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 강병옥도 자극을 받았다. 중간에 끼어 애매모호한 위상을 가졌지만 그 덕에 도리어 운신의 폭이 넓었다.
“우린 각자 알아서!”
“파트상 안 교수는 김지훈 선생님, 서 교수는 휘플 라파로까지 하는 마당이니까 나 교수를 도와줘야겠네. 나하고 강 교수는 어디로 가지?”
“이런 일에 빠지면 뒤처지기 십상이야. 마음이 가는 부분에 붙어서 최대한 공유해야 돼.”
“전 송진우 선생하고 수련을 같이했고, 이런저런 일로 인연이 꽤 깊으니까 소아외과 라파로 준비에 참여하겠습니다.”
“강 교수는 그게 좋겠다.”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마치 두 편으로 갈린 것처럼 저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까지 공유하며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기본에는 김지훈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완벽에 가깝게 준비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잘돼 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 교수에게 준비를 맡긴 일 정말 잘했다. 다들 많은 자극을 받았어.”
“전 스승님의 말씀을 따른 것뿐입니다.”
“먼저 얘기한 건 내가 아니야.”
“전 단지 생각만 말씀드렸습니다. 손 교수도 스승님 도움에 펄펄 날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항상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준영 교수가 긴 숨을 내쉬었다.
‘아예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는구나.’
단독 후보인 데다 새롭게 추천받은 인사도 없어 사실상 원장직을 수락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일반외과 내부와 외부의 일을 가리지 않고 이경석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와 상의했다. 결국 은연중 모든 일이 자신의 결정이라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그물을 친 것이다.
스승을 힘들게 하는 제자이건만 어느 하나 탓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오히려 제자를 힘들게 하는 스승이 될 것이다.
이준영 교수가 돌연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렇게 하마.”
“우와! 이런 말씀 처음 듣습니다.”
“임기 동안만이다.”
“이 년이 어디입니까?”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드디어 지난 시간 간절히 바랐던 일이 이뤄졌다. 스승은 원장으로서, 제자는 부원장으로서 이 년이란 기간 동안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경험을 가진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까지 합류해 힘을 합친다면 종합 병원의 미래가 한층 더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천군만마였다.
‘스승님, 원장직은 단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죠? 쭉 연임하시다 중앙 의료원 원장님까지 하셔야 합니다. 제가 잘 보좌하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카르페 디엠!
***
이 주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바닥에서 시작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반외과가 가진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물론 써전의 실력을 감안해야 했다.
간 이식이든 소아외과 복강경이든 집도의의 능력이 요구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머릿속 구상에 그칠 공산이 높았다.
그런 면에서 전문 복강경 파트 개설, 전문 병원을 표방했음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혈관 외과,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 시행은 신의 한 수였다.
기한이 꽉 찬 날.
김지훈이 나종진과 머리를 맞댔다.
나종진이 두 가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의 산물을 꺼내 들었다. 침착하게 모든 항목을 검토한 김지훈 역시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일반외과 구성원의 생각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제안이었다. 조금 더 다듬어 구체화시킨다면 실제로 적용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어떠십니까?”
“몇몇 부분만 보완하면 될 것 같아. 며칠 같이 작업한 후 주말 집담회에서 발표하자.”
나종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자신이 아는 한 최고의 써전인 김지훈이 동의했다면 이미 구부 능선을 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기울인 노력과 동료들의 도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남은 문제는 단 하나였다.
누가 새로운 길을 먼저 뚫어야 성공 확률이 높을지가 관건이었다. 입을 열려던 나종진이 입술을 깨물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공여자 파트가 아니라고 해도 누가 최초로 시도해야 하고, 안정성이 입증될 때까지 수술해야 할지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문제다. 라파로로 간 절제부터 혈관 처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써전은 단 한 명뿐이다.’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이론과 실제는 별개라고 말을 하지만 절대 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준비했으면 수술을 하는 것이 맞고, 지난 기간 라파로에만 매진한 결과를 스스로 봐야지.’
“소아 수술 가능 목록을 보니까 어른으로 따지면 마이너 수술이 대부분이네. 송진우 선생과 함께 이 부분을 맡아 진행하는 데 문제없겠지?”
“예? 우리가 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초반에만 같이 수술한다고 이미 말했는데 뭘 그렇게 놀라? 이 상황에서 내가 소아 라파로까지 맡아 할 수가 없잖아.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 교수가 송진우 선생 교수 만들어야 돼.”
“이미 확정된…….”
“누가 그래? 우리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진우가 아니라 진우 할아버지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이야. 앞으로 라파로만이 아니라 나 교수가 가진 모든 걸 알려 줘야 할 거야. 송진우 선생에게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면 나 교수도 책임을 면할 수 없어. 명심해.”
나종진이 훅 숨을 내쉬었다.
분명 과장된 말이지만 솔직한 말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핵심은 송진우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교수이자 선배로서 후배를 책임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이 뜨뜻미지근하다. 힘들어?”
“아닙니다.”
“대신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은 초반에만 신경 써도 돼. 물론 직접 참여를 안 한다고 해도 안 교수와 오 교수까지 라파로로 시행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거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나 교수가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속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어.”
나종진이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을 보았다.
엄청난 수술의 준비를 맡겼다.
