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00화 (100/316)

100화

경기는 반 이닝이 지날 때마다, 판이하게 바뀌었다. 마치 서로 다른 경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스트라이크!”

2회부터 서서히 시동을 걸기 시작한 트레버 바우어는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오클랜드를 몰아붙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트레버 바우어! 오늘 약속이라도 있나요?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오클랜드를 몰아칩니다!

거칠고, 박력 있게.

그리고 굉장히 빠르게.

무식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피칭에 오히려 관중들과 중계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이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저러다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으니까.

[#Indians]

[드론맨 혹시 약이라도 빨았냐? 오늘 갑자기 왜 이래?]

└스테로이드는 아닌 것 같고. 비아그라나 각성제 쪽 같은데?

└어찌어찌 잘 막고는 있어서 좋긴 한데, 좀 불안하다.

└왜? 속도감이 있어서 좋기만 한데. 루키한테 패기가 뭔지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네!

└입을 턴다 싶더니, 결국 또 사고치네, 사고쳐.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그의 숨 가쁜 피칭에 우려를 표하거나, 혹은 만족감을 표출하며 반응을 보였다.

갑작스럽게 미쳐 날뛰는 드론맨, 트레버 바우어를 보며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는 곧 고유석과 마찬가지로 그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얼핏 보면 트레버 바우어가 무식하게 던지는 것 같지만···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Go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있어요.

-선발투수들 간에 신경전을 벌일 때 흔히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네, 상대 투수의 휴식을 제한해서, 체력을 갉아먹는 의도도 있습니다만, 진짜는 멘탈 공격이죠.

바둑의 속기(速棋)와 비슷한 피칭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상대의 정신을 흔드는 것이니까.

-이렇게 이닝 교체가 빨라지면, 평소와 템포가 달라지기에, 노련하지 못한 신인 투수라면 자기 리듬을 잃기 쉬우니까요.

대단하다 못해, 기이하게 여겨질 만큼 엄청난 성적을 기록한 투수. 허나 어쨌든 루키다.

신인 선수의 경우 자신의 흐름을 잃는 순간, 놀라우리만큼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말이다.

트레버 바우어의 피칭은 그것을 정확하게 노린 것이지만···

-하지만 Go는 평범한 루키가 아니죠.

트레버 바우어가 마운드를 비운 뒤, 곧이어 올라가는 투수. 체온 유지를 위한 점퍼를 벗고 마운드 위에 굳건하게 선 투수는 처음과 변화가 없었다.

그런 고유석을 바라보며, 캐스터가 흥미롭다는 듯 말하자, 트레버 바우어의 의도를 꿰뚫어 봤던 해설자 역시 동의했다.

-네, 루키가 아니죠, 현시점 리그 최정상의 투수니까요.

거칠고, 난폭했던 마운드의 분위기는, 난잡해진 바닥을 고르는 발동작 한 번에 다시 차분하게 정돈됐다.

그것으로 보는 이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분위기는 빠르게 급변했다.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천천히, 자신의 호흡을 유지하며 던지는 피칭은 언뜻 시청자들에겐 ‘내가 다른 경기를 틀었던가?’하는 생각을 안겨줬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에서 열린 에이스 간의 맞대결처럼 뜨거웠던 열기가 한순간 꺼트려졌으니까.

“스트라이크!”

허나 느긋하다 하여, 예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한 생각을 거듭해서 던진 한 수이기에.

“스트라이크 아웃!”

더욱더 확실했으니까.

오늘 경기에서 트레버 바우어와 고유석의 피칭은 극단적인 정 반대라고 봐도 무방했다.

트레버 바우어가 빠른 타이밍으로 타자들을 휘몰아치며 그라운드를 압도했다면.

고유석은 여유롭게 던지면서도, 마치 손 위에서 타자들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천천히 휘감았으니까.

“아웃!”

겨우 몇 분 간격로 시시각각 돌변하는 경기에 관중들 역시 둘로 나뉘었다.

“어··· 그래도 잘하고 있네.”

“트레버! 이대로 저 루키 찍어 눌러 버려!”

“지금처럼만 해! 입도 털었겠다, 아주 끝까지 가야지!”

속도가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던 홈팬들이었지만.

안타를 몇 개 내주기는 했어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빠르게 타자들을 잘 때려잡는 모습에 조금씩 만족감이 차올랐다.

턴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야구가, 투수 대 투수의 1대1 맞대결로 변한 것 역시 생각보다 입맛에 맞았고 말이다.

