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90화 (90/316)

90화

흐름은 2회 말에도 여전했다.

“나이스 배팅!”

“쭉쭉 가자!”

“조이까지 연결해! 그럼 홈런이니까!”

1회 말, 엘비스 앤드루스 이후 타자들이 아웃당하며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으나.

2회에는 선두타자부터 안타가 나왔으니까, 그것도 초구를 제대로 통타했다.

1루에 우뚝 선 루크네드 오도어가 팔을 들어 올리자, 동료들과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졌고.

뒤이어 타석에 올라간 마이크 나폴리 역시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진짜 좀 맛이 간 건가?’

물론 아직까지는 모른다.

안타도 겨우 두 개에 불과하고, 둘 다 다르게 보자면 투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타자가 잘 때린 거니까.

그러니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 경기에서 보여줬던 활약이 너무 대단했었기 때문인지, 오늘의 휘청거림이 왠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타임, 잠시만 올라가겠습니다.”

그 순간 포수가 흐름을 끊었다. 그것도 꽤나 다급하게.

브루스 맥스웰, 최근 들어 종종 나오는 녀석인데, 얘도 아직 애송이라서 그런지,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주심에게 요청한 포수는 허락이 떨어지자 황급히 마운드로 올라갔고, 서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이런저런 제스처가 이어졌다.

‘진짜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휘휘 돌리던 마이크 나폴리는 눈썹을 씰룩였다.

아닌 척 마운드를 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감정 표현이 활발한 녀석이건만, 지금은 글러브로 얼굴을 가렸다.

일부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건데, 아직 가리지 못한 두 눈이 조금 파르르 떨리는 걸 그는 똑똑히 포착했다.

조금 대화가 길어지고, 주심이 눈치를 주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포수도 조금 딱딱했고.

“왜 말을 안 들어? 그러게 어린놈한테 에이스 자리를 주면 안 된다니까. 기세가 등등해져서 지 맘대로 행동하잖아. 그치?”

“···경기나 합시다.”

은근하게 동조를 구하듯 물으니, 딱딱하게 답변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단서다.

베테랑이라면 과장된 반응이라도 보이며 주의를 돌렸을 텐데, 노하우가 없으니, 그저 어떻게든 상황을 넘기려는 거지.

‘그래도 공은 아직 좋다고 했으니···’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도 실력이 준수한 녀석이기에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스트라이크!”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잠깐 숨을 고르고서 던진 초구.

몸쪽으로 쫙 들어왔는데···

‘느낌이 다르긴 하네.’

약간은 미묘하다.

구속은 86마일.

1회보단 더 올라왔는데, 이런 느낌이었던가? 조금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다른 투수들과 비교하면, 구속은 좀 느리더라도 훨씬 더 강력한 무브먼트지만···

‘해볼 만한데?’

마이크 나폴리는 81년생이다. 이제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지. 실제로 올해를 끝으로 은퇴를 생각 중이고.

허나 조금 늙기는 했어도, 그는 여전히 다양한 장점을 있다. 선구안은 아직 괜찮고, 20홈런은 쉽게 넘기던 파워도 여전하다.

다만 나이 때문인지 현저히 떨어진 배트 스피드 탓에, 97마일 이상의 속구를 던지는 파이어볼러들은 대처하기 힘들지만. 지금 날아오는 공처럼···

“가라! 가라!”

“넘어가! 좀 넘어가!”

느릿한 놈은 충분히 받아칠 수 있다. 기분 좋게 머리 뒤로 팔을 넘겼다. 깔끔한 팔로스루. 장타를 예상했고, 역시나 타구가 빨랫줄처럼 쭈욱 뻗었는데···

“아웃!”

“아아아···”

“저걸 쳐 잡네!”

예전이었다면, 다른 곳도 아니고 글로브 라이프이니 그냥 넘겼을 것 같은데, 타구가 잡혔다.

“내가 늙기는 늙었군.”

뭐가 잘못된 건지 각도가 살짝 낮기는 했는데, 잘하면 제법 큼직한 장타가 됐을 것 같았기에 몇 발자국 떼지 못한 그는 아쉬움에 혀를 내둘렀다.

