가 적지 않았으나.
그가 중계 카메라 앞에 서고 채 30초가 지나지 않았을 때, 그런 기사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저 ‘히어로’처럼 당당하게 정면돌파를 선택한 선수를 향한 찬사가 이어졌을 뿐.
└아직··· 아직 몰라. 저거 다 쇼야, 쇼. 일부러 오늘은 안 바르고 던진 거야.
└쯧쯧, 반박기사가 없더니, 이런 조잡한 수나 준비하고 있었네. 뻔하다, 뻔해.
└글쎄, 저기 말고도 워낙 숨길 곳은 많아서. 난 아직 못 믿기네.
물론 더욱더 극렬하게 반응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인정해버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왔으니까.
악에 받쳐 그저 쇼맨십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쏟아냈으나, 그들 역시 곧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덕아웃 벤치에 앉아, 깨끗한 손바닥을 보여준 뒤에도, 그 ‘쇼’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웃! Go가 1회 초에 이어서 또 다시 삼자범퇴를 올리며! 그야말로 압도적인 피칭으로, 동부지구의 최강자, 내셔널스를 몰아칩니다!
-어··· 이번에도 카메라로 향하는 것 같은데··· 허, 제 야구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화끈한 방식의 증명이네요.
-네! 당당하니, 거리낄 게 없다는 거겠죠!
2회 초를 마쳤을 때도.
뒤이어 3회 초에도.
아니, 매 이닝을 마칠 때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으니까.
그때마다 새로운 캡처가 탄생했고, 벌게진 눈으로 영상을 픽셀 단위로 끊으며, 분석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깨끗하네, 전부다. 오히려 다른 투수들보다도 더 청결해. 잘 씻고 사나보네.
└흙이라도 조금 묻을 법한데, 그것마저도 없어.
└그냥··· 인정해야지. Suck은, 아니 Go는 그냥 실력이야.
그렇게 결국 마지막 한줌의 의혹마저 사라졌을 때. 다시금 분위기는 불타올랐다.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솔직히··· 좀 멋있지 않아? 오늘 Suck, 걔 말이야. 확 다 벗는데, 그게 왜 그렇게 멋져보이냐.
└후련하긴 하더라. 피칭만 그런 줄 알았더니, 성격 자체가 마초적이네.
└그래, 사내새끼는 저래야지! 억울하다고 징징거리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돌파해야 진짜 남자지!
거리낌 없이 당당한 모습이 미국 특유의 마초이즘을 정확하게 공략했으니까.
기존에도 의혹은 물론, 고유석이라는 선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이들조차 처음으로 매력을 느꼈고.
경기 전에는 부정투구 스캔들로 관심이 모였다면, 이젠 조금 다른 의미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고유석은 마지막 한 수를 터트렸다.
####
‘5이닝 동안 실점 하나. 미친놈처럼 던진 것 치고는, 짜게짜게 잘 막았네.’
5이닝 4피안타 7삼진 1실점.
오늘 경기 성적이다.
맞을 걸 각오하고, 오직 힘으로 전력투구를 쑤셔 박았는데, 무려 내셔널스 타선을 상대로 1실점이면, 잘 막았다고 볼 수 있겠지.
‘사람들도 아주··· 대단하고.’
슬쩍 관중석을 봤다.
솔직히 안 보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다.
“You-Suck! You-Suck!”
“오클랜드는 무적이고! Suck은 신이다! 알겠냐, 이 X부랄 새끼들아!”
“그는 신이야! 오클랜드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신이라고!”
죄다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눈이 안 가. 이닝이 끝날 때마다 스트립쇼를 반복하니.
관중들의 반응도 점점 바뀌었다. 환호는 경이로, 경이는 숭배로, 숭배는 광기로.
그래, 나를 향한 의혹에 불쾌감이 감돌았던 콜리시엄은 이젠 광기로 뒤덮였다.
“Suck! 여기 좀 봐라! 얼굴 좀 영접하자! 그 신성한 눈으로 좀 쳐다보라고!”
“X나게 사랑한다! 니가 원하면 내 거 떼고 만나줄 수도 있어!”
