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나이스 캐치! 나이스!”
어제는 영웅이지만, 오늘은 잉여인간이다. 쓸데없이 덕아웃 자리만 차지하는 거지.
그래도 가끔씩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루키 답게 열정적으로 응원하거나 소리치며, 응원단장이라도 하고 있는데.
‘어제는 8점이나 내더니, 오늘은 또 영 점수가 안 나오네.’
솔직히 말하면 그리 재밌는 경기는 아니다. 1회 초에 에인절스가 먼저 1점을 내고, 우리가 뒤이어 2점을 내며 역전한 뒤로는 쭉 점수가 이어졌으니까.
진짜 우리 타자들 좀 공갈포 끼가 있다니까. 너무 몰아서 쳐.
‘그래도 에인절스보단 낫지만. 아니지, 트라웃 없는 에인절스랑 비슷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트라웃이라도 있었다면, 그 양반 관찰이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못 나왔다.
햄스트링 부상이라고 하던데, 큰 부상은 아니지만, 몇 경기쯤 결장할 거라던가?
대충 다음 시리즈에 나올 테니, 우리로선 다행이지만, 진짜 심각하긴 하네.
‘이제 ERA가 0.19. 7이닝 1실점인데 ERA가 오르기도 하네.’
지지부진한 경기에 분석자료나 뒤적이다, 문득 내 성적이 눈에 걸렸다.
실점은 아무렇지 않다.
진짜다, 이미 말했듯 내가 실점한 것만 몇 번인데 그게 신경 쓰이겠어?
‘어제 삼진을 제법 잡아서 그런가, 탈삼진 페이스는 더 높아졌어.’
삼진을 많이 잡은 건···
그냥 잘 잡힌 거지. 내가 잡은 거냐? 타자들이 알아서 죽던데?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은데.
<실점에 대한 생각? ‘아무렇지 않다, 언젠가 끝났을 기록’ Go, 프로다운 마음가짐!>
└거짓말하고 있네.
└Go를 좋아하지만, 이건 거짓말 맞아.
└열 받아서 이 악물고 던지더니, 이제와서 그렇게 말해봤자···
다른 사람들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더라. 인터뷰 기사 보니까, 댓글이 저렇더라고.
이미 내 속이 훤히 보인다는 건데. 날 어찌나 잘 아는지, 아주 무서울 정도야.
“슬슬 약빨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단 말이야.”
인터뷰 좀만 하면 껌뻑 죽던 양반들이 이젠 내성이 생긴 건지 이젠 좀 안 먹히네.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내 혼잣말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브루스 맥스웰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충 손을 휘저으니 눈썹을 씰룩거리면서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는 끄덕였다.
아무튼 내 감정과 상관없이, 0이라는 아름답고 깔끔한 기록지는 이제 없지만···
‘무실점만 깨진 거지, 아직 충분히 괴물이네. 이거 내 성적 맞아? 실감이 안 나네.’
내 스탯은 대부분 항목에서 최상위권을 기록 중이었다. 아니, 전부 다 인가?
세이버메트릭스 계열의 2차 3차 기록이나, 그냥 심플한 클래식 스탯까지, 최상단에는 죄다 내 이름뿐이네.
오랫동안 이어왔던 0의 행진은 깨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조금 더 성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추가적인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고,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니, 그냥 없는 셈, 논외로 치던 아웃라이어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괴물로 평가하는 거지.
<여전히 ‘0점대’ 평균자책점, Go의 목표는 사이 영?>
그러다 보니 이런 기사들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고.
‘사이 영이라···’
어제 경기가 끝난 뒤부터 저런 예측이 올라왔다. 내가 ROY(Rookie Of the Year) 즉 신인왕이랑 사이 영 상을 올해 둘 다 거머쥘지도 모른다는 건데.
