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운명의 날이 밝았다.
상대는 워싱턴 내셔널스.
인터리그 매치업인데, 이번에도 홈에서 붙네. 내 멋들어진 번트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영 안 오는구만.
뭐, 그래도 번트는 아니지만, 오늘은 따로 보여줄 게 있었다.
‘오늘은 짧고 굵게 간다.’
딱 6이닝. 그 안에 내 모든 걸 쏟아 부을 생각이다. 가장 강력하게, 오직 최고로만.
워싱턴 내셔널스.
현재 NL 동부의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팀인데,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오늘 목적은 따로 있잖아?
물론 성적이야 당연히 좋아야 하겠지만, 그거야 열심히 하다 보면 알아서 되는 거고.
가장 중요한 건 ‘간지’지.
“X나 카리스마 있어. 이러니까 사람들이 뻑이 가지.‘
거울의 앞에서 모션을 취해봤다. 괜히 버벅대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
그러니 미리 연습 정도는 해보는 거지. 오프시즌 동안 벌크업을 하면서 체중이 제법 늘어나기는 했으나.
그만큼 고강도의 트레이닝도 반복했고, 꾸준하게 훈련을 거르지 않아서 그런지. 제법 몸이 태가 난다.
내가 은근히 모델 핏이거든.
키도 크고, 어깨도 딱 벌어졌고, 다리도 쭉쭉 뻗었으니까.
좋아, 이 정도면 남보이기 부끄럽진 않겠어.
‘뭐, 진짜로 아예 다 깔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그걸로 마지막 확인을 마친 뒤, 곧바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딱 좋아요. 아니, 평소보다 더 힘이 넘칠지도?”
“음···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네요. 감정에 의해, 몸이 오버페이스를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나쁜 것보단 나으니, 다행입니다.”
오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인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대니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집요하게 내 상태를 체크했다.
혹시라도 내가 흥분해서 절제를 잃고, 마구잡이로 행동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 그런 놈 아닙니다. 솔직히 좀 빡이 돌긴 하지만.
‘닥치고 있으니까,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굴던데 말이야.’
브라이언은 내 부탁을 성실히 이행했다. 구단에도 협조를 구했고. 그 덕에 의혹 이후 별다른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몇몇 언론을 제외하면, 죄다 달려들고 있지. 한 입이라도 물어뜯으려고.
심지어 한국 언론에서도 제대로 물고 있다고 하니, 분위기가 어떤지는 뻔하다.
‘약쟁이한테도 이렇게는 안 하겠네.’
나를 아주 도핑범 이하의 승부조작범 취급을 하고 있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라며, 내 성적을 아예 없는 일처럼 부정하고 있지.
좀 과격한 놈들은 두 달 연속으로 차지한 이달의 투수와 신인을 박탈해야 한다며 주장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났다.
어느 정도는 내가 의도한 반응이긴 한데, 나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없진 않거든.
한순간 죽일 놈이 돼버렸는데, 속이 오죽하겠어? 그런 한편으론···
‘좀 흥분되네. 나 진짜 관종끼가 좀 있나? 사람들 반응 상상하니까, 왜 이렇게 흥분 되냐.’
마음 안쪽이 간질거린다. 괜히 입이 씰룩거리기도 하고.
과연 내가 준비한 퍼포먼스를 오늘 보여줬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게 미치도록 궁금했다.
“Suck, 왔어? 일찍 왔네?”
“오, Suck, 오늘도 때깔 좋은데? 잠 잘 잤나 봐?”
“잠이야 늘 잘 자지. 오늘은 특히나 더 잘 자야하고.”
그렇게 피식피식 웃으면서, 클럽하우스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조금 미묘한 시선으로 반겨줬다.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아마도 날 배려하는 거겠지.
워낙 밖에서 공격을 퍼붓고 있는 터라, 약간 걱정스러울 테니까.
“그냥 훈장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계속 잘하면 다 닥칠 놈들이니까.”
“하여간, 야구 할 줄도 모르는 놈들이, 더 지랄을 떤다니까. Suck, 오늘 퍼펙트 가자. 내가 다 잡아줄 테니까. 어때?”
위로를 해주기도 하는데, 약간의 짜증도 눈에 보였다.
나를 향한 건 아니고.