우리 레이더스님들이야, 혼절하기 일보직전이고. 내가 저 양반들 입맛을 제대로 공략했나 봐.
평소에도 과격한 편이지만, 이젠 스스로의 남성성을 포기해도 괜찮겠다고 여긴 건지, 듣기 민망한 소리까지 부끄럼 없이 해댔다.
눈까지 까뒤집어가며 아주 핏대를 세우고 있는데, 좀 무서울 정도네.
‘잘하면 나중에 시장 선거 나가도 당선되겠네.’
대충 관중들 어림잡으면 2만명쯤 될 텐데, 시청자들까지 다 합치면 잘하면 가능할지도?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오클랜드 시장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가능할 것 같다. 거의 신앙심에 가까우니까.
‘반대로 내셔널스는 기분이 확 상했고.’
허나 내셔널스 선수들은 표정이 처음보다 훨씬 썩었다. 1점을 올리긴 했지만, 화끈하게 털렸잖아? 나한테.
‘거기다, 본의 아니게 내 퍼포먼스의 희생양이 됐지.’
자기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분위기를 띄워주는 제물이 돼버렸으니, 불쾌할 만도 하겠지.
허나 이 광기도, 그리고 저 불쾌함도 이제 곧 끝이다.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니까.
내가 관종끼가 좀 있어서 그런가, 조금 더 누리고 싶기는 한데, 이 이상은 몸이 안 받쳐주거든.
‘투구수가 아마 딱 70구였던가?’
투구수 자체는 평소보다 현격히 적다. 그도 그럴게, 나도 무지성으로 들이박았고, 상대도 미친 듯이 휘둘렀거든.
삼진도 적당히 쏠쏠하게 잡으면서, 투구수도 아낀 건데, 이게 그냥 70구가 아닌 게 문제다.
‘그중 절반이 전력투구지.’
혹시라도 딴말이 안 나오도록 아주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졌는데, 덕분에 잘 막긴 했지만, 대신 체력소모가 극심했다.
제한 투구수인 100구보다, 무려 30구가 더 적은 셈이고, 평소라면 2이닝, 좀 더 개기면 3이닝도 넉넉하겠지만. 지금은 좀 힘들지.
‘사실 이번 이닝도 좀 간당간당하긴 하고.’
피안타를 네 개를 맞았기에, 이번 이닝은 2번타자부터 시작이다. 그래, 아주 X같다는 거지.
저~기 이전 타석에서 안타를 날리셨던 짐머맨께선, 날 아주 잡아잡수려고 하고 있고.
나머지 놈들도 이제 세 번째 타석인 만큼, 거의 다 타이밍을 잡았다. 특히나···
‘하퍼 쟤는 눈빛이 왜 저래?’
브라이스 하퍼가 이상했다.
다른 타자놈들은 날 씹어먹으려고 한다면, 얘는 뭐랄까, 호승심? 승부욕? 그런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얘도 리그에서 제일 퍼포먼스가 극심한 놈 중 하나인데, 동질감이라도 느끼나 보다.
이전 타석에선 워닝트랙에서 잡히는 장타로 아쉽게 물러났었는데, 이번 이닝은 아주 제대로 후리겠다는 거겠지.
‘빡세다, 빡세.’
할 거 다 해서 그런가, 힘이 쭉 빠졌는데, 타자들 상태가 저러니, 괜히 식은땀이 나네.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지금 내 상태를 평가했다. 가능할까? 무사히 이번 이닝을 마치고, 멋지게 내려가는 게.
‘약간은 힘들지. 특히 예쁘게 하려다간 아주 피똥을 쌀 거고.’
그러니 선택을 내려야지.
어차피 볼 건 다 봤고, 보여줄 것도 다 보여줬으니. 유종의 미를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넌 아니야.’
지친 어깨를 휘휘 돌리며, 몸을 대충 풀었을 때, 이닝의 선두타자가 올라왔다.
2번타자 브라이언 굿윈.
말했다시피 선구안이 처참하지. 그래서 오늘도 삼진만 두 개를 잡혔고. 아주 고마운 녀석이야.
