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99화 (99/316)

99화

드론맨의 SNS질은 단순히 호텔 식당에서만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인디언스의 홈,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들어가는 순간, 묘한 시선이 따라붙는 걸 보면.

하긴 저격질의 당사자인 내 입장이야 어떻든 간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경기의 재미를 더 해주는 흥미 요소일 테니까.

경기장 근처서부터 보이던 기자들이야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간밤에 있었던 광란의 키보드질 때문에 급하게 준비된 건지, 기대감에 찬 양반들이 몇몇 보이는데.

아마 경기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끝나자마자 이번 일에 관한 질문을 퍼부을 것 같다.

홈팀, 인디언스의 팬들은···

‘약간 쪽팔리는 것 같기도?’

나랑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거나,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둘 중 하나다.

드론맨의 칭호가 생긴, 작년 포스트시즌의 헤프닝 때문에 여러 가지 애증이 존재하는 선수지만.

그래도 인디언스 내에서는 프랜차이즈 스타급 선수이니, 아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거겠지.

클럽하우스에서 환복을 마치고, 본격적인 워밍업에 들어갔을 때도, 시선은 여전했다.

“이거, 어쩌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되버렸네. Suck, 이길 자신 있지?”

남의 속도 모르고, 브루스 맥스웰은 저런 말이나 하고 앉았다. 얘 포수 맞아? 무슨 놈의 포수가 오늘 등판하는 선발투수한테 저런 말을 해. 처 맞으려고.

내가 도량이 넓고, 선한 사람이라서 망정이지, 예민한 놈들이었으면 죽탱이 한번 돌렸을 거다.

등판의 스트레스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다 예기치 않은 헤프닝까지 겹친 셈이니까.

“이기긴 누구한테 이겨? 내가 빠따 들고 타석 나갈 것도 아닌데. 괜히 꼼지락거리지 말고, 너도 워밍업이나 해.”

“에이, 딱 봐도 그런 눈치가 아닌데? 아주 이글이글 열의가 불타는- 어, 그래. 가야지, 워밍업.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이제 좀 친해지긴 했나봐.

처음 정규시즌에서 호흡을 맞췄을 때는 뭔가 기가 눌린 것 같더니, 아주 팔자가 늘어졌어.

살짝 노려보니, 다시금 깨갱한 브루스 맥스웰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켰고, 내 워밍업을 돕던 대니얼도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외부의 말 같은 건 웬만하면 신경쓰지 마세요. 투수라는 직업 자체가 정신적 피로가 심한데, 거기에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아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네, 뭐, 그냥 무시하는 거죠. 혼자 알아서 떠들겠다는데.”

맞는 말이다.

한 시즌 동안 풀로 피칭하는 것도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일인데, 이런저런 일까지 신경쓰다 보면, 이 일 못 해먹고 살지. 못 버티니까.

‘미친놈이 달라붙었다고, 나까지 같이 미친놈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상대의 도발이 짜증 나기는 한다. 까놓고 말해서 날 대놓고 무시한 거잖아? 내가 지금까지 올린 성적도 자긴 인정 안 한다는 뉘앙스고.

내가 아무리 착한 놈이라도, 대놓고 무시하는 건 좀 짜증나지. 하지만 굳이 그런 도발에 반응해봤자, 손해를 보는 것도 나다.

쓸데없이 이슈가 커질 수도 있고, 괜히 감정을 섞어서 피칭을 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쪽으로든 투수에겐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지.

“네, 15분 됐습니다. 바로 불펜으로 가실 거죠?”

“루틴에 맞춰야죠. 그냥 평소처럼.”

어쩌면 우리의 미치광이 드론맨도 그걸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반응하는 거 말이야.

루키니까, 이런 종류의 도발에 쉽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한 거지. 조금 긁어주면 스스로 경기를 망칠 거라고.

‘내가 무슨 고삐리 애새끼도 아니고.’

“Go, 워밍업은 잘했어? 폼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뭐, 좋습니다.”

“오··· 다행이네. 그··· 이슈 같은 건 그냥 웬만하면 잊어버려. 네가 최고의 투수라는 거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드론맨은··· 미치광이라는 거 잘 알잖아?”

여기서도 이 소리구만.

불펜에 들어서니, 투수코치가 맞이해줬는데, 역시나 드론맨 타령이다.

하긴, 투수코치로서 그냥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니지. 내가 괜히 감정적으로 동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경기를 망치면 그의 입장에서 그리 좋은 것도 없고 말이야.

“네, 미친놈의 미친 소리죠.”