“시원하게 잘 던지네! 그래, 루키는 이렇게 때려잡아야지!”

“어이, 트레버 쟤 너한테 겁먹은 것 같던데, 저 Pussy한테 한 수 제대로 가르쳐 줘!”

그리고 일단 겉으로 보기엔 트레버 바우어가 압도하는 것 같았기에 흡족함이 생겼다.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조금 다르게 본다면, 그토록 칭송받는 리그 최고의 애송이가 트레버 바우어의 기에 눌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 팬들의 응원과 끄떡도 없는 고유석의 모습에 트레버 바우어는 점점 더 속도를 올렸다.

“음··· 잘하고는 있네.”

“안타도 하나밖에 안 맞았고. 볼넷은 오늘도 없고. 실점도 안 했고. 잘하고 있는 건 맞는데···”

“쓰읍, 뭐, Suck이 생각이 있겠지. 그래도 성적으로 보면 Suck이 더 나아.”

반대로 소수, 아주 극소수의 원정팬들은 조금 미묘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고유석이 트레버 바우어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뭘 하든지 그냥 무시해버리고 자기만의 피칭을 하는 거니까.

4회까지, 피안타 하나와 삼진 다섯 개를 잡았으니. 이 정도면 준수하지.

그러니 그럭저럭 만족스럽기는 한데, 문제는 그들이 보통 팬은 아니라는 거였다.

“Suck! 너도 그냥 들이받아!”

“X발 왜 점잔을 빼고 있어? 우린 니가 어떤 놈인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화끈하게 너도 불 질러!”

“Go, 콧대를 눌러줘야지! 그딴 개소리 들어놓고, 왜 재미없게 굴어?”

사실 제아무리 고유석으로 인해 오클랜드의 인기가 제법 올라갔다고 해도.

굳이 클리블랜드 원정을 올 정도는 아니기에. 사실 원정팬의 절대다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레이더스’다.

특히 고유석이 등판하는 경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써어어어어어억! 빨리- 빨리 저 새끼 조져!”

레이더스는 자신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영원토록 오클랜드의 상징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선수가 ‘계집애’처럼 싸움을 피하는 걸 원치 않았다.

누구 대가리가 먼저 깨지든지 간에, 일단 머리로 들이받고, 당당하게 치킨게임을 하는 걸 더 선호하지.

그런 성향이기에, 시원시원한 피칭을 자주 보여주는 고유석에게 푹 빠진 것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성적에는 만족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여유로는 피칭에는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런 레이더스의 악다구니 섞인 외침에도 고유석은 유유자적 분위기를 유지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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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버,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준수한 피칭에 팬들은 어느 정도 불안을 덜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을 직접 받는 포수의 걱정은 점점 더 짙어졌다.

평소와 다른 스타일의 피칭, 거기다 어쩔 수 없이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허나, 잘 던지고 있는 투수에게 초를 칠 수는 없는 만큼, 포수, 로베르토 페레즈는 덕아웃에서 나가기 전,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 몇 번째 묻는 거야? 멀쩡하다니까? 투구수도 얼마 안 됐구만.”

그의 눈빛에서 일말의 불안을 읽은 트레버 바우어는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휘휘 돌렸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투구수는 그리 많지 않다. 피안타도 셋밖에 되지 않고. 볼넷도 없으니까.

그 덕에 투구수를 많이 아껴서, 평소 다른 경기와 비교한다면, 대략 8~10개 정도 적은 셈이지만···

‘대신 전력투구도 더 많았잖아.’

로베르토 페레즈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씹어 삼켰다. 지금이라도 자제를 시켜야 하는 게 맞겠지만. 타이밍은 이미 늦었다.

‘이미 탄력을 받았어.’

이제 와서 다시 속도를 늦춘다면, 그대로 리듬을 잃고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불쾌하게 여길 게 분명하고.

성격이 워낙 기이한 녀석이기에, 오히려 걱정을 해주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도 이제 5회니까. 아직은 괜찮겠지.’

어차피 멈출 수도 없었기에, 그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조금 위태롭기는 해도, 이렇게 끝까지 갈 수도 있는 거니까. 체력이 나쁜 투수는 아니니까.

또 경험이 제법 쌓여서, 베테랑에 가까운 만큼, 스스로 어느 정도는 조절을 할 테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걱정을 눌러둔 포수를 보며 트레버 바우어는 피식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네.’

솔직하게 말하면.

자존심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그도 조금은 당황했다.

