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완봉의 여운은 구단에도 짙은 영향을 끼쳤다. 외부에서 보기에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선수가 새로이 생겨난 셈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장의 매출에는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 유니폼 판매량이야 애초에도 꾸준하게 우상향 그래프를 그렸고. 그 외의 것들도 마찬가지니까.
허나 중요한 건 그런 눈앞의 이익이 아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브랜드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진 것이니까.
‘최소한 5년 정도는 말이야.’
고유석이 지금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가정하에.
A’s는 최소 5년 동안은 확고한 에이스가 생긴다. 그것도 리그 정상급에 비벼볼 만한 에이스가.
그건 작년 시즌이 끝난 직후, 미래마저 암울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기존 스폰서들은 물론, 그밖의 기업들 역시 스폰서십 제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특히 한국 쪽이 생각보다 괜찮지.’
비주류이면서도 부유한 국가 출신의 슈퍼스타. 논센스 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능성은 희박하나, 성공했을 때의 리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고유석은 거의 반절은 도달한 상태이고. 새로운 트렌드처럼 떠오른 선수니까.
이번의 완봉은 그에 대한 방점을 찍었고 말이다.
‘만약 기대처럼만 된다면, 수익 분배 감소도 버틸 수 있어.’
A’s의 유일한 젖줄인 리그 수익 분배는 올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줄어들 예정이다.
기존의 5천만 달러에서, 매년 25%씩, 서서히, 아주 가파르게.
공동 체제에서 일인 체제로 변경되었음에도 여전히 주머니를 닫고 있는 구단주에게 기대어야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
완봉 이후 기업들은 일종의 확신을 얻었다. 고유석이라는 라이징 스타의 위험부담이 그리 심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허나 그 확신은 이익뿐만이 아니라, 약간의 귀찮음, 그리고 고민도 선사했다.
“캐시먼입니다. 양키스요.”
마침 딱 연락이 오는군.
화려했던 4월 이후, 고유석을 향한 트레이드 제안은 거의 사라졌다. 이번의 완봉은 아예 끊어버렸고.
간단하다. 다른 구단들, 단장들도 깨달은 거지. 젊고 유망하고, 당장의 성적도 뛰어난 선발투수는 분명 탐스럽지만, 그렇기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절대로 트레이드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 완봉으로 결정됐다.
그 어떤 대가가 주어진다 해도, 당장 다음 경기부터 고꾸라져서, 처참하게 처박는다고 해도, 고유석은 비매품이다.
최소한 3년 이상은.
그렇기에 수많은 하이에나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몇몇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돌렸다.
특히 선발투수, 그것도 에이스급 선발투수가 급한 팀들에게 제법 탐스러운 매물이 오클랜드에 하나 더 있으니까.
‘소니.’
소니 그레이. (전) 에이스다. 물론 1선발에선 밀렸지만, 여전히 오클랜드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지.
잦은 부상과 FA까지 얼마 남지 않은 서비스 타임, 얼토당토않은 것 같으면서도 노려 볼 만한 매물이니까.
특히 애슬레틱스가 이렇다 할 만큼 윈나우 지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우리로서도 가장 값비싼 매물인 건 사실이지.’
약간의 흠집은 있다. 생채기가 제법 많은 상품이지. 허나 그 값어치만큼은 확실하다.
사이 영 3위를 기록했던 최대 실링과 부상만 없다면, 매년 수준급 성적을 찍는 기량.
그리고 비록 단 한 번에 불과하긴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줬던 준수한 임팩트까지.
챔피언을 노리는 팀들 중, 선발투수가 애매한 팀이라면 한 번쯤은 탐낼 만한 매물이다.
오클랜드 입장에서, 이만큼 충분한 대가도 받을 수 있는 상품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 쪽에서도 그런 방향의 이야기가 자주 나왔고.’
물론 소니 그레이는 지켜야 하는 선수다. 구단의 상징이자, 얼굴이니까.
그렇기에 일단은 지키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반대 의견도 적지는 않았다. 위험부담이 큰 선수이니, 차라리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 FA가 되기 전에 팔자는 거지.