대충 그렇게 대답하니, 그제야 마음을 좀 놓은 것 같다.

어쩌면 덤덤한 표정을 보고 안심한 걸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불펜에 입장하니, 불펜포수까지도 같은 소리를 하길래 대충 지겹다는 듯 손을 흔드니까, 얌전히 입을 꾸욱 닫았다.

‘그래, 굳이 신경 쓸 이유 없는, 저급한 도발이지.’

그러니, 그냥 무시하고 내 페이스를 유지하···긴 개뿔.

이런 저급한 도발을 들었는데 그냥 넘어간다면 그건 정신력이 좋은 게 아니다.

배알이 없는 거지.

그리고 난 원래 먼저 걸어오는 도전을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적이 없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 또한···

“어- 이게···”

“나이스볼?”

“어, 나이스볼, 나이스볼. Fucking Nice Ball이야.”

오늘 컨디션도 좋으니까.

드론맨, 드론 수리하다 손가락을 베였다고 했던가?

아마도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역사상 최악의 부상 이유일 거다.

‘이번엔 손가락이 아니라, 모가지다. 딱 대.’

처음 일어났을 때도 몸이 개운했지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누군가 덕분에 지금은 묵직한 힘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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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투수코치는 그를 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다가와 한소리 늘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트레버 바우어라는 투수가 그만큼 팀 내에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투수라는 것 때문이겠지.

뭐, 지랄맞은 성질머리 탓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것도 있고.

오늘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숨만 픽픽 내쉬었던 투수코치에게 그는 씨익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날려줬다.

안심하라는 것처럼.

좋은 의도의 미소였지만, 다르게 받아들인 건지, 그를 보내는 투수코치의 얼굴은 한결 더 일그러졌다.

“오늘은 드론 안 만졌지?”

“잘해라! 그렇게 입 털어놓고 발리면, 그거만큼 추한 게 없어! 루키 새끼한테 빅리그가 뭔지 보여주라고!”

“그 X발놈의 손가락은 제발 베이스볼에만 쓰면 어디가 덧나냐?”

마운드로 걸어가니, 여러 가지 종류의 목소리가 그를 반겨줬다.

그리고 저런 반응들이야말로 인디언스가 그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었다.

누군가는 그 광기를 불안해하고, 누군가는 오히려 흥겹게 여겼다. 물론 괜한 이슈를 만든다며 혐오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고.

사실 원래는 오늘 경기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Go라는 루키에 대한 감상도 그저 그랬고. 그냥 좀 잘하는 신인이 하나 나왔구나 정도였지.

뭐, 언론에서 더럽게 띄워주는 게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물어뜯는 모습에 약간의 동질감도 느꼈다.

또 그런 루키 하나를 신경 쓰기엔, 작년에 저지른 죄를 무마하기 바빴다. 그럴 여유가 없었지. 초반 성적도 별로 좋지는 않고.

그렇기에 그럭저럭 적당하게 경기를 준비하는 정도였는데, 망할 놈의 언론이 그의 기분을 망쳤다.

‘내가 저 애송이보다 훨씬 못하다고?’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평범한 사전리뷰다. 시리즈 전에 양팀의 전력과 현재 성적 같은 걸 간략하게 비교하는 거지.

그저 객관적인 정보만 담았는데, 2차전을 평가한 내용에서 나온 선발투수 약세가 눈에 딱 걸렸다.

선발투수 약세. 클리블랜드 쪽 언론이니, 그 약세가 어느 쪽을 이야기하는지는 분명하다.

그래, 저 기세 좋은 애송이에게 자신이 조금 처진다는 거지. 밀린다는 거고.

‘웃기고 자빠졌네.’

자존심이 상했다.

걔가 리그 최고는 맞다.

객관적인 성적만 봐도 그렇지. 지금 Go가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거의 역사적인 수준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자존심은 자존심이다. 13년에 데뷔한 이후, 그도 이제는 제법 연차가 쌓였고.

선발투수로서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았는데, 아무리 최근 기세가 좋다고는 해도. 루키보다 훨씬 못하다는 건 조금 그랬으니까.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었던 건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는데. 망할 기자 새끼들, 분명 내 SNS를 염탐하고 있는 게 분명해. 아주 상주를 하고 있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어? 열받네? 정도였다. 막 엄청나게 격렬하기 보다는,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지.

그래서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해 SNS에 게시글을 올린 건데, 그래, 좀 과격하게 쓰기는 했다.

