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11화 (1,311/1,329)

17화

김지훈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올해는 과장님과 함께 수술하지만 내년부터 특정 파트를 제외한 라파로를 혼자 다 주관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과장님께서 교수 충원을 말씀하셨습니다. 펠로우 선생들까지 있어서 무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

나종진이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지?’

일주일에 이틀 수술한다.

진료 환자가 많고, 건수가 적지 않아 바쁘긴 해도 마이너 수술인 탓에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심리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쟁쟁한 펠로우들이 있어 이경석을 대신해야 할 내년 역시 크게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동료들에 비해 한가하다고 느껴지는 면이 겹쳐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말할 일이었다.

“동기들과 비교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이혁원 선생이나 오만석 선생과 비교하면 남는 시간이 굉장히 많겠지.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비교가 되나?”

나종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정곡을 찌르다 못해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평소 날카롭긴 해도 절대 기분 상하는 말을 하지 않는 김지훈이 이런 말을 하다니 의아하긴 했다.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인정합니다.”

“한 가지 더 묻자. 과장님 말씀으로는 물이 올랐다고 할 정도로 라파로 실력이 뛰어나고, 나도 인정하는데 지금 상황에 만족해?”

분명 칭찬이었다.

김지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무엇인가 기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력 있는 써전의 여유를 아무 이유 없이 거론할 김지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

“솔직히 수술이 점점 쉬워지고, 간단하게 느껴집니다. 마이너 위주라고 자만해서는 안 되지만 가끔은 관성에 빠져 수술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 교수가 하는 수술이 모든 수술의 기본인 데다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도 피하기 힘든 일이야. 그래서 해결책은 생각해 봤어?”

나종진이 콧등을 찡그렸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실력에 맞는 수술을 하는 동시에 이를 발판으로 더욱 난이도 높은 수술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교수가 됐다. 원하는 대로 파트 수술을 조정할 수 없을뿐더러 애초 복강경 전문 써전이 조건이었다.

운신의 폭이 없었다.

주도적으로 나설 처지도 아니었다.

‘내 생각을 말씀드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결국 누군가의 수술을 빼앗는 꼴이라 공연히 분란만 일으킬지도 모른다.’

“지금은 제 생각을 말씀드릴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실력과 경험을 쌓은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언제야?”

“글쎄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김지훈이 돌연 소리 내 웃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자신의 미래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종진으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쁠 수도 있었다.

“어이구! 내 이럴 줄 알았어. 나 교수, 아직도 펠로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겸손한 건 좋은데 교수는 달라. 당장 인턴, 레지던트만이 아니라 펠로우까지 가르쳐야 하는 신분이야. 그런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막상 자신의 미래를 마치 다른 사람 일처럼 흐릿하고, 막연하게 말하면 정말 곤란해.”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처한 상황과 한계가 만만치 않습니다.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지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빤히 아는데 해결할 수 없다면 화가 나겠지. 열정이 없다면 현상 유지를 바랄 테고 말이야. 이 정도면 맡겨도 되겠어.’

“권한이 없다! 그러면 권한이 있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나 교수가 꼭 해 주어야 할 부분이 있어. 간 이식 공여자 파트와 소아외과에 관련된 일이야.”

‘내년부터 간담췌 파트 소속이 되긴 하지만 사실상 특정 파트가 아니라 라파로가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간 이식과 소아외과라면 설마?’

나종진의 눈이 커졌다.

“라파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공여자 수술을 라파로로 시도해 볼 생각이야. 소아외과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질환이 있지 않을까? 당장 탈장 정도는 가능하잖아. 내 제안을 수락할 의향이 있어?”

어느 쪽이든 난이도를 운운할 수술이 아니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분야였지만 심장은 이미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하기에 도리어 신중해야 했다.

‘선생님과 함께하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술인가? 그 정도 실력이 될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면 김지훈은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경석과 이미 상의를 했고, 일치된 판단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나종진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해 보겠습니다.”

“처음부터 혼자 하라는 소리 아니니까 부담 가질 거 없어. 해당 파트 선생들과 긴밀하게 상의하고, 수술은 일단 공여자 수술부터 소아 수술까지 모두 나와 함께해야 돼.”

“당연한 일 아닙니까?”

“좋아. 그럼 필요한 기구부터 수술 방법까지 철저하게 준비해. 시간은 얼마나 주면 되겠어?”

