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21화 (1,321/1,329)

7화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송재덕 교수였다.

오늘은 모두 예고 없이 찾아오기로 한 날인 모양이었다. 반가운 사람이 분명했지만 순간 장인어른의 얼굴과 은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겨우 일 년 차이시구나.’

티를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원장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여기 앉으시죠.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뭘 이렇게 당황해? 커피는 됐어. 나이 먹는 게 벼슬이 아니라더니 변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 시간에 먹으면 잠이 안 와요. 잠이. 마침 민 부원장도 여기 있었네? 잘 지내지?”

“예. 별일 없습니다.”

“원장님, 커피 대신 차라도 타 올까요?”

“녹차가 낫긴 한데 그놈이 그놈이야. 민 부원장, 내년에는 부원장실에도 직원 한 명 배정해. 일도 많은데 손님 올 때마다 커피까지 직접 타야겠어? 그런 사람은 한둘이면 충분해. 한둘이면. 귀하게 대접해야 할 사람은 미리미리 신경 쓰자. 말이 안 된다. 말이.”

종합 병원으로 확대되면 규모와 직위에 걸맞도록 당연히 지원될 것이다. 다만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이와 직위에 따라 행동거지가 달라지는 것처럼 대접도 달라지는 게 맞아. 커피 탈 시간에 한마디라도 더 나누는 게 낫다. 그게 세상이야. 세상. 그나저나 김 부원장, 오늘 수술은 잘됐니? 잘됐지?”

“다행히 잘 끝났습니다.”

“그래.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나 교수가 라파로에만 전념해서 실력이 만만치 않았을 거야. 후배 잘 키웠다. 잘 키웠어. 일전에 소식 듣고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준비하는 병원이 있더라. 먼저 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앞서가는 것이 좋겠지. 그치? 내 말이 맞지?”

김지훈이 조용히 듣기만 했다.

전공의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는 송재덕 교수였다. 감사한 마음뿐이었지만 장인어른의 은퇴와 맞물린 탓인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민정호도 단박에 알아챈 사실을 송재덕 교수가 모를 리 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아는 이상 이미 연락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술 잘됐고, 환자 잘 깨어났다면서 얼굴이 왜 그래? 누구 죽었니? 죽었어?”

송재덕 교수가 웃고 있었다.

말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금 장인어른이 우리 병원에 와 계십니다.”

“그 양반 사위 자랑 못해서 안달이더니 또 왔구나. 또 왔어. 나 같으면 모른 척하고 기다렸을 텐데 말이야. 그래야 멋지잖아? 멋을 몰라요. 멋을. 그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이제 수술을 안 하신다는 말씀 때문에 그러니? 그게 뭔 대수라고 죽을상을 하고 있어? 죽을상을. 입장이 그렇긴 하겠다. 입장이.”

알고 있었다.

평생 메스와 함께 의사 생활을 했고, 이제 자신도 다르지 않은 상황을 앞뒀건만 애석하거나 서운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으시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실 텐데 일부러 태연한 척하시나?’

“착잡합니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원장님은 큰 스승님 밑에서 수련까지 함께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김 부원장,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야. 모든 일을 현명하게 결정하려 애를 쓴다는 말이지. 고성문 선생님은 누구보다 현명하신 분이야.”

‘현명하신 분!’

“평생 올바르고 정직한 의사로 살아오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실 분이야.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실 거다. 수술해야만 의산가? 청진기만 들어도 의사는 의사야. 오히려 축하드려야 할 일이야.”

누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하지만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봤고, 거의 같은 세월을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고성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다들 자신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같아도 결국 같은 마음이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은퇴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이유가 없었다.

유독 김지훈이 힘들어하는 까닭은 외과 대선배이자 장인어른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더불어 송재덕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가장 힘든 분이 아버님일 텐데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일석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아. 웃자.’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제이의 의사 생활을 시작하시겠죠?”

“말해 뭐 하니? 구십까지 사시면 구십까지 환자를 보실 양반이야. 눈이 침침해져도 고집을 부리시면 어떡하지? 의사도 정년이 있어야 되는데 큰일이다. 큰일.”

“설마 그때까지 환자를 보시겠습니까?”

“사위가 돼서 장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면 어떻게 해?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다. 아암! 그러고도 남지. 내가 그래서 잘 알아. 잘.”

“원장님도요?”

“왜? 난 안 되니? 은퇴하면 집에 그냥 처박혀 있으라는 말이야? 육십이래 봐야 청춘이다. 청춘. 청진기 들 힘만 있으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뭐가? 내 얼굴 쭉 보고 싶으면 생각 잘해야 한다. 잘.”

결국 웃음이 터졌다.

진료가 가능할 때까지 환자를 보겠다는 말이 왠지 위안이 됐다. 자리를 잡지 못한 후배들은 선배들의 욕심이라며 삐딱하게 볼 테지만 상황 나름일 것이다. 사실 올바른 인성과 선배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췄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진정시켰다.

송재덕 교수는 분명 고성문의 은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와 함께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가족끼리 저녁을 먹기로 한 사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지?’

생각해 보니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의 결정에 맡기면 된다.

“원장님, 장인어른은 만나셨습니까?”

“빨리도 묻는다. 이 교수 방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이 먹은 사람끼리 만나면 할 말이 더 많은 법이야. 간다. 수술 잘 끝내서 좋다. 좋아. 우리 경석이는 뭐 하나? 뭐 하고 있을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송재덕 교수가 민정호와 함께 교수실을 나갔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왕이면 좋은 면을 찾아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환자 치료도 마찬가지였다.