이럴 때면 나이가 야속하다. 제대로 퍼 올린 것 같았는데 말이야.

비록 기대했던 것처럼 홈런이나 장타를 만들지 못했고, 워낙 빠른 타구였기에 잡힌 시점도 빨라서, 주자도 여전히 1루에 머물렀지만, 대신 괜찮은 정보를 얻었다.

“저게 잡히네. 마이크, 영양제라도 좀 챙겨 먹어봐요. 스윙 보니까, 예전이었으면 그냥 넘겼을 것 같던데.”

“어우, 그랬다가 이상한 거라도 검출되면 괜히 피곤해져.”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겨준 동료의 농담에 너스레를 떤 그는 그가 확인한 걸 말했다.

“쟤 진짜 좀 이상해. 포수도 눈치가 안 좋아 보이고. 기를 쓰고 던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느낌이야.”

저 크레이지한 루키 투수가 예전에 봤을 때와 다르다는 건. 이미 지난 이닝에 확인됐었다.

그러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나, 마이크 나폴리의 전언은 그런 예측에 확신을 주는 용도였다.

Choo와 마이크 나폴리, 팀 내의 가장 노련한 타자 두 명이 똑같은 답변을 했다는 것이니까.

“오~ 진짜 뭐가 있나?”

“Choo랑 마이크가 둘 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조이! 니가 가서 날리면 되겠다!”

자신감은 더욱더 짙어졌다.

다소 심각한 공갈포이기는 해도, 최강의 파워를 자랑하는 조이 갈로의 타석도 곧 있을 테니. 금방 득점이 올라가겠지.

타자들은 배트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고, 그때, 다시금 안타가 나왔다.

“휘이이이이익!”

“저 새끼 바로 끌어내려!”

“우리가 두 번은 안 당하지!”

“이달의 투수? 까고 있네! 그래봤자 오클랜드 투수지!”

다시금 깔끔한 안타.

이번에도 2구를 공략했다.

카를로스 고메즈의 날쌘 통타로 1사 주자 1,2루. 올라오는 타자를 보며 휘파람 소리가 흘렀다.

“조이! 한방 날려!”

“쓰리런 알지? 어제처럼 하나 날리면 돼!”

전날 홈런을 기록했던 타자. 그리고 현시점 텍사스 제일의 거포.

텍사스 팬들은 그를 이렇게 지칭하기도 했다. K or HR이라고. 홈런 혹은 삼진. 조이 갈로라는 타자를 가장 잘 설명한 말이리라.

전날까지 포함하여 11개의 홈런. 24개의 안타. 그리고 무려 54개의 피삼진.

2할의 타율과 5할의 장타율이라는 대단히 극단적인 기록을 자랑하는 타자는, 화끈한 화력을 선호하는 레인저스 팬덤에게 사랑받기 충분했다.

“타임!”

모두가 큰 거 한 방을 기원한 그때, 다시금 타임이 요청됐다. 이번엔 포수만이 아니라, 덕아웃에서도 코치가 나왔고.

순간적으로 난타를 당했고, 위기상황이니 적절한 조치였겠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투수코치는 의연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운드로 향했으나, 레인저스에겐 그 모습이 마치 억지로 포커페이스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라가서 지시를 내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위로한 건지는 모른다.

그저 몇 차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투수가 모두가 내려간 마운드에서 짧게 심호흡하는 모습이 보였을 뿐.

그리고 다시 재개된 경기.

마음을 다잡은 건지, 투수는 씩씩하게 공을 뿌렸다.

“스트라이크!”

조이 갈로 특유의 극단적인 풀히트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원래도 자주 헛스윙을 하는 선수이기에 큰 의미는 없으나, 투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원래 저랬던가?”

“부담감이 있잖아. 아마 본인도 본인 컨디션 안 좋은 걸 아는 것 같은데, 그럴 땐 스트라이크 하나가 감사하지.”

