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97화 (97/316)

97화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이 올라가는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

압도적인 환호성과 함께 폭죽이 터졌다. 아직 낮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오클랜드인데도, 축하의 분위기는 잊지 않았다.

‘100번째 탈삼진이라. 놀랍기는 하군.’

전광판에는 큼직하게 100K라는 글자가 떠오르자. 관중석은 축제처럼 들썩거렸다.

데뷔한 지 대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100번째 삼진을 올린 신인투수.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이 자아낸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말린스에는 약간의 당혹감과 투지가 불탔다.

단순히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처럼. 그런 미묘한 분위기의 중간 지점, 대기타석에 선 타자는 말 없이 차분하게 준비를 마쳤다.

-9번타자, 스즈키 이치로.

잠깐의 소란이 지나간 뒤. 장내가 울렸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소개에 몇몇 홈팬들은 그를 신기한 듯 보기도 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미약한 반가움을 표출하기도 했고.

과거 같은지구 팀인 시애틀 매리너스의 소속으로 전설을 써 내려갔던 선수였으니까.

물론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이를 벅벅 가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타석으로 입장한 그는 잠깐 그라운드와 전광판을 눈에 담았다.

빨간색 불이 두 개 올라가 있고. 저 1루를 밟은 타자는 아직 한 명도 없다.

‘그럴 수밖에.’

말린스는 강하다.

대단히 강력한 타선이지.

그런 타자들이 선발투수에게 쭉 밀린 것이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덕아웃에서, 그리고 대기타석에서부터 피칭을 지켜봤기에,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62이닝, 아니 이제 64.2이닝 3자책점인가.’

0점대의 방어율.

그리고 방금 막 100개로 올라간 탈삼진. 극도로 적은 볼넷과 피안타까지.

지난달 데뷔한 이래로 저 투수가 기록한 성적은 괴이하다.

Go You-Suck. 농담 같은 이름으로,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적을 만들어냈지.

그 역시 리그 역사에 손꼽히는 화려한 데뷔 시즌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한 바가 있지만.

그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지. 투수와 타자의 포지션 차이 있고, 또한 그의 데뷔와 저 투수의 데뷔는 조금 다르니까.

‘좋은 일이지, 아시아에서 저런 좋은 투수가 나왔다는 건.’

선발 라인업이 발표됐을 때, 언론에선 조금 떠들었을 거다. 항상 이야기를 만들어내니까.

오래간만에 라인업에 들어간 그의 이름을 보고서는 가쁘게 손가락을 놀렸겠지.

과거 화려한 커리어를 보냈던 타자와 현재의 정점으로 나아가는 투수 간의 일한(日韓)전이니, 흥미로운 주제니까.

물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지금 저 투수와 자신은, A's와 말린스의 선수로서 마주한 거니까. 그저 약간의 동질감 정도.

“스트라이크!”

서로 약간의 눈인사가 지나간 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구가 공이 들어온 순간, 그는 조금 눈살을 좁혔다. 듣던 대로 굉장히 날카롭다.

‘나갈 것 같았는데. 절묘하게 멈췄군. 노린 코스라면··· 역시 쉽지는 않겠어.’

바깥쪽 슬라이더. 정확하게 라인에 걸쳤다. 딱 여기까지가 스트라이크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우연은 아닐 거다.

제구(制球)가 좋은 것으로 유명한 투수이니,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겠지.

‘난감하군.’

비록 서로 리그는 다르나.

워낙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투수이기에, NL에서도 유명했으니까.

90마일조차 되지 않는 속구(速球)를 가진 신인이나, 워낙 그 성적이 대단했으니까.

고국에서도 제법 이름이 높은 걸로 안다. 아내의 말로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다고 했었지.

그리 친밀하지는 못한 이웃 나라 출신의 투수인데도. 그 캐릭터성이 확실하고, 성적도 뛰어나기에, 컬트적인 인기가 생길 수밖에.