그리고 그런 주장에는 힘이 실렸다. 이번에도 Go로 인해서. 정규시즌 개막 이후, 소니 그레이라는 상징조차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당장 원정 경기를 쫓아다니는 개인 팬들, 레이더스 팬덤 출신이라고 하던가? 그들만 봐도 그렇지.
‘만약 소니가 예전과 같았다면···’
지금 온 연락을 망설이지 않았을 거다. 어느 정도는 여질를 줬겠지. 트레이드 자체는 훨씬 뒤에 이뤄지겠지만, 그래야 몸값이 더 오를 테니까.
허나 들리는 말이 조금 달라졌다. 항상 열심히 하는, 다르게 말하면 조금 과할 만큼 부담감에 짓눌리는 투수였는데.
‘달라졌지.’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은 걸까? 아니면, 1선발을 빼앗겨서 승부욕이 생긴 걸까?
다시 선수단으로 돌아온 뒤의 소니 그레이는 최소한 서류상의 분석에 의하면 이전보다 정신적인 부분에선 더 안정적여 졌다.
그게 경기에서도 드러나는 건지, 최근 등판에서 기대 이상으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렇기에 욕심이 생겼다.
‘지금 우린 컨텐더급인가?’
아니,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팀에 애정이 강하기에, 빌리 빈은 확신했다.
한순간 선발진이 확 올라왔고, 조금 미묘하긴 하나 타선도 나쁘지는 않지.
프리시즌 당시 부실한 선발진과 로스터에 최악을 가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 덕분인지, 성적도 예측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고. 허나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시즌을 노릴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아직은 부족하지. 군데군데 구멍이 많고, 약점이 뚜렷하니까.’
준수한 선발진, 한방은 있지만, 조금 몰아치는 감이 심한 타선. 그리고 여전히 부실한 불펜.
괜찮은 전력을 갖췄지만 아직은 더 보강이 필요하다. 그러니 차라리 길게 보고 리빌딩을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아예 불가능한 정도인가?’
이것 역시 미묘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약간의 단점만 적절하게 보강한다면.
그러니까, 기존에 팬들에게 설명했던 리툴링이 완성된다면.
‘대권을 노릴 수 있겠지.’
위험성은 크다. 핵심이 되야 할 선발진의 주축이 갓 데뷔한 루키와 부상이 잦은 유리몸 투수니까.
최대 기대치가 조금 낮아지고, 기간이 길어지는 대신 보다 더 안정적인 리빌딩이냐.
리스크는 높지만, 반대로 성공만 한다면 리턴 역시 확실할 리툴링이냐.
차라리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면, 오히려 손쉽게 선택했겠지만···
생겼다. 희망이라는 놈이.
암울한 현실 속, 미래를 꿈꾸고 의지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희망이 생겨버렸다.
재앙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재앙이 희망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빌리 빈은 생각했다.
위험하고, 불확실하며, 그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한데도.
“캐시먼, 무슨 일이야?”
-다른 게 아니라, 괜찮은 비즈니스가 생각나서 말이야. 천천히 의견이나 나눠보자고. 소니 말이야, 우리가 데려가 줄게. 솔직히 그쪽도 팔고 싶잖아? FA도 얼마 안 남았고, 부상도 많고.
“오, 그래? 난 별로 즐겁지 않은데. 더 재밌는 제안이 있으면 그때 다시 찾아와. 개소리는 하지 말고.”
결국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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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직후 대니얼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곧장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대신, 원정 내내 날 도왔다.
“Go의 욕심이야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웬만하면 자제하십시오.”
“최대한 조심할 게요. 괜히 무리하다 데뷔 첫 시즌부터 부상으로 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거든.
그 꼴을 보니 차마 못 두고 가겠던 거지.
그래도 브라이언이 전해준 금융치료 덕분에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 정도로 완봉의 피로를 몰아낼 수는 없더라고.
‘투구수가 줄은 건가?’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원래 100구씩 던져도 끄떡도 없는 사람이거든.
