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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322화 (1,322/1,329)

8화

고성문이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환자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 같지 않아?”

“술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데 그렇게 보이십니까?”

“술은 빼고, 청각장애인이란 사실만 생각해 봐. 자기 가슴을 저렇게 심하게 두드리며 행패 부리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어. 술 마시다 아프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야. 내 눈에는 통증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여.”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말씀을 들으니 그렇게도 보이네.’

간 이식을 받고 술을 마신 환자에게 정신이 팔려 간과했을 수 있었다. 일단 문진이 필요했고, 수화가 가능한 사람이 없는 이상 필담만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어어! 어어어!”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펠로우마저 쩔쩔맸다.

지금도 술 냄새가 나는 데다 점점 통제가 불가능해져 신경질이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당장 환자를 진정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고성문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김 교수, 환자가 겁에 질렸거나 흥분 상태라면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거야. 내가 환자를 봐도 될까?”

김지훈이 잠시 고민했다.

응급실 경험이 적은 써전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의사 경력이 짧은 김지훈과 손일석이지만 각지에 산재한 병원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환자를 접했다. 그만큼 환자를 다룰 자신이 있었지만 왠지 고성문이 가장 적합한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십시오.”

볼펜과 종이를 받아 든 고성문이 환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떤 상태인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진정시켰다.

쉽지 않았지만 고성문은 끈기 있게 환자와 소통했다. 연륜에서 나오는 노련함이 빛을 발하며 환자의 격한 행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픕니까?-

-가슴이 답답합니까? 아픕니까?-

-언제부터 아팠습니까?-

-숨 쉬기가 곤란합니까?-

환자가 거칠게 글씨를 썼다.

하나하나 답이 나왔다.

김지훈과 손일석의 안색이 변했다.

호흡곤란을 동반한 흉통이었다.

행패에 가까운 행동의 이유가 보였다.

술 냄새에 극심한 고통 및 호흡곤란이 가려졌다. 청각장애 탓에 아무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이 가져온 혼란이자 공포였다.

환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무서워요.-

질환 하나가 떠올랐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외쳤다.

“펠로우 선생, EKG(심전도) 찍고 확인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내과 펠로우가 곧바로 심전도를 찍었다. 나직한 기계음을 따라 심장박동의 이상 유무를 알려 주기 시작했다.

심전도 검사는 무척 간편하다.

환자에게 힘들지 않고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 상당히 유용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무조건 맹신하면 안 되는 검사였다.

따라서 심전도 그래프가 정상적으로 보여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유의해야 했다.

반대로 의미 있는 변화가 관찰되면 거의 100퍼센트 심장 질환이 있다는 의미였다.

즉각 대처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결과가 나왔다.

펠로우의 안색이 확 변했다.

“선생님, 심근경색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

김지훈이 심전도를 확인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심근경색 발생 전 유의미하게 나타나는 소견이 확연하게 관찰됐다. 환자의 증상을 고려할 때 심근경색 전 단계라는 것이 확실했다.

심장 혈관이 막히고 있다는 말이었다.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몰랐다.

어떤 혈관에 문제가 생겼는지 정확한 진단이 필요했고, 유일한 치료는 막힌 혈관에 스탠트를 넣는 시술인 혈관 확장술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문제는 전문적인 치료가 가능한 순환기 내과는 물론 필요한 장비마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근방에 위치한 제법 큰 병원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즉시 서울 병원으로 이송합시다. 인턴 선생, 함께 가면서 환자 잘 관찰해.”

응급실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앰뷸런스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송했다.

환자는 잦아들지 않는 고통과 호흡곤란에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고, 서울 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늦지 않았다면 살 것이다.

단 일 분이 환자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었다.

그런 환자를 단지 술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 하나로 간과했으니 자책하고도 남았다. 더구나 우선적으로 고려했어야 할 청각장애마저 무시했다.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환자에게는 심근경색 발생 자체가 치명적이었다. 하기에 빠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건만 고성문이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응급실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덕분에 환자 본인은 물론 병원도 큰 위기를 넘겼다.

김지훈이 숨을 몰아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왜 우리 눈에는 안 보였지?’

일이 안 되려면 바로 눈앞의 것도 안 보인다지만 의사에겐 적용하기 힘든 말이었다. 심지어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마저 같은 판단을 내렸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다 떠나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했다.

고성문이란 써전이 다시 보였다.

재야의 고수란 말을 공연히 듣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과 인품을 갖춘 덕만이 아니었다.

종합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의 경험은 깊고 전문적이지만 다른 과 환자 치료에 맹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단적인 예로 약간만 파고들어야 해도 외과 의사가 내과 질환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반면 개인 병원은 훨씬 다양한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 얕은 대신 넓고, 자신의 과에만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물론 하나하나 쌓이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며 스스로 배우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리어 시야가 좁아지고도 남았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비록 외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수술조차 모두 하지 못하는 개인 병원 의사지만 고성문은 그런 장점까지 갖춘 써전이었다.

본받아야 할 의사가 분명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덕분에 환자 한 명 살렸습니다. 앞으로 술 취한 환자라고 절대 등한시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네는 외과 환자만 주로 보니까 놓칠 수 있어. 그래서 다른 과가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개인 병원은 달라. 종합 병원과는 다소 다른 기본이 필요해. 난 그 점에 충실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순간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 일로 인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성문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의사였다.