이닝 당 소모된 시간은 평소의 반에 가깝다. 굉장히 빠르게 경기가 진행된 셈이지.

오후 6시에 시작한 경기에, 이제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아직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토록 열심히 몰아쳤는데, 정작 저 녀석은 끄떡도 없다.

원정팀 덕아웃 한쪽에서 점퍼를 목 끝까지 올린 채 포수와 시시덕거리는 선수를 보며 트레버 바우어는 조금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거 진짜 루키 맞아? 얼굴 까보면 다른 사람 있는 거 아니야?’

그런 망상이 들 정도로 저 녀석은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일부러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 노려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손가락질도 하면서. 최대한 속을 긁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까지 전무.

이쯤 되면 인정해야 했다.

내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겨우 조금 못 쉬게 하는 정도로 흔들릴 만큼 가벼운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슬슬 내 쪽이 위험해. 이제부터는 적당히 조절 해야겠어.’

변함없이 우뚝 선 투수 때문에 열기가 조금 식었고, 이후가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포수의 앞에선 능청을 떨었지만, 오늘 자신은 명백히 오버 페이스를 했으니까.

자존심이 뭔지, 입 한 번 턴 것 때문에 평소에 하지도 않던 피칭을 해버렸지.

그래도 덕분에 4이닝을 잘 막았으니, 어느 정도 결과물은 얻어냈다. 원래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자존심은 챙겼어.’

다행히 체력소모가 심한 건 아닌지, 조금 지치기는 해도 어느 정도는 여력이 남았다.

그러니 남은 체력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한다면, 앞으로 3이닝 정도는 더 거뜬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마운드에 오른 트레버 바우어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항상 바라는데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Fuck.”

그렇게 시작된 5회 초.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그는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수비 시프트의 반대 방향으로 타구가 날아갔으니, 갑자기 엄청난 강풍이 불어서 파울라인을 넘어가지 않는 한, 무조건 페어다.

‘슬슬 체력 좀 아끼려고 했더니··· 괜히 또 지랄맞게 발목을 잡네.’

하위타선이기에 방심했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 그냥 타이밍을 잡았다.

하위타선이라고 해도, 어쨌든 메이저리거이기에 한번 타이밍을 잡는 순간, 안타는 손쉽게 만들 수 있지.

이닝의 선두타자인, 7번타자 매튜 조이스의 안타로 시작부터 5회 초는 삐걱거렸지만. 그는 피안타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나머지를 처리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마인드컨트롤하며 다시금 집중력을 올린 트레버 바우어였고.

이후 순조롭게 아웃 두 개를 잡으며, 다시금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지만.

“아아아아···”

결국 댐이 무너졌다.

우중간을 가르는 깔끔한 안타. 우타자의 머리를 넘긴 타구는 펜스 앞까지 굴러갔고.

그건 안타 이후 2루에서 내내 놀고만 있던 주자가 들어오기 충분한 거리였다.

“세이프!”

눈앞에서 홈으로 들어온 타자를 보며, 트레버 바우어는 입술을 씹었다.

홈팬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은은하게 흐르며, 푹 떨어진 기분을 더욱더 바닥으로 처박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후속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추가 실점은 막았지만, 0의 행진이 이어졌던 전광판에 찍힌 1이라는 숫자 하나가 그의 가슴에 꽂혔다.

‘1점···’

큰 점수는 아니다.

사실 5이닝에 1실점이면, 꽤 괜찮다고 볼 수 있지. 야구에서 2점이야 너무도 쉬운 일이니, 어쩌면 바로 다음 이닝부터 역전될 수 있는 점수다.

상대팀 투수가 ERA가 0점대에, 지난 10경기 동안 단 3자책점만을 기록한 미친놈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잘 막았어, 내 탓이야. 내가 너무 앞으로 나왔어.”

“바로 역전 갈 거니까, 좀 쉬고 있어라.”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덕아웃에 돌아오니, 마찬가지로 속속들이 도착한 야수들이 어설픈 위로를 던졌다.

약간의 민망함도 담아서.

사실 5회까지 0대0이라는 건, 투수들이 잘한 것도 있으나, 타자들이 못했다는 말도 된다.

그것을 만회하겠다는 듯 자신감을 비추는 타자들의 모습에 트레버 바우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5월 들어서 슬슬 실점을 하고 있으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찝찝한 마음을 억누르고, 점퍼의 지퍼를 끌어올렸지만, 곧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저 X새끼가···”

경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아무리 지랄발광을 다 떨어도, 동네 개처럼 무시하던 고유석이 지금은 똑똑히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으니까.