‘안심했다가 일이 터지는 경우가 있고,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을 한 환자가 오히려 아무 문제 없이 퇴원하는 걸 생각하면 굳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생각할 이유가 없겠지.’

다소 기운을 찾았다.

환자도 힘을 주었다.

박소영의 혈색은 나빠지지 않았고, 수혜자 수술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 교대 시간이 돼 고경아의 근무도 끝났다.

잠깐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경아 씨, 아버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알았어요. 희연이 데리고 경희와 식당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 봐요.”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나 김지훈은 똑똑히 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을.

돌아서며 눈가를 훔치는 모습을.

세월에 눌린 아버지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식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랑받는 딸이었다. 고성문은 김지훈에게도 아버지와 다름없었지만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이지만 걱정이네.’

김지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조용히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하는 편이 훨씬 좋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잠시 혼자 정리할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얼굴을 감쌌다.

‘희한한 날이네.’

재야의 고수라는 말을 들으며 의료계에 큰 족적을 남긴 써전 한 명의 삶이 바뀌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날, 정상을 향해 달리는 의사 한 명이 또 한 번 의미 깊은 걸음을 내디뎠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일어났고, 벌어질 일이었다. 모두의 말처럼 순리이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지훈에겐 정말 복잡한 하루였다.

일과가 끝났다.

손일석과 함께 약속 장소로 내려간 김지훈이 발걸음을 서두르다 말고 멈칫거렸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고성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 모임인데 같이 가시나?”

“장인어른이 두 분 모두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식사 같이하자고 하셨는데 내가 말 안 했나? 우리끼리 가면 송재덕 선생님 삐진다. 곤란해.”

“하긴 경아 씨나 처제나 기분이 울적할 텐데 분위기가 어두워질 수도 있겠네. 선생님들과 함께 얘기하시는 것이 더 편하실지도 몰라.”

“김 부원장도 얼굴 펴. 메스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우리도 장인어른 나이 정도 되면 자연스럽게 칼을 놓지 않겠어? 공연히 후배 키우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가자. 기다리신다.”

고성문은 웃고 있었다.

송재덕 교수는 여전히 활기찼고, 이준영 교수의 무뚝뚝한 얼굴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시려 왔다.

‘스승님도 은퇴를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이겠지?’

“가자. 가자. 우리 손 교수가 추천한 집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자. 손 교수, 확실한 집이지? 나이 들면 입까지 짧아져요. 입까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함께 막 응급실 앞을 지날 때였다.

난데없이 고성이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응급실에서 이 정도 목청으로 고함을 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술 취한 사람, 행패 부리는 양아치들의 해결사, 바로 오만석이었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나칠 수 없었다.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했다.

양해를 구하고 응급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술을 마셨어?”

아들의 간으로 생명을 연장한 사람이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술을 마시고 내원했다. 더구나 공여자 수술을 한 의사가 오만석이었다.

“부원장님이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아프다고 여기를 와요? 진료 거부로 신고해도 좋으니까 돌아가세요. 우리는 살려고 하는 사람만 치료합니다.”

“나 환자입니다. 아픈 배부터 치료하는 게 의사가 할 일 아닙니까? 신고하라고 하면 못할 줄 알아요?”

고성이 오고 갔다.

평소라면 몇몇 환자가 있어 김지훈이든 손일석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간 이식 파트 구성원이었다.

멀쩡한 간을 잘라 낸 공여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간이 망가진 환자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땀을 쏟는지 몸으로 느끼는 의사들이었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상황을 전해 들은 이준영 교수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만석이 으름장이 아니라 실제로 진료를 거부해서라도 확실하게 해결하기를 기다렸다.

모두들 환자가 빤히 보는 위치에 서서 지켜만 보았다. 어떤 의사도 자신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길 바랐다.

또 한 명의 환자가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어어어! 어어어!”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시뻘게진 얼굴로 인턴에게 행패를 부렸다. 명찰을 잡아 뜯으며 청진기까지 잡아채려 해 진료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과 펠로우가 개입해 간신히 불상사를 막는 상황이었다.

차트를 보니 청각 장애인이었다.

내원할 때부터 소리를 질러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술 냄새를 풍겼다는 사실에 동정의 여지조차 없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두 명이 난장판을 만드네. 술 먹었으면 곱게 집에 갈 일이지, 응급실에는 왜 와? 술이 웬수다. 웬수.”

“그동안 이런 환자가 없어 편했는데 슬슬 시작하는 모양이다. 내년에는 어떨지 모르겠네.”

별의별 환자가 다 오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그동안 전문 병원이란 간판 때문인지 잠잠했는데, 환자 잘 보기로 소문이 난 데다 종합 병원 개원까지 앞두고 있어 온갖 군상이 다 모여들 판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씁쓸하다 못해 썼다.

‘에휴! 답답하다.’

궂은일도 경험이었고,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후배들이 쌔고 쌘 병원인 이상 이준영 교수는 물론 손일석이나 부원장인 김지훈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사실 오만석 한 명이면 충분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경찰까지 부를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 오 교수에게 맡기고 가시죠.”

다들 잊을 만할 때마다 겪은 일이기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응급실을 나왔다.

그때 고성문이 눈가를 좁히며 발길을 멈췄다.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김 교수, 손 교수, 이상하지 않아?”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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