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27화 (1,327/1,329)

13화

신현수의 근무가 시작됐다.

하루 종일 참관만 했다.

그런 시간이 일주일이었다.

오인방에게 약속했던 일을 진행해야 하는 탓도 있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메이저, 마이너 수술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더없이 진지했다.

고요함이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이었다.

수술 내내 실력 있는 써전이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불러왔다. 김지훈마저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몰라도 윤서연의 눈빛이 차츰 누그러졌다. 신현수의 표정은 한결같았지만 마음은 분명 편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주가 시작됐다.

신현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업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펠로우들과 긴밀하게 상의하며 세컨에 이어 퍼스트를 섰다. 사인방도 놀랄 정도로 겸허한 태도와 배우겠다는 말 속에 담긴 무게가 집도의들을 더욱 분발하게 했다.

“어후! 혈관 수술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망정이지 생각보다 훨씬 부담돼. 꼭 엄한 선생님 앞에서 시험 보는 것 같아. 우리가 이 정도니 후배들은 죽어나겠어.”

“신 교수 눈빛이 보통 매서워? 송진우 선생하고 한수영 선생은 식은땀을 다 흘리더라.”

“미운 시누이 쫓아냈더니 엄한 시어머니 오신 꼴이지, 뭐. 후배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김 부원장하고 신 교수가 동시에 들어가 지켜보는 불상사는 피해라.”

“누가 시어머니야?”

“왜 번지수까지 틀려 가며 발끈하고 그래? 김 부원장은 시누이야. 시누이.”

눈을 흘기던 김지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집도하고 싶다는 말은 못 들었어?”

“대단한 말도 아닌데 목소리는 왜 깔아? 손이 근질근질할 텐데 입도 벙긋하지 않더라. 폭풍 전 고요라더니, 현수가 정말 칼을 물은 것 같아. 눈치로 짐작하건대 이준영 선생님이 곧 주실 것 같긴 해.”

“스승님께서?”

“이준영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하는 의사가 누구야? 수술 잘하는 놈이 열정과 의욕까지 충만하면 아예 물고 빠시는 분이잖아. 잘 알면서 왜 그래?”

타당한 말이었다.

환자와 제자가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 뚜렷한 원칙하에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니 신현수에게 모든 신경을 쓰고도 남았다.

굴러 들어온 수술을 마다할 신현수도 아니었다.

김지훈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손일석이 이죽거렸다.

“설마 초조한 건 아니겠지?”

“전공의 때도 아닌데 초조하긴 뭐가 초조해? 도리어 현수가 공여자 수술을 어떻게 할지 기대를 하고 있어. 스타일이 다르니까 라파로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긍정적인 마인드 좋네. 가슴이 찢어져도 그런 마음으로 쭉 살아. 난 우리 김 부원장님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신장 문제로 바빠서 먼저 간다.”

“나름 신경 쓰고 있어.”

“손에 잡히기 전에는 내 것이 아니다. 신 교수처럼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세요.”

“이사장 빽하고 부원장 빽이 같아?”

“전직이 아무리 화려해도 현직보다 못하다던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하여튼 알아서 최선을 다해 주세요.”

홀로 남은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신현수가 온 이후 여유 시간이 제법 많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자잘한 문제들도 쌓이면 꽤 골치 아팠었는데, 그런 문제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

고마웠다.

더군다나 이젠 보다 넓은 시각에서 신현수를 볼 수 있었다. 라이벌이란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지만 외과 전체로 보면 이만한 힘이 없었다.

‘빨리 공여자 수술 받고, 다른 수술 모두 두루 손에 익히길 바란다. 이왕이면 개원 전에 공여자 라파로는 물론 수혜자 수술까지 했으면 좋겠다. 위장 파트를 진일보시키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의사의 직능이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지만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같은 과라면 자신의 분야에 전문적이면서도 다재다능한 써전만큼 환자에게 큰 득이 될 의사가 없었다.