‘방법은··· 그대로 고수해야겠지.’

그는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투수를 상대했다. 다른 이들은 그걸 조금 독특하게 여겼지만.

언제나 투수의 변화구를 노렸다. 그것도 웬만하면 가장 느린 것을. 갑자기 속구가 날아올 때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

브레이킹 볼에 의한 헛스윙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인데. 오늘은 더욱더 그래야 하리라.

‘서클 체인지업. 이것 역시 듣던 대로였다. 만약 집중하지 않는다면··· 힘들겠지.’

저 투수의 서클 체인지업은 가장 유명한 상징이다. 이제는 은퇴한 과거의 전설들이 떠오를 만큼, 압도적인 변화를 자랑하지. 심지어 두 가지고.

만약 시즌이 끝난 뒤에 구종의 가치가 매겨진다면, 넉넉히 5위권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비록 자신은 좌타자라서, 우타자들이 느끼는 것보다는 조금은 덜 하겠지만. 위협적인 건 매한가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았다가는, 곧바로 꿰뚫리겠지.

‘다만 패스트볼은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저 투수의 속구는 그리 빠르지는 못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90마일조차 나오지 않으니까.

NPB의 투수들과 비교하더라도, 조금은 느리지. 평균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니까.

비록 나이가 들어, 많이 노쇠한 몸이지만, 아직 그 정도의 속구까지는 대처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파울!”

‘음!’

곧 착각임을 깨달았다.

배트가 닿는 순간,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정도의 무게감.

저 투수의 속구,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이 구속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구위(球威)만 따진다면, 리그에서도 수준급이라고 하던가?

당장 오늘도, 앞서 여덟 명의 타자들이 저 패스트볼에 밀렸었지.

그렇기에 위력적이라는 걸 이미 감안하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한 속구의 파괴력은 그 이상이었다.

‘라이징 패스트볼··· 그래, 그런 느낌이군.’

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실제로 떠오르려면, 160km/h 이상의 구속과 3500이상의 회전수를 가지면 떠오른다고 하니까.

허나 그렇기에 현실의 야구에선 라이징 패스트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의 어깨로는 절대로 던질 수 없지.

그렇기에 지금의 무브먼트가 그저 착시라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강력한 수직 무브먼트로 인해, 눈에서 전달받은 정보를 뇌가 오인하며 생긴 오류지.

‘하지만 최소한 내 눈에서는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결국 눈으로는 그렇게 보인다는 거니까. 뇌가 그렇게 인식한다는 거고.

또한 손에 남은 감각, 이 진한 여운 역시 진짜고.

‘힘들겠군.’

손목 힘을 타고난 덕분에 웬만큼 강력한 속구에도 곧잘 대응할 수 있었지. 하지만 오랜 세월 때문인지 이젠 쉽지 않았다.

떠오르는 착시효과에도 어떻게든 공을 맞추기는 했지만, 배트가 크게 밀렸다.

묵묵하게 걸어온 길이 자랑스럽기에 나이를 원망해본 적은 별로 없다. 그저 아쉬웠을 뿐.

현재의 노련한 기술과 젊은 시절의 신체가 어우러진다면, 더 좋은 타자가 되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게 유독 더 아쉽게 느껴졌다.

‘구속이 느린 덕분에 못 맞출 정도는 아니나. 허나 좋은 타구는 힘들다.’

부족한 힘을 타격의 기술로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 날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더 배트를 집중을 끌어 올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3구를 보며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몸을 맞출 듯이 날아오다가, 급격하게 꺾이면서 존안으로 들어가는 공.

루킹 삼구삼진.

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아니, 애초에 삼진 자체가 그리 친한 편은 아니지. 어떻게든 공을 때리니까.

분명 단단히 집중한 채, 최대한 노리고 있었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10년, 아니, 15년 전의 투수들 같은 느낌이군.’

자신이 막 MLB의 문을 두드렸을 무렵, 그때는 참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지. 꿈의 무대라는 말이 어울리게도.

