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사이.
4이닝이 삭제됐다.
물론 삭제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은 우스운 일이기는 하다.
안타만 여섯 개가 나왔는데, 그걸 더러 삭제라고 하는 것도 이상할 테니까.
허나 안타를 얼마나 쳤고, 얼마나 신이 나서 투수를 두들겼든지 간에, 점수를 내지 못한 이상 아무런 의미는 없었다.
또한···
“스트라이크!”
그 4이닝, 무려 두 타순이 도는 동안 얻어낸 모든 정보, 타이밍마저 쓸모없다면 더욱더 그렇고.
저번 경기와 비슷한 몸쪽 포심 패스트볼. 지난 타석에 안타를 만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이질감 때문에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추민수는 마음 같아선 허탈하게 웃고 싶었다.
‘웃기고 자빠졌네.’
이제까지 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저런 녀석을 진짜 그냥 평범하게 후배로 여겼다고? 뭐? 나중에 밥이나 먹여? 위로를 해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후배를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 당장 남은 타석이라는 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였던 건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말 그 모든 행동이, 포수의 마운드 방문, 투수코치와의 논쟁, 하물며 표정과 눈빛까지,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죄다 잘 짜여진 각본이었다고?
‘이건··· 약한 척 정도를 넘어섰잖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쟤는 길을 잘못 들어온 거다. 예체능이라는 큰 틀은 맞겠지만, 체(體)가 아니라 예(藝)로 갔어야지.
적당히 몸을 사리며, 은근하게 타자를 속이는 정도는 ‘영리한 피칭’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철저히 자신의 계획에 입각해서, 그것도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는 방향으로.
‘느낌이 이상하다 싶더니···’
그래, 이상했었지.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그렇게 가벼운 공을 던지면서도, 끝내는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 건 조금 찝찝했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타석 때는 미약한 의심이 생겼었고,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너무 늦었다.
“스트라이크!”
다시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한번 하이 패스트볼.
아끼고 아낀 힘을 이제부터 모두 방출하겠다는 듯이 던지는 고유석에, 그는 크게 헛스윙하며 세 번째 타석을 끝냈다.
그렇게 다시 물러나,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때, 문득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건지를 깨달았다.
‘방심··· 방심은 안 했지. 방심만 안 했지.’
신인이라기에는 너무도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결과를 낸 투수. 그렇기에 저 녀석을 방심하거나 얕잡아보는 타자는 더 이상 리그 내에는 없다.
메이저리그의 투수, 그것도 1선발 에이스로서 인정받긴 했지만···
‘결국 마음 한쪽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어리숙한 신인으로 여겼던 거야.’
준비와 계획이 완벽하다고 모든 성공이 보장되진 않는다.
상대가 그 계획에 맞춰 움직여주고, 판단을 해줘야 결국 통하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레인저스는 딱 정확하게 생각하고, 움직였다. 투수, 고유석이 바랐던 대로.
조금 전만 하더라도 덕아웃, 레인저스 선수들 사이에서 주고받던 이야기를 떠올린 추민수는 다시금 허탈하게 웃었다.
신인이기에 무리했을 거다.
신인이기에 흥분했을 거다.
신인이기에 오버페이스 했다.
신인이니까, 그 한마디로 모든 정황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여기 신인이 누가 있어.’
저 괴물 새끼 하나만 있지.
마찬가지로 루키라고 할 만한 포수도, 아주 제대로 자신들을 낚았는데 말이야.
‘밥은··· 다음 번에 먹어야겠네.’
오늘도 그리 편안한 하루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같은 나라 선수끼리 정답게 식사나 나눌 정도로.
“스트라이크!”
덕아웃으로 돌아온 추민수가 다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그의 생각이 옳다는 듯, 우렁찬 스트라이크 콜이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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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올리면 안 돼, 길게 가려면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원래라면 아무리 못해도 5회쯤 되면 속도를 높인다. 그때쯤이면 집중력도 다 올라오고, 경기감각도 딱 12시를 가리키거든.
“스트라이크!”
오늘도 마찬가지기는 하다.