김지훈이 무지막지한 일복에도 불구하고 복강경을 이용한 간 공여자 수술과 췌장 수술을 시행하고, 소아외과까지 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몸이 힘들어도 그만한 대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끌고 나아갈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런 경쟁에 참가한다면 발전이 가속화될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그 시간 내내.

송재덕 교수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평소와 달리 수술 방에서도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필이면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의사인지 잘 알면서도 최근 고성문의 일을 아는 이들 모두 내심 일말의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김지훈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송재덕 교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 일반외과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고, 실제 몇몇 일은 함께했다.

이준영 교수와 수시로 얼굴을 맞댔다.

때마다 김진호 교수도 함께 자리했다.

다른 이유 없었다.

종합 병원에 근무할 의료진이 속속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인사 위원회의 결정은 공정했고, 능력이 검증된 인재가 많아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기업으로 따지면 임원진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누구를 앉힐지 결정하는 일은 온전히 현 원장과 차기 내정자의 몫이었다. 신현수가 이사장을 그만두면서 절대 변경할 수 없는 권한으로 못 박은 일이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다.

“이 교수, 부원장은 이미 김 교수로 내정됐지만 진료 부장, 수련 부장, 응급실 부장부터 간호 부장과 과장까지 기한 내에 인선을 해야 되는데 생각해 둔 사람 있어?”

“진료 부장은 내과에서 맡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수련 부장은 김대성 선생이 어떻겠습니까?”

“또?”

“응급실은 고민을 해 봐야겠습니다.”

“간호 부장은?”

“현 간호 부장과 과장이 그대로 맡았으면 합니다.”

“고 과장의 나이가 젊긴 하지만 경력이 충분하니까 문제없겠네. 이 교수,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이라지만 최종적으로 이사회 승인이 필요한 건 알지? 그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식으로 결정하면 순조롭게 승인이 날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후우! 한 가지만 부탁하자. 한 가지만. 원장은 결정권자인 동시에 눈과 귀를 모두 열고, 발로 뛰어야 하는 사령탑이야. 사령탑. 누군가를 말로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서면으로 충분하면 얼마나 좋겠어? 얼마나? 이 교수를 잘 아는 사람이야 이해하겠지만 세상 사람이 다 똑같아? 말수 좀 늘리자. 말수 좀. 김 원장, 그래? 안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필요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믿는다만 원장 자리가 만만치 않아. 하다못해 안건 하나를 두고도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아야 하는 때도 있어. 그걸 원만하게 처리하는 일이 쉬운 줄 알아? 어렵다. 어려워. 욕먹기 딱 좋다. 좋아. 이 교수가 제일 싫어하는 정치력이 요구된다는 말이야. 정치력이.”

왜 모를까?

송재덕 교수의 조언은 금쪽과 같았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때론 주어진 권한이 주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원장을 몇 번이나 연임하는 동안 잡음 한번 나지 않았고, 손가락질받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가 돼서도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고쳐야 할 점은 고쳐야겠지.’

“많이 도와주십시오. 김 원장에게도 부탁해.”

송재덕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후우! 의사인 게 죄다. 죄.”

어떤 조직이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존경받고, 승진을 거듭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칙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병원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준영 교수만큼 본연의 일에 충실하고, 인정받는 의사가 없었다. 그런 의사가 원장이 되는 것이 당연하건만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초지일관 환자만 보는 의사.

재단이든 사람이든 소위 빽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경멸 혹은 무시하는 의사.

자기 자신은 물론 선후배 모두에게 원칙을 강조하며, 좌고우면하지 않는 의사.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가치관이 변해 가며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는 원장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전문 병원의 확장이라 할 종합 병원 개설이라는 특수한 상황, 김지훈의 강력한 요청,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의 지지가 맞물리지 않았다면 평범한 대학 병원 교수로 머물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송재덕 교수라는 예외적 인물도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자수성가 혹은 입지전적이라는 말에 더욱 의미가 담기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송재덕 교수의 의도는 명확했다.

