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은근히 긴장되는 나날이었다.
신임 이사장이 선출됐다.
송재덕 교수의 사임과 동시에 신임 원장이 임명됐고, 서울 병원 일반외과의 빈자리를 채울 교수 선발까지 모두 완료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생각 이상으로 빠른 진행이었다.
신현수의 의지기도 했다.
‘단단히 마음먹었네. 춥다. 추워. 몸만 오면 끝나는 일이 아닌데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정규 수술을 모두 끝낸 김지훈이 우연히 마주친 윤서연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부부만큼 서로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윤 교수, 신 교수는 언제 온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찬바람이 씽씽 불었다.
‘어? 설마 혼자 결정했나?’
“상의 안 했어?”
“난 반대하는데 고집을 안 꺾어. 김 교수, 생각해 봐. 내가 신 교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어느 쪽이 더 정상적인 결정이겠어? 이사장 한 명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대가니 어쩌니 하면서 내팽개치는 게 옳은 일이 아니잖아. 솔직하게 말해서 신임 이사장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대비를 했겠지.”
“사람을 겉만 보고 알 수 있어? 문제가 생겼다고 아무 때나 복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 내가 반대하는 걸 빤히 알면서 어떻게 일정까지 앞당길 수가 있어? 서울 병원에서 수술하면 어디가 덧나? 이혁민 선생님하고 같이 수술하면 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김 교수는 어떻게 생각해?”
김지훈이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한쪽 편을 든다는 낌새만 보여도 된소리 들을 판이었다.
“왜 말이 없어?”
“내가 결정하거나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 화부터 내지 말고 신 교수하고 진지하게 얘기해 봐. 써전으로서 인생을 살겠다는데 윤 교수도 그런 면은 이해…….”
순간 윤서연의 눈에서 번개가 쳤다.
“써전의 인생?”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누가 들어도 신현수 입장이었다.
말 잘못했다.
“다른 의사는 인생이 없어? 결혼을 했으면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몸만 달랑 오면 되는 일도 아니고, 애들이며 챙겨야 할 집안일은 또 어떻게 할 거야? 김 교수도 고 과장님과 상의 없이 막 결정해? 이게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꼭 해야 할 일이야?”
이렇게 말이 긴 윤서연을 처음 보았다.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유탄에 맞아 죽을 지경이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망갔다간 신현수 편이라 생각할 것이 빤했다.
처절한 보복을 당하고도 남았다.
가뜩이나 수술이 많아 마취과에게 항상 미안한 상황이었다. 냉혹한 마취과 의사로 변신해 수술 스케줄로 트집을 잡아도 할 말이 없긴 했다.
무조건 아쉬운 쪽이 외과였다.
‘윤 교수가 그럴 리 없지만 오늘은 정말 분위기가 안 좋네. 김지훈, 조심하자. 무조건 윤 교수 편을 들어야 해.’
김지훈이 급격히 태세 전환을 꾀했다.
“그런 면이 있지. 윤 교수 말이 맞네.”
“윤 교수, 너무 흥분하지 마. 몸에 해롭다.”
“아니긴 한데…….”
말로 여자 이기는 남자 흔치 않다.
하물며 부부 싸움에 휘말린 꼴이었다. 살 맞대고 사는 고경아 마음도 다 모르는데 윤서연의 말에 제대로 맞장구를 칠 턱이 없었다.
말꼬리 흐려지다 못해 사라졌다.
마침 고경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신현수가 들어야 할 말을 대신 고스란히 들을 뻔했다. 역시 김지훈의 구세주는 고경아였다.
“윤 교수님이 왜 저렇게 화가 나셨대요?”
“후우!”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고경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날 수밖에 없죠. 신현수 선생님도 최소 윤 교수님 동의를 받고 움직이셨어야지 너무하셨네요.”
“그렇긴 한데 신 교수 입장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나도 부원장 자리를 좋아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상황이 다르지만 현수가 부럽기도 해요.”
어디선가 찬바람이 또 불어왔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고경아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부원장 그만두시고, 수술에만 전념하시겠다고요?”