솔직히 어처구니없잖아?
동료들이야 내가 부정투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애초에 같은 팀 동료한테도 들키지 않는 부정투구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정당하게 성적을 올린 팀의 에이스를 외부에서 흔드는 꼴이니, 짜증이 날 법도 하지.
성적도 좋겠다, 계속 유지하면서 치고 나갈 타이밍인데 말이야.
다른 동료들이 위로와 배려, 짜증을 보였다면, 나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포수들은 꽤나 격렬했다.
“그런 X같은 소리 하는 놈들은, 직접 홈 플레이트에 앉혀놓고 Suck 쟤 공 받게 시켜야 돼.”
“그럼그럼, 딱 10개만 받아보면,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올 텐데.”
다만 내가 공격받는 게 짜증나는 게 아니라. 자기들 노력을 폄하당하는 것 같아 화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X같이 무거우면서, 미끈거려서 얼마나 잡기 힘든데. X발 차라리 파인타르라도 발랐으면, 포구라도 쉽지!”
특히 브루스 맥스웰 이 새끼는 뭔가 좀 확실히 핀트가 엇나간 것 같고.
아무튼 내 의혹에 대해 선수단의 분위기는 대단히 뜨거웠고. 코칭 스태프들 또한 대단히 격렬한 모습을 내보였는데,
그들에게 내가 오늘 할 일을 말해주니, 분노는 빠르게 진정됐다.
“어때? 재밌겠지?”
“이야~ 역시 천재랑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리그 최고의 에이스라서 그런가, 마인드가 다르긴 하네.”
“오~ 개소리나 짓거리는 것들을 아주 X신으로 만들겠다? 난 좋아 보이는데?”
“좋아, 내가 옆에서 시중들어 줄 테니까, 한번 가보자.”
그 대신 나와 같은 흥분이 감돌았을 뿐. 선수들이야 수염난 애새끼들이니, 죄다 좋다는 반응이고.
코치들 또한 긍정적으로 여겼다. 잘만 하면, 팀을 옭아맨 귀찮은 의혹을 뿌리칠 찬스니까.
잘나가는 분위기를 더욱더 올려줄 신선한 이벤트이기도 하고.
“좋아, 아주 당당하게 보여줘. 에이스가 그런 맛이 있어야지.”
밥 멜빈 감독의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더 거리낄 것도 없구만. 그렇게 허락까지 떨어진 뒤, 나는 본격적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X발 홀라당 까줄 테니까, 아주 실컷 봐라, 실컷 봐.’
잠시 뒤에 있을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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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 피칭을 마친 뒤, 마운드에 서자, 여러 가지 시선이 느껴졌다.
“Suck! 개소리는 무시하고, 그냥 평소처럼 멋지게 던져!”
“X신같은 루저들이 하는 투덜거림이니까, 그냥 X이나 까라고 하고, 삼진이나 잡아!”
홈팬들은 걱정스러워 보인다.
팬들도 고생 많았지.
내 부탁으로 나랑 구단이 닥치고 있는 동안, 적극적으로 일선에서 싸웠으니까.
특히 브라이언에게 듣기로, 몇몇 열성팬들은 일당백의 활약을 보였다고 하고. 아마도 저 양반들, 레이더스겠지.
그게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했다. 내가 그만큼 팬들에게 만족스러운 선수였다는 뜻이니까.
‘오늘은 다른 의미로 아주 재밌을 테니까, 기대하고 보슈.’
그런 의미를 담아 관중석에 살짝 미소를 지어준 뒤, 고개를 돌리니, 이번엔 상대팀이 눈에 들어왔다.
내셔널스. 그러고 보니, 얘들은 어쩌다 보니 들러리가 됐네. 타자들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마치 네가 그 ‘파인맨’이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으니까. 특히 덕아웃 난간에 걸쳐 있던 한 타자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봤고.
‘다른 짓 생각하느라, 정작 오늘 상대 타자들을 신경 안 썼네’
사실 별다른 이슈가 없었더라면, 오늘은 좀 조심해야 하는 경기다.
앞서 말했듯 워싱턴 내셔널스는 대단한 강팀이거든. 동부지구 1위라니까? 말해 뭐해. 특히나 타선이 아주 미쳐 날뛰고 있지.