자신의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기에 칼을 잡고, 안 잡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사를 믿고 찾아온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며 적절하게 치료한다면 그 이상의 존재 의미는 없었다.

‘메스를 놓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써전이기 전에 의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송재덕 교수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그러고 보니 인턴 막 시작할 때 내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바이탈 다루는 건 마찬가지라면서 열변을 토하셨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틀렸나요?”

“내가 언제? 송 원장은 실습 돌기 시작했을 때인데 학생에게 그런 말을 했겠어?”

“우리 과로 방향 트시면서 날 꼬셨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내과 예찬론자가 외과 예찬론자로 변했는데 어떻게 기억을 못하겠어요? 그때 내과 하셨어도 좋았네. 김 교수, 손 교수,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그치?”

고성문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환자 놓치고도 그런 말이 나와?”

“허험! 잘 해결됐는데 왜 그러세요? 그러려고 선배가 있는 거지, 괜히 있나? 괜히. 에이! 못해 먹겠네. 이 교수, 자네는 뭐 한 거야? 응? 뭐 했어? 왜 말이 없어? 왜?”

송재덕 교수가 투덜거리며 이준영 교수를 끌어들였다. 무뚝뚝한 얼굴이 슬그머니 돌아가며 먼 산만 바라보았다. 마치 아득히 먼 옛날 전공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나이 먹을 만큼 먹어도 선배와 후배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은 까마득한 후배였다.

입 잘못 놀렸다간 된소리 먹을 것이다.

약속 시간까지 지났다.

고경아와 고경희가 기다린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서둘러 앞장섰다. 아직도 고성문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이 사위 두 명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했다.

간만에 가족이 모였다.

즐거운 얘기만 해도 모자랄 판인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든든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였다.

딸들은 눈시울만 붉혔다.

고성문이 즐겁게 웃었다.

“희연아, 정훈아, 할애비하고 고기 먹자.”

희연이와 정훈이가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 고성문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무뚝뚝하고, 살가운 말을 하지 않아도 가슴속 깊은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따스한 손, 예뻐 죽겠다는 눈빛만이 아니라 먹기 좋게 자른 고기 한 점에도 사랑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을 하지 않아도 좋고, 표현을 하면 더 좋은 것이 사랑일지도 몰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면 단 한마디 말에도 사랑이 실려 있을 테니 말이다.

한 잔 두 잔 술이 오고 갔다.

고경아와 고경희도 간간이 웃음을 보이며 점차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고성문의 미소도 점점 진해졌다.

“자자! 더 취하기 전에 한마디만 합시다.”

모두들 웃고 떠들면서도 한 사람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용해졌다.

“이 일 저 일로 겸사겸사 왔지만 축하하고 싶은 일이 네 가지나 있어요.”

뭐가 그리 많을까?

“우리 셋째 사위, 손 교수가 신장 이식 센터를 추진하게 돼 정말 기쁩니다. 어떤 장기를 이식해도 혈관 수술이 기본이지만 이제야 자기 자리를 찾는다는 생각도 들고요. 신기동 교수도 저만큼 기뻐할 겁니다. 손 교수,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겠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잊지 마. 내실을 기했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손일석이 무척 진지했다.

김지훈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스승인 신기동 교수와 함께 혈관과 신장 이식에 매진하고 싶었던 손일석이었다. 뜻하지 않은 일로 전문 병원을 개설하게 됐고, 그 탓에 진로를 바꿔야 했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애초 김지훈이 원했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손일석이 나아가고자 한 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고성문도 써전이기 때문에 그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항상 미안했던 일이었다.

‘아픈 손가락! 미안하다.’

“한 사람의 써전으로서 우리 둘째 사위, 김 교수가 오늘 공여자 수술을 라파로로 성공한 것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간담췌 분야에 있어 항상 선도적인 위치에 서 있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낯 뜨거운 칭찬이었다.

“김 교수, 잘 알고 있겠지만 김 교수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원동력은 이준영 교수와 손 교수를 비롯해 함께한 동료들의 힘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기를 바라.”

“명심하겠습니다.”

“더욱 노력하고, 연구해서 수혜자 수술까지 라파로로 할 수 있겠지? 환자와 의사로서의 명예까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으면 해.”

“노력하겠습니다.”

고성문이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스승님과 이 교수에 이어 대가라는 소리를 곧 들을 수 있을 거야. 자만을 경계하라고 하고 싶지만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믿는다.’

고성문의 시선이 딸들에게 향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우리 두 딸도 정말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요? 김 교수와 손 교수가 자신의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두 딸의 헌신과 노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어요. 경아야, 경희야, 고맙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정말 고마워서 그래.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아버지의 사랑을 왜 모를까?

자식을 키우며 고성문에게 아쉬웠던 일, 원망스러웠던 일까지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모 역시 자식 키우는 일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필이면 이런 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이 뭐 특별한 날인가? 내게는 수많은 날 중에 하루일 뿐이야. 가장 축하하고 싶은 일이 남았으니까 아닐 수도 있겠네.”

고성문이 기분 좋게 웃었다.

모두들 바짝 귀를 기울였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마저 궁금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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