별 같잖은 애송이에게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울컥 울화가 치솟아 벌떡 일어선 순간.

“어?”

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에, 몇 초를 버티지 못한 채 그는 다시금 주저앉았고, 그제야 깨달았다.

‘X됐다.’

X됐다는 것을.

바톤이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것을.

####

“슬슬 시작하자.”

트레버 바우어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려준 뒤, 살짝 고개를 돌려 브루스 맥스웰에게 말하니, 고개가 추욱 늘어졌다.

“결국··· 오늘도 하는 거네. 지금도 잘 막고 있는데···”

“투덜거리지 말고, 공 잘 받아. 지금까진 평소보다 여유로웠잖아? 쉰 만큼 빡세게 가야지.”

“하아아···”

빡세게 가자는 말에 아주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얘는 포수라는 놈이 투수 공을 무서워하는 것 같단 말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내 공이 무서운 거겠지만.

나는 포수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내 구위가 대단하긴 한가 봐.

‘포심 RPM이 평균 2400회였던가?’

컨디션 좋은 날에는 2500도 찍는다고 하는데. 확실히 받기 힘들 것 같긴 하네.

구속은 80마일에서 놀아도, 웬만한 100마일 이상 강속구보다 더 묵직하다고 하니까.

‘그래도 오늘은 꽤 오래 풀어줬잖아? 4이닝 편하게 받았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에잉, 쯧쯧. 요즘 포수들은 근성이라는 게 없어. 나 때는- 아, 얘가 나보다 나이 많지.

내면의 꼰대가 고개를 쳐들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음, 나이는 인정이지.

아무튼 나는 지금부터 ‘그거’를 할 생각이다. 그게 뭐냐고? 그, 있잖아 그거. 4회나 5회부터 하는 거 말이야.

‘집중력은 충분히 올라왔고, 감각도 날카롭고. 껌도 딱 좋게 부드러워졌고. 준비는 완벽하네.’

10초에 한 번씩 씹던 껌을 가쁘게 질겅거렸다. 단물은 이미 다 빠졌지만, 오랫동안 입안에 있었기에 딱 좋네.

‘아주 신이 나셨더만.’

다시 돌아온 마운드는 전보다 훨씬 깨끗하다. 사실 지금도 좀 흔적이 많기는 한데. 이전까지는 아주 개판을 쳐놨던 걸 생각하면, 이만하면 양호한 편이지.

그런 마운드의 상태가 트레버 바우어의 심리를 말해줬다.

2회 초, 3회 초, 4회 초.

3이닝동안 아주 신나게 던졌지. 자기 세상인 것처럼, 아주 살판이 나서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반응이 없으니, 아마도 이번 이닝부터는 다시 자기 페이스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나.’

피칭에도 탄성이라는 게 있다. 한번 흐름을 타서,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고무줄처럼 쭈우욱 늘어나지.

그 사이클 속에서 반복 노동을 하다보면, 피로도 잘 느끼지 못하고, 열기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걸 끝까지 유지한다면, 완봉이든, 완투든, 아주 경기를 지배하겠지만.

고무줄의 내구성은 완벽하지 못하지. 기초부터 튼튼한 게 아니라면, 어느 지점에서 뚝 끊어지거든. 혹은 탄성을 못이겨 줄을 놓치든가.

‘그 줄이, 방금전에 제대로 끊어졌지.’

트레버 바우어는 줄을 놓쳤다. 신이 나서 쭉쭉 늘려댔지만, 결국에는 놓쳤다.

한계까지 늘어난 고무줄을 놓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답은 ‘더럽게 아프다’다.

‘보니까 다리가 비틀거리는 것 같던데, 시작됐네.’

신나게 던지면서 잊고 있었던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온 거겠지. 그것만 하더라도 이미 트레버 바우어는 무너지는 셈이지만···

‘체력 싸움하자며?’

난 거기에 조금의 가속을 더 붙여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어디보자, 아주 제대로 삐졌네, 제대로 삐졌어.”

다시금 여유롭게 마운드를 고르며, 관중석을 흘끔 쳐다보니, 수염난 아저씨들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다.

대체 왜 그러세요, 아저씨.

나이를, 아니, 최소한 본인의 외형을 생각하시고 행동을 하셔야죠.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원인제공을 했으니까, 달게 받아들여야지.