신인왕이야 이미 예전부터 압도적인 컨탠더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사이 영이 언급된 건. 정확하게 말해서, 애슬레틱스 팬들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진지하게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4월이 마친 시점부터, 후보군은 이미 나왔다. 크리스 세일이나 코리 클루버, 댈러스 카이클이 주로 꼽혔었지.
정작 4월 이달의 투수 수상자인 나는 루키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에 제외됐고.
근데 이젠 제법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나도 당당히 후보 중 하나로 인정하고, 그 이름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여전히 좀 애매하긴 하지.’
정작 나는 좀 회의적이다.
무실점 깨졌잖아.
기록 날렸다고 징징거리는 게 아니라, 이미지의 문제다.
트윈스전에서 내 첫 번째 이미지, 압도적인 괴물 투수의 이미지가 벗겨졌다면.
이번 타이거즈전에서는 그런 트윈스전에서도 유지되었던 ‘난공불락’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졌거든.
특히 타이거즈의 노인네들이 해냈으니, 다른 타자들도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타석에 임할 거라는 뜻이지.
물론 여전히 성적은 좋고, 또 추가적인 실점은 철저하게 막았기에 절대로 루키라고 방심하지도 않을 거고.
“와··· Suck 넌 진짜 사는 세계가 다르네··· 사이 영 가능하겠는데?”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옆에 앉은 브루스 맥스웰은 내가 살펴보면 성적표를 흘끔 훔쳐보더니 그저 감탄사만 뱉었다.
넌 좀 안 가냐?
자리도 넓은데 왜 내 옆에만 앉아. 오늘은 다시 스티븐이 출장했는데,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브루스 맥스웰은 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이런 말 좀 나온다고 마냥 좋아하기 보다는, 꿈은 크게 가지더라도, 현실적인 목표를 잡아야지.”
괜히 부추기는 반응에 흔들려서 억지로 힘을 쓰다간, 제풀에 지쳐서 넘어질 테니까.
“오~ 마인드가 다르긴 하네. 멋진데? 역시 잘하는 선수는 멘탈부터 다른 건가? 그럼 Suck 네가 원하는 현실적인 목표는 뭔데? 신인왕? 아니면··· 적당히 풀시즌?”
“풀시즌은 이젠 목표가 아니라 의무지. 다른 것도 아니고 1선발인데.”
사이 영은 좀 그렇고.
지금 성적과 앞으로 떨어질 페이스를 감안하고, 목표를 잡았다.
“대충 20승 200삼진 정도? ERA는 한 3점대 중반? 아니 초반쯤이면 좋겠네.”
볼넷이야, 그냥 상황 보고 판단하는 거니까, 목표로 잡기는 뭐하고. 대충 저 정도쯤 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음, 완벽해. 딱 좋아, 아주 적당한 목표야. 이 정도는 내 노력하에 가능하지.’
나는 내 나름대로 빅리그 첫해로 딱 만족스러울 것 같은 목표를 말했는데, 브루스 맥스웰은 표정이 조금 기괴해졌다.
“···어, 20승 200삼진이면··· 그냥 보편적인 사이 영 페이스 아니야? ERA만 좀 낮춰도 그냥 받을 것 같은데.”
“몰라, 나보다 더 잘하는 놈 나오겠지. 아무튼 사이 영은 좀 그렇고, 그냥 딱 이 정도면 돼.”
“현실적인 목표라며?”
왜? 얼마나 현실적이야.
알아, 다른 투수라면 커리어하이나 다름없는 기록이라는 거.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할 정도의 기록은 아닌 것 같거든.
‘아무리 상대 타자들의 마인드가 달라진다 해도, 최소한 전반기 동안은 가능한 페이스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난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잡지 않는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득점지원의 운빨도 따라줘야하는 승수는 몰라도 나머지는 비벼볼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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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5월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반복성이 사라졌다는 거지.
나는 법을 준수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반복성이 없는 그저 오락을 즐겼고.
“두고 봐! 니 경기에 내가 안타라도 하나 치는지! 아주 죄다 죽어버릴 거야!”
