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른 타이밍의 실점은 오히려 도움이 됐다.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고, 판단도 빨라졌으니까.
‘오늘은 샌드백이겠네.’
먼저 대충 오늘 내 역할이 예상됐다. 아마 샌드백일 거다. 애초에 야구에서 투수는 샌드백 비슷한 역할이기는 한데, 오늘은 딱 그에 걸맞겠지.
언제나 잘 던질 수는 없으니까. 풀타임 시즌을 기준으로 선발투수는 1년에 32경기, 로테이션에 따라 33경기를 소화하는데, 그 모든 경기를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그러니 결국 얻어맞는 날도 있어야 하는 건데,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기왕이면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맞아도, 효율적으로 맞아야지. 적당히 납득이 가는 방향으로.’
같은 10대를 맞더라도, 뼈가 아니라, 살이 두툼한 엉덩이로 맞는 쪽이 더 나은 것처럼 말이야.
“Suck, 좀 어때?”
이젠 우리 공격이 시작된 그라운드를 지켜보며 입맛을 다셨을 때, 스티븐 보그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질문이 조금 우스운 게, 나를 제외하면, 콜리시엄 안에서 내 상태가 어떤지는 이 양반이 제일 잘 알 거다.
내 공을 몇 번이나 받아봤는데, 평소와 다르다는 거야, 대충 봐도 알 수 있지.
그러니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 건데, 거참 감사하기도 하네.
‘첫인상은 둘 다 안 좋았는데 말이야.’
첫 시작이 기싸움이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구만.
어쨌든 고맙기는 한데, 위로는 괜찮았다. 뭐, 겨우 1점 내준 거 가지고, 위로씩이나.
“뭐, 안 좋죠.”
“음, 그럼 오늘은 좀 빡빡하게 가는 건 어때? 유인구 위주로, 바깥쪽으로 제구해서.”
대놓고 안 좋다고 표현하니, 조금 입맛을 다신 스티븐은 슬그머니 제안했다.
날 이미 포기한 상태라서, 웬만하면 피칭은 터치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좀 다르니까.
사실 이게 정석이다.
몸 안 좋은 날은 이렇게 대처하는 거지. 최대한 꾸역꾸역 틀어막는 방향으로.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문제는 내 제구력이다.
피로 때문인지, 공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자꾸 묘하게 어긋나더라고. 몰리기도 하고.
그렇기에 평소라면 아슬아슬하게 바깥쪽 보더라인 공략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오늘은 좀 애매했다.
아마 볼넷이 제법 나오겠지.
그렇다고 제구에 집중했다가는 오히려 위력이 떨어질 거고.
‘만약 제구 삐끗해서 주자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도 골 때리지.’
그렇기에 판단을 비틀었다.
정석을 존중하되 살짝 꺾자.
“일단 먼저 확인 작업부터 합시다.”
“응?”
뜬금없는 말에 스티븐은 눈썹을 실룩거렸다. 그건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는 것처럼.
그런 게 있어, 이 양반아.
“스티븐, 최대한 타자들 체크해줘요. 누구 컨디션이 어때 보이는지, 타격감은 괜찮은 것 같은지, 자신감도 어느 정도인지. 스윙에 확신이 있는지. 옆에서 보면 대충 보이죠?”
“···허, 말도 안 듣더니, 이젠 막 부려먹기까지 하네. 뭐, 그거야 당연히 포수가 해야 할 일이니까. 최대한 파악해보지.”
내 부탁에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내가 왜 이런 놈을 걱정했던 거지? 하는 표정으로. 거참 너무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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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보면 투수가 참 외로운 직업이야. 늘 혼자 1대9의 싸움을 해야 하잖아. 무슨 전설적인 일진도 아니고.
야수라는 이름의 뒤를 받쳐줄 좋은 친구가 있기는 한데. 결국 마운드의 위에서 타자들과 싸우는 건 투수 혼자다.
이 얼마나 외로운 직업인가?
이를테면 마운드 위의 외로운 늑대··· 그만하자. 너무 갔네. 어우 요새 팔자가 펴서 그런가 별 개잡생각을 다하네.