과거가 현재보다 낫다는 식의 닳고 닳은 노장의 투덜거림은 아니다. 그저 워낙 강렬하게 남았던 시절이기에, 그때가 익숙할 뿐.

저 눈앞의 투수는 그때의 투수들에게서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이젠 전설로 남은 선수들.

그러고 보니, 시범경기 때 그렉 매덕스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했던가?

기분이 미묘했다.

커리어의 황혼기에 한창때의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투수를 만난 게 기쁘면서도.

그런 투수에게 전력으로 맞설 수가 없다는 게 씁쓸했으니까.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재밌었겠지.’

마침 저 투수도 오클랜드이고, 자신도 시애틀이었으니.

똑같은 서부지구일 테니까.

그것이 못내 아쉬워서, 짧게 혀를 차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한국은 좋은 투수가 은근히 많이 나온단 말이야.’

“혹시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나? 저 투수 말이야.”

덕아웃으로 돌아가니, 타격코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워낙 대단한 커리어를 지닌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기에 이처럼 사소한 질문조차 부담스럽다는 것처럼.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물으면서도 타격코치의 얼굴에선 일말의 기대감이 나타났다.

은퇴만 한다면 쿠퍼스 타운이 예정된 커리어와 그것을 만들어낸 천재성, 그리고 베테랑의 노련함으로 투수에게서 무언가 약점이라도 알아냈을까 싶은 거겠지.

그런 생각이 담긴 물음에, 묵묵히 배팅장갑을 벗은 이치로는 얼토당토않다는 듯한 옅은 미소를 띠며 짧게 답변했다.

“Nothing.”

그런 게 있을 리가.

저런 종류의 투수에 대한 상대법은 간단하다. 그저 잘하면 된다. 잘 때리면 되고. 그게 전부지.

‘오늘 경기, 쉽지 않겠어. 간만의 선발출장이라, 웬만하면 이기고 싶었는데.’

3이닝이 지워졌다.

9명의 타자가 아웃을 당했고. 안타나 볼넷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 시간 동안 말린스가 얻어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아슬아슬한 줄타기.

오늘의 피칭은 딱 그랬다.

‘타자들 자신감이 대단해. 특히 상위타선은 더욱더 그렇고.’

죄다 큼직하다.

강력하고, 성적이 좋은 타자들이라서 그런지, 그 자신감이 타격에서도 드러나네.

그렇기에 오히려 쉽게 잡았지만, 깔끔하게 지워진 이닝의 내막을 살펴본다면, 하나하나가 위험했다.

‘대가리 터지겠네.’

최대한 생각에 생각을 더해서 피칭했다. 메이저에서 이러는 건 오래간만이네.

그렉의 조언을 따라, 적절하게 타자들을 상대했었으니까.

마이너에서는 항상 이렇게 던진 편이긴 하지만, 오래간만에 대가리를 굴리니, 과부하가 걸린 건지 뜨끈뜨끈하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지는 않네.’

타자들 스스로 타격에 대한 자신감이 강한 덕분에 살벌한 스윙이 이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

최대한 대가리 굴린 보람이 있어. 자신감의 빈틈을 적당히 찔렀는데, 잘 잡히네.

‘덕분에 투구수도 적절하게 아꼈고.’

목표는 딱 7이닝이다.

그걸 감안하면 지금 투구수는 꽤나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지. 물론 앞으로 난타를 안 당한다는 가정하에.

“오늘은 뭔가 좀 되는 날인 것 같은데, Suck, 네 생각은 어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개발에 땀나도록 머리 굴린 노력을 몰라주는 건지, 조시 페글리는 그런 속편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최선의 수를 던지더라도, 안 되는 날은 안 되거든.

말린스 타선의 파괴력을 생각한다면, 오늘은 잘 되는 날인 거지. 그렇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금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 다시 1번부터. 빡세다, 빡세.’

4회 초.

이제 한 타순이 돌았다.