투구의 간격을 가파르게 좁혔고, 타이밍을 뒤튼 것까진 다른 경기와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몰입하지는 않았다. 정신 놓고 던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하거든.
다른 때야 길어도 7이닝 던지고 내려가니, 상관은 없겠지만, 오늘은 아니지. 이런 적절한 찬스가 또 언제 올 줄 알고.
“스트라이크!”
순간적으로 다시 느리게 던진 체인지업에 타자는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타이밍이 망가졌으니, 배트를 내기도 쉽지 않지.
‘그리고 서클을 적극적으로 쓴 덕분에, 쓰리핑거가 제법 잘 먹히기도 하고.’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약한 척을 하면 그건 그거대로 안 먹힌다. 의심이 들거든.
원래 거짓말도 10% 정도는 진실을 섞어야 더 효과가 크다고 하잖아?
그래서 서클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던지며, 위험할 때마다 타자들을 조졌는데.
그런 서클 체인지업‘들’과 비슷한 타이밍, 비슷한 릴리스 포인트, 그리고 비슷한 속도로 날아가는 쓰리핑거 체인지업은-
“스트라이크 아웃!”
적어도 지금부터는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위닝샷이다.
쓰리핑거에 망가진 타자는 패스트볼을 따라가지 못했고, 만약을 대비해, 포심 대신 던진 투심조차 건드리지 못하며 크게 헛스윙했다.
땅볼 하나에 삼진 둘.
5회 말도 그렇게 사라졌다.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갑자기- 갑자기 뭐야?”
“무슨 벌랜더도 아니고··· 왜 경기 후반에 더 잘하는 건데?”
“어··· Suck이 잘하고 있어서 좋기는 한데, 뭔가 좀···”
“자- 잘했어! 뭐, 이제라도 삼진 잘 잡으니까 좋네···”
타자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면, 관중들은 그냥 좀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홈팀, 레인저스 팬들은 갑작스럽게 급변한 상황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까지 잘 나가던 타자들이 이젠 또 갑자기 꼬라박고 있으니, 이해가 되겠어?
뭐, 소수의 우리 팬들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기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기뻐 보이기는 한다.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욕도 못하고 있네.’
한껏 조롱하다 갑자기 털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인지부조화가 걸린 것 같다.
저번 경기에선 욕도 좀 먹고, 야유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어쩌면 희망을 품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지금 내 피칭이 그저 남은 모든 힘을 불태우는 회광반조, 맞나? 무협지에서 봤는데. 아무튼 그 비슷한 거라고 여기는 걸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 이닝부터는 다시 처박거나, 아니면 교체될 거라고 믿는 걸지도?
‘어림도 없지.’
만약 그런 거라면, 홈팬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회광반조가 아니라, 풀악셀에 가깝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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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메이저리그 팬에게, 현재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를 꼽으라고 한다면, 보통 둘이 거론됐다.
양키스의 저지와 애슬레틱스의 Go.
루키라는 딱지를 떼어놓고 보더라도,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들이니까.
2017년, 메이저리그의 가장 핫한 라이징 스타들이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의외로 둘은 조금 달랐다.
<저지, 시즌 13호 홈런! 목표는 단일시즌 신인 최다 홈런?>
비유하자면, 애런 저지는 전통의 강호였다. 백인, 양키스, 거포. 타자로서 가질 수 있는 흥행성을 모두 지닌 선수니까.
반대로 고유석은 이레귤러에 가까웠다. 느린 구속, 아시안, 애슬레틱스. 흥행성은커녕 오히려 감점 사항이 덕지덕지 달렸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투수와 타자라는 포지션과, 판사를 뜻하는 Judge, 그리고 아무리 봐도 욕으로밖에 안 보이는 Suck이라는 이름 역시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고.
허나 그 대신 화려한 임팩트와 상대팀을 산산조각 내는 피칭, 그리고 기괴한 성적으로 그 모든 단점을 잠재웠고,
마치 언더독과 같은 느낌이 들기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곱지 않은 시선도 뒤따랐다.
한동안 최정상급 투수로서 서부지구에 군림하며,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던 고유석이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걔는 오늘도 털리고 있네. 이제 거품 좀 빠지나?[
└진짜? 트윈스한테 털리고, 타이거즈한테는 실점하더니, 오늘도 마찬가지네.