이번 이닝을 잘 마치려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타자다.
그렇기에 서서히 꺼져가던 힘을 끌어 올려,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지난 타석들을 통해, 내 공에 어느 정도 적응한 건지, 제법 잘 골라내는 브라이언 굿윈.
이번에는 어떻게든 치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표정에서 드러나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어림도 없지.
그런 선구안으로 내 서클을 고르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눈도 똥눈인 놈이 어딜 감이 벌써 적응하려고!
그래도 어느 정도 제 몫은 했다. 덕분에 힘이 조금 더 빠졌으니까. 지치기 시작하면, 원래 복리로 빠지거든.
아주 훅훅 떨어지지.
‘넌 이미 적응하긴 했겠네.’
그리고 다음타자 브라이스 하퍼. 얜 진짜 적응했겠지. 아주 홈런 치겠다고 얼굴에 써놨네, 써놨어.
‘소름끼치니까 웃지마 새꺄.’
친근하게 웃는데, 저런 기세를 내뿜으면서 웃으니, 별로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친한 척 할 거면 그것만 하던가. 때려잡겠다는 기색이 역력한데, 쳐 웃고 있네.
‘음, 역시 힘들어.’
대충 보니 감이 왔다.
얜 절대로 아니다. 무조건 아니다. 그러니 어떡해?
“베이스 온 볼!”
‘잘가라.’
1루로 보내드려야지.
축하한다, 너 이제 트라웃이랑 동급인 거야. 고의사구까지 당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하냐? 라이벌 맞네, 라이벌 맞아.
대체 왜인지는 몰라도,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는데, 수염난 놈이 저러니까, 귀엽지도 않다. 어우, 극혐.
‘그래, 그렇게 가자고.’
그런 하퍼를 무시한 채, 뒤에 올라온 라이언 짐머맨을 보고, 다시금 사인을 보내자, 스티븐 보그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진심이냐고 묻는 것처럼.
아니, 이 상황에서 뭘 어떡해? 브라이스 하퍼가 승부욕을 내비췄다면, 라이언 짐머맨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실제로 오늘 안타도 하나 쳤으니, 타격감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까···
‘댁도 가슈.’
“베이스 온 볼!”
그쪽도 그냥 얌전히 가슈.
나이도 많아서, 달리면 힘들 텐데. 내가 특별히 배려해준다.
그렇게 연달아 고의사구.
광기에 휩싸였던 경기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어? 어어?”
“아니- 갑자기 왜···”
“What the Fuuu- 투수코치 X발 뭐하는 거야!”
애먼 스콧 에머슨이 욕먹는다. 내 선택인데, 설마하니 투수가 직접 이런 생각을 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슬쩍 벤치를 보내, 스콧 에머슨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라운드로 나오려고 했지만, 살짝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딱 하나, 딱 한 구. 그거면 끝나니까, 그냥 보고 기다리셔. 조급하게 굴지 말고.’
씨익 웃으니, 아직 멀쩡하다고 느낀 건지, 몸이 덜컥 멈췄고, 그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곧바로 스티븐 보그트에게 사인을 냈다.
다음 타자를 위한 코스와 구종. 그리고 수비 시프트. 그 요청에 그는 이제 해탈한 건지 그저 고개만 까딱였다.
‘딱 하나,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진다.’
그리고 올라온 5번타자 대니얼 머피. 아직까진 안타가 없다. 다만 기세는 등등하고.
약간 빡이 돈 것 같기도 하네.
원 아웃, 주자 1,2루.
못 먹을 수가 없는 찬스지.
근데 그 주자 두 명이 자기 앞에서 고의사구로 나갔으니, 화가 날 수밖에.
날 잡아먹다 못해, 진지하게 죽여버리고 싶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데, 딱 좋다.
‘그래, 최대한 집중해라. 최고의 감각을 유지하고.’
오늘 난 무지성으로 들이박았다. 무식한 고릴라처럼 힘만 더럽게 사용했지.
그런 내가 오늘 경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구종, 코스는 뭘까?
