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레드삭스와의 4연전은 적당히 위닝 시리즈로 끝났다. 화끈하게 3연승하고 마지막 경기에서 졌네.
‘어째 스윕을 못하네, 스윕을.’
2연전은 죄다 1승1패고.
3연이나 4연전은 2승을 하든 3승을 하든 꼭 한 경기는 진다. 성적만 보면 생각보다 잘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한 가지가 떠오르네. 웰시코기데이라고 하던가?
한국에서 ‘꼴’로 유명한 야구팀이 하나 있는데, 그 팀의 팬인 한 만화가가 그린 웹툰에서 비롯됐다.
죽어도 스윕은 절대로 안 하는, 못하는 모습을 보고 웰시코기랑 3연전 붙어도 한 경기는 넉넉하게 져서, 스윕 못 할 거라는 뜻이지.
우리도 딱 그런 느낌이네.
“폼은 거의 올라오셨죠?”
“네, 뭐, 푹 쉬었으니까요. 저번 경기 이후로. 집에만 콕 틀어박혀서. 스트레칭도 열심히 했고.”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 옆자리에 동승한 대니얼은 꾸준하게 내 컨디션을 물었다.
위밍업 중간중간에도 계속해서 체크했고. 저번 경기에 좀 털리기도 했고, 완봉 이후로 몸 상태가 좀 저조했었잖아?
혹시라도 그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적당히 보통은 되는 것 같은데, 제일 중요한 건 감각이지. 오늘도 저번처럼 제구가 이상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저번 경기는 제구가 문제였다. 피로감 때문에 투구감각이 맛이 간 건지, 미묘하게 어긋났지.
뭐, 그 덕에 새로운 길을 열기도 했고, 일시적인 폼 저하라 큰 걱정이 없었는데, 만약 오늘도 만약 저번 경기처럼 제구가 흔들린다면 그건 상황이 심각해진다.
단순히 폼이 떨어진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그래도, 어제 불펜피칭 할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오늘은 폼이 더 올라왔으니, 저번보다는 괜찮겠지.’
그렇게 믿으며 워밍업을 마치고 불펜으로 입장하자, 투수코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했다.
“Go, 오늘 잠은 푹 잤어? 간만에 낮 경기라고 잠 설친 건 아니지?”
“잘 잤어요. 시간 딱 맞춰서, 9시간 푹~ 잤으니까, 걱정 마슈.”
“다행이네, 음··· 분석팀 자료는 봤어? 상대가 좀 강하기는 한데, 너무 신경쓰지 마. Go 넌 이번 시즌 최고의 투수니까.”
그렇게 말하는 스콧 에머슨은 대단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지난 경기에 2실점이나 하면서, 좀 얻어맞았고, 거기다 어제는 대폭발이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렐이 안 보이네. 클럽하우스에서도 못 봤고.’
오늘 경기 상대는 마이애미 말린스로, 인터리그 매치업이다. 지역 스플릿에 따라, 올해 AL서부는 NL 동부랑 맞붙거든.
그 첫 상대로 말린스가 뽑힌 건데, 비교적 신생팀에 가깝고, 그래서 그런가, 마이애미라는 초거대 마켓이 연고지인데도 그리 인기 팀은 아니다.
구단 사이즈도 스몰마켓에 가깝고. 문제는···
‘하긴, 멘탈이 터질 수밖에 없지. 나도 조심해야겠어. 까딱하고 정신줄 놓으면 개같이 털리겠네.’
타선이 X나게 쎄다.
이게 무슨 스몰마켓이야.
X나게 빅마켓이지.
참고로 오늘은 2연전의 2차전으로. 1차전은 어제저녁에 했는데, 선발로 나간 자렐 코튼이 영혼까지 털렸다.
4.1이닝 6실점으로 강판됐지.
그래서 그런가, 오늘은 경기장에도 안 보이네. 아마 구단에서 푹 쉬라고 한 거겠지.
아무리 선발투수라고 해도, 한 경기 좀 망쳤다고, 루키가 출근도 안 할 수는 없거든.
“Suck, 스티븐한테 얘기는 들었어. 아주 포수가 아니라 때려잡는다며? 불펜에선 살살 좀 던져 줘. 내 나이쯤 되면 뼈가 잘 안 붙거든.”
“엄살은, 공이나 잘 받아줘요.”
어젯밤, 라커룸에서 완전히 넋이 나갔던 자렐 코튼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잡혔을 때, 불펜포수의 목소리가 정신을 깨워줬다.
저번 경기에서 무식하게 던지느라, 스티븐이 조금 고생했었는데, 저기다가 일렀나보네.