└누구?
└있잖아, 걔. 무실점이라고 깝치던 놈.
└아, 그 Suck 같은 놈? 꼴 좋네.
└오클랜드 놈들, 천년만년 무실점일 것처럼 굴더니, 배알 좀 꼴리겠네.
└한달 반짝 잘한 거 가지고, 언론에서 X나게 띄워주더니. 그럼 그렇지.
└거봐, 걔 서부지구에서만 통하는 거 맞잖아?
그런 이들에게 탈탈 털리다, 겨우(?) 무실점을 건진 트윈스전이나, 그 무실점마저 깨지고, 광분했던 타이거스전에 이어.
이번에도 여지없이 털리고 있다는 소식은 그 어떤 것보다도 기쁜 소식이었다.
드디어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거품이라는 놈이 꺼지기 시작한 것 같았으니까.
└Suck 경기나 좀 볼까? 우린 어차피 이겼는데.
└얼마나 멋지게 털리고 있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야지.
몇몇 이들은 그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시청하기 위해 기꺼이 채널이나, 경기를 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응원팀을 제외하면, 다른 야구 경기는 잘 챙겨보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거의 끝나가는 ‘우리 팀’ 경기 대신 그보다는 조금 더 흥미롭고, 이야깃거리도 많을 것 같은 애슬레틱스와 레인저스의 경기로 시선을 돌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레인저스를 몰아넣는군요!
-4회를 기점으로,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네, 이젠 인정해야 겠네요. 제가 성급했어요. Go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말이죠!
그들을 반긴 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X발 털리고 있다며! 레인저스가 Suck되고 있구만, 털리긴 뭐가 털려?
└4회까진 X나 처맞았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됐데?
└아니, 애초에 무실점인데, 털리기는 무슨, 너 꿈이라도 꿨냐? 아님 잡초(weed) 한 대 빨면서 경기 봤냐?
└아니, 진짜로 털렸다니까? 안타 봐봐!
└7이닝에 7피안타면 그냥 X발 준수하게 잘 막은 거잖아!
└그 7피안타가 6회에 하나 맞은 거 빼면, 6개가 전부 다 앞에 4이닝 동안 나온 거라고! X발 잠깐 게임 한판 돌린 사이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예기치 못한 트롤링(?)에 기분이 상한 이들이 분노를 토해내자, 소식을 전달했던 이들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그들 역시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경기는 180도 바뀌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장이라도 강판될 것처럼 휘청거렸었는데.
다시 채널을 돌렸을 때는 이미 예전 등판 경기를 재방송으로 송출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피칭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쟨 진짜 서부지구에 악감정이라도 있나··· 트윈스랑 타이거즈한테는 처맞더니.
└골목대장이네, 골목대장.
└같은지구는 확실하게 조지는 투수. 좀 탐스럽기는 하네. 오클랜드 놈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겠어.
└대체 얘는 거품 언제 꺼지냐? 언제까지 80마일짜리 투수한테 털릴 거냐고? 어쩌다 메이저리그가 이렇게 됐는지···
그들은 결국 이번에도 원하는 장면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거나, 분노를 토해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정직했다. 불만이 가득한 불퉁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채널을 돌리지는 못했으니까.
-타자가- 참았고, 주심의 판단은 스트라이크! KK! 계속해서 삼진을 잡으며 7회를 셧아웃 시킵니다!
스트라이크가 올라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리기도 했고.
└그래도 곧 내려가겠네.
└오늘은 실점은 없지만, 그래도 많이 맞은 거 보면 서서히 맛이 가고 있다는 거야.
└다음 경기에는 홈런도 하나 맞겠지. 저런 공으로는 빅리그에서 못 살아남아.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지만···
└나랑 같은 경기 보고 있는 거 맞냐? 뭘 곧 내려가. 아직 투구수 많이 남았구만.
└망상 하지 말고, 현실을 봐 X신들아. 지금 Completed Game(완투) 페이스야. 안 내려간다고.