‘포심, 그리고 몸쪽.’
몸쪽 포심 패스트볼.
당연하게도 대니얼 머피 역시 그거에 자주 당했다. 하이 패스트볼에도 털렸고.
최근 기세가 좋은 타자니, 아마도 타이밍을 잡고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그렇게 가야지.’
왼손에 힘을 담았다.
남은 모든 체력을 죄다 쏟아붓는다는 느낌으로. 어찌보면 도박이다. 타자가 어울려주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허나 상황은 완성됐다.
자기 바로 앞에서 고의사구가 두 개가 나왔고, 투수는 자길 만만하게 쳐다본다.
성적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지. 오늘만 좀 잘 잡혔을 뿐.
그런 상황에서 이미 익숙한, 한번 당하기도 했던 코스로 공이 날아온다면···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절대로 아니지.’
힘껏 당기는 스윙.
감정이 실린 타격은 그 자체만으로 가공할만한 무게감을 선보였다.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며, 쭉 뻗는 스윙의 궤적은 분명 공과 거의 일치했지만···
‘투심까진 예상하겠지. 오늘도 종종 던졌으니까. 쏠쏠하게 먹혔고.’
마지막 순간 공은 살짝 꺾여나가며, 스윗스팟에서 멀어졌다. 둔탁한 타격음, 그리고 눈동자가 떨리는 타자.
‘근데 커터는 아니잖아?’
의도한 건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안 던졌어.
애초에 잘 던지지도 않고.
근데 문득 생각이 나더라고.
열심히 갈고 닦은 덕분인지, 요즘 제법 완성도가 올라왔는데, 아주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던진다면, 제법 그럴 듯 하겠지.
‘끝났네.’
타구는 3유간으로 흘렀다.
오늘 출장한 유격수는 채드 핀더. 내야 유틸리티 자원이지. 즉 수비로 먹고사는 선수다 이거야.
그런 선수는 손쉬운 타구를 놓치지 않았다. 1루 주자는 라이언 짐머맨.
준족은 아니다.
커리어를 통틀어 도루가 두 자릿수를 넘긴 적이 첫 풀타임 데뷔시즌 밖에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젠 나이까지 들었지.
“아웃!”
“아웃!”
2루에서 주자 아웃.
다시 1루에서 타자 아웃.
‘내보내고 잘 막기만 한다면야, 고의사구는 괜찮은 방법이지.’
이게 딱 좋겠더라고.
물론 라이언 짐머맨이나 브라이스 하퍼에게 뜬금 커터를 던져서 아웃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그럼 겨우 하나잖아.
기왕이면 욕심을 내야지. 내가 욕심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건데.
“Hell Yeaaaaaaaah!”
“그럼 그렇지! X발 다 생각이 있었구만?”
“수고했다! 마지막도 X나게 특이하게 가네!”
불만스럽던 관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저 소리를 질렀다. 아주 보기 좋군.
호기롭게 피칭한 것 치곤 두자릿수 삼진도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용 자체는 멋졌으니까. 화끈한 퍼포먼스도 있었고.
내가 힘들 다한 걸 아는 건지, 수고했다며 소리치는데, 몇몇은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다시 할 거냐고 묻는 것처럼. 그래, 마지막까지도 확실하게 해야지.
다시금 스트립쇼를 펼친 뒤, 손을 쫙 펼쳐, 새하얀 손바닥을 다시금 카메라에 보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파인타르가 아니라, 그냥 X나게 쩔어주는 재능이야. 똑똑히 기억하라고.”
이 X발놈들아.
마지막 말은 간신히 삼켰다.
한국어라 미국 놈들은 못 알아먹겠지만, 그래도 방송에서 욕하는 건 좀 그렇지.
대놓고 풍기문란도 벌였는데. 욕까지 했다가는 자칫 사무국 징계가 떨어질지도 모르고.
그것으로 오늘의 피칭은 끝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은 지쳤지만, 마찬가지로 그 어느 때보다도 속이 후련했다.
부정투구니, 파인타르니.
한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여봐.
그땐 진짜 바지까지 탈탈 벗어서 보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