엄살을 부리며, 몸까지 떨어대는 불펜포수에 피식 웃은 뒤 자세를 잡았다.
‘먼저 서클부터.’
언제나 시작은 서클 체인지업. 이건 절대로 변하지 않지.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적당히 50%의 힘을 넣으며 천천히 공을 던졌다.
“나이스볼!”
불펜포수의 의례적인 립서비스를 시작선 삼아, 느긋하게 불펜피칭을 이어나가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말린스 타선··· 진짜 좀 빡세긴 하네. 성적도 장난이 아니고.’
가장 큰 고민은 단연 상대 타선이다. 만만찮은 놈들이니까.
디 고든을 시작으로 지안카를로 스탠튼, 크리스티안 옐리치, 마르셀 오즈나, 저스틴 보어, J.T. 리얼무토까지.
말린스 타선은 숨 쉴 곳이 없다.
파워 역시 똑딱이에 가까운 디 고든을 제외하면, 죄다 한방의 저력은 있는 편이고.
특히나 가장 핵심 타자인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경우, 부상없이 무탈하게 풀타임만 치른다면, 50홈런 이상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타자지.
‘그나마 그 외의 세 명도, 이치로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하위타선 치고는 잘 치는 편이지.’
아마 7,8번타자로 나올 놈들 역시 둘 다 OPS가 7할이 넘으니. 그럭저럭 적당한 정도는 된다.
이 정도면 핵타선까진 아니더라도 융단폭격 타선 정도는 되겠네. 그나마 구멍이 있다면 스즈키 이치로인데.
‘이 양반은 잘하면 그게 이상하지.’
리빙 레전드이자, 명예의 전당이 확정적인 아시아 역대 최고의 타자이긴 하지만. 나이가 몇 살인데··· 73년생이면 우리 아빠랑 엇비슷하네.
일본에서 9년, 미국에서 올해로 17년차 커리어를 보내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좀 못 친다고 해서 그걸 구멍이라고 말하면, 그게 나쁜 놈이지.
‘어쨌든 타선 빡센 걸로 따지면, 최소한 올해 만난 팀들 중에서는 최고야.’
순수하게 내 성적과 상관없이, 지금까지 상대한 팀 중 가장 강한 팀은 애스트로스다. 그날 내가 미친 덕분에 잘 때려잡긴 했지만, 타자들 하나하나가 상당히 강력하지.
허나 오늘 말린스는 적어도 내가 생각했을 때는 그보다 조금 더 빡세다. 그래서 쫄리냐고?
“나이스 볼! 오늘은 진짜 좀 좋나 보네. 고놈 참, 포수 잘 때려잡겠어.”
“때려잡긴 뭘 때려잡아요. 타자라면 모를까.”
난 원래 겁이라는 게 없는 놈이야.
탈부착식인 건지 가끔씩 생길 때가 있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제구도 돌아왔네. 역시 쉬는 게 답이구만.’
휴식도 훈련의 일종이다.
아주 유명한 격언이지.
어디서나 통용되는 만사형통의 말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정답이구만.
레드삭스전 이후, 몸을 올리는 것에만 집중해서, 차 뽑은 이후 종종 했던 드라이브마저 거르고, 닥치고 쉬었는데, 그런 보람이 있구만.
‘어디, 오늘도 타자들 열심히 때려잡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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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경기는 언제나 좋다.
내가 어디서 주눅 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익숙한 곳이 낫잖아?
“Suck! 오늘은 다 조져버려!”
“NL 새끼들한테 진짜 야구가 뭔지 보여줘!”
“저번에는 너무 짧았어, 저번보다 딱 한 이닝만 더 던져. 삼진도 10개 잡고. 알지?”
이거 봐. 얼마나 좋아?
아주 부담을 팍팍 주잖아
동부의 끝과 서부의 끝에 있는 팀끼리 만나서 그런가, 경기장에는 조금의 원정팬도 없었다.
죄다 녹색 위주의 에이스 유니폼이 펄럭거렸을 뿐. 시즌 초반과 비교하면 관중이 오히려 좀 늘어난 것 같네.
‘하긴 최근 성적이 좋으니까.’
결국 뭐든지 간에, 성적 좋으면 되는 거지. 뭐, 내 등판 경기라는 프리미엄이 있기도 하고. 내가 좀 슈퍼스타잖아?
오클랜드에 한해서는.
그 인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부족했던 저번 경기 때문인지, 관중들의 얼굴에는 평소보다도 기대감이 조금 더 진했다.
‘진짜 야구를 보여주라니. 따지고 보면 NL이 정통이지 않나?’