이번에는 100구를 좀 넘기기는 했는데, 어쨌든 예전에는 이 정도쯤 던져도 아무렇지 않았다.
‘뭐, 그만큼 빅리그가 빡세다는 거겠지. 집중의 차이가 다르니까.’
마이너에서 열심히 안 했다는 뜻이 아니라, 메이저에선 120%의 출력을 낸다는 거지.
그러니 같은 투구수라도 피로가 더 클 수밖에 없지. 물론 그만큼 환경이 달라진 덕분에 대신 회복도 빨라졌지만.
아무튼 대니얼은 레인저스 시리즈가 끝난 뒤, 내가 등판하지 않는 매리너스 원정까지 쫓아다니며, 최대한 회복을 도왔다.
“이 정도면 그래도 제법 올라오긴 했군요.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죠, 돌아가자마자 바로 등판해야되니까.”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다음 등판은 절대로 무리하지 마십시오. 연달아서 몸에 과부하를 주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덕분인지, 원정 6연전을 마치고 다시 홈으로 돌아왔을 때는 생각보다 제법 폼이 올라왔다.
물론 대니얼이 저렇게 신신당부할 만큼 다른 경기랑 비교하면, 여전히 좀 저조하긴 하다.
‘레드삭스라···’
거기다 상대도 만만찮고.
한국 쪽 메이저리그 팬들은 종종 잘 던지는 투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동부 검증’을 받아야한다고.
알동부, AL 동부지구를 뜻하는 건데, 전통적으로 가장 타격이 강하고, 빡센 디비전으로 손꼽힌다.
그러니 아무리 잘나가는 투수라도, 일단 알동부 팀들을 상대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지. 동부지구 자체가 좀 빡세긴 하니까.’
개소리 같아도, 어느 정도는 타당한 주장이기는 하다. AL 동부의 경우 무려 4개가 타자구장이고.
양키스나 레드삭스야 말할 것도 없는 전통의 강호이고, 빅마켓인데다가. 나머지 세 팀 역시 저력이 있으니까.
실제로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AL 동부에서 좋은 커리어를 보내면, 은근히 언론에서 버프를 준다.
사이 영이나 MVP,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은근히 이득을 주거든. 특히나 양키스 선수들은 양키 프리미엄이 붙기도 하고.
‘좀 시끌시끌하겠네.’
반대로 나는 좀 말이 나온다.
서부지구 팀들을 상대로 깡패같은 성적을 올렸으니까.
매치업이 이렇게 잡힌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깔려고 하면, 깔 수는 있는 거지.
자기 동네에서만 깡패라고. 요즘 한국에선 방구석 여포라고 하던가?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알동부 검증을 받아보라는 말도 나오기는 할 것 같은데···’
전통의 명문팀인 레드삭스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알동부의 대표주자다.
현재 동부지구 3위이긴 하지만, 아직 시즌 초반인데다가, 거의 비등비등한지라, 그거야 크게 상관없고.
당장의 성적과 상관없이 강력한 컨탠더급 팀인데. 타선도 확실히 만만치는 않다.
‘엄청나게 빡센 편은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지. 빡센 타자도 하나 있고.’
저조한 폼. 제법 강력한 타선.
그나마 홈에서 경기를 한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긴 하지만···
‘쉽지는 않겠네.’
아마 이번 경기는 좀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야지.’
두들겨 맞더라도, 효율적으로 맞아야지, 아무한테나 다 얻어맞고 다니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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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유석 오늘 제삿날 ㅇㅈ?]
-레삭한테 개털릴 듯ㅋ
└지난 경기 완봉한 투수인데 뭔 개소리야.
└솔직히 You-Suck 방구석 여포라서 다른 지구팀한테 약한 건 팩트아님?
└알동부 검증 가즈아~
└완봉이 중요하냐? 틀딱도 아니고 경기 내용을 봐야지.