감정을 잘 드러내긴 해도, 저렇게 카운트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녀석은 아니었기에 생각은 점점 확신에 찼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투수가 탄력을 받은 듯이 연달아 공을 던졌다.

“88.6마일, 최고구속에 근접했네?”

“표정 봐, 억지로 던진 거야.”

“그렇지, 폼이 별로일 때는 오히려 저렇게 가면서 폼을 올려야지.”

“노련하긴 노련하네.”

이번에는 이전과 거의 흡사하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공이 날아갔으니까. 구속도 다시금 확 올라왔고.

허나 레인저스 타자들이 보기에 그 모습은 마치 슬럼프에 빠진 타자가 어떻게든 자기 스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좋았을 때를 머리로 그리고, 다시 그때의 감각을 올리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큼직하게 헛스윙.

낮게 뚝 떨어지는 종류의 서클 체인지업. 이번 경기에서는 처음 던졌는데, 저건 아직 여전한 건가?

“손가락 감각은 살아있는 것 같은데?”

“어, 서클은 여전해 보여.”

“쓰읍, 저것도 좀 맛이 갔으면, 더 편했을 텐데.”

이번 경기 첫 삼진의 제물이 된 조이 갈로는 제 머리를 통통 때리며 아쉬움을 토해냈고, 뒤이어 9번타자, 딜리아노 디쉴즈 주니어까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흔들리는 것 같았던 투수는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위기를 무마했다.

그리고 그런 투수를 향한 감탄사가 덕아웃에 나직하게 흘렀다.

“그래도 저력이 있긴 있어.”

“어린놈한테 1선발 맡겨서, 오클랜드 X신인 줄 알았더니, 이유가 있네.”

“그치, 억지로라도 저렇게 넘겨야지. 에이스라면.”

분명 억지로 던진 것 같지만, 어떻게든 욱여넣는 피칭은 적의 눈으로 봐도 인상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순수하게 투수를 인정했으나, 어쨌든 확신이 들었다. 저 투수, 분명 정상은 아니다.

모든 증거가, 그리고 모든 정보가 그것을 이야기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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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말.

벌써 한 타순이 돌아,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추민수는 마운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지난 이닝의 위기를 화려하게 끝마친 것 치고는, 마운드에 우뚝 선 투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으니까.

식은땀만 없다 뿐이지,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게 굳은 얼굴은 보는 이에게 안쓰러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걱정이네, 쓰읍, 오늘 경기 끝나면 데려가서 밥이라도 맥여야지. 안 되겠어.’

다른 투수였어도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또 같은 한국 출신 후배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팀의 기세와는 별개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듣기로 결혼도 안 하고, 가족들이랑 같이 살지도 않는 것 같던데, 집밥 비슷한 거라도 먹이면 멘탈에도 도움이 되겠지.

물론 그건 그거고-

“세이프!”

이건 이거다.

또다시 선두타자 안타.

3구째에 몰린 공을 툭 밀어친 추민수는 가볍게 1루 베이스를 밟았고.

다시금 투수코치가 올라왔다.

이번엔 꽤나 격렬하게 항의하는 듯 고유석은 격앙된 표정이 이어졌고, 몇 차례 강력하게 고개를 적시도 했지만, 투수코치 역시 표정이 진지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겠지. 아니, 그럴 수밖에.

‘첫 타석보다 가벼운 것 같은데?’

마치 오래전 마이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니 마이너에서도 보기 드문 가벼운 속구.

짧게 휘두른 게 아쉬울 정도로, 거의 배팅볼처럼 가볍기 그지없는 공은 당혹감마저 선사했다.

간만에 괜찮은 후배가 나왔다 했더니, 예사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데드암이라도 걸린 건가?

자신도 알 정도면, 투수코치도 모르진 않을 테니, 비록 실점은 없더라도, 빠른 타이밍에 내리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나올 만큼 가벼운 공, 그런데···

“아웃!”

“아웃!”

“아웃!”

생각보다 잘 막는다.

중간중간 힘을 내는 건지, 빡세게 던지며, 타자들을 다시금 나란히 아웃시킨 고유석은 피로감에 찌든 모습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뭔가 좀···”

그때부터였다.