“그럼 또 팬들한테 욕이나 먹겠지. 수고해라. 수고들 하슈.”
음, 역시 풍족하단 말이야.
이틀 뒤에는 아주 든든~하게 마운드에 오르겠어.
“또 땄어? Suck, 너 그냥 야구 때려치우고 전 세계 카지노 투어를 하는 게 낫지 않아? 진지하게 그쪽이 더 많이 벌 것 같은데.”
“내가 잘해서 땄나, 쟤들이 더럽게 못해서 딴 거지.”
마커스 시미언의 참 더럽게 무서운 협박을 뒤로하고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1차전 등판이라,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위치의 좌석인 내 옆 칸에 앉은 자렐 코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겼다.
두둑하게 쌓인 봉투 하나를 쓱 던져주니, 아주 입이 찢어지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 실력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놈의 양키들은 도대체 인내심이라는 게 없다는 게 중요하지.
살짝만 긁어도 내가 뭘 들고 있든지 상관없이 무작정 눈 까뒤집고 올인 박거든.
‘그나저나 이번에는 번호 좀 딸 수 있으려나?’
이번 경기 상대는 레인저스다. 원정 3연전이고, 나는 그중에서 2차전에 등판하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는 못하다.
일단 콜리시엄을 떠나고, 글로브 라이프로 간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들도 아주 기를 쓰고 덤벼들 거거든.
‘날 잘근잘근 씹어 먹으려고 하겠지.’
별건 아니고, 지난번에 개발렸잖아. 5.2이닝 동안 퍼펙트에다가, 6이닝 1피안타 13삼진으로 말이야.
거기다 때마침 내 무실점도 깨졌으니, 적극적으로 때리려고 할 거다.
그저 그런 타자들이 기어오르는 거라면 대충 때려잡으면 되는데, 몇몇 놈들이 문제지.
‘미친놈들인가?’
자료를 확인한 순간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정확하게는 두 명이 문제다.
먼저 로빈슨 치리노스.
현재는 백업포수 정도인데.
열두 경기 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비율스탯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장타율은 주목할 만했다.
왜냐고? 7할이 넘거든.
그게 왜 가능하냐면···
‘안타가 10갠데, 그중 5개가 홈런이네.’
2루타도 하나 있고.
단타보다 장타가 더 많네. 파워는 확실하다는 건데, 미친놈이구만.
분석팀 예상으론 내 경기에는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주의해야겠지, 아무튼 이 친구도 좀 그렇지만, 진짜 괴물은 따로 있다.
“얜··· 뭐지?”
“왜 그래? 뭐 문제라도?”
“아니, 뭐, 너도 내일 좀 조심해라.”
“왜? 레인저스 타격감 좋아보여?”
“어, 몇몇은. 특히 조이 갈로 조심하고.”
“아, 걔는 이미 들었어. 미친놈이던데, 맞지?”
“그래, 정확하게 아네.”
자렐 코튼도 인정하는구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지만, 여유로운척 하려면 표정이라도 좀 펴라.
내일 막 등판할 선발투수한테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괜한 공포를 줬어.
조이 갈로.
현 레인저스 타선에서 가장 문제인 놈이다. 파워가 좋지만, 공갈포 끼가 심해서 저번 경기에서는 쉽게 잡은 타자인데.
‘완전히 만개했네.’
여전히 성적을 보면 공갈포 같지만, 사실 이쯤 되면 공갈포가 아니라. 그냥 좀 예열이 많이 필요한 초대구경포라고 봐야겠지.
‘안타가 23개인데 홈런이 열 개, 2루타가 넷, 3루타가 하나.’
이번 달에만 벌서 홈런을 네 개 쳤네. 그래도 이쪽은 서른여섯 경기나 나와서 장타율이 극단적이진 않지만, 뭐 이런 새끼가···
‘프로틴으로 밥 해먹고 사나?’