다시 또 저 타선을 한바퀴 돈다고 생각하니 속이 미식거릴 지경이다.

‘그나마 옐리치가 안 나와서 다행이지···’

크리스티안 옐리치. 말린스 타선의 핵심 중 한 명인데, 어제는 나왔는데, 오늘은 휴식을 하는 건지 안 나왔지.

걔마저 있었더라면, 진짜 머리가 깨져도 단단히 깨졌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구만.

‘다시 디 고든부터야.’

다시금 타석에는 1번타자 디 고든. 이미 말했듯, 나한테는 가장 쉬운 유형의 타자다.

물론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최소한 구위에 자신이 생긴 뒤로는 딱 좋지.

“스트라이크!”

“볼!”

“아웃!”

첫 타석을 허무하게 날렸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최대한 참으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공을 지켜본 디 고든이었지만, 살살 꼬시는 피칭에 결국 넘어왔다.

몸쪽으로 바짝 붙은 투심에 결국 참지 못하고 스윙을 내질렀지만, 틱-하는 맥없는 소리를 내며 타구가 마운드를 향해 데굴데굴 굴렀다.

‘이제 슬슬 수비력도 올라가는 것 같네.’

그것을 가볍게 낚아 1루로 송구하는 것으로 일단 원아웃.

그렉에게 수비를 배우기는 했었지만, 확실히 실전이 답이야.

막 데뷔했을 때만 하더라도 땅볼을 유도해서 그걸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게 조금 어색했다.

구위가 약해서, 땅볼 자체가 그리 잘 안 나왔으니까. 유도하는 건 너무 위험했고.

하지만 구위가 좋아지면서부터는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쉽게 만들어졌고, 투심으로 종종 직접 만들면서 서서히 반복학습 된 건지, 꽤 좋아졌네.

‘이 정도면 골드글러브···는 아니고, 그래도 어디서 못한다고 욕 안 먹을 정도는 되겠네.’

다시금 가볍게 올린 첫 아웃카운트에 기분 좋게 웃었지만, 계속 만족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올라왔으니까. 고릴라가.

지안카를로 스탠튼. 이게 이름이기는 한데, 무너진 자세로 장타 날리는 거 보고 그냥 고릴라고 부르기로 했다.

X발 그게 어떻게 사람이야?

로랜드 고릴라한테 야구, 아니 방망이질 가르친 거지.

‘진짜 파워 하나는 리그 최고라고 봐도 되겠지.’

저기에 컨택이나 선구안까지 좋았다면, 그냥 심플하게 야구의 신 혹은 청정본즈라고 불렀겠지만, 그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러고 보니 배리 본즈가 작년에 저쪽 팀 타격코치하지 않았었나? 그래서 그런가, 타자새끼들이 참 빡세네.

‘차분하게 가자, 차분하게. 긴장해서 손 삐끗하는 순간 아주 그냥··· 제트기 하나 날라가는 거야.’

최대한 긴장을 다스렸다.

실투가 적은 편이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최대한 억눌러야 했으니까.

처음에는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는데, 지난 타석의 아쉬움 때문인지 스탠튼도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워워, 진정하슈. 컴다운.

왜 그렇게 사람이 진지를 빨고 그래. 연봉도 많이 받을 텐데, 한 경기쯤은 편하게 쉬어도 되잖아?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

바깥쪽 포심에 카운트가 올라갔다. 타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반대로 나는 좀 미묘했다.

이건 좀 빠진 것 같은데 잡아주네. 왜지? 선구안이 별로 좋지 않은 탓에 타자는 그저그런 것 같은데, 괜히 내가 찝찝하네. 진짜냐고?

‘그럴 리가. 사랑합니다.’

줄어든 것도 아니고, 늘어났는데, 찝찝하긴 뭐가 찝찝해. X나게 감사해야지. 충성충성!

퍼펙트 때문인지, 아니면 제구력이 좋다고 소문난 투수라서 어련히 스트라이크겠거니 한 건진 몰라도. 일단은 땡큐다.