└혐유석 약빨 떨어진 건 팩트임, 저번 경기는 운빨이고
주목에는 언제나 명암이 따른다. 누구나 슈퍼스타라면 헤이터는 존재하는 법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유석은 어그로가 끌리기에 딱 좋았다.
한국인 메이저리거, 좋은 성적, 언론의 주목까지. 현시점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였으니까.
거기다 구속이 느리기에 지금까지는 그저 행운에 불과하다는 생트집도 가능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고유석이 등판이 있는 날이면, 몇몇 커뮤니티들은 다소 과격한 양상을 보였다.
어그로를 위해 분탕을 놓으며, 분위기를 망치는 안티팬들과 그들을 제압하는 팬들의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특히나 오늘은 더욱더 심한 편이었다.
알동부 검증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거리와 지난 경기의 완봉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니 말이다.
[분탕들 먹이X]
-어차피 경기 시작하면 슬금슬금 다 빠질 텐데, 걍 무시하는 게 답임
└어그로 특징이지. 등판 전에는 누구보다 강하다가, 경기 시작하고 한 30분 지나면 깨갱하는 거.
└솔직히 ㅈㄴ 병신 같긴 함. 56이닝 동안 1자책한 투수한테 운빨이라는 거 보면.
하지만 팬들은 믿었다.
조금 참다보면 다시금 잠잠해질 거라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한국인 선수에 대한 기이한 반감으로 인해, 괜한 어그로가 끌리는 고유석이지만, 언제나 승자는 그들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 이닝, 두 이닝 서서히 진행되다 보면, 스스로의 민망함에 알아서 꼬랑지를 말았으니까.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믿으며, 그저 경기를 지켜본 팬들이었지만···
-2루 주자가- 세이프. 어··· 예, 고유석 선수가 1회 초만에 연이은 안타를 허용하면서··· 선취득점을 내줍니다.
-네, 음··· 실투였던 것 같네요. 쓰읍,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은데, 예. 무키 베츠 선수가 좋은 주루 플레이를 보여줬습니다.
[ㅆㅆㅆㅆㅆㅆㅆ혐유석 1회 초 실점~~~~]
-쑤아리 질러~~~~
└이게 알동부지! 어딜 레쟈출신 개X밥 투수가 개겨?
└혐유석빠들한텐 미안하지만 혐유석은 실점으로 보여줌ㅋ
└완봉? 1자책점? 아직 알동부를 안 만나봤잖아!
└혐유석 약빨 떨어졌다니까~ 이제 내리막만 남음
└똥볼인데 제구도 못하네ㅋ
기대는 생각보다 이르게 깨졌고. 1회 초부터 실점이 올라간 순간, 그간 참고 또 참았던(?) 분탕이 커뮤니티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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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긴 하네.’
안 하던 실투를 다하고.
살짝 몰린 코스, 여지없이 때려버리는 구만. 괜히 레드삭스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야.
무키 베츠에게 2루타를 내준 거야 그럭저럭 괜찮다. 현시점에서 가장 폼이 좋은 타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다만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맞은 건 조금 타격이 크네. 내 실수에서 비롯된 거니까.
‘맞을 걸 각오하긴 했는데··· 1회 초부터 실점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뭐, 내가 신은 아니니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그래도 제법 큼직한 타구였는데, 만약 탁구장 스타일의 구장이었다면 투런이었을지도 모른다. 콜리시엄에 감사해야지.
‘일단 맞은 건 맞은 거고. 정리부터 하자.’
살짝 정신이 멍하긴 하지만, 계속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서 조금 더 빈틈을 보인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뜯을 테니까.
오늘 포수는 스티븐 보그트, 간만에 합을 맞추는데, 슬쩍 시선을 보내니, 마치 자기 잘못이라는 듯 가슴을 툭툭 치고는 사인을 보냈다.
타석의 타자는 3번 타자 젠더 보가트. 최근 기세가 좋은 타자 중 하나다.
3할 3푼의 타율과 8할 5푼의 OPS을 기록하며, 준수한 타격감을 유지 중이니까.
‘다만 선구안이 엄청 좋은 편은 아니지. 지금 내 제구도 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뒤의 주자는 잊었다.