‘아무튼 그러니까 최대한 줄여야지. 아홉 명은 너무 많잖아? 특히나 오늘처럼 컨디션도 안 좋은 날은.’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그렉이 했던 조언의 의미를.
타자를 분류하고, 상대하라.
그래야 길게 버틸 수 있다.
그래 뭔소린지 알겠어.
지금까지는 그냥저냥 약한 놈한테 적절하게 체력을 아끼고, 심력 소모를 줄이라는 뜻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오한 말이었구만. 다른 해석도 가능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차근차근 타자들을 좁혔다.
6번타자 크리스 영.
그리 인상적인 성적은 아니다. 특히 좌익수라는 포지션을 감안하면, 좀 부족하지.
코너라인의 경우 수비부담이 적은 만큼, 웬만큼 타격을 해야 인정받으니까.
뭐, 그래도 2006년부터 지금까지, 빅리그에서 오랜 커리어를 보낸 베테랑인데다가, 올스타도 한번 나갔던 선수니 무시할 순 없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이 양반은 아웃.
슬쩍 스티븐을 쳐다보니, 그도 같은 생각인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운드에서 봐도 완전히 자세가 무너졌으니까.
내 서클이 쩔긴 하지만, 그래도 스윙이 망가질 정도면 타자의 상태도 좋지는 않다는 뜻이지.
그러니 이 양반은 패스.
그 다음 7번타자 재키 브래들리 Jr. 작년에 좋은 성적을 거뒀던 중견수다.
수비력이 뛰어나고, 타격으로도 8할 초중반대의 OPS와 26개의 홈런을 날렸던가?
작년 WAR이 5.3으로 기억하는데. 올스타급이지, 올스타급. 하지만 최근에는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OPS도 6할에 불과하고.
타율은 아슬아슬하게 2할 턱걸이네. 보통이라면 그냥 가뿐하게 조졌겠지만, 오늘은 첫 타석 정도는 철저하게 검증을 해봐야지.
“볼!”
역시 살짝 나갔다.
바깥쪽으로 넣어 봤는데.
쓰읍, 이걸 안 잡아주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구가 흔들리니까, 때마침 존도 야박하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고.
그래도 느낌이 나쁘진 않다.
타자가 애초에 선구 자체를 거의 못 한 것 같으니까. 원래 선구안이 좋은 걸로 아는데.
‘그러고 보니, 4월에 부상으로 경기를 날렸다고 했지?’
부상 이후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니, 그것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진 것 같다.
부디 재도약의 트리거가 내가 아니길 바라면서, 2구를 던졌고, 이번에는 그럭저럭 기분 좋게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조금 더 안쪽으로 넣어봤는데, 이번에도 참는 타자. 참은 건가? 아니면 타이밍을 놓친 건가?
“아웃!”
타이밍을 놓친 거군.
빗맞은 타구가 그라운드를 때렸다. 바운드가 걸려서 톡 튀어 오른 공을 마커스 시미언이 가볍게 잡아서 1루 송구, 그리고 아웃.
‘그래도 완전히 빠진 코스였는데, 억지로 때린 걸 보면, 완전히 손맛이 떨어진 건 아니네.’
다만 성적을 복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조금 무리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단은 보류다.
타격감이 아예 죽지는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면, 하위타선에서 까다로운 타자가 될 테니까.
‘이쪽은 확실하게 조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포수다, 90년생이면, 브루스 맥스웰이랑 동갑인데, 커리어는 그보다 훨씬 알차다.
14년부터 백업포수로 시작해서 꾸준하게 나온 선수니까. 다만 작년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그렇고, 타격은 거의 팀에 민폐 수준인데.
‘올해는··· 나쁘진 않네. 아니, 솔직히 좋지. 이 정도면.’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수비부담이 극심한 터라, 체력안배를 위해 하위타선에 있지만, 현재까지의 성적은 인상적이다.
OPS 8할에 타율은 3할 3푼. 장타율은 4할5푼으로, 포수라는 포지션을 감안하면, 지금은 거의 A급 활약을 하고 있다.
다만 홈런은 하나도 없고.