환자와 관련된 업무를 대폭 줄이면서까지 종합 병원 개원 전에 전체적인 틀 및 일반외과 체계를 확고하게 정립시키고자 했다. 동시에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에게 걸리는 하중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까지 있었다.

이경석과의 자리가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경석아, 내년부터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 결정하자. 이런 일은 과장이 하는 거다. 과장이.”

“종합 병원 개원 전에 저를 포함해 센터장까지 인사이동은 없습니까?”

“개원 초에 발생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연임해야지. 연임.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과장 일만 하자. 과장 일만.”

“알겠습니다. 이준영 교수님과 김 부원장도 함께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장, 부원장, 과장 모두 각자 자리에 맞는 일만 하면 된다. 그래야 지치질 않지. 게다가 우리 과 대장은 과장이야. 과장. 경석아, 네가 우리 과 대장이다. 대장.”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상의 내내 이경석 얼굴이 편안했다.

하나둘 결정이 났다.

이식 센터 센터장-진충기 교수.

간 이식 파트장-서도진.

신장 이식 파트장-손일석.

최철한, 유석재, 홍재순, 오하석 등의 선발이 확정됐다. 더불어 각 파트에서 요구하는 신임 펠로우 정원 및 전공의 선발 인원까지 결정했다.

차기 원장과 부원장으로서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모든 사항을 절차대로 보고받았다. 다른 과의 요구나 건의 사항이 모두 취합되는 즉시 재단에 적극 요구하기로 했다.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동안 어수선하겠지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원장과 부원장이 거의 모든 일을 논의하고 결정해야 했던 기존 전문 병원 체계와 확실히 달랐다.

‘신 교수와 송재덕 선생님의 힘이 정말 어마어마하네. 평생 신세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하하! 우리 마님이 드디어 대학 병원 간호 과장님이 되시네.’

고맙고, 즐거웠다.

민정호가 빠질 상황이 아니었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의 조직을 비교 검토해 최대한 효율적인 행정 조직 구성과 인원 편성을 제안했다. 공식적인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했고, 재단 역시 별 이견 없이 승인할 것이다.

김지훈이 넌지시 물었다.

‘함께 고생했고, 행정적 부분에서 절대적인 공헌을 했는데 이제 와 나 몰라라 하고 그만두지는 않겠지?’

“민 부원장님, 연봉만 병원 전체 급여 체계에 맞춰 조정하면 될 것 같은데 계약서 다시 쓸 필요가 있을까요? 이젠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왕이면 기한도 정하지 맙시다.”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농담 비슷하게 던진 말이었다. 항상 진지한 민정호였기에 오히려 이런 식으로 의중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반면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준영 교수가 있는 자리였다.

민정호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제가 필요하십니까?”

“말하면 입만 아프죠. 민 부원장님이 없으면 종합 병원이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원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민 부원장은 우리 동료야.”

역시 이준영 교수였다.

단 한마디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았다. 여전히 냉철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민정호도 무엇인가 느꼈는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은근히 초조한 시간이었다.

이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계약서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어? 뭘 다시 작성해요?”

“새로 개원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기존 직원들 모두 근로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 합니다. 원장님과 부원장님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런 거구나.”

약간 비틀긴 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농담이나 회피를 모른다는 면에서 이준영 교수와 거의 비슷해 사실상 확정이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은근슬쩍 의향을 떠본 후 어떻게든 붙잡을 속셈이었는데 너무 쉽게 결정됐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물어봐도 되겠지?’

“저도 감사드립니다. 계속 함께 일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민 부원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후부터 느낀 건데, 왜 전임 이사장과 등을 돌렸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제는 말해 줘도 되지 않습니까?”

민정호의 입가가 살짝 말렸다.

“아직도 궁금하셨군요. 전임 이사장이 있었을 때는 몰라도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닙니다. 단지 초반에는 제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전임 이사장의 부정과 횡포를 막았는데 그보다 옳은 일이 어디 있어요?”

“때론 상대가 정말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 감정이 깊숙이 개입된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보장도 없고요.”

무엇인가 심각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이준영 교수 역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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