아니나 다를까, 덕아웃의 고유석을 찍는 중계 카메라에 잡힌 건, 이번에도 목끝까지 점퍼 지퍼를 올린 고유석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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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는 어때? 체력은 좀 남았어? 5회부터는 속도 높였잖아.”
브루스 맥스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까지 잘 해놓고 이제와서 다시 치킨이 됐네.
뽀글뽀글 머리를 멋지게 투블럭으로 쳐놔서 그런지, 생긴 건 히스패닉 갱처럼 생겨놓고, 왜 이렇게 감정 변화가 심한가 몰라.
“아직은 괜찮아. 적당히 조절했으니까. 투구수도 조금 남았고.”
시큰둥한 답변에 브루스 맥스웰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떼지 않았다.
아마 완봉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던 것 같은데, 굳이 부정 탈 이유는 없으니까.
“굿샷, 굿샷!”
“Suck 생각하고 적당히 쳐!”
4회에 첫 득점을 올렸던 타자들은 그 뒤로 서서히 타격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경기가 이어지면서, 나랑 마찬가지로 경기감각이 올라온 거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수비 부담이 줄어든게 가장 클 거다.
‘오늘은 특히나 수비도움을 제법 많이 받았으니까.’
경기 초반에 털리는 와중에 위험하다 싶으면 중간중간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대부분은 변형 패스트볼을 섞어서 범타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그 덕에 똥빠지게 수비하느라, 타격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텐데, 4회 이후로는 그런 부담이 줄어서 그런지, 잘만 치네.
‘특히 로잘레스 도움이 컸고.’
오늘도 주전 유격수인 마커스 시미언 대신, 내야 전천후 백업인 아담 로살레스가 대신 출장했는데, 포지션 특성상 그의 도움이 지대했다.
전천후 백업답게 수비가 좋거든. 내가 범타를 유도할 수는 있어도, 결국 잡는 건 유격수의 몫이니까.
‘이제 4대0. 승리투수는 거의 확실하겠네.’
내려갈까? 투구수도 마냥 적은 건 아닌데. 이 정도로 만족하고 물러날 수도 있다.
탈삼진도 이제 여덟 개니, 제법 잡은 데다가. 무실점에, 승리도 챙길 수 있을 것 같으니. 이만하면 훌륭한 경기지.
또 나중의 일은 모른다, 경기 초반도 빠르게 처리했고, 지금은 타자들을 쉽게쉽게 잡는다고는 하지만. 바로 다음 이닝에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7이닝 무실점으로 만족하고,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줘도 괜찮겠지. 아마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도 내심 그걸 바라고 있을 거고.
‘퍼펙트게임을 포기했던 것처럼.’
시범경기에선 더 긴 시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퍼펙트게임 중에 교체됐었지.
물론 겉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렇다는 거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따로 있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내가 그렇게 물러나길 원할 거다.
잘 던져서 기쁘기도 하지만, 길게 던지면 던질수록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때랑은 다르지.’
퍼펙트게임이야 어차피 안 되는 걸, 선심 쓰듯 포기하면서 진짜 이득을 챙겼다면, 지금은 아니다.
완봉과 퍼펙트게임.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실질적인 가치를 따지고 보면, 그때 포기했던 퍼펙트게임보다 오늘 완봉이 더 높거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안 되는 일에 괜히 대가리 박치기 안 해. 지금 내가 판단하기에 오늘의 완봉은···
‘충분히 가능하지.’
8회 초, 우리 공격이 끝났다.
딱 한 점만 냈네. 덕분에 어깨가 식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잘 쉬었구만. 딱 적절하게 타격해줬어.
그 지원에 힘입어.
“스트라이크 아웃!”
8회 말은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이제 완봉까지 남은 건 9이닝 하나.
투구수를 아낀 것 치고는, 조금 몸이 힘들고 지쳤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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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초의 공격이 흐지부지 끝난 뒤. 덕아웃을 나서기 전, 스콧 에머슨은 조심스럽게 나를 붙잡았다.
“Go, 너야 똑똑한 녀석이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무리하지 말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콜 해. 미리 사인 맞춰뒀던 것처럼. 교체투수들은 이미 준비돼 있으니까, 눈치보지 말고.”