‘까딱하면 두들겨 맞겠네.’
정신을 바짝 잡았다.
그것도 그거지만, 피칭 역시 중요했으니까. 정작 경기 말아먹고 그런 퍼포먼스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걸?
결국 프로선수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성적이 좋아야 한다. 그게 곧 개연성이고, 논리니까.
‘가장 먼저 트레이 터너.’
“플레이볼!”
주심의 선언과 함께 올라오는 이번 경기의 선두타자. 1번타자 트레이 터너.
1번타자 치고는 출루율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타율가 큰 차이가 없으니까. 대신 장타율은 그럭저럭 높지.
‘내셔널스 타자들 대부분이 장타율이 좋은 편이긴 하지.’
타선의 질을 평가한다면, 내셔널스는 이제까지 내가 만난 상대 중 가장 강력하다 평가했던 말린스보다 더 뛰어나다.
알동부, 알동부 거리는데.
어째 올해는 늘동부 쪽 타선이 더 강력한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나도 오늘은 마음가짐이 좀 달라서 말이야.’
허나 괜찮다. 까다롭고, 약간 쫄리기는 한데, 난 오늘 무조건 잘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빡세게 갑시다. 어차피 오늘은 길게 갈 생각도 없으니까.’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 포수를 보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파트너는 스티븐 보그트. 그는 내 말의 의미를 잘 알거다. 처음 당한 게 이 양반이니까.
‘선구안이 별로 좋지 않은 타자. 그리고 파워가 준수하긴 하지만, 대단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오늘 타격감을 봐야 하긴 하겠지만-
“스트라이크!”
일단은 찍어 누르자.
오늘 내가 추구하는 피칭은 간단했다. 최대한 강력하게, 최고의 공을 던지는 것.
X같은 놈들이 부정투구라며 떠들어댔던 것보다도 조금 더 강하게.
과감한 몸쪽 낮은 코스.
제구를 의도하진 않았는데, 꽤나 절묘하게 들어갔다.
타자, 트레이 터너의 무릎이 살짝 흔들렸고, 눈동자도 떨렸다. 그래, 죽여주지?
‘약간 의심도 느껴지고.’
사람 말이라는 게 그래요.
다른 리그인데, 나한테 별생각이 있었겠어? 근데 봐봐, 좋은 공 들어오니까, 얘도 의심하잖아?
옛말에 사람 세 명이 떠들면 호랑이도 만든다던데, 강력한 공을 보니, 이미 들은 말이 있기에, 혹시 진짠가? 싶겠지.
‘미안하지만 이건 파인타르가 아니라-’
“스트라이크!”
‘실력이야.’
한 번 더 포심 패스트볼.
이번엔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무브먼트와 눈의 착시에 제대로 속은 거겠지.
‘투 스트라이크. 약간 높은 코스로 하나 던졌고. 타자는 우타자.’
결정구는 정해졌다.
완벽한 상황이니까.
가장 자신 있는 공이기도 하고. 다시 돌려받은 공을 둥글게 감싸며, 손가락의 감각을 끌어 올렸다.
짧게, 그리고 빠르게.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하며, 왼팔을 휘둘렀고.
“스트라이크 아웃!”
둥실둥실 날아가다, 뚝 떨어지는 공을 타자는 멍하니 쳐다만 봤다.
서클 체인지업 V1. 높은 패스트볼 다음에 이거만한 게 없지. 그것으로 원아웃.
“You-Suck!”
부정투구 의혹 때문에, 더 열심히 응원하려는 건지, 관중들은 물러나는 타자를 향해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순간 구린놈으로 전락한 트레이 터너를 뒤이어 올라온 2번타자 브라이언 굿윈.
‘저번 달에 데뷔해서, 표본이 적긴 하지만, 그리 인상적인 타자는 아니지.’
파워는 그럭저럭 좋아 보이고, 컨택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선구안이 박살났다.
많이 뛰지 않아서, 비율스탯이 크게 의미가 없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율이랑 출루율이 1푼밖에 차이가 안 나는 건 좀 그렇지.
‘그래도 1차전 때는 4안타를 쳤었으니까. 홈런도 날렸고, 타격감이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것을 감안하여, 이번에는 조금 속도를 늦췄다. 갓 콜업한 이후로, 기세가 좋은 타자를 상대로 무작정 던지는 건 그리 좋은 방식이 아니니까.
