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민정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식 입장에서 부족함을 찾기 힘든 가정이었다. 성격도 지금과 달라 사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업 성적이 좋아 원하는 대학, 원하던 과에 합격해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때 사달이 났다.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들이닥쳤다.
가구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다.
한순간에 사업이 망한 것이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재기하고자 백방으로 뛰었고, 어머니가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지만 더 이상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어음 부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나중에 알았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지만 빚이 빚을 부르다 결국 처음에 진 빚조차 갚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습니다.”
생각보다 망하기 쉬운 것이 사업이란 놈이다.
잘나갈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제대로 망하면 아파트에서 단칸방으로 옮겨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가족으로 여길 만큼 친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데도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 탓에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민정호가 냉혹한 현실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아버지까지 사고로 몸져누웠다.
어머니 홀로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민정호 역시 방황이 아닌 삶을 택했다.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학비조차 댈 수 없었고, 설령 마련한다고 해도 아버지의 치료비를 빼면 입에 풀칠조차 힘들었다.
피난을 가듯 군대를 가야 했다.
도리어 상황이 나빠졌다.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생활고에 지친 어머니마저 몸져누웠다.
걱정과 불안 속에 제대했고, 민정호를 기다린 것은 가장의 역할이었다. 먹고살아야 해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기적처럼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장학금 명목으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 일부까지 제공했다. 그 돈에 힘을 얻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간신히 대학을 마쳤다.
하늘은 무정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나뿐인 아들의 졸업식도 기다리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도가 난 어음을 손에서 놓지 못하며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상속할 재산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상속 포기로 빚을 떠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포기하지 않았었습니다.”
충격 때문인지 어머니마저 암에 걸렸다.
아니, 초기에 병원에 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민정호는 어머니의 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사회 초년병 입장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치료 비용에 또다시 빚을 졌다. 첫 직장을 얻어 가족의 고생을 덜 수 있다는 기쁨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희망고문이었다.
일과 간병을 병행하며 어떻게든 어머니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말기 암은 씻기지 않을 한을 남긴 채 너무도 쉽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고의적인 부도였고, 부도를 낸 사람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처음 알았습니다. 저 혼자 어떻게 할 사람들이 아니더군요. 그때 완전히 무너질 뻔했습니다.”
피해자 집안은 풍비박산 나는데 가해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말았다. 지난 인생을 보상받을 길도 없었다.
증오만이 남았다.
세상을 원망했다.
밤마다 술에 빠져 살았다.
결국 직장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힘조차 잃은 상태였다.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만 쌓여 갔다.
죽음마저 뇌리를 스쳤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실행을 앞둔 그 순간!
불현듯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떠올랐다.
이름만 간신히 알 뿐 얼굴은 물론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학비를 건넨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이런 나를 몇 년 동안이나…….’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도와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살아라!
굴하지 말고 네 인생을 개척해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독하게 마음먹었다.
이미 직장을 잃은 후였기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밤낮을 잊고 최선을 다한 결과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재능까지 발견했다.
사업적 수완이 있었다.
부도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 때문인지 돈 관리에 누구보다 철저했고, 일단 계약을 맺으면 절대 어기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감정을 배제하려 노력하며 누구보다 냉철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결국 인정받았다.
보다 큰물에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하늘의 뜻인지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부도 어음을 건넨 자들과도 연결이 됐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복수라는 감정이 치솟았다.
“정말 처절하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나락에 빠진 모습을 보며 비웃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치밀한 사람도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실제 실행에 들어갔고요. 그런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상대는 조무래기가 아니었다.
민정호로서는 상상도 못할 거대한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이 배후에 있었다. 더군다나 그 모든 재산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생을 짓밟아 쌓아 올린 부였다.
섣불리 나섰다간 역으로 당하고도 남았다.
참아야 했다.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웠다.
더욱 냉철하게 행동했다.
“자료를 모으다 보니 상습적으로 부도를 내고 돈을 챙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를 가진 사업가들도 상당한 피해를 봤더군요. 그런 놈들이 어떻게 발각되지 않았는지 의아했고, 누군가 뒤를 봐주고 이득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고 또 캤다.
마침내 핵심을 찾아냈다.
진상건이었다.
단,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어 도리어 측근이 되기를 자처했다.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지만 주변과의 관계가 너무 복잡했고, 자료 자체를 교묘하게 은폐시켜 꼬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표면적인 충성을 다했다.
일단 계약을 하면 어떤 성격의 일이라도 완수한다는 확신까지 심어 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계약 이상의 돈을 원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참 희한하더군요. 그때 진상건이 재단과 병원을 이용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진씨 일가가 핵심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됐고요.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던 저로서는 선대 이사장님부터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얼굴 없는 은인이 바로 선대 이사장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했고, 어머니는 말기 암으로 곁을 떠났다.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행동을 미룰 때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했다.