SNS를 좋아하긴 하지만, 몇몇 머저리들과 격렬한 ‘토론’을 나누는 걸 제외하면, 평소에는 그만큼 심하지는 않거든.

그냥저냥 기사 내용도 신경쓰였고, 늦은 밤이라서 그런가, 괜히 감정도 요동치고. 또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팬들에게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서 쪼오끔 말이 험하게 나간 것 같긴 하다.

‘뭐, 결국 일은 벌어졌으니까. 어차피 돌이키긴 글렀으니, 저 사람 말처럼 쪽팔리진 말아야지.’

저 녀석의 인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거센 반응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감은 있었다.

올 시즌 기세가 별로 좋지 않기는 한데, 오늘은 그래도 감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또한 루키를 어떻게 조질지에 대한 방법도 세워뒀고.

“Hey, 트레버, 똥도 미리 싸질렀겠다, 멋지게 가야지?”

“그래야지, 오늘은 좀 타이트하게 가자. 2회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말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올라왔던 포수, 로베르토 페레즈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눈썹을 씰룩거리기도 했고.

마치 괜찮냐고 묻는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감 넘치게 미소를 지은 트레버 바우어는 이내 홀로 선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다잡았다.

‘그래, 쪽팔리진 말자고.’

일이 좀 커지긴 했지만, 뭐, 어쨌든 일은 이미 벌여졌고, 1대1의 승부는 시작됐다.

그러니 기왕이면 이겨야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마운드에서의 마지막 연습피칭 겸 투구감각 체크를 마친 그는 글러브를 두들기는 포수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느낌이 좋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강하게 긁어볼 걸 그랬나?

어나, 그래도 아까 전, 얼핏 워밍업 하는 걸 스쳐봤을 때, 자존심이 좀 상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한번 제대로 놀아보자.’

곧 경기는 시작됐고,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홈팬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듯.

“스트라이크!”

그는 차분하게 공을 던졌다.

마치 마운드 위에서마저 날뛰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볼!”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아웃!”

그 느긋하고 차분한 피칭에 그제야 관중들의 눈에 드리웠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몇몇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고. 그렇게 원아웃.

“아웃!”

범타를 유도하며 투아웃.

“아웃!”

3루수 땅볼로 쓰리아웃.

다소 격렬했던 전날의 SNS와 달리. 1회 초는 조금 느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분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투수에게 1회는 오늘의 감각을 잡는 시간이기에, 대부분은 다소 조용한 편이기는 하기에, 특이한 건 아니다.

허나 그렇게 1회 초를 마치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트레버 바우어의 눈빛은, 스스로 보여줬던 피칭과 달리 굉장히 날카로웠다.

이닝이 끝나자, 불펜에서 걸어나오는 선수에게 시선이 꽂혔으니까.

‘아니꼬우면, 한번 잘해보던가.’

지금의 무난한 피칭은 다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하는 듯한 미묘한 눈빛에, 그와 눈이 마주친 고유석은 마찬가지로 자신 있는 미소로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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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하고 있네. 뭔 야구 만화도 아니고. 이닝 끝났으면 빨랑빨랑 덕아웃에 들어갈 것이지. 뭘 야리고 있어?”

똘끼도 똘끼지만, 좀 중2병 비스무리한 것도 있는 건가?

대체 무슨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웃기네.

‘그래도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불펜에서 화면으로 지켜본 피칭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미친 망아지처럼 날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차분하더라고. 하긴, 성격과 달리, 꽤나 학구적인 선수라고 하니까.

입, 아니 손가락만 좀 털었을 뿐이지, 생각보다 평범한 경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있어, 분명히.’

방금 전의 눈빛으로 그런 행복한 상상은 고이 접었다.

분명히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었으니까. 매너 플레이? 멋진 승부? 까고 있네.

‘마운드 꼬라지만 봐도···’

마운드의 상태는 개판이었다. 물론 피칭이 이어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운드가 더러워지기도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 경기가 중반 이후로 접어들었을 때의 이야기고. 기껏해야 한 이닝 던졌는데, 이런 상태가 될 리가 없지.

이건 명백히 일부러 개판을 쳐 놓은 거다. 실실 쪼개더만, 이거 때문인가?

‘아니, 겨우 이 정도가 아니야. 뭔가 더 있어.’

좀 짜증나긴 해도, 이 정도는 그냥저냥 투수들끼리 신경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다. 일종의 멘탈공격이지. 은근히 열 받거든.

대충 발로 정리하면 되는데, 이것도 충분히 유치하지면, 진짜는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Suck, 드론맨한테 한번 본 때를 보여주자. 누가 진짜 King인지 알려주자고!”