포지션 특성상 경기수가 적어서 타석 자체가 적기에 비율스탯이 높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준수한 스탯이다.
다만 출루율이 3할 6푼으로, 타율과 3푼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즉 배드볼 히터거나, 선구안이 아주 개똥망이거나.
‘어느 쪽이든 그래도 컨택을 잘한다는 거지. 8번이라··· 좀 까다롭긴 하겠네.’
얘도 얘지만, 타순이 절묘하다. 9번이야 그렇다 치고, 1,2번으로 이어지니, 얘가 나가면 좀 까다롭겠지.
부디 오늘은 그 괜찮은 타격감이 발휘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주 시원스러운 스윙.
크리스티안 바스케스는 몸쪽 코스를 노리고 스윙했다. 박자를 봐서는 패스트볼을 생각한 것 같고.
종종 기세를 잡기 위해 몸쪽 포심을 던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예측한 거겠지.
허나 초구는 체인지업이다.
낙차가 있는 서클 V1.
배트는 날쌘 바람소리만 남긴 채 크게 헛돌았다.
‘대충 느낌은 오는데···’
꼴사나운 헛스윙이지만, 재차 타격을 준비하는 바스케스의 얼굴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저 자신감 있게 타격폼을 잡았다. 최근 기세가 좋으니, 그만큼 멘탈도 안정적일 수밖에. 거기다 포지션도 포수니까.
“볼!”
“볼!”
“파울!”
생각보다 선구안도 나쁘지는 않다. 좋은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확실하게 나간다 싶으면 골라내기는 하네.
이제 투 앤 투.
뭔가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5구를 던졌고, 다시금 날쌔게 배트가 나왔다.
좌중간을 가르는 깔끔한 안타. 타자는 넉넉하게 1루로 들어갔고, 그것을 본 몇몇 관중은 이번 이닝은 삼자범퇴를 기대했던 건지,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패스트볼이었네.’
안타를 내주긴 했지만.
최소한 정보는 얻어냈다.
‘게스 히팅이네.’
타격감이 좋다 싶더라니.
잘 찍네, 잘 찍어.
행운이 돕는 게스 히팅과 준수한 성적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합쳐지면 좀 까다롭다.
어차피 하나 찍어놓고 타격하는 거라서, 타이밍도 잘 안 흔들리고, 멘탈은 끄떡도 없거든.
‘그럼 얘까지 세 명.’
마지막으로 9번타자 데빈 마레로.
내야 유틸리티 백업인데, 오늘은 선발출장 했구만.
작년에도 13경기밖에 안 뛰었고, 올해도 얼마 나오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올해 성적은 안 좋긴 해도, 표본 자체가 적어서 상관없고,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분석팀의 자료에는 마이너 성적까지 있던데.
‘마이너에서도 별로 좋진 않았지. 타격 쪽으로는. 더블A에서 한번 넘긴 걸 제외하면, OPS가 8할이 넘은 시즌이 없어.’
내야유틸. 딱 그거 하나만 보고, 로스터에 들어간 건데. 누누이 말하지만 수비력이야 나랑 관계없는 이야기고.
“스트라이크!”
타격이 별로 안 좋은 거. 그거면 충분히 감사하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한숨을 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의 역할은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쪽은 아예 체념이구만.
“You-Suck!”
“You-Suck!”
그래도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너 X나 못한다고 소리치는 홈팬들의 말은 좀 거슬리긴 한 것 같네. 얼굴이 일그러지는 거 보면.
사실 우리 팬 여러분들께서 조금 더 요란하게 소리치는 감이 없잖아 있다.
1회에 실점을 마치 잊어버리겠다는 것처럼 더욱더 우렁차게 소리쳤으니까. 괜히 뭉클하네.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주지 그래?”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 슬쩍 다가온 스티븐이 그렇게 말했고, 이번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살짝 손짓하자, 팬들은 잘하고 있다는 것처럼 박수를 쳐줬다.
‘이미지 조지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최소한 여기는 끄떡도 없네.’
솔직히 좀 짜증났었다.