아마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한 삼일밤낮은 인터넷이 시끄러워지겠지. 꽤나 민감한 주제니까.
아무튼 그런 기대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서서히 마운드로 향했다.
“Suck, 음··· 컨디션은 좋아 보이네. 혹시 오늘도 레드삭스 때처럼 할 건 아니지?”
오늘 포수는 조시 페글리다.
슬쩍 다가와 맞이하는데, 얼굴에 왠지 모를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약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스티븐은 대체 뭔 소리를 하고 다닌 거야.’
불펜에서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만나는 포수마다 죄다 저 소리네.
저번 경기 때 많이 힘들긴 했나보다. 여기저기 다 떠벌리고 다닌 걸 보면.
‘오늘 만약에 그랬다가는··· X되겠지.’
“그냥 평소처럼 갈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쫄지 마요.”
“어? 쫄기는 무슨··· 다행이네. 아무튼 오늘도 잘해보자.”
직설적인 말에 민망한 듯 코를 씰룩거린 조시 페글리는 가볍게 하이파이브한 뒤 홈 플레이트로 내려갔다.
저번 경기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했는데, 오늘 경기에서는 그 깨달음을 적용하면 안 된다.
말했잖아, 말린스 타선 X같다고. 어느 정도 쉬어가는 놈들이 있어야 그렇게 던지는 거지.
만약 저런 타선을 상대로 무지성 노제구로 던졌다간 3회도 안 지나서 5점쯤 내줄 걸?
물론 정확한 건 한 타순 정도 간을 봐야 하겠지만, 제구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그래도 한 5회부터는 빡세게 가야지. 인터벌이랑 같이 쓰면 효과가 더 클 테니까.’
그래도 조심스럽게 경기 후반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일단 거기까지 무탈하게 가는 게 중요하다.
천천히 마운드의 감각을 발끝으로 끌어 올리며, 차분하게 공을 던졌고, 다행히 불펜과 마찬가지로 제구는 정확하게 들어갔다.
바로 저번 경기에 제구가 흔들려서 그런가, 괜히 더 좋게 느껴지네, 그래, 이렇게 잘 들어가는 놈이 말이야.
“플레이볼!”
마지막 마운드 연습피칭까지 마친 뒤, 첫 타자가 등장했고, 주심의 우렁찬 경기시작 선언도 울렸다.
‘디 고든.’
타석으로 입장하는 조금 얄쌍한 타자. 얼핏보면 야구선수가 아니라, 육상선수 같네.
이름은 디바리스 스트레인지-고든으로, 좌타자다.
이름이 길어서 그런가, 보통 디 고든으로 지칭되는데.
얄쌍한 체격만 봐도 알 수 있듯, 전형적인 똑딱이다. 아버지도 메이저리그 선수라고 하는데, 원래는 농구를 했었다고 하더라고.
농구 특유의 폭발적인 속도감을 그라운드에서도 잘 보여주며, 도루를 상당히 잘하지.
타율도 그럭저럭 좋고.
‘전형적인 리드오프 스타일. 하지만 선구안은 별로 좋진 않지.’
이건 어쩔 수 없다.
쭉 농구만 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갑작스럽게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기본기가 떨어질 수밖에.
특히 선구안이라는 건 타고난 동체시력도 좋아야 하지만, 경험도 굉장히 중요하거든.
많이 본 만큼, 알 수 있으니까.
‘파워도 부족하고, 선구안도 그리 좋지는 않은 타자.’
상위타선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사랑스럽네. 아주 좋아 죽겠어.
가볍게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긴장을 놓지는 않았다. 나랑 상성이 잘 맞는 것과는 별개로,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타자니까.
‘빠르게 갑시다.’
땅볼유도는 안 된다.
발이 워낙 빨라서, 자칫 잘못하면 내야안타를 내줄 테니까. 그러니 삼진 위주로 잡아야지.
혹시라도 출루시키면 빠른 발 때문에 도루도 짜증나거니와, 뒤에 놈들이 죄다 파워가 좋아서, 희생 플라이도 넉넉하게 들어올 거다.
그러니 무조건 삼진, 삼진으로 잡아야지. 레드삭스 때처럼 제구가 조금 불안정했다면 쉽지 않았겠지만···
“파울!”
다행히 오늘은 괜찮다.
몸쪽 포심 패스트볼.
항상 거의 1구는 여기지.
상대 타자도 알았던 건지, 곧장 배트를 냈지만, 어림도 없지!
힘 싸움을 압도하며, 타자의 스윙을 밀어낸 공은 홈플레이트 뒤로 총알처럼 날아갔다.