확신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에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은.

트윈스전과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그때랑은 느낌이 다르다. 그땐 그저 시원하게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버틴 거라면. 지금은···

‘의도한 건 아니겠지?’

본인이 판을 짠 것 같았으니까.

혹시나 하는 의혹이 추민수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무렵, 원정팬 좌석을 채운 오클랜드 팬들은 그저 불안했다.

“Suck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까 보니까, 투수코치 표정이 안 좋던데.”

“저번 경기는 실점하긴 했어도 화끈하게 던졌는데··· 오늘은 뭔가 좀···”

“X발 그러니까, 왜 루키를 막 굴려! 멍청한 프런트, 코치 새끼들이 어깨 갈아서 그런 거잖아!”

“부상이라도 당한 건가?”

오늘 마운드의 투수는 그들이 알던 고유석이 아니다. 트윈스전에서도 난타를 당하긴 했지만, 그때도 공은 좋았는데.

지금은 뭔가, 비전문가의 시선으로도 차이점을 느낄 만큼 미묘하게 떨어졌다.

어쩌면 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팬들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중계진 역시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오늘··· Go가 조금 힘들어 보이죠?

-네, 구속도 1마일가량 떨어졌고, 결정적으로 네, 여기 나오네요. 무브먼트가 부족합니다.

스탯캐스트를 이용해 분석한 고유석의 피칭은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라, 분명 이상했다.

-지금 여길 보시면, 몇몇 공의 경우 수직 무브먼트가 예전보다 심하게 부족한 걸 알 수 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네, 확실히··· 기존의 피칭과는 많이 다르네요. 또한 컨트롤과 커맨드도 조금 스트라이크 존 안쪽으로 찍히는 것 같고요.

모든 공이 다 그런 건 아니나, 종종 배팅볼 수준의 공이 찍혔다. 이전의 자료와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극명할 정도로.

또한 제구 역시 전체적으로 존 안쪽으로 형성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말이다.

-가장 합리적인 가정은 체력저하입니다. 시범경기부터 직전 경기까지, 벌써 73이닝을 던졌으니까요.

-Go가 굉장히 노련하고 영리한 피칭을 하는 투수이긴 하지만, 이제 막 데뷔한 투수다 보니, 전체적인 시즌 운영은 경험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체력저하. 사실 고유석이 생각보다 일찍 퍼질 거라는 건 이전부터 종종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제 갓 데뷔한 신인투수가 시작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었으니까.

시범경기에도 놀라온 피칭을 보여줬고, 그것을 쭉 이어갔지만, 다르게 보자면 오버 페이스를 하고 있다는 감도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실점 없이 경기 초반을 잘 마무리 지었기에, 아직 확신하긴 이릅니다. 간혹 투수들의 폼이 조금 늦게 올라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불안한 예측이 이어졌을 때, 분위기는 빠르게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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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선취점을 낸 건 애슬레틱스였다.

“그렇지! 양심이 있으면 오늘은 좀 쳐야지!”

“더 내! 더 내라고! Suck이 막은 실점이 얼만데, 오늘은 좀 편하게 가보자!”

4회 초, 흔들리는 고유석에게 힘을 실어주듯 나온 선취점에 팬들은 그나마 마음이 진정됐고.

몇몇은 아직 부족하다며, 최대한 점수를 더 내라고 채찍질하는 것으로 대신 불안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타자들이 길게 끌어서 좀 쉬었으니까, 몸이 올라왔을 거야.”

“한 점은 아쉽긴 하지만··· 득점지원도 있으니까. 어깨가 편하겠지.”

그래도 이제부터는 경기 중반에 접어들고, 지원도 있었으니,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했지만, 곧 4회 말, 여전히 불안한 피칭이 이어졌다.

“아웃!”

4회 말. 이닝 선두타자를 초구만에 아웃으로 잡으며, 다시 기세를 살리는가 싶던 고유석은 곧 직전 타석에서 좋은 타구를 날렸던 마이크 나폴리에게 안타를 허용했고.