당시에 경험한 진상건의 행태를 볼 때 내부에도 조력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언제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 몰라 선대 이사장의 아들인 신현수는 물론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개인적 인연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다행히 신현수조차 아버지의 남모를 선행을 알지 못해 어떤 연결 고리도 없었다.
오직 계약에만 충실한 것으로 위장했다.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진상건을 몰락시킬 생각이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이후 경과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민정호의 행동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선행으로 인한 인연과 병원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한데 맞물리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물론 민정호의 능력이 더해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으로 세상 참 묘했다.
진상건과의 악연과 선대 이사장과의 인연이 겹치고 겹쳐 병원과 수많은 직원들을 구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선대 이사장님의 재산을 생각하면 장학금 자체는 결코 큰돈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원이 가능할까? 박재순 회장님의 기부가 우연이 아닌 것처럼 결국 그 속에 담긴 뜻이 이런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스스로 영향받는다는 사실이었다. 별생각 없이 행한 조그만 선행 하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 누가 알까?
잠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준영 교수가 상념을 깼다.
“민 부원장, 고생했어. 고맙다.”
“왠지 후련합니다.”
“생각대로 멋진 사람이다.”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웃었다.
민정호로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왜 이러지? 왜 낯설지 않을까?’
돌연 눈가를 붉혔다.
자식이 홀로 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이준영 교수와 민정호의 관계가 밀접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웃었다.
‘불행했던 일은 지나간 기억으로 족합니다. 평생 가슴에 묻고 살 필요가 없어요.’
자신의 과거를 털어 냈다는 것은 민정호도 더 이상 지난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개인사마저 비슷한 구석이 있어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민 부원장님, 오늘 한 말 비밀인가요?”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선대 이사장님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 신 교수는 알아야 할 텐데 어쩌죠? 하루 이틀 보고 끝날 사이도 아닌데 손 교수나 진충기 선생님도 무척 서운해할 것 같고요.”
민정호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이준영 교수님이 계신 자리라 말씀드린 겁니다. 선생님, 일어나시죠. 부원장님, 그럼 이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일이 분명했다.
평생 입이 근질거릴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실타래가 풀렸다.
병원 일도 마찬가지였다.
산더미처럼 몰려드는 일과 하나뿐인 몸에 제대로 진행시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 어느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건물 공사가 끝났다.
내부 시설 설치 및 조경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기한 내에 모두 끝날 상황이었다.
직원 선발도 완료됐다.
원장, 부원장 이하 임원들은 물론 각 과의 과장까지 모두 선임했다. 교수진 보강 및 펠로우와 전공의 선발 문제가 남았지만 개원에 영향을 줄 수준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 체계도 그에 맞춰 변해야 했다.
이식을 제외한 모든 파트가 본관으로 옮겨져 명실상부한 이식 전문 센터로 운영될 것이다. 한동안 췌장 파트 일부와 소아외과를 이끌어야 하는 김지훈의 동선이 무척 길어질 테지만 말이다.
물론 종합 병원 개원 전까지 전문 병원의 일상이나 업무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도리어 김지훈, 손일석, 진충기 교수와 떨어져 본관에서 근무해야 하는 신현수와 이경석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후배 사인방, 신임 교수들, 이젠 확실하게 세부 전공 파트를 정해야 하는 펠로우까지 치열한 나날을 이어 갔다. 종합 병원은 그들에게 또 다른 기회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건물 다르다고 인연이 달라지니? 어차피 다 한 식구고, 다 라이벌이다. 라이벌. 천천히 하자. 천천히.”
불을 지르는 건지, 마는 건지.
“김 교수, 신 교수, 손 교수, 이 과장, 진 교수, 너희들은 모두 라인 만들어도 좋다. 선배 챙겨 주고 후배 끌어 주는 라인, 동료와 협력하는 라인, 자리에 욕심내지 않는 라인 좋다. 좋아. 난 경석이 라인이다. 경석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지금의 생각과 가치관을 잃지 말고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써전이 되라는 말이었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써전은 없을 것이다.
실제 전문 병원의 마지막 날까지 피 튀기는 경쟁이 이어졌다. 신현수가 공여자 라파로를 집도했고, 손일석은 신장 이식을 시작했다. 진충기 교수는 수혜자 파트는 물론 이식 센터 전반을 확실하게 아울렀고, 이경석은 대장 파트를 다시 시작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드디어 종합 병원 개원을 목전에 두었다.
전 직원이 출근해 개원 즉시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 근무 장소를 옮겨야 하는 의료진과 직원들로 어수선했던 전문 병원 건물도 평상을 되찾았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모든 의료진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병원 전경을 바라보았다.
“결국 우리의 바람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우리 어깨가 무겁다.”
“내일 개원식에서 하실 말씀은 준비하셨습니까? 이사장님, 귀빈 축사, 중앙 의료원 원장님 다음이던데요. 박재순 회장님 기념관 설립 축사도 하셔야 합니다.”
나직한 숨이 터졌다.
답답함이 아니었다.
스승도, 제자도 가슴 벅찰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