저러면 손 진짜 아픈데.
나도 고등학생 때는 종종 타자로 나가서 잘 안다. 저러면 진짜 더럽게 아프다. 손이 찡~하고 울린다고 해야하나?
예상처럼 타석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기분 좋게 건치를 드러냈던 디 고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케이, 바로바로 가자.’
일단 기싸움은 가볍게 눌렀고. 타자도 아픈 것 같으니, 굳이 여유를 줄 필요는 없지.
“스트라이크!”
다시금 포심 하나.
허나 이번에는 바깥쪽이다.
나갔다고 생각한 건지, 이번엔 또 스윙을 참았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콜을 잡아줬다.
‘오늘 존은 대충 이 정돈가?’
그럭저럭 평범하네.
이참에 아래쪽도 살펴보자.
낮게 서클 하나. 낙차가 있는 V1으로. 가볍게 휙 날 려보내 서클 체인지업이 역회전과 낙차를 보이며 뚝 떨어졌다.
일부러 살짝 걸치도록 던져봤는데, 타자는 이번에도 참았다.
“볼.”
결과는 볼. 아래쪽은 좀 짧네.
타자의 신장이 180이니까, 빅리그 기준으로 살짝 작거나 평균 정도이기는 한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짧다.
‘그래도 이걸 거르네.’
생각보다 선구안이 좋은 걸까? 눈치를 봐서는 골라낸 것 같지는 않다. 뭐, 볼 하나를 주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투 스트라이크. 파워가 약한 타자. 그럼 이게 직빵이지.’
다시 높게 하나.
어쩌다보니 상하좌우 다 던졌네. 하지만 이번에는 존을 체크하지 못할 거다. 왜냐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이 나올 테니까.
하이 패스트볼, 이번 타석에만 세 차례나 봤기에 그런지, 패스트볼 타이밍을 읽은 타자가 배트를 냈지만, 스윙은 크게 벗어났다.
‘잡을 놈은 잡았고, 이제부터가 문젠데.’
자, 이제 어떡하지?
제일 X같은 타입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디 고든을 뒤이어 올라오는 타자.
‘스탠튼.’
그의 타격은 하나로 설명 가능하다. ‘압도적인 똥파워’ 프로필상 키가 나랑 똑같은 거로 아는데, 무게는 더 나간다.
근데 죄다 근육이지. 직접 보니 유니폼으로 가려졌는데도 단단하네. 저거 야구 선수 맞아? 미식축구 해도 되겠는데?
‘그런 근육을 감안해도 좀 괴랄하지, 파워 자체가.’
그런 몸으로 뿜어내는 압도적인 파워로 매년 못해도 25홈런 이상, 평균적으로 30홈런 이상 날리는 거포.
설명한 것 치고는 홈런 갯수가 부족하지 않냐고? 놀랍게도 풀타임이 아니다. 못해도 15경기, 많으면 40경기 이상 못 나오고도 이 정도 홈런을 깠다는 거지.
만약 풀타임을 무탈하게 치른다는 가정하에 못해도 50홈런, 잘하면 60홈런도 가능하다는 평가가 주류지.
‘플라이볼 혁명이랑은 정 반대의 스타일이고 말이야.’
그 똥파워는 홈런의 각도에서도 드러난다. 대부분의 홈런이 어퍼 스윙으로 퍼올려서 만든 게 아니라, 미사일처럼 쭉 뻗으며 관중석이나 전광판을 직격하는 라인드라이브니까.
‘거기다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고. 그것까지 감안하면···’
타석을 가득 채운 거구와 눈을 맞추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든 직격타는 막아야지. 무조건 넘어갈 테니까.’
파워가 심각하게 미친 타자이기는 한데, 다행히 약점은 있다.
‘볼삼비가 심각하지. 올해는 그나마 나아보이기는 하지만.’
볼삼비가 나쁘다.
나랑은 정 반대지.
거포답게 삼진을 많이 먹는 건 당연하긴 한데, 볼넷도 그만큼 못 얻어낸다.
‘그리고 컨택도 좋지는 않고. 아니, 까놓고 말해서 나쁘지.’
그러니 아예 못 잡을 타자는 아니다. 맞으면 장타라는 게 X나게 쫄리기는 해도 말이야.
겁 없다고 하지 않았냐고?
이건 겁이 아니다. 그냥··· 상대를 향한 객관적인 평가 정도?
‘최대한 흔들자. 혹시라도 타이밍 잡거나, 타격감 올라오면 진짜 X되니까.’
그런 생각을 가득 담아 선택한 초구.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공을 쏘아보냈다.