“스트라이크!”
“볼!”
“파울!”
“볼!”
아슬아슬하게. 자기도 모르게 건드리고 싶을 정도로.
절묘한 코스가 이어지자, 타자의 몸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약간의 조급함도 보이고.
그래도 인내심이 없는 건 아닌지, 브라이언 굿윈은 4구째에 낮게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의 유혹을 간신히 참아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눈높이에 맞게 날아오는 하이 패스트볼에 스윙이 나왔다. 그렇게 스트라이크 하나 더. 이제 투아웃.
‘이제부터 문제인데.’
강력한 타선.
그렇게 말해놓고 맥아리가 없이 죄다 삼진당하는데. 진짜는 이제부터다. 3번타자가 올라왔으니까. 누구냐고?
‘브라이스 하퍼라···’
브라이스 하퍼.
아마 메이저리그 팬들 중 얘 이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현시점 최고의 슈퍼스타니까.
혹시라도 모른다면, 메이저리그 팬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브라이스 하퍼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팬이야?
아마추어, 고교아구 시절부터 전국적인 인기를 가진 천재타자.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픽으로 지명된 이후, 1년 반만에 마이너리그를 초토화한 뒤. 무려 19세에 빅리그에 데뷔하여. 해당 시즌에 20살의 나이로 신인왕을 탄 규격 외의 재능.
‘종자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엄청난 유망주가 있으면, 흔히 그렇게들 표현한다. 얘는 종자가 다르다고.
특히나 재능의 영역인 예체능에선, 그 종자가 아주 중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브라이스 하퍼는 확실히 남들과 종자가 다른 선수다.
‘나랑 같은 년생이니까. 진짜 X나게 빨리 데뷔하긴 했네.’
나랑 똑같은 92년생. 생일은 내가 더 느리긴 한데, 한국 나이로는 동갑이다.
그런데 내가 이제 갓 데뷔한데 반해, 얘는 재작년 MVP 만장일치의 주인공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마찬가지로 야구천재이자, 현시대 최고의 타자로 평가 받는 트라웃의 라이벌이라는 기믹도 있는데···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야.’
언론에선 그렇게 부를지 몰라도. 까놓고 말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둘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도, 트라웃급이 아니라는 거지, 굉장히 껄끄럽지.’
특히나 극단적인 풀히터인데, 타고난 힘도 좋아서, 아무리 내 구위가 좋다고는 해도. 맞으면 골로 갈 가능성이 높다.
타격 기술도 좋고, 선구안도 훌륭하니, 대단히 까다로운 타자. 그런 타자가 타석에 올라왔다.
마치 흥미롭다는 듯, 미묘한 눈빛을 띠고서. 아까 전에 덕아웃에서도 저렇게 보더니.
‘날 훤히 안다는 눈치인데···’
자신감이 대단하다.
마치 너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고 있으니까. 한마디 하고 싶었다.
넌 나에 대에서 X도 몰라.
내가 뭘 할지도 모르고.
‘잡기만 한다면, 딱 좋긴 하네. 가장 극적일 테니까. 이 만큼 좋은 간판도 없지.’
다행히 잡을 방법은 있다.
묵혀둔 게 하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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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파인타르라며?”
“어쩐지, 성적이 X나게 이상하더라. 난 분석팀에서 잘못 기입한 줄 알았다니까?”
“시즌 개막한지 두 달이 넘었는데, 0점대 ERA는 이상하긴 하지.”
메이저리그는 정보가 빠르다.
아니, 사실 이번 경우는 정보에 둔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다.
리그를 강타한 최대의 스캔들. 거의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인터넷만 열면, 연일 온갖 종류의 추측이 나오는 상황인데, 하물며 상대팀 입장에서 모를 수가 없지.
그렇기에 내셔널스 덕아웃 역시 상대팀 선발투수, 고유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허나 다소 격렬한 외부 반응과는 달리, 사실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선 별다른 이슈는 아니었다.
파인타르를 쓰는 투수가 한 두 명도 아니고, 내셔널스에도 몇몇 있기는 하니까.
“그래도 분석 자료 보니까, 공이 죽여주긴 하던데. RPM이 2500이라던가?”