“행정적인 일이 만만치…….”
“내가 희연이 키우는 일부터 집안일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한마디 안 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요? 지훈 씨 잘되는 걸 내 일처럼 생각하면서 꾹 참고 살아왔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지훈 씨가 원장님까지 하길 바라요. 희연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죽도록 고생한 보상은 받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냥…….”
“집에 가서 우리 진지하게 얘기해요.”
김지훈이 식은땀을 흘렸다.
신현수 상황이 남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아내의 말에 동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구절절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밤늦도록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해결 방법은 단 하나였다.
부부 싸움을 크게 한 적은 없지만 일단 의견 충돌이라도 생기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아내였다.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일이 아닌 이상 얌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정과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아오며 터득한 삶의 지혜이기도 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명분과 자기 위안이라 해도 좋았다.
더구나 사람과 사람의 차이, 남편과 아내의 차이 그 무엇이 됐든 고경아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상반된 입장에도 불구하고 신현수와 윤서연의 생각을 옳고 그름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경아 씨도 나 때문에 희생하는 일이 많은데 한가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큰일 났다.
쫓겨나지 않는 한 부원장은 물론 원장까지 쭉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고경아 앞에서는 항상 경계했던 야망을 가져야 할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돌연 웃었다.
‘그래. 우리가 뭐 그리 특별하다고.’
평범한 일로 생각하면 절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내비게이션과 더불어 꼭 들어야 할 여자 목소리 중 하나가 아내의 말이라는 농담이 새삼 떠올랐다.
***
드디어 신현수가 전문 병원에 입성했다.
단지 한 명의 써전이 다시 합류한 것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의 행보와 맞물리며 일반외과 전체에 다양한 의미를 전했다.
무엇보다 사인방이 다시 뭉쳤다.
첫 근무를 시작하기 전 일반외과 핵심이 모였고, 신현수의 요청으로 진충기 교수까지 참석해 사실상 오인방으로 확대됐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 전에 신현수의 말부터 들어야 했다.
다들 왜 시간을 앞당겨 오게 됐는지, 종합 병원 개원 전까지 어떤 방식으로 근무할지 구체적인 생각을 듣고자 했다. 추측이 난무했지만 들은 소리에 불과해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고, 여기저기에서 말이 나온다는 사실도 잘 알지만 내가 할 말은 써전으로 살고 싶었고, 써전으로 살겠다는 말 단 하나야.”
단호했다.
이사장 자리까지 버리고 서울 병원이 아닌 전문 병원으로 온 이유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눈빛까지 보였다.
손일석이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써전으로 살겠다는 말에 답이 다 들었네. 그럼 개원 전까지 파트 구분 없이 수술에 참여한다는 것도 사실이야?”
“각 파트 주임 교수들이 허락한다면.”
결국 오인방의 결정에 달렸다는 말이었다.
이경석이 눈가를 굳혔다.
“펠로우들이 한 건이라도 더 수술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야. 위장 파트가 정식으로 진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굴러온 돌일 수도 있고, 송재덕 선생님과는 사정이 달라. 집도를 못할 수도 있어.”
“후배들을 누르면서까지 집도에 욕심 부릴 생각이 없습니다. 참여만 하게 해 준다면 만족합니다.”
“참관만 가능해도?”
“라파로부터 간 이식까지 배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라도 더 알면 내 분야에 도움이 많이 될 테고요.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김지훈을 비롯한 참석자에게 일일이 시선을 준 이경석이 과장으로서 결정을 내렸다.
“좋아. 파트가 다른 이상 진료까지 할 수는 없지만 수술 참여는 최대한 협조할게. 단, 지금은 신 교수보다 펠로우나 전공의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알겠습니다.”
“응급실 당직은 서야 돼.”
“내 환자가 없으면 섭섭할 텐데 잘됐습니다. 당직 스케줄에 바로 넣어 주세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예전이었으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됐지만 지금은 위치가 달라졌다. 하나의 과 혹은 파트를 책임져야 하는 이상 전임 이사장이라고 해도 특혜를 줄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친한 친구 혹은 선후배라는 사실은 더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내심 감탄을 했다.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듣기 껄끄러울 수도 있는데 경석이 형이나 현수나 정말 깔끔하게 정리하네. 어쨌든 새로운 활력인 것만은 확실해. 덕분에 내 일도 많이 줄어들겠어. 조금만 도와줘.’