사실 일부러 미묘하게 빼서 한 구를 골라본 건데, 카운트까지 잡았네.

‘하나 꽁으로 먹었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천천히.’

컴다운을 중얼거리며 차분하게 공을 던진다. 조급해봤자 좋을 게 없는 타자니까.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저런 종류의 타자에게 자칫 속도를 높여서 마구잡이로 던지다가.

괜히 개싸움 들어가기 시작하면 오히려 식겁하는 건 나다. 그러다 하나 맞으면 바로 골로 가는 거니까.

“볼!”

“볼!”

“파울!”

연이은 볼 두 개.

바깥쪽으로 길어져서 좋아했더니, 좀 짧아졌네. 스트라이크존이 탈부착식이구만.

카운트를 하나 잡으려고 과감하게 던졌는데, 스탠튼이 묵직하게 때려 맞췄다.

‘투심 아니었으면···’

엿 될 뻔했다.

혹시 몰라서 투심으로 던졌기에 망정이지, 포심을 예상하고 나온 빠른 스윙에 파울라인을 넘은 타구가 멀찍하게 날아갔다.

심지어 날 열심히 응원하던 우리 홈팬들마저 입을 꾹 닫았다. 식겁한 건지 새하얗게 질린 사람도 있고. 나도 그런 심정이다.

‘그래도 이제 카운트 몰았으니까. 어떻게든 잡자.’

좀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파울. 이제 투 스트라이크다 .잡을 타이밍이지. 선택지는 미리 정해뒀다.

‘잘 들어가라, 늘 그랬던 것처럼.’

공에 숨결을 불어 넣으며 그립을 잡는다. 타자 역시 준비를 마친 듯 우람한 팔뚝을 부풀렸고.

약간의 대치. 그리고 피칭.

빠르게 동작을 이행하면서도, 마지막 자세까지 확실하게 취한 뒤 공을 흩뿌렸다.

타자 또한 기다렸다는 것처럼 지금까지처럼 무겁게 스윙하며, 기다란 배트를 휘둘렀고.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으로 쭉 꺾여가는 서클 체인지업에 배트가 따라갔지만, 한 끗이 모자랐다.

‘나이스, 나이스.’

이걸로 가장 위험한 놈은 세이프. 스탠튼은 아쉽다는 듯 애먼 배트를 바닥에 두들겼다.

사실 지금까지 성적만 놓고 본다면 쉽게쉽게 막았다. 두 타석 모두 다 내 의도대로 됐고. 어떤 면에서는 쉬운 타자지만, 압도적인 파워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네.

“아아···”

“그걸 왜 쳐 X새끼야!”

안도한 것도 잠시, 3번타자 마르셀 오즈나의 벼락같은 스윙에 장타를 내주며, 오늘 경기의 첫 출루이자, 2루타를 허용하긴 했으나.

4번타자 저스틴 보어에게 범타를 유도하며 4회 초 역시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다.

####

이후로도 고유석의 피칭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중간에 안타를 하나 더 내주긴 했지만,

최소한 최근 경기들 중에서는 가장 기분 좋은 경기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레인저스전에 완봉을 하긴 했지만, 그 경기 역시 초반에 안타를 좀 많이 내주긴 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You-Suck!”

“그래 홈에서도 이렇게 해야지!”

거기다 삼진 또한 6회까지 아홉 개를 올리며 적절하게 쌓았기에, 홈팬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경기였으나.

원정을 가는 대신, 집에서 중계를 시청하는 걸 택한 말린스 팬들은 당연하게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타자들이 좀··· 힘든가?”

“어제 몰아치면 뭐해? 좀 적당히 나눠서 칠 줄도 알아야지.”

지난 경기에서 화끈한 난타전을 보여주더니, 오늘은 내내 막히는 모습만 보여주는 타자들이 못마땅했으니까.