완봉하자마자 털리면, 완봉의 여운이 싹 가실 테니까. 또 이때다 싶어 물어뜯을 거고.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오클랜드는 이젠 확실히 내 텃밭이 된 것 같네.
우리 사랑스런 집토끼들을 위해서 열심히 해야지.
‘간도 충분히 봤으니까.’
덕아웃으로 들어가며, 스티븐에게 부탁했던 것을 물었다.
“홈 플레이트에서 봤을 때는 어땠어요? 타자들 느낌이.”
“너랑 비슷할 거야. 바스케스는 까다롭고, 주니어는 애매하고, 나머진 별로.”
음, 역시 나랑 비슷한 감상이구만. 그래도 포수도 같은 의견을 낼 정도면 어느 정도는 정확도가 더 올라가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분류도 마쳤으니, 차분하게 가보자고.’
생각을 마친 뒤.
나는 다시 스티븐을 봤다.
할 말이 있었으니까.
“스티븐.”
“어, 왜?”
“제구는 버립시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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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은 말했었다.
타자들을 분류하라고.
못난 놈들, 잘난 놈들로.
그리고 잘난 놈들에게 집중하고, 못난 놈들은 적당히 편하게 잡으라고. 그래야 오래 간다고.
세세한 내용은 좀 다르겠지만, 아무튼 저런 뉘앙스였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를 보탰지. 잘난 놈들한테 맞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털어내라고 말이야.
‘오늘은 그걸 반대로 꼬아야지.’
투수가 상대해야 하는 타자는 아홉. 나는 오늘 그걸 여섯으로 줄였다.
“Let’s Go! Sox!”
“Let’s Go! Sucks!”
관중석에선 경쟁이 활발했다.
삭스랑 썩스. 참 오묘하구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응원소리가 그라운드를 때렸고, 좀 거슬리긴한데, 나쁘진 않았다.
“아웃!”
약빨은 우리가 더 큰 것 같다. 3회 초 무키 베츠는 아쉬운 범타로 물러났고.
“베이스 온 볼!”
더스틴 페드로이아가 볼넷을 골라내고 걸어 나가긴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나머지를 막으면 되지.
‘어차피 홈런까진 안 나와. 이렇게 던진다고 해도. 구위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콜리시엄이 이래서 좋지.
내 구위가 적당히 멀쩡하기만 하면, 그 멀쩡함의 기준이 리그 상위권이긴 한데, 아무튼 그 정도만 유지하면 홈런은 쉽게 안 나온다.
설사 강력한 거포라고 해도.
오늘 피칭은 그것에 기반을 뒀다. 스티븐이 권유했던 정석적인 방법과 그렉의 조언을 적절하게 섞어서.
‘무키 베츠, 페드로이아, 바스케스는 버린다.’
말했잖아, 오늘 내가 상대하는 타자는 딱 여섯 명이라고.
한 타순을 돌면서, 타자들을 시험했고, 그것을 토대로 분류했다.
오늘의 잘난 놈은 저 셋인데.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 내가 기를 써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던진다쳐도, 이 세명에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가?
‘아니, 물론 더 나은 결과는 만들어지겠지만, 그게 만족스럽지는 않겠지. 내 컨디션도 별로인데, 이 셋은 타격감이 좋으니. 안타도 잘 나올 거고.’
그럼 반대로 물었다.
잘나지 못한 여섯 명은 조질 수 있나? 그 대답은 YES.
“맞을 만한 놈한테만 맞고. 잡을 놈은 확실하게 잡는다.”
그게 오늘의 목표였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맞아, 당연한 말이지. 그러니 행동으로도 이어져야 의미가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확실하게 잡아야 할 놈인 핸리 라미레즈에게 공을 뿌렸다.
“스트라이크!”
깔끔한 몸쪽 포심.
최대한의 힘을 담아 전력으로 뿌린 공은 저조한 몸상태에도 89마일을 찍었다.
지난 타석에서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성실하게 던지긴 했지만, 느낌이 확 다르겠지. 혼신의 힘을 다한 전력투구니까.
‘제구는 그 세 명에게만. 적당히 홈런만 안 나올 정도로 집중해서.’
그 외의 나머지는···
“스트라이크!”