여전히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행정적인 문제도 산적했다.
탁월한 써전의 능력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신현수는 정말 강한 힘이 될 것이다. 당장 펠로우에게도 커다란 득이었다. 퍼스트는 몰라도 세컨을 서며 쌓이는 피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기대 섞인 눈초리를 놓치지 않았다.
“김 교수, 부원장 업무에 관한 일은 사절이야.”
“뭐?”
“이사장 일 하면서 탈모가 왔을 지경이야. 남는 시간 모두 온전히 수술에 투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 소중한 경험을 왜 낭비하려고 해? 재단 이사라면 최소 종합 병원에 관한 업무 정도는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이사장 자리는 내놓았지만 엄연히 이사회 일원이야.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신경 쓸 수밖에 없어. 내 역할은 이사회까지야.”
선을 딱 그었다.
아예 고개를 돌리며 화제마저 바꿨다.
“과장님, 내년 일반외과 교수 선발이 곧 확정될 겁니다. 예비 명단을 드릴 테니 의견 있으시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인사 위원회에 적극 건의하겠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서울 병원을 오가려면 힘들겠지만 결국 우리 병원과 과를 위한 일이니까 힘닿는 선에서 노력해 줘.”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진충기 선생님, 수혜자 수술에서 배울 바가 정말 많을 것 같습니다. 힘드시더라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우리 파트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센터 운영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이사회 차원에서 해결 방안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손 교수, 신장 이식 센터에 관한 일은 이사회에 이미 협조 요청을 했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만 상당히 기대하고 있으니까 순조롭게 진행될 거야.”
“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한 명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 준다면 나야 바랄 것이 없지. 예전에도 일 잘했지만 이사장 하더니 일 처리가 시원시원해졌네. 신 교수, 믿을게.”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여기서 끝?’
이경석의 과장 업무, 진충기 선생의 센터장 업무, 손일석의 신장 이식 센터 개설 업무까지 가장 힘들고 굵직한 문제들을 거론했다. 써전 신현수가 아닌 이사장을 지낸 재단 이사 신현수로서 말이다.
가장 일이 많은 자신에 대해 한마디 더 나오길 기대했건만 여지없이 깨졌다. 공적인 대화는 곧바로 마무리됐고, 사적 대화가 이어졌다.
‘어후! 부원장 일도 좀 도와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릴 리 없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화기애애해지고, 웃음꽃이 만발했다. 급기야 첫 근무 날의 수술 스케줄까지 꺼내 어떤 식으로 참여할지까지 논의했다.
김지훈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눈가를 좁힌 채 한편이 된 네 명의 배신자를 노려보다 말고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현수가 신경 쓴다는 일 모두 일정 부분 내가 관여해야 할 일이잖아? 눈에 안 보여도 확실히 내 일이 주네. 어후! 현수까지 돌려 말하면 어떡하나.’
히죽히죽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손일석이 혀를 찼다.
“빨리도 깨닫네. 부원장님이 일은 참 잘하시는데 가끔 불안불안해요. 이 정도면 신 교수가 꽤 신경 쓴 거 아닌가? 나이와 직위에 맞게 머리 좀 씁시다.”
“허험!”
헛기침만 터졌다.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이었던 신현수도 이사장 직무를 수행하며 많이 변했다. 하긴 김지훈을 부원장 자리에 앉힐 때도 어딘지 모를 음흉함과 노련함이 엿보이긴 했다.
김지훈도 기분 좋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복수의 기회를 찾으며.
궁리 끝에 한 가지 찾았다.
자리가 끝나고 난 후 슬그머니 치명적인 약점을 강하고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윤 교수가 화 많이 났더라. 확 불을…….”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다.
“우리 이혼하면 네 책임이다.”
헉!
단도직입적이다.
안 변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