뒤이어 카를로스 고메즈가 범타로 물러나긴 했으나, 결국 우려했던 빅 파워가 터졌다.

“Hell Yeah!”

“이게 조이 갈로지!”

펜스 상단부를 맞추고 떨어지는 타구, 1루 주자가 들어오긴 힘들지만, 그래도 주자 2,3루를 만드는 화끈한 한방.

2사이긴 해도, 안타 하나면 역전도 가능하기에 홈팬들은 크게 환호하며 기대감을 올렸고, 몇몇은 투수교체를 생각하기도 했다.

“또 나오겠네.”

“X같은 애새끼 때문에 저쪽 코치도 바쁘다, 바빠.”

“에이, 어차피 좀만 있으면 우리가 알아서 끌어내려 줄 텐데, 그냥 계속 이대로 가면 안 되나?”

물론 지금의 찬스가 쉽지는 않을 거다. 9번타자가 올라오니까.

허나 최소한 저 투수가 맛이 갔고, 지금이 아니라도 공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들은 여유롭게 그라운드를 내려 보며 다음 상황을 예측했지만. 투수코치는 나오지 않았다.

이닝마다 수시로 마운드를 방문했던 포수도 지금은 그저 얌전히 홈 플레이트에 앉아만 있었고. 따지고 보면 지금이 오늘 경기에서 가장 위험한 위기일 텐데.

“어··· 포기했나?”

“그럴 리가 없잖아? 오클랜드한테 쟤가 얼마나 소중할 텐데.”

오클랜드는 미치도록 조용했다.

지금까지 골골거리던 투수 역시.

“스트라이크!”

뭔가 많이 달랐고.

깔끔한 초구. 바깥쪽 보더라인에 슬라이더를 툭 집어넣었고, 타자는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것으로 몰리는가 싶던 제구가 돌아왔다.

“스트라이크!”

서클 체인지업.

이건 여전히 좋아 보이긴 했지만, 급격하게 역회전하며 꺾이는 모습은 이상하게 전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리고 마지막 3구.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를 윽박지르는 하이 패스트볼. 그 순간 시작부터 지금까지 기분 좋게 이어왔던 흐름이 끊겼다.

그래, 이해할 수는 있다.

9번타자인데다가, 투아웃이니, 제법 탐스럽기는 해도 살리기는 쉽지 않겠지.

그렇기에 중요한 건 이번에도 아쉽게 날려 먹은 기회가 아닌, 투수의 피칭이었다. 뭔가, 뭔가 좀 달랐으니까.

“팔십···구마일?”

“어··· 맛이 갔던 거 아니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찍은 89마일의 최고구속. 무브먼트 역시 대단하리라.

배트가 하이 패스트볼의 및을 크게 헛돈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아까 전 2회 말과 비슷하다. 위기를 삼진으로 틀어막은 거니까. 멋들어진 전력투구로.

허나 그 느낌이 달랐다.

그때처럼 억지로 던졌다기보다는, 그냥 예전처럼 손쉽게 찍어 누른 쪽에 가까웠으니까.

무언가 상황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차올랐을 때쯤. 문득 전광판의 한 숫자가 눈에 박혔다.

“46··· 저거 맞아?”

“뭐가 사십육이라는- 어?”

“아니, 아니아니, 투구수가 왜 저거 밖에-”

Pitch.

전광판에 기록된 투구수의 옆에 적힌 46이라는 숫자. 그리고···

한바탕 잘 놀았다는 듯이 방금 전까지 지었던 불안한 표정을 집어치운 채, 질겅거리던 껌으로 풍선까지 불며 후련하게 웃는 투수.

그것이 눈에 보인 순간 싸늘한 감각이 뒷덜미를 스쳤고, 내내 원정팬들을 괴롭혔던 불안감은 이번엔 반대로 레인저스 팬들의 심장을 옥죄였다.

####

“와··· 이게 진짜 통하네. 난 진짜, 솔직히 설마설마했거든! Suck 너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브루스 맥스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아까 잘~ 해놓고 뭔 소리야?