착착 계획대로 진행된 경기에 미리 허락 아닌 허락을 내렸기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하는구만. 또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기도 하고.
그의 걱정들 덜어주기 위해 씨익 미소를 지은 뒤 그라운드로 향하니, 분위기가 훨씬 험악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어안이 벙벙한 듯 그냥 멍한 눈빛만 하고 있었는데, 이젠 위협이 실감나는 건지, 관중들은 명백한 적의로서 나를 노려봤다.
‘타자들도 마찬가지고.’
한 30분, 아니 40~5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타석에 입장하던 레인저스 타자들은 이젠 반대로 결연한 눈빛을 했다.
‘좀 귀찮기는 하겠네.
어떻게든 완봉만큼은 막기 위해, 고춧가루를 뿌리는 심정으로 투구수를 질질 끌 수도 있다. 어떻게든 체력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6회에 허용했던 안타 하나가 괜히 아쉽구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후우, 그래도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야.’
잠깐 점검해본 어깨는 그럭저럭 멀쩡했다. 좀 뜨겁기는 한데, 팀이 걸어놓은 리미트가 문제인 거지, 원래 내구성 자체는 좋은 편이거든. 회복도 빠르고.
‘초반을 쉽게 조지려고 하긴 했지만, 설마 완봉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괜한 감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몸이 지쳐서 그런가, 잡생각이 드네.
아직 완봉은 아니다.
이번 이닝을 완전히 끝내야 완봉인 거고, 지금은 그저 8이닝 7피안타 10삼진에 불과하지.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좀 빡세긴 빡세네.’
5-6-7로 이어지는 타선.
상위타선은 아니지만, 만만치는 않다. 특히 루크네드 오도어는 오늘 멀티히트를 했었으니까. 6회에 안타 친 것도 얘거든.
“볼!”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던졌다.
바깥쪽으로 낮게. 포심 하나.
다행히 컨트롤은 멀쩡하다.
완벽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원하던 코스에 근접했으니까.
‘86마일··· 체력이 떨어지긴 했네.’
다만 구속은 좀 줄었네.
전력투구였는데 86마일이라.
이것도 간신히 찍은 거고, 아마 좀 느리게 던지면, 81~2마일 정도에서 놀겠지.
‘다시 바깥쪽으로 하나.’
하지만 아쉬워할 여유는 없다.
힘이 떨어졌어도 기를 쓰고 잡아야 하니까.
타자를 바라보며 글러브 안에서 공을 굴렸다.
어떤 그립이 좋을까, 원래 이럴 때는 느낌을 따라가야 하는데. 괜찮은 게 하나 잡혔다.
“아.”
투심 패스트볼.
연달아 패스트볼이라는 게 조금 걸려도, 느낌은 좋았던 것 같은데,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지! 어딜 감히!”
“저, 저저 시건방진 애새끼 두들겨서 보내버려!”
“글로브 라이프에서 완봉? 꿈 깨라! 어림도 없으니까!”
힘없이 날아간 타구는 3루수의 글러브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고, 그나마 후속 조치가 빨라서, 금방 떨어진 타구를 잡기는 했지만, 필사적으로 달린 타자를 잡지는 못했다.
9회 첫 타자부터 안타.
슬쩍 벤치를 보니 스콧 에머슨이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것처럼.
손을 흔들어 그를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솔직히 나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X같네.’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되면 제일 껄끄러운 놈까지 이어지거든. 이런 상황일수록 가장 까다로운 타자한테.
‘쉽게쉽게 가자. 병살은··· 쯧, 통하지도 않겠네.’
그리고 그걸 레인저스 역시 잘 알고 있다. 올라오는 타자들의 생각이 훤히 보였으니까.
어떻게든 병살만 조심하자.
삼진을 당하더라도, 차라리 혼자 죽자.
타자들의 얼굴에선 그런 생각이 훤히 보였다.
차라리 자신이 영웅이 되겠답시고 의지를 불태웠으면 편했을 텐데.
‘먼저 이 양반부터.’
6번타자 마이크 나폴리.
노련한 베테랑 타자답게.
타이밍은 거의 잡은 것 같다.