“오~ 타르 쓴 보람이 있네. 2500이나 나올 정도면.”
“대신 더럽게 느리잖아?”
“그렇긴 하지.”
그렇기에 그저 간단한 농담거리 정도에 불과했고, 그런 불미스러운 일에 걸린 투수를 비웃는 정도였지만.
곧 경기가 시작되고, 마운드 위에 우뚝 선 투수가 공을, 아니 대포를 쏘기 시작했을 때.
가벼웠던 분위기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삼진.
제대로 손조차 못 써보고 물러난 트레이 터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어때? 여기서 보니까, 완전히 미쳤던데.”
“그냥··· X같아. X발 저게 90마일도 안 나온다고? 스피드건 잘못된 거 아니야? 저 새끼, 파인타르 무조건 썼어.”
90마일도 나오지 않는 포심.
허나 그걸 초월한 무브먼트.
트레이 터너는 거의 확신에 찬 것 같았다. 아니,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을 보고 왔으니까.
그의 확언에 다른 타자들 역시 딱딱하게 굳었고, 몇몇은 그럼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아무리 가장 잘나가는 투수, 엄청난 성적을 찍은 투수라고 해도, 다른 리그이기에, 그만큼 거리가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삼진이 올라갔다.
돌아오는 타자의 눈빛은 앞선 트레이 터너와 똑같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안 돼. 저거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손도 못 대겠어. 하나 커트해보니까, 손목이 꺾이더라.”
“진짜 그 정도야?”
“떠오른다니까, 저거. 착시고 나발이고, 떠오르는데 어떻게 쳐? 먼저 궤적이 익숙해져야지.”
이번에도 똑같은 말.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건지, 파인타르를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비슷한 눈치였다.
그런 상황에 자연스럽게 다른 선수들의 시선은 한곳으로 몰렸다.
“몬도(Mondo) 니가 한방 날려 봐. 애들이 너무 쫄았어.”
몬도(Mondo).
브라이스 하퍼의 애칭 중 하나였는데, 대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지칭하기는 적절한 단어겠지.
그런 동료들, 그리고 코치의 기대에 브라이스 하퍼는 피식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타석으로 향했다.
‘Suck, Suck, Suck. 이름이랑 다르게 공은 Suck이 아니네.’
대기타석에서 보면서. 솔직히 조금 놀랐다. 가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니까.
80마일대의 패스트볼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 상식이 깨졌다.
‘생각보다 화끈하네. 말이 많으니까, 찌질하게 빌빌댈 줄 알았더니. 하긴, 지난 경기에선 트레버 바우어랑도 한판 붙었었지?’
브라이스 하퍼는 고유석을 잘 알았다. 자신이 데뷔했을 때처럼, 워낙 언론의 주목을 받는 녀석이기도 하고.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재밌게 놀 줄 알았으니까. 그래, 마치 자신처럼.
‘트라우티(Trouty)를 도발하길래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시범경기 때부터 소란스럽던 녀석이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이 뇌리에 박힌 건, 에인절스전이었다. 개막전 말고 그 다음에 만났을 때 말이다.
경기 전에 인터뷰까지 하면서 트라웃을 도발했었지.
그냥 입을 좀 터는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를 냈기에 생각이 달라졌다.
실력도 있으면서, 적절하게 유명세를 이용할 줄 아는 놈으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면돌파,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밌지.’
저 투수의 의도야 뻔하다.
아주 온 사방이 물어뜯고 있으니, 괜히 변명하기 보다는, 그냥 당당하게 뚫고 나가려는 것.
보통 때보다 조금 더 강력하게 던지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마음에 들었다.
남자답고 좋잖아?
‘어디 한번 맛이나 보자.’
타석에 올라 서서 씨익 웃자, 투수 역시 표정이 미묘했다.
마치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투수치고는 표정이 잘 드러나는 녀석이다.
어쩌면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 자기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에, 굳이 표정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스트라이크!”
묵직하게 들어온 공은 그런 자신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89마일··· 그래, 89마일은 아니긴 하네.’
브라이스 하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유명한지. 그리고 투수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런데도 두려움 없이 이번에도 몸 쪽으로 포심을 던졌다.