브루스 맥스웰은 여전히 흥분한 것 같다. 내 일인데, 얜 왜 그러나 몰라. 어쩌면 완봉 이후 홈으로 돌아가서, 지샥 하나 사준 게 문제일지도···

그때 이후로 부쩍 충성도가 올라간 것 같았으니까. 아주 충복이네, 충복이야.

“뭐하러? 그냥 평범하게 가자. 오늘 컨디션 좋으니까. 굳이 별짓거리 안 해도 돼.”

“오··· 진짜? 컨디션이 좋다면···”

정작 컨디션이 좋다고 말하니, 또 표정이 굳네. 뭔가 바짝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참 이상한 놈이야.

“공이나 잘 받아. 타자들 체크 좀 해주고.”

“Yes, Suck! 믿고 맡겨.”

그래도 말하는 건 씩씩하네.

포수를 돌려보낸 뒤, 가만히 마운드 위에 서서 머릿속을 비웠다.

상대 투수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결국 투수의 적은 타자니까. 여기에 집중해야지.

‘폼이 좋은 것 같긴 해도, 딴생각까지 하면서, 거만 떨 정도는 아니야.’

최근 가장 좋았던 때는 4월에 있었던 애스트로스전이다.

결과로 따진다면 완봉이 있기는 한데, 컨디션은 그때가 가장 좋았지. 여전히 수준이하인 커터가 제법 그럴듯해질 정도로 폼이 올라왔었으니까.

오늘의 컨디션은 분명 좋긴 하지만, 그때 정도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집중해야지.

‘타선은 강력하지. 말린스 정도는 아니지만.’

먼저 1번타자 제이슨 킵니스.

저~기, 목욕탕 열탕에 있는 아저씨처럼 팔을 휘휘 젓고 있는 녀석.

OPS형 히터에 가깝다.

커리어 초반에는 도루도 좀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별로 없지. 파워가 준수해서, 작년에 20홈런을 넘겼지만. 그 대신 삼진도 좀 많이 늘었지.

전형적인 테이블세터형 리드오프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셈인데, 어쨌든 만만한 타자는 아니다.

‘다만 최근 성적은 별로 좋지는 않아. 아마 기세가 떨어졌겠지.’

분명 지금까지 커리어는 위협적인 타자이나, 올해는 시즌 초반에 조금 삐걱거리고 있다.

타율은 커리어 평균보다 다소 떨어지고, OPS도 6할 초반으로 좋지 않은데. 특히나 큰 약점이 있지.

‘6할 중 태반이 장타율이야. 출루율은 2할 6푼 정도.’

즉 선구안이 망가졌다는 건데, 그런 타자 잡는 거야···

“스트라이크!”

무조건해야 하는 일이지. 이 친구 뒤로 죄다 빡빡하니까.

초구는 스트라이크.

늘 던지던 몸쪽 포심이 아닌, 살짝 바깥쪽으로 뺀 서클 체인지업.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스윙이 나왔다. 역시 몸쪽 코스를 노린 것 같은데, 참을성이 많이 떨어졌네.

‘일단은 감이 나쁘진 않아. 적당히 선구했으면 참았을 코스인데, 스윙이 나온 걸 보면 조급하다는 거다.’

살짝 입맛을 다셨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1번타자의 감이 떨어져 있다는 건 투수로서 기쁜 일이지.

“스트라이크!”

이번엔 다시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 낮은 코스.

타자는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같은 손인 좌타자이니, 일종의 크로스파이어라고 봐도 되겠지.

투구폼이 평범해서, 존을 가로지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엇비슷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이대로 몰아칠까, 싶었지만, 이미 구석에 몰아넣었기에, 여유를 가졌다.

“볼!”

‘존은 여기까지인가? 좀 짜네.’

바깥쪽으로 하나 더.

이번엔 존 확인 용도다.

스트라이크존은 조금 짧았다.

평소보다 볼 반 개, 아니 반의 반 개 정도. 던지는 입장에서 까다롭긴 한데, 뭐, 아까 불펜에서 중계로 보니까, 트레버 바우어한테도 똑같이 잡았으니까. 그냥 이해해야지.

‘제구 싸움으로 가면, 내가 바우어보다는··· 어우, 타자한테 집중하자.’

다시 정신을 다잡은 뒤, 마지막 4구를 골랐다. 뭐니뭐니해도 좌타자한테 이거 만한 게 없지. 특히나···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이미 타자의 머릿속에 바깥쪽 코스를 잔뜩 심어뒀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슬라이더.