중간에 연기를 집어치운 뒤부터는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지금은 느낌이 좋지는 않네.
‘하나 빼자.’
낮게 깔린 서클 체인지업.
타자의 잠깐 배트가 움찔거리다, 이내 꾸욱 참았다.
혹시나 싶어 던져봤지만, 역시, 제대로 골라내는 것 같다.
‘하나 둘, 셋. 세 놈을 잡아야 하는 건데···’
잠깐 인터벌의 속도를 늦추고서 짧게 고민했고, 곧 판단을 마쳤다.
“스트라이크!”
과감한 몸쪽 포심에 마이크 나폴리는 스윙을 참았다.
구속은 86마일. 살짝 놀란 듯한 눈빛이다. 마치 정말로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내 생각은 간단했다.
그냥 찍어 누르자.
마이크 나폴리, 그다음인 7번타자 카를로스 고메즈까지.
최대한 전력투구에 가깝도록.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몰아치는 피칭에 마이크 나폴리는 크게 스윙했지만, 2루수에게 걸렸다.
그것으로 원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카를로스 고메즈까지 6구까지 이어진 승부 끝에 잡았지만, 체력은 이미 거의 바닥이 났다. 구속도 더 떨어졌을 거고.
그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던 가장 위험한 놈이 올라왔다.
‘X밥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저승사자였네.’
조이 갈로.
뻥파워가 강력한 공갈포. 삼진 제조기. 지난 경기에선 갖고 놀았고, 오늘도 적당히 잘 잡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공갈포기는 해도 선구안이 나쁜 편은 아니니까, 타이밍도 거의 다잡았을 거고. 또 나쁜 공에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지만, 지금은 그게 장점이지.’
그의 타율의 문제는 간단하다. 낮든지 높든지 멀든지 간에 본인 판단에 칠 수 있을 것 같다면 무조건 스윙하는 것.
자연스럽게 안 좋은 코스도 건드리게 되니 삼진도 쉽게 당하고, 빗맞은 타구도 자주 만들지만, 지금 상황에선 장접이라고 봐야한다.
이미 앞선 타석들을 거치면서 나한테 익숙해진데다가, 장타를 억제할만한 힘이 확 떨어진 상태이니, 설사 나쁜 코스를 건드렸더라도 잘 맞은 타구가 나올 테니까.
그러니 그 2할밖에 되지 않는 타율이 지금 상황에선 거의 80% 확률로 제대로 터질 가능성이 높은데.
‘아주 초집중을 하셨구만. 나 하나 잡아잡수시려고. 더럽게 철저하시네 그려.’
집중까지 완벽하네.
그의 시선은 나한테 고정되어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무조건 날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마 혹시나 싶기도 하겠지.
만약의 가능성도 있으니까.
허나 고개를 저었을 거다.
그냥 완봉도 아니고, 특별한 완봉을 내가 포기할 거란 생각은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영광스럽게 생각하슈.
‘무사사구 완봉, 앞글자는 떼야겠네.’
피안타 여덟 개. 볼넷 제로.
이대로 경기를 끝마친다면 무사사구 완봉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겠지만.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거라도 살려야지.
그리고···
뒤에 9번타자가 있는데, 심지어 약한 척했을 때도 안타 하나 못 쳤던 타자가 바로 뒤에 있는데, 내가 뭐 하러 널 상대하냐?
대가리에 총맞은 것도 아니고.
“베이스 온 볼!”
“이런 X바아아아아아알!”
“야! 야이 개색-”
“이 X같은 새끼야아아아악!”
일어난 포수.
즐거운 캐치볼.
1루로 나가는 타자.
신난(?) 관중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타자, 딜리아노 디쉴즈 주니어가 올라왔다.
식은땀을 안 흘리는 게 용할 만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아, 까보기 전에는 모르니 아직은 마지막 타자가 아니긴 하지.
“아웃!”
이젠 맞고.
명색이 1선발 에이스인데, 완봉 정도는 해야 가슴 피고 다니지.
9이닝 8피안타 11탈삼진 ‘1’볼넷. 완봉이 완성됐고. 곧 욕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라운드를 오클랜드가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