집도 여부를 떠나 첫 시도부터 시작해 안정될 때까지 매 수술에 참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김지훈은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동기, 선배, 후배를 막론하고 관련된 써전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었다. 라파로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도움을 주려면 간 이식 공여자 수술만이 아니라 혈관 수술까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소아 수술 역시 기본 수술을 잘 모르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워야 한다. 후우! 내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김지훈은 담담했다.
우려의 눈빛을 찾을 수 없었다.
‘날 믿고 계신다.’
최고의 써전이 주는 신뢰는 더할 나위 없는 힘이었다. 부족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료가 없기에 도리어 같이 배우며 서로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나종진이 어깨를 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내일 이 시간에 보자.”
무겁기만 했던 짐을 덜어 낸 것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짐을 새로 떠안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라파로 하나에만 매달려야 했던 이유를 스스로 찾았다.
가슴이 뛰었다.
전에 느끼지 못한 활력이 다가왔다.
김지훈의 눈빛도 왠지 부드러워 보였다.
딱 여기까지였다.
다음 날.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서는 순간 김지훈이 돌변했다. 빨간 펜을 꺼내 들고는 미비한 부분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어마어마한 공력 차이에 반박조차 힘들었다.
“나 교수, 우리에게 이론은 곧 실전이고, 환자에게는 현실이야. 미비한 부분을 감수한 채 수술을 시도할 수는 없어. 스스로 보강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완해 주는 것의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어. 주말 집담회 사흘 남았다. 우리 열심히 하자.”
“죄송합니다.”
“미안한 문제가 아니야. 내가 환자가 돼 수술을 받는다고 생각해 봐. 준비라고 다 같은 준비가 아니잖아. 어떤 준비가 된 의사에게 받고 싶겠어?”
나종진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핵심을 간과했다.
의사 입장에서 가능한 방법만 찾았을 뿐 정말 환자가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보다 철저히 검토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돌연 웃었다.
“이준영 선생님을 포함해 선배들에게 타기 싫으면 그래야 할 거야. 이 정도 관심 사안을 발표하는데 그냥 지나갈 리가 없잖아? 최소 질문 하나하나에 구체적이고도 적절한 대답을 해야 살아남지 않겠어? 집담회 때만큼은 나도 네 편이 아니다.”
“헉!”
교수라고 예외를 둘 선배들이 아니었다.
자칫 후배들, 특히 인턴과 레지던트 앞에서 화염에 휩싸이고 다져진다면 그보다 큰 망신은 없을 것이다. 사실 망신은 얼굴 한 번 벌게지는 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나종진이란 써전에 대한 신뢰였다.
건강하게 타느냐!
부족해서 타느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나종진에게 쉴 틈은 없었다.
집담회까지 불과 이틀 남았다.
여유 시간을 모두 투자해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을 참관했다. 오후 늦게 벌어지는 혈관 수술은 물론 소아 수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손에서 자료가 떠나지 않았다.
의문이 생기거나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은 해결될 때까지 선배와 동기들에게 매달렸다. 연구실 불빛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나 교수, 그동안 보인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 크게 발전할 원동력이 될 거야.’
슬쩍 표정을 살핀 김지훈이 정색을 했다.
“선생님, 나 교수가 정말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데 집담회 때 봐주시면 안 됩니다.”
“김 부원장은 발표 안 해?”
“전 부원장입니다.”
“부원장이기 전에 써전이다.”
“전 그냥 원님 덕에 나팔 불려고요. 예전에 어떤 분에게 너무 타서 이젠 탈 것도 없습니다.”
“이러다 말로만 일하겠어.”
“하하하! 저도 레벨이 있는데 이제 몸 쓰는 건 후배들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원장님 오더는 직접 실행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준영 교수 입가가 씰룩였다.
‘나도 이 나이 때 스승님께 이랬었나?’
모를 일이다.
보다 친밀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회진을 끝내자마자 곧장 회의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집담회를 대비해 미리 생각을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꼭 이럴 때 전화가 와요. 어?’
서정호였다.
“형님,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하윤호를 정식으로 기소한단다. 다른 의료 관련 사건과 성격이 달라서 상당히 빠르게 진행한 모양이야.)
“형님이 직접 맡아 진행하는 사건도 아닌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덕이 아니라 하윤호 스스로 무덤을 팠어. 당시 수술을 함께했던 관련자 조사 중 수술과 진료 기록을 모두 위조한 사실까지 드러나 괘씸죄에 걸린 거지. 당사자들 간의 말이 하나도 안 맞는 모양이야. 어쨌든 사문서 위조 혐의까지 걸려서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
“그렇군요. 형님, 감사합니다. 훈철 형님과 함께 시간 내주시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막장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전종훈과 책임 소재를 두고 다툰 게 틀림없어. 하긴 간호사 탓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지. 이제 와 그게 통하겠어? 하윤호, 넌 집도의고, 집도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야. 도대체 인간의 끝은 어디일까?’
머릿속이 은근히 복잡해졌지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윤리 위원회의 징계 결정을 이끌어 냈다. 최해연 환자의 의지에 기대 여론을 환기시켰고, 사법적 판단까지 구하게 됐다.
이제 공은 손에서 떠났다.
송재덕 교수에게 전화했다.
(인과응보다. 인과응보. 잘됐다. 잘됐어. 곧 집담회 할 시간이지? 이젠 하윤호 같은 놈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에만 집중하자. 좋다. 좋아.)
이준영 교수의 반응은 예상하고도 남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하윤호의 미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본연의 업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은근히 발목을 잡던 찝찝함마저 사라져 개운한 기분으로 임할 수 있었다.
집담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