비슷한 구속이야, 종종 본 적이 있다. 의외로 빅리그에는 저 정도 구속의 투수가 제법 있으니까. 잠깐 발만 담궜던 마이너 시절이나, 하이스쿨, 대학시절에도 본 적 있고.
허나 확연히 다르다.
조금 기억이 빛바랬다고는 하나, 예전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구속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한번 스윙을 가져간다.’
떠오른다고 했지.
앞서 타석에 오른 동료들도, 분석팀의 자료에서도. 저 투수의 공은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게 보인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카운트가 더 좁혀지기 전에, 미리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실제 궤적의 간격을 가늠해봐야 했다.
“스트라이크!”
큼직하게 배트를 돌렸다.
그만큼 크게 빗나가긴 했지만, 상관없다. 거리를 측정한 거니까.
‘한 개 이상인가?’
포구 위치와 배트의 위치를 조합했을 때, 뇌의 오류와 실제 공의 간격은 볼 한 개 혹은 그 이상.
이 정도면 정말로 떠오른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야말로 충격적인 수준의 수직 무브먼트. 허나···
‘못 칠 정도는 아니야.’
그런 재능은 자신에게도 있다. 역대 최고의 80마일대 패스트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공이지만. 그런 걸 쳐낼 수 있기에 브라이스 하퍼다.
‘일단 고르자.’
필요한 정보는 얻어냈다.
그러니 숨을 고를 차례지.
그는 브레이킹볼을 예상했다.
어쩌면 들어올 지도 모르고.
과감하게 공격적인 투수니까.
“볼!”
‘안 빼네?’
허나 이번에도 날아온 건 포심 패스트볼. 브라이스 하퍼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비록 코스가 살짝 높았기에 볼이 됐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제대로 꿰뚫렸다. 반응을 못 했으니까.
‘무슨 생각인 거야? 포심만 세 개? 나한테?’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구종을, 그것도 패스트볼을 세 개를 연달아 던진 걸까?
심지어 죄다 몸쪽, 위험성이 높은 코스로. 다른 의도라도 있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다시금 공이 날아왔고.
‘이런 씹-’
“파울!”
간신히 쳐낸 브라이스 하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짝 빠진 코스. 간신히 따라가셔 쳐냈다.
‘그래, 포심만 가진 게 아니지.’
포심도 구속 이상의, 압도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저 투수의 진정한 상징은 따로 있다.
간신히 커트해낸 서클 체인지업. 억지로 빗맞히기라도 했기에 다행이지, 자칫 손도 못 쓰고 멍청하게 루킹삼진을 당할 뻔했다.
‘무슨 서클 궤적이··· 서클이 맞긴 맞나?’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강력하다는 거야,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직접 타석에서 마주한 서클의 궤적은 강력함을 넘어, 기이한 수준이었다.
눈앞에서 거의 사라지는 수준이었으니까.
거기다 심지어는 트레이 터너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낙차가 있는 것도 있지.
‘포심은 그렇다 치고, 브레이킹볼도 파인타르가 효과가 있나?’
아마도 아닌 걸로 안다.
뭐, 다른 종류의 부정투구로는 공의 궤적을 강력하게 만들 수 있는 걸로 아는데.
설사 그런 방법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이런 공을 던질 수가 있나?
‘그나마 좌타자라서 낫지. 우타자들은 좀 짜증나겠네.’
심지어 좌타자인 하퍼 자신도 이 정도인데, 우타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특히나 눈치를 봐서는 언론의 지랄에 빡이 돈 건지, 아니면 뭔가 단단히 보여주려는 건지,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우타자들에게 애도를 표한 브라이스 하퍼는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타이밍을 다시 잡은 뒤 돌아와 자세를 취했다.
‘같은 종류의 서클은 연달아서 던지지 않는 편이지. 그렇다면 다른 서클이나 밋밋한 체인지업. 그리고 투심, 커터, 슬라이더인가?’
더럽게 많기도 하다.
확실한 건, 저 투수의 성적은 파인타르 따위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파인타르 좀 쓴다고 이렇게 많은 구종의 커맨드가 잡힌다면, 너도나도 다 썼겠지. 아마 안 쓰는 사람이 없을 걸?