앞선 공들과 비슷한 코스로 날아간 공에 타자는 결국 배트를 내밀었지만, 공은 쭈우욱 꺾이면서 얄밉게 배트를 지나쳤다.

그걸로 삼진 하나.

이제부터 진짜다.

프란시스코 린도어.

원래 수비력으로도 괜찮았던 녀석이 올해는 타격에서도 포텐이 터지기 시작하는 건지.

시즌 초반부터 우람한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작년보다 벌크업도 한 것 같고. 손목 힘도 타고났다고 했었지?’

듣기로, 유망주 시절에도 툴이 많은 걸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게 서서히 터지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센터라인, 그것도 유격수다 보니, 체격 자체는 그리 큰 편은 아니나, 단단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선구안도 좋다고 했는데···’

제일 까다로운 타입이다.

선구안도 좋고, 컨택도 좋고, 파워도 좋고. 거기에 발이랑 수비도 좋으니. 5툴 플레이어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서 쫄리냐고?

‘트라웃도 잡아봤는데, 뭐, 이 정도야.’

내가 지금까지 조진 타자가 몇 명인데. 뭐 쫄기까지야. 거기다 오늘은 컨디션도 좋으니···

“스트라이크!”

적극적으로 덤벼야지.

이번에야말로 과감하게 몸쪽 포심 패스트볼. 타자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내 공 처음 보면 대부분은 저런 반응이더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이젠 좀 식상하네.

그래도 항상 기분은 좋다.

조금 당혹감을 느낄 만큼, 공이 좋다는 뜻이니까.

“스트라이크!”

카운트까지 잘 잡히면 더 좋고. 퀵 앤 슬로우. 언제나 정석이지. 과감하게 쓰리핑거를 던졌다.

체인지업까진 타자도 예상한 건지, 배트가 나왔지만, 서클이라고 판단한 건지, 그저 느리기만 할 뿐, 어떠한 변화도 없는 쓰리핑거는 유유히 배트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체인지업, 그것도 느리고 맛탱이 가게 하기 충분한 쓰리핑거에 속았으니-

“아웃!”

마지막은 하이 패스트볼이지.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놓은 공 타자의 배트가 곧바로 따라 나왔지만,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한 채 타구가 튀었다.

빗맞은 타구는 툭 떠오르며 넉넉하게 2루수의 글러브 안쪽으로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3번타자 마이크 브래들리까지 깔끔하게 삼진. 오늘 공빨이 좀 잘 받네.

앞서 트레버 바우어의 삼자범퇴로 조금 미소를 짓던 홈팬들이 다시 표정을 흐렸다.

1회에서 각각 선발투수끼리 보여준 퍼포먼스는 내 쪽이 더 높으니까. 삼진이 두 개잖아? 저긴 한 개고.

똑같은 삼자범퇴이기는 해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 그래도 나는 문명인이라서, 굳이 뽐낸다거나,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Suck, 오늘 공 진짜 죽여주는데? 잘하면 6회 안에 글러브 터지겠어. 드론맨 저 자식, 사람 잘못 건드렸네.”

“이제 겨우 1이닝이야. 더 길게 봐야지.”

이제 이닝도 끝났으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분명 뭔가 준비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얌전히 덕아웃 한쪽에 앉아, 점퍼의 지퍼를 목끝까지 쭉 올리며 그라운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아주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트레버 바우어,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으니까.

‘호오?’

차분했던 1회 초와 달리.

2회 초, 마운드에 올라서는 즉시 그는 가면을 갈아 끼웠다. 이게 그 노림수구만.

‘원래 인터벌이 빠른 타입은 아니지. 1회 초가 제모습이야. 그런데···’

빠르다. 지금은.

마치 경기 중반부터 내가 가속이 붙는 것처럼, 굉장히 가쁜 피칭으로 타자들을 때려잡았다.

‘재밌네.’

삼자범퇴이기는 해도, 조금 시간이 걸렸던 1회 초와 달리, 2회 초는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트레버 바우어는 마치 바톤을 넘기겠다는 듯, 이번에도 내 쪽으로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

마치 너도 자신감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것처럼. 그래, 뭔지 잘 알겠어. 뭘 노리는 건지.

‘나랑 체력 싸움을 해보시겠다?’

노림수도 알았으니.

바로 카운터 가야지.

그거, 나도 참 잘하거든.

속도를 높이는 거 말이야.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써먹어야 가장 효과적인지도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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