제아무리 글로브 라이프라도, 장타를 억제할 자신은 있지만, 이 두 놈은 솔직히 모르겠다.
특히 조이 갈로는···
맞으면 그냥 골로 가겠네.
진지하게 로키스로 트레이드 되거나 FA되서 쿠어스에서 뛰면 60홈런도 찍겠는데? 한 100안타 안쪽으로 넉넉하게 끊겠어.
아무튼 둘 다 사이클이 바짝 선 것 같으니, 이 둘을 가장 조심해야겠지.
‘실점하고 연이어서 홈런까지 맞을 수는 없지.’
무실점 깨지더니, 루키 답게 멘탈에 타격을 받아서, 흔들리는 것 같다는 언론의 개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거든.
‘타격 사이클도 좋고, 나도 기세가 안 좋아 보이니 아마 적극적으로 휘두를 텐데···’
부웅, 부웅 큼직하게 휘두르는 레인저스 타자들을 떠올리며, 잠깐 입맛을 다시던 찰나,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추가 실점은 깔끔하게 막았고, 아주 타이거즈를 갈아 마시긴 했지만, 그걸 조금 다르게 보면···’
오케이, 기왕이면 좀 쉽게쉽게 가야지.
안 통하면 별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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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추민수는 상대편 덕아웃을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같은 지구 팀이니, 앞으로도 계속 만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후배랑 밥 한 끼는커녕, 번호도 제대로 교환 못 했으니까.
지난 경기에서, 자신들을 아주 때려잡다 시피하며 굴욕을 선사했기에, 팬들 눈치가 보여 그냥 넘어갔는데.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것도 아니고, 괜히 같은 나라 후배라고 챙기는 게 촌스럽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적당히 알고 지내도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오늘 경기 끝나면··· 아, 내일 등판하지. 그럼 오늘도 좀 그렇겠어.’
기분 좋게 경기에서 이겼고, 팬들 반응도 좋으니, 오늘이 딱인 것 같지만, 하필이면 또 내일 등판을 앞뒀기에 다시금 기회를 다음으로 미뤘다.
어쨌든 그렇게 기분 좋은 1차전 승리를 가져간 뒤. 그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레인저스 선수단은 약간은 미묘했다.
“쟤 무실점 깨졌다며?”
“그래도 무시는 못하지.”
“삼진이 78개던가? 미친놈이네. 진짜 300삼진 가겠는데?”
“에이, 딱 보면 몰라? 저렇게 오버페이스 하는 애들은, 여름 되면 알아서 자빠져.”
저번 경기의 복수를 하자!
근데 좀 트라우마도 남았다.
복수도 복수지만, 분명 그때 더럽게 잘 던졌으니까.
무실점이 깨졌으니, 멘탈이 터졌을 거다! 여전히 성적은 좋고, 실점만 했다 뿐이지, 타이거즈를 아예 씹어 먹던데?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 탓에 상대 투수를 보는 타자들의 마음은 복잡했고, 후배 대신 투수를 맞이한 타자로서 경기의 첫 타자로 올라온 추민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구가 아주 날이 선 것 같던데, 보더라인에 착착 걸치면서.’
최근 좀 내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선구안만큼은 여전히 자신감 있다.
스스로 자부하는 가장 큰 장점이니까.
그러니 투수에게 자신이 얼마나 까다로운 타자인지도 잘 아는데. 반대로 저 녀석 역시 타자에게 대단히 껄끄럽다.
공도 묵직한데다가, 실투가 거의 없을 만큼 제구가 안정적이고, 날카로우니까.
스트라이크존을 잡는 것 역시-
“스트라이크!”
굉장히 칼 같고.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시작부터 딱 걸친 코스의 포심.
리드오프로 나온데다가, 또 살짝 나간 것 같아서 지켜봤는데, 역시나 스트라이크.
이 정도면 기계나 다름없지.
‘이야~ 진짜 존이 눈에 보이나? 영진이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왜 이리 제구가 좋아.’