‘투심은 뺀다. 듣기로 대단히 위력적인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쟤도 나한텐 안 던지겠지. 그런 의미에서 커터랑, 위험성이 높은 밋밋한 체인지업도 제외.’
그래도 차근차근 하나씩 선택지를 제거하니, 조금 머리가 맑아졌다. 남은 선택지는 셋.
‘거르자.’
판단은 빨랐고, 결과는 옳았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로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볼!”
뚝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이건 좌타자라도 좀 힘들겠다. 낙차가 무슨 스플리터 같았으니까. 그래도 꾹 참아내며 얻어낸 볼 하나.
‘원래라면 하나를 빼야 정상이지만, 쟨 아니겠지.’
오늘 처음 만난 투수지만, 왠지 생각이 훤히 보였다. 어떤 스타일인지도 잘 알겠고.
성적에서 드러나듯 대단히 공격적인 녀석인데다가, 특히나 오늘은 더욱더 정면승부로 가겠지.
‘보통 이렇게 카운트를 잡고,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던졌을 때는 보통···’
하나가 떠올랐다.
하이 패스트볼.
구속이 느린 투수치고는 의외로 과감하게 위닝샷으로 사용했었지. 허나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번 썼어. 터너한테.’
물론 자신에겐 아니지만, 다양한 래퍼토리를 가진 투수이니 다른 게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팔뚝을 부풀린 그는 투수를 똑바로 쳐다봤고, 꽈악 손잡이를 붙들며 타격을 준비했다.
‘슬라이더, 혹은 바깥쪽 패스트볼.’
타이밍은 패스트볼에 맞췄다.
코스만 예상대로라면, 슬라이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포심의 무브먼트, 그 기괴한 무게감을 감안하여, 그는 최대한의 힘을 스윙에 담았고.
곧 다시금 눈썹이 씰룩거렸다.
‘아, 그래, 저런 것도 있다고 했었지.’
투수 본인도 위력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걸 아는 건지, 잘 안 던지는 공. 그렇기에 의아했다. 왜 하필···
‘X나게 느린 커브.’
지금 나한테 던진 걸까?
느릿하게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며, 그는 스윙을 멈추는 걸 포기했다. 괜히 연골만 닳을 테니까.
어차피 체크 스윙하긴 글렀고, 혹시 모를 위험이라도 방지해야겠지.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
후련하게 헛돌은 그는 이내 전광판을 확인한 뒤, 짧게 혀를 찼다.
‘66마일··· 리틀 야구 시절에도 저런 구속에 헛스윙 삼진은 안 당해봤는데.’
그걸 메이저리그에서 당할 줄이야. 더럽게 느리기만 할 뿐, 위력 자체는 하찮은 공.
허나 그렇기에 예상치 못했다. KKK, 세 타자 연속 삼진의 제물이 되어버린 게 조금 짜증스럽긴 하나.
경기야 아직 한참 남았기에, 그는 미련 없이 물러났고, 짜증스럽게 덕아웃에 들어온 찰나. 다시금 눈썹을 씰룩였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건지, 잔뜩 기른 수염도 떨렸고.
“쟤 뭐야?”
“저거 미친놈 아니야?”
“X발 세리머니 하는 것도 아니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투수는 덕아웃이 아닌, 그 옆의 중계 카메라로 향했다.
그리고 글러브를 가져다 댔다. 거기까진 그냥저냥 1회 초를 완벽하게 때려잡은 걸 자축하는 정도였는데.
“저런 건 예상 못 했는데. 신선하네.”
그 뒤의 행동은 감탄이 나왔다. 하퍼 자신도 웬만한 퍼포먼스는 죄다 생각했었지만. 저런 건 그의 상상속에서도 없었으니까.
투수는 글러브를 활짝 열어서 보인 뒤, 모자를 벗어서, 그것 역시 가져다 댔다. 안쪽과 모자챙이 잘 보이도록. 거기에 뒤돌아서 목 뒤까지 확실하게 확인시켰다.
그리고 벨트와 벨트의 버클을 보인 뒤,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유니폼 셔츠를 벗어, 셔츠의 깃과 소매 안쪽까지 중계 카메라에 똑똑히 보여준 뒤에야 고유석은 덕아웃에 들어갔다.
“미친놈이네, 저거.”
얼핏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브라이스 하퍼는 다른 이들,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을 처음으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