뭐, 3루로 뛰지도 않을 테니까. 설사 뛴다고 해도 그건 스티븐이 알아서 해줄 거고.
가볍게 숨을 고르며 던진 초구. 바깥쪽으로 낮게 내려가는 공에 타자는 크게 헛쳤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서클 체인지업.
제대로 나간 코스였던 것 같은데, 저걸 휘두르네. 확실히 선구가 좋아보이지는 않네.
그래도 스윙은 매섭다.
헛스윙이긴 하나, 스피드도 빠른데다가, 제법 묵직했으니까. 최근 기세가 날카로운 이유겠지.
‘그러니 망쳐야지. 쟤한텐 미안하지만, 어떻게든 타이밍을 조져놔야 한다.’
이른 타이밍에 던지는 게 조금 염려스럽긴 하나, 타이밍 조지는데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거기다 선구도 안 좋으니까, 딱 좋긴 하겠어.
계획을 세운 뒤 사인을 보내자, 스티븐은 그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대립하는 걸 포기하기도 했지만, 아까 전의 실투가 그의 요구였으니, 민망할 수밖에 없겠지.
“볼!”
2구는 볼.
이번엔 좀 아슬아슬했는데, 이건 또 잘 골라냈네. 아니지, 그냥 참은 기다린 건가?
‘이번엔 높게 하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높은 공을 던진다는 게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부담스럽다고 안 던지면, 어차피 던질 공은 하나도 없다.
“스트라이크!”
쭉 뻗는 하이 패스트볼.
원래는 결정구로 자주 사용하지만, 이번엔 카운트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타자는 다시금 크게 헛쳤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원 볼.
결정구가 남은 상황에서 타자의 눈빛이 흔렸다. 머리가 복잡하겠지, 워낙 다양한 구종이 있으니까.
아직 슬라이더랑 쓰리핑거, 그리고 역회전 서클을 던지지 않았고, 투심도 있다.
슬쩍 2루 주자를 확인한 뒤, 다시 타자와 눈을 맞췄고, 그대로 4구를 던졌다.
‘오케이, 낚았다.’
유유히 날아가는 공.
타자는 멍청한 눈빛으로 멍하니 공을 쳐다만 봤다. 타이밍을 완전히 잃은 거겠지.
살짝 움찔거리기만 하며, 결국 배트를 내지 못했고, 둥실둥실 날아간 공은 스트라이크 존의 한복판으로 쏙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루킹 삼진.
슬로 커브, 역시 좀 좋다니까.
다른 구종 노리고 있을 때 이거 하나 던지면 다들 좋아서 죽으려고 하거든.
‘좀 더 쎈놈한테 던지려고 했더니··· 다시 또 묵혀둬야겠네.’
살짝 아쉽구만.
MVP급 타자 만나면 하나 던지려고 했는데, 트라웃한테는 맞을 것 같아서 참았고.
그래도 젠더 보가트도 나쁜 타자는 아니니까, 이 똥볼로 삼진 하나 잡았으니, 만족해야지.
‘일단 중심타자 타이밍 조져놨으니 됐고, 차근차근 풀어가자.’
보아하니 무키 베츠야 말할 것도 없고, 더스틴 페드로이아도 타격감이 좋아 보이는데. 잰더 보가츠까지 긁혔다면 꽤나 난감했을 거다.
사전에 조기 진압해서, 일단 최대한 망쳐놨으니, 최악의 상황은 덜었다고 봐도 되겠지.
그다음 타자는 핸리 라미레즈. 헨리 아니고 핸리 맞다. Hanley거든.
리그를 대표하는 정상급 유격수 중 하나였는데, 나이 들면서 지명타자나 1루수로 자주 출전하지만, 어쨌든 작년에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올해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멘탈이 중요하지.’
섬세한 건지, 미친놈인 건지.
좀 정신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타입인데, 다르게 말하면 필받은 날에는 확실한 타격을 보여준다.