전력으로 조진다.
그게 오늘의 방법이었다.
평소와는 정반대다. 원래는 위험한 타자들을 위주로 전력투구를 뿌렸으니까.
‘그거야 그렇게 해서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고.’
오늘은 전력을 다하더라도 완전히 억제하기는 힘들 거라는 판단이 섰다.
매 타석 처맞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위험성은 대단히 높지.
그러니까, 차라리 위험한 놈들은 적당히 홈런만 억제하는 방향으로 막고, 잡을 놈들을 잘 잡는 게 나아.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기에 세부적인 승부의 방식도 조금 달리했다. 언급한 세 명은 앞서 말한 대로 적당히 홈런만 억제하는 방향으로 갔다.
스티븐이 권유한 것처럼 바깥쪽 위주로 로케이션을 잡으며, 적당히 까다롭게. 볼넷 정도는 그냥 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 외의 나머지 타자들에겐 제구를 버리고, 그 한줌의 집중마저 오로지 공에 담았다. 절대로 장타는 만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끊어야지. 절대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때릴 놈은 때려라.
샌드백처럼 맞아줄 테니까.
대신 나머지는 각오하고.
그게 오늘의 마음가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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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터를 한 다음 경기는 망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그때의 흥분감과 여운, 다르게 말하면 피로가 투수의 몸에 짙게 남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이 크니까.’
쉽게 말해서 퍼펙트라는 행복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에, 정신은 High한데, 반대로 몸은 저조해서, 얻어맞는 거지.
어떻게 보면 오늘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스티븐 보그튼 생각했다. 1회에 한 점을 내줬고, 5회에 다시금 한 점을 빼앗겼다.
5이닝 2자책점.
피안타는 다섯. 볼넷은 하나.
평범한 투수라면 그럭저럭 준수한 성적이겠지만, 저 녀석에겐 아니다.
단연 이번 시즌 최악의 경기라고 봐도 무방하지. 사실 그래봤자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물어 뜯겼을 거다. 호시탐탐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놈들에게.
폼이 떨어졌다느니, 루키가 무리한 것 때문이라느니, 아니면 거품이 꺼졌다느니.
아주 별 소리가 다 나왔겠지.
그런데···
‘오늘은 아니겠네.’
6회 초.
선두타자는, 4번타자 핸리 라미레스.
초구가 날아왔다.
상념을 집어치운 스티븐 보그트는 긴장한 표정으로 공을 기다렸고, 곧이어 가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간결하게 낚아챘다.
“스트라이크!”
묵직한 무게감. 우렁찬 콜.
공을 받은 스티븐 보그트는 애써 입을 꾸욱 닫았다. 헛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으니까.
‘미치겠네, 진짜.’
슬쩍 타자를 올려보니, 조금 억울한 표정이다.
“헤이, 스티비. 좀 살살해. 공에 맞아 죽겠네. 왜 나한테만 악에 받쳐서 던지는 건데?”
아니, 진짜로 억울한 것 같다.
약간 화가 난 것도 같고.
너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셋을 제외한 모든 놈들에게 다 그런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대꾸할 여유는 없었다.
“스트라이크!”
이거 받는 게 얼마나 힘든데.
자칫 입 놀리다 집중이 깨지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쯧.’
악몽이 시작되겠지.
시범경기 때 느꼈던 얼얼한 손맛이 떠오른 스티븐 보그트는 고개를 다시금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꾸욱 눌렀다.
갓 데뷔한 루키의 공에, 자신 같은 베테랑 포수가 트라우마가 생기다니. 약간 쪽팔리면서도-
“스트라이크 아웃!”
날아오는 공을 보면 다시금 긴장을 바짝 부여잡게 된다.
왜냐고? 자칫 잘못 잡았다가는, 그때 느꼈던 고통을 싹 잊을 만한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길 테니까.
‘이런 느낌인가? Suck이 컨트롤을 포기하면.’
Go You-Suck.
애슬레틱스 내에서는 Suck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밈처럼 자리했지만, 실력은 확실한 놈이다.