다만 초반에만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렇게 여겼다. 그냥 타격감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잘 따지고 보면 아쉬운 범타도 몇몇 있기는 했었으니까.

허나 그런 상황이 점점 더 계속해서 이어지고, 매 이닝마다 넙죽넙죽 삼진을 올리는 고유석의 모습에 생각은 점점 달라졌다.

“잘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허, 86마일? 아니 구속이 저렇게밖에 안 나오는데, 왜 이렇게 잘해?”

리그는 다르지만, 어차피 같은 나라고, 메이저리그라는 큰 틀이 있는 터라, NL에서도 고유석은 제법 유명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번 시즌, 양대리그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고 있는 투수니까.

새로운 신성에 환호하거나, 자신의 팀을 떠올리며, 욕심을 낸 이들이 많았지만.

몇몇 내셔널리그 근본주의자(?)들은 저 투수를 아메리칸 리그를 향한 시비거리로 삼기도 했다.

“루키가 무실점이라고? 그것도 40이닝도 넘게? 허, 빅리그 망신 다 시키고 있네.”

“AL 별거 없네. Go인지 뭔지 걔 90마일도 못 던진다며? 그런 놈한테 털리는 거 보면··· 알만하다, 알만해.”

“자기네들이 진짜 리그라며 으스대더니, 루키한테 온갖 기록을 다 세워줄 작정인가봐. 한심한 놈들.”

우습지 않은가? 겨우 루키에게, 구속도 더럽게 느린 녀석에게 리그 전체가 털렸다는 게. ‘Junior’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기에 마침 인터리그, 그것도 내셔널리그에서 이름난 강타선을 상대로 맞이한 고유석을 보며 잘 됐다고 여긴 이들도 많았다.

평범한 루키가 아니라, 역대급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아메리칸리그 놈들에게, 내셔널리그의 저력과 누가 진정한 ‘Major’인지 보여줄 기회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체인지업이었는데, 오프스피드에 타자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남은 스트라이크는 하나!

-이미 투아웃인데··· 이것 참, 사람들의 불안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무실점을 기록하네요.

그렇기에 말린스나 에이스의 팬들 외에도, 몇몇 경기를 찾아본 이들이 있었다.

전체 숫자에 비하면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의 기대감을 품고 경기를 지켜봤었지.

말린스 팬 중에서도 몇몇은 내심 옆동네 리그의 초신성을 자신들이 박살내길 기원했고.

그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니 그러길 바랐던 사람들도 들뜬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지만.

허나 티비 속 직접 마주한 ‘Go’는 그런 기대감을 모조리 산산조각 냈고, 혹시나 했던 의심 역시 지워버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 막강한 말린스 타선이··· Go에게 말렸네요.

-전날 대승을 거뒀던 말린스기에 자신감이 있었을 텐데, 오늘은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틀어 막혔습니다.

-반대로 Go는 지난 경기에서 2실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눈길을 받았는데. 그걸 말끔히 씻어내네요.

“쟤 이제 3실점이라고 했던가?”

“어, 레드삭스한테 2점, 그리고 타이거즈한테 1점. 그게 끝이야. 4월은 그냥 깨끗하고.”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4월부터 5월 중순에 접어든 지금까지. 겨우 3자책점 밖에 하지 않은 투수.

심지어 선발투수다, 현재까지의 모든 로테이션을 소화했지. 1선발 에이스로서.

갓 데뷔한 루키 에이스에게 제대로 점수조차 못 내는 아메리칸리그. 그런 루키를 떠받들어주더니, 조금 빈틈을 보이자마자 갑자기 흔들기 시작하는 언론.

그것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던 이들의 머릿속에는 이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3점‘밖에’가 아니라, 3점‘이나’일지도 모르겠다고.

7이닝 3피안타 무실점 무볼넷. 그리고 11K. 풀컨디션의 고유석은 여지없었고, 곧 사람들은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돌풍이 그저 루키의 신선함과 패기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호우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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