“있기는 뭐가 있어. 그리고 너도 수고했다. 아주 실감나더라. 연기해도 되겠던데?”

“그야··· Suck 네가 시킨 대로만 했지. 근데 정말로 먹힐 줄은 몰랐고. 허··· 이게 되네.”

“앞으로 날 베드로라고 부르도록.”

베드로, 사람 낚는 어부.

투수에게 이것만큼이나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사람, 즉 타자를 낚고, 또 낚아야 하는 게 투수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완벽하게 베드로가 되었다.

‘손끝을 섞으니까, 정신을 못 차리네. 칠렐레팔렐레 거리면서 말이야. 아주 신이 나셨어?’

별건 아니고, 그냥 약 좀 친 거지.

원래 사기를 칠 때도, 상대방이 짝짜꿍을 해줘야 그게 가능한 거거든.

그냥저냥 적당~히 약하게 던지기도 하고. 종종 손가락 마디가 아니라, 예전처럼 손끝으로 찍어서 공을 던지기도 하면서. 물론 최대한 위험하지 않은 코스로. 그건 진짜 맞으면 넘어갈 테니까.

그렇게 몇 번 섞어서 던지니까, 아주 껌뻑 넘어오더라고.

‘대신 생각보다 좀 많이 맞았네.’

적당히 맞을 각오는 했지만, 4회 만에 여섯 개나 맞을 줄은 몰랐다.

위험하다 싶을 때는 출력을 올리거나, 은근슬쩍 투심을 섞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연기하다가 진짜로 두들겨 맞을 뻔했다.

그만큼 저쪽 타자들 흥이 올랐다는 뜻이겠지.

기분이 좋으면, 타격도 좋아지거든, 야구가 원래 멘탈 싸움이잖아?

‘그래도 그만큼 흥이 오른 덕분에 배트가 쉽게 나왔어.’

4회까지만 무려 열여덟 번의 타석이 돌았지만, 투구수는 겨우 마흔여섯.

이 정도면 아껴도 엄청나게 아꼈다. 거의 바겐세일 수준이지.

그도 그럴 것이,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들면서부터.

레인저스 타자들은 적극적으로 배트를 냈다.

삼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숭부가 2~3구 정도에 몰려 있으니까. 초구를 때리기도 했고.

‘마침 타이밍도 좋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직전 경기에서 무실점이 깨졌고, 그거에 빡쳐서 무리한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그 이전의 트윈스전은 실점만 안 했지, X나게 처맞았네?

약간의 의심만 더해주면,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그래도 노련한 타자가 많으니, 혹시 안 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리 사인을 맞췄다.

“그래도 잘했어, 적절하게 올라오던데? 딱딱 잘 맞춰서.”

“뭐, 네가 직접 신호를 주니까, 그것만 보고 있었지.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크~ 무슨 첩보 영화 같아서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그래그래, 참 수고 했다. 그래도 아직 긴장 놓지 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아, 그치 이제부터 시작이지. 열심히 받을 게! 마음 껏 던져!”

내가 목을 왼쪽으로 돌리면 포수 혼자 올라오고,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면 투수코치도 같이 올라오기로.

그렇게 올라오고 나면, 마운드 위에서 경기 끝나고 뭘 먹을지를 진지한 얼굴로, 아주 열심히 토론했다. 그래야 더 실감나잖아?

브루스 맥스웰은 가슴이 떨리는 건지,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흥분을 토해냈고, 그건 덕아웃에서 우릴 맞이한 투수코치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진짜 제대로 먹혔네. 길게 갈 거지?”

“길게 가야죠. 이렇게나 판이 잘 깔렸는데. 한 8회 정도? 잘하면 더 길게 갈수도 있고.”

“뭐, 그야 네가 앞으로 어떻게 던질지가 중요하겠지. 잘 아껴 쓰면··· 9회도 가능하긴 하겠네.”

오케이, 사실상 허락은 떨어졌구만.

이미 말했다시피 4회가 끝난 시점에서 투구수는 마흔여섯.

그걸 조금 다르게 말하면···

‘완봉 페이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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