성적을 보면, 감히 뭐라 얘기할 수가 없지. 팀 내 최고이자, 리그 최고의 투수니까.
그런 최고의 루키의 장점을 꼽는다면, 아마 말이 다 다를 거다. 누군가는 이 괴이한 무게감, 패스트볼의 무브먼트를 이야기할 거고.
또 누구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서클 체인지업을 칭송하며, 소리를 높이겠지.
허나 저 녀석의 공을 받아 본 포수들, 자신과 페글리, 그리고 젊은 맥스웰은 세 명 다 하나를 꼽았다.
‘컨트롤. 커맨드. 로케이션. 이게 진짜지.’
압도적인 제구력.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리그 탑이지 않을까?
오늘 경기에 나온 것과 고의사구까지 포함해도, 겨우 다섯 개밖에 안 되는 사사구가 그걸 증명해주지.
그래서 안정감도 뛰어나다.
정확한 위치에 글러브만 가져다 대고 있으면, 알아서 공이 박히는 수준이니까.
Suck 스스로도 그걸 잘 아는지, 보통은 제구에 집착에 가까운 집중을 보였다.
경기 중반부터 서서히 인터벌이 빨라지고, 속도가 붙으며, 마구잡이로 공을 던질 때조차, 제구는 확실하게 했었으니까.
힘이 다 떨어지고, 피로에 찌들어도, 어떻게든 제구는 유지하는 편이고.
그토록 가장 강력한 장점을 제 손으로 포기한다는 말에 조금 어이도 없었다.
‘어린놈이긴 하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었다. 대충 오늘은 평소보다 손에 안 감기니, 그냥 놓아버린다는, 루키 특유의 극단적인 판단 같았으니까.
헌데···
“스트라이크!”
느낌이 다르다.
한가운데로 들어온 패스트볼. 코스만 놓고 본다면 이보다 더 명백한 실투가 없다.
한복판에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타자는 헛스윙했다. 조금 눈동자가 떨리기도 했고.
‘파워피처···’
저 녀석, Suck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평가 중에서 ‘파워피처의 영혼을 가진 피네스피처’ 혹은 ‘피네스피처의 스터프를 가진 파워피처’라는 표현이 있다.
기발한 묘수로 타자를 낚아채고, 날카로운 컨트롤로 카운트를 잡으며, 다양한 구종의 조합으로 조지는, 거기다 구속이 느린 모습은 영락없는 피네스피처이지만.
압도적으로 삼진을 잡아내고, 볼넷을 쉬이 허용하지 않으며, 구속 대신 무브먼트로 타자를 조각내는 모습은 또 파워피처 같았기에 붙은 표현이지.
원래도 얼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제구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고, 오로지 힘으로 찍어대는 고유석의 모습은···
“아웃!”
‘이런 놈이 파워피처가 아니면, 누가 파워피처야?’
파워피처 그 자체였으니까.
힘에 밀린 배트는 타구를 툭 띄우며, 내야 팝 플라이를 만들었고, 타구는 곧 높이 쭉 뻗은 투수의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죽겠네, 진짜.’
평소처럼 손쉬운 포구는 없다. 알아서 들어 와주는 상냥한 피칭도 없고.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낚아챘지만, 분명 포구에 미스가 없었는데도 팔꿈치가 저릿했다.
마치 무게에 밀린 것처럼 살짝 손목이 꺾이기도 했고.
“You-Suck! You-Suck!”
“남자답게 잘하네! X나게 잘했어! 실점? 까짓거 할 수도 있는 거지!”
“X발 보스턴 새끼들을 아주 X되게 박살냈어!”
우악스럽게 상대를 때려잡는 모습에서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나서 그런가, 관중들은 마음에 드는 것 같지만,
‘계속 이렇게 받다가는 제명에 못 살겠네.’
스티븐 보그트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오늘 같은 피칭이 딱 열 번만 이어지만, 그대로 은퇴해야 하지 않을까?
팔꿈치든, 손목이든, 아니면 결국 못 버티고 손바닥으로 받든지 간에, 오른손이 아주 아작이 날 테니까.
농담 같은 말이지만, 최소한 스티븐 보그트는 마냥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