초구에 불과했지만, 단순히 운이 아니라, 제대로 노린 코스란 걸 알기에 허탈한 감탄사마저 나온다.
어쨌든 칭찬은 여기까지고.
그 외의 초구는 애매하다.
저번 경기와 여러 분석 영상에서 느꼈던 것과 조금 달랐으니까.
‘구속이 84마일. 좀 느린가?’
구속도 평소보다 느리고.
저번 경기에서 타이거즈를 때려잡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무래도 그때 좀 흥분한 것 같기는 하던데··· 아니, 아니지.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까, 말리지 말고, 집중하자.’
퍼뜩 정신을 붙잡은 추민수였으나, 뒤이어 던진 공들에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볼!”
“파울!”
볼 하나, 파울 하나.
투 스트라이크 원 볼로 카운트 자체는 밀렸지만···
‘볼은 완전히 나간 코스였고, 3구는 좀 몰렸어. 그리고 느낌도 좀 애매하고.’
진짜 뭔가 문제라도 있나?
한번 의심이 생기니, 왠지 표정도 달리 보였다. 약간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대부분 경기의 초구는 몸쪽 포심으로 넣는 편이다. 확실하게 전력투구로 던지고.
죄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던지면서 타자의 기선을 제압했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제구싸움으로 갔지.
‘배트 한번 내보자.’
참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투구수를 끌어내는 것도 중요하나, 결국 상대 투수의 오늘 컨디션을 확인하는 것이 리드오프의 역할이기에 그는 배트를 꽉 틀어쥐었다.
그리고 마지막 4구.
“아웃!”
낮에 깔리는 포심.
쭉 들어오긴 했고, 여전히 그 힘이 대단하다. 배트가 징~하고 울릴 정도로.
먹힌 타구가 둔중하게 떠올라 3루수의 글러브 안으로 착 안착했고, 그걸로 원아웃이 올라갔지만, 최악의 결과는 아니었다.
“Choo, 어때요? 대기타석에서 볼 때는 좀 느낌이 다르던데. 저번 경기처럼 개자식 같아요? 아, 코리아 후배였지, 그, Bad boy에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엘비스 니가 본 것처럼 좀 다르더라. 포심이 여전히 무겁긴 한데, 그래도 저번보다는 힘이 덜해.”
슬쩍 귀에 속삭여주니, 2번타자 엘비스 앤드루스는 감사를 표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은 그랬는데···’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서, 엘비스에게 말했던 정보를 전파한 추민수는 묘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봤다.
약간의 의심도 들었지만, 곧이어 엘비스가 넉넉한 안타를 때려내며 불식시켰다.
씩씩하게 잘 던지고, 똑똑한 후배라서 내심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역시 좀 흥분해서 무리했었던 건가?
‘길게 봐야지, 기록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후속타자들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 탓에 아쉽게도 1회부터 득점을 올리진 못했으나.
이닝이 끝났을 때, 타석에 나갔던 타자들은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 진짜 좀 가벼운데?”
“가벼운 것까진 아니고, 아무튼 저번 경기보단 덜하더라. 구속도 덜 나왔지?”
“어, 한 1~2마일 정도?”
“트윈스전에 안타 많이 맞았던데, 혹시 그때부터 떨어진 거 아니야?”
“그런 걸 수도 있겠네.”
“저번에 아주 신이 났던데, Choo, 오늘 후배 좀 때려도 되지?”
“마음껏 때려. 나도 손맛 좀 볼 생각이니까.”
“그럼그럼, 원래 애들은 강하게 키워야지.”
시작부터 기분 좋은 감각이 선수단에 흘렀고, 승부욕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마음속에선 대신 자신감이 차올랐다.
저 망할 놈의 애송이에게 지난 경기를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갚아줄 찬스가 왔으니까.
그 달콤함에 취해, 눈이 가려진 것 때문인지, 그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덕아웃으로 향하던 고유석의 입가에 피어난 은은한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