나이 들면서 좀 중후해진 건지, 그런 경향이 줄기는 했지만, 어쨌든 확인이 필요했다.
그의 성격이 죽었다고 해도, 어쨌든 간에 잘 나갔던 베테랑 타자들은 한번 삘받으면 미쳐 날뛰기도 하니까. 웬만하면 조심해야지.
‘몸쪽으로 낮게 하나.’
핸리 라미레즈의 경우 전성기 때는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였다. 안 좋은 공도 자주 건드리고, 그걸 또 안타로 만들어내거든.
그래서 타율은 높은데 출루율이 조금 저조했었지.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정상적으로 벌어지기는 했는데, 그거야 타율이 깎여서 그런 거고. 한번 찔러는 봐야지.
“아웃!”
아니나 다를까, 과감하게 휘두른 스윙.
몸쪽 낮은 코스의 경우 타자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코스인데도 타격에 거리낌이 없다.
번뜩이는 배드볼 히팅을 보여줬지만, 결과는 유격수 땅볼.
이미 예상한 건지 더스틴 페드로이아는 2루에 딱 붙어 있었기에 병살 유도는 실패했다.
‘오케이, 이 양반도 오늘은 괜찮아 보여.’
간신히 억지로 때려쳐서 땅볼을 만든 것을 보아, 오늘은 감이 좋은 날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이 점은 체크해두고, 드디어 투아웃.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이길 바라는 선수가 올라왔다.
미치 모어랜드.
성적은 그럭저럭이다.
OPS가 7할 9푼에, 홈런도 적당히 깠으니, 나쁜 성적은 아닌데, 1루수라는 게 문제다.
수비부담이 적은 포지션인 만큼, 1루수에게 기대하는 건 적당한 수준의 타격이 아니니까.
그래도 수비력은 좋은 걸로 아는데, 그거야 나랑 상관없이, 타자들이 신경 쓸 일이고.
“스트라이크!”
나한테는 이게 가장 중요하지. 다시금 몸쪽 패스트볼.
과감한 코스에 타자가 살짝 물러섰다. 저걸 잡아주네. 거의 맞을 뻔했던 것 같은데.
‘제구가 문제네, 제구가 문제야.’
이번에도 살짝 빠졌다.
정작 체력은 괜찮은데, 피로감에 피칭 감각이 떨어진 건지 컨트롤이 약간 흔들렸다.
여전히 다른 투수들과 비교하면 훨씬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딱딱 안 들어가니까, 괜히 답답하네.
‘일단 몸쪽에는 반응이 없고.’
그래도 스트라이크는 잡았으니까. 그러면 된 거지. 주심이 넉넉하게 잡아준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반응을 보아 몸쪽 공은 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원하시는 대로 하나 가야지.’
바깥쪽으로 하나.
살짝 보더니 기다린 것처럼 배트를 냈지만, 슬라이더다.
서클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것도 은근 좋거든. 쭉 꺾이는 공을 억지로 때리긴 했지만, 차라리 배팅을 참았어야지.
“아웃!”
1루 방면으로 둥실둥실 떠오른 타구. 파울 라인을 넘었지만, 1루수 라이온 힐리가 끝까지 쫓았다.
가볍게 포구하는 것으로 드디어 1회 초 종료. 반응이 미묘하구만.
“자- 잘했어! Suck 네가 쵝고다!”
“한 점쯤은 줄 수도 있지.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야.”
“그냥 항상 하던대로만 해, 괜히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이미 충분하니까!”
뭔가 평소처럼 응원해주기는 하는데, 목소리에서 진득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당혹감도 느껴지고.
하긴 던진 나도 초장부터 얻어맞아서 정신이 멍한데, 팬들은 오죽하겠어?
특히나 오클랜드 팬들에게 지금의 나는 절대로 안 맞는 투수, 무적의 에이스니까.
1회부터 연달아 안타 맞고 실점했으니, 당혹스럽기도 하겠지.
‘그래도 얼추 감은 잡았어.’
비록 두 번째 자책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시작부터 한방 맞은 덕분에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