‘좀 보기 그렇긴 하지만, 풀어주면 되겠지.’

그래도 이제부턴 괜찮다.

저 양반들이 그토록 바라던-

“스트라이크!”

화끈한 맞불이 시작될 테니까. 이번 이닝은 5-6-7번으로 이어진다. 출루를 한 번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셋 다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다. 특히 5번타자 에드윈 엔카··· 엔카나시온? 엔카르나시온? 이름 겁나 어렵네.

아무튼 저 양반은 직전 타석에서 제법 괜찮은 타구를 날렸었지.

아슬아슬하게 안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타격감은 좋다는 건데···

“스트라이크!”

그 좋은 타격감도 일단 맞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타이밍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18초. 초구와 2구의 간격이다. 공 넘겨받고, 둘 다 자세 잡고 한 것까지 합치면 좀 더 길긴 할 텐데. 아무튼 순수하게 내 인터벌만 따지면 아마도 저 정도겠지.

그토록 빠르게 날아온 2구에 타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기 내내 느긋하게 세월이나 낚으면서 던지더니.

갑자기 속도가 확 빨라지니까, 감을 잡기가 힘들겠지.

애초에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좀 천천히 던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게 하나 꽂고.’

“볼!”

‘마지막으로 서클 체인지업.’

“스트라이크 아웃!”

순수하게 타석에 있던 시간이 1분은 될까? 순식간에 삼진으로 물러난 에드윈 엥카··· 아무튼 5번타자는 헛웃음을 흘리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당혹스러운 것 같은데, 그보다도 뒤의 관중들 반응이 예술이다.

“어?”

“···저 새끼 이제까진 가만히 있더니-”

어처구니가 없겠지.

트레버 바우어가 온갖 개지랄을 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정작 얌전해지니까, 갑자기 내 쪽에서 불타는 게 말이야.

그런 황당함 그리고 당혹감이 섞인 웅성거림이 그라운드에 흘렀다. 반대로 우리 레이더스들은 아직 긴가민가한 눈치고.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곧이어 나온 삼구삼진, 확실하게 1분이 넘지 않은 타석에-

“You-Suck!”

“Hell Yeeeeeeeeah!”

“이거지!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하면 잘하는 놈이 꼭 화를 내야 보여준다니까!”

“이놈 이거 아주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네! 가지고 놀아!”

“Suck 니가 변한 줄 알고 실망했던 5분 전의 내가 X신이었어!”

그제야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래, 얼마나 보기 좋아?

역시 저 수염난 아저씨들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는 것보다,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걸쭉한 욕설을 뱉는 게 더 잘 어울려.

사실 페이스페인팅에 가려저서, 딱히 빨갛게 물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열렬한 환호성에 힘입어, 지난 이닝 동안 차분하게 긁어모았던 체력을-

“스트라이크 아웃!”

본격적으로 터트렸다.

앞서 한창 폭주했을 때의 트레버 바우어보다도 더욱더 빠르게 끝나버린 이닝에 홈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마운드를 내려가며 다시금 쳐다본 트레버 바우어 역시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죽을 맛이겠지.

1분, 1초가 소중할 텐데.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마운드에 올라야 하니까.

‘그러게 왜 오버를 하고 그래.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단순히 투구간격을 빠르게 하는 것 같아도, 이게 꽤 힘든 일이다. 체력을 당겨쓰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결국 대가가 따라오지.

특히 중간에 흐름이 끊긴다면, 그 대가가 복리로 돌아오는 거고.

나는 왜 괜찮냐고? 난 철인이라서 그렇다. 고무팔, 강철인대를 타고났지.

이건 좀 구라고, 사실 나도 안 괜찮아. 마운드 내려가고 나면, 다음 로테이션까지 3일 동안은 죽은 듯이 지내거든.

집중력과 경기감각이 필요하기에 경기 중반부터 가속하는 지라, 그나마 마지막까지 버티는 거지.

그에 반해 오늘 트레버 바우어는 시작부터 달렸다. 명백한 오버페이스지.

리듬은 끊겼다. 주도권을 이쪽으로 넘어왔고. 과연 그에게 긴 이닝을 버틸 정도의 체력이 남아 있을까? 휴식조차 짧을 텐데?

‘선택하슈, 승부를 어떻게 끝낼 건지.’

이제 드론맨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지금 성적에 만족하며 꼴사납게 내려가느냐. 혹은 마지막 체면이라도 지키기 위해 독이든 잔을 달게 마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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