“스트라이크!”
일단 스트라이크 하나.
제구가 잘 들어갔네.
바깥쪽으로 낮게, 꽉 차게 들어간 투심을 스탠튼은 얌전히 지켜봤다.
‘그리고 서클 하나.’
우타자니까, 이게 직빵이지.
이번에는 V2. 몸쪽으로 들어올 듯하다가 급격하게 꺾이는 체인지업에 배트가 크게 요동쳤다.
“스트라이크!”
헛스윙, 이제 투 스트라이크.
일단 여기까진 베스트다.
이제 남은 건 끝마무리뿐.
‘제발 얌전히 있다가 가라.’
그렇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면서 3구를 던졌고, 손에서 쥐어진 그립은-
‘오케이, 됐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패스트볼을 예상했던 걸까?
느릿하게 날아오는 공, 앞선 서클과도 약간은 다른 공에 스탠튼의 몸이 얼어붙었다.
자세가 거의 무너지다시피하펴 비틀거렸고, 그 모습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지만.
“응?‘
망가지면서도 억지로 툭 때려 맞춘 타구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레이저처럼 쭈욱 날아갔다.
거의 넘어진 거나 다름없는 자세인데, 저게 대체 뭐야···
“아웃!”
다행히 각도가 낮았고, 또 수비 시프트 자체가 뒤로 물러나 있었기에 좌익수 채드 파인더 안으로 쑥 들어갔지만.
심장이 철렁거렸다.
‘X발 사람 맞아? 진짜 무슨 고릴라도 아니고···’
자세가 무너졌는데, 라인드라이브가 왜 나와, 미친놈아.
분명 의도대로 제대로 타이밍을 흔들면서, 잡기는 했는데, 왠지 모르게 뒷덜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빅리그 최고의 똥파워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괴랄한 것 같네.
‘더 주의하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넘어간다는 생각으로 가야돼. 마이너 때처럼.’
본의 아니게 날 초심으로 되돌려줬어. 그래, 마이너 때는 항상 이런 마음가짐이었지.
실제로 그랬으니까.
최소한 오늘 스탠튼을 상대로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투아웃.’
시작은 좋네. 저번 경기보단 훨씬 나아. 마지막으로 3번타자, 마르셀 오즈나.
원래는 중견수였는데, 올해부터 좌익수로 뛰기 시작하더니, 시즌 초반 기세가 날카로운 타자다.
특히 플라이볼 생산 위주의 타격으로 장타를 잘 만드는 편이고.
‘많이 위험하지. 이쪽도. 스탠튼 만큼은 아니지만.’
파워는 스탠튼보다 훨씬 못하겠지만, 여기도 쉽지는 않다.
기본적인 파워야 준수하고, 특히 올해는 컨택 능력도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까.
‘최대한 장타만 막는다는 방향으로.’
욕심을 내려놓고서, 최대한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승부에 임했다.
‘제구도 좋고, 존도 거의 잡았으니, 제구 싸움으로 가자.’
손안에서 한 차례 공을 굴린 뒤, 그립을 잡는다.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낮게. 포심.
한 번 참아볼 것 같았는데, 역시나 타자는 공을 골랐다.
앞에 두 명 나가리 됐으니, 신중하게 가보겠다는 거겠지.
“볼!”
“스트라이크!”
“볼!”
“파울!”
투 앤 투. 그리고 파울 하나.
확실히 기세가 좋은 타자답게 쉽게 넘어가질 않네.
‘그래도 카운트도 잡았고, 타이밍도 됐으니까, 쫄지는 말자.’
한 구 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말린스를 상대로는 빠지는 승부를 하면 안 된다.
타선 자체가 심하게 빵빵해서, 어디가 터질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주자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지.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 유유히 들어가는 공.
분명 나간 코스였지만, 쭈우욱 꺾인 슬라이더가 보더라인에 걸쳤다. 그것으로 루킹삼진.
타자는 내가 한 구를 뺄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멍청한 눈빛으로 들어온 공을 바라봤고,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You-Suck!”
“You-Suck!”
“이게 AL이다!”
그러자 울리는 유석 소리.
오늘도 여전하구만.
지난 경기와 달리 첫 이닝을 무사히 넘긴 것에 만족스러운 듯 홈팬들은 가벼운 박수로 피칭을 치하했다.
‘그래도 좀 까다롭긴 하지만, 느낌이 나쁘지는 않네.’
그렇게 끝난 1회 초.
아직 경기는 한참이나 남았지만, 마운드를 내려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가슴 속의 자신감도 조금 더 뚜렷해졌고. 좋아, 오늘은 잘 조져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