나종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다 준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난 라파로 전문이 아니야. 길은 터도 그 이후에 해당 수술을 함께하면서 같이 고민하고, 가르쳐야 할 사람은 바로 나 교수야. 새로운 시도인 만큼 처음부터 중심 단단히 잡고 시작하지 않으면 지속하기 어렵다는 거 알지? 할 수 있겠어?”

불현듯 서도훈이 떠올랐다.

휘플 라파로를 김지훈과 함께 준비하고, 시작했다. 간 이식 공여 수술을 라파로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르건만, 몇 번의 경험이 쌓이자 김지훈은 자연스럽게 수술을 넘겼다.

‘내 분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일까?’

엄청난 부담이었다.

또한 도전이었다.

성공한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복강경 수술 하나로 대가의 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뒤로 뺀다면 써전이 아니었다.

나종진이 강한 각오를 보였다.

“이 주만 주십시오.”

“오케이! 그 안에 공여자 수술 방법과 라파로를 적용시킬 수 있는 소아 수술 목록까지 모두 작성해 와.”

김지훈이 휙 돌아섰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종진이 부리나케 달려가 물었다.

“선생님,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을 라파로로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개창이 얼마나 큰지 잘 알잖아? 엄청나게 아파한다. 자신의 삶까지 걸고 간을 제공하는데 고통이라도 줄여 줘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대개 젊은 사람들이야. 그렇게 큰 흉터가 있으면 수영장에도 못 간다.”

“그럼 간을 빼내는 방법도…….”

“한가운데를 열어서 빼낼 거면 라파로의 의미가 없겠지. 덜 아프면서 흉도 노출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 봐. 그리고 이제부터 질문 금지다.”

나종진이 화들짝 놀랐다.

“상의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휘플 라파로와 다른 면이 많아. 처음부터 머리를 맞대다 보면 자칫 우리 둘 다 사고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어. 나와의 상의는 나 교수 제안이 완성된 이후에 하자. 혈관 쪽 조언이 필요할 텐데 손 교수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그 문제도 나 교수가 알아서 해.”

부담 백배였다.

반면 엄청난 신뢰였다.

돌연 가슴이 뛰며 우울했던 한 주가 마치 옛날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이 주 동안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동기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부리나케 달려가던 나종진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듣자마자 결정했네. 김지훈 선생님이 예전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면 어땠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도 남았겠지. 그만큼 시간을 허비하고도 우물쭈물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왠지 고단수란 생각이 들었다.

나종진이 동기들과 자리를 가졌다.

“뭐? 공여자 수술을 라파로로?”

오만석도 처음 들은 말이었다.

상상이 안 되는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에 나종진이 더욱 강한 각오를 다졌다. 동시에 김지훈은 몰라도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많이 도와줘.”

“그걸 말이라고 해? 라파로로 성공하면 또 한 번 난리 나겠다. 김지훈 선생님은 도대체 평소 무슨 생각을 하며 사시는지 모르겠네. 혁원아, 어떻게 생각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분명한 건 가뜩이나 저 멀리 있는 써전이 또 한 발 앞서간다는 거야. 자신의 자리를 찾은 손일석 선생님, 이경석 선생님에 신현수 선생님까지 다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제일 못난 기수라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어.”

“부담된다.”

나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부담을 가져야 돼. 소아외과 라파로를 시작하게 되면 진우한테도 밀릴 수 있어.”

“어후! 샌드위치 신세네.”

거구에 어울리는 호쾌한 웃음이 트레이드마크인 오만석도 웃지 못했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라파로로 간 공여 수술이 가능해진다면 상당 기간 숨 가쁘게 달려야 할 오만석이 갑자기 심각한 눈으로 이혁원을 보았다.

“혁원아, 나도 나지만 너도 미리 라파로 수술을 많이 봐 놔야겠다.”

“공여자 수술인데 왜?”

“공여자 수술을 성공하고 나면 그다음이 뭐겠어? 수혜자 수술이 가능할지 고민하실 테고, 누군가에게 준비를 맡기실 게 빤하잖아?”

“헉! 그렇구나.”

성급한 생각이었지만 언젠가 현실로 다가올 미래인 것만은 확실했다. 더구나 간 이식 파트는 선배 교수들로 드글드글했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혁원의 눈이 번쩍였다.

***

새로운 주가 밝았다.

외과 전체가 술렁였다.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을 복강경으로 시도하겠다는 발상도 놀라운데 이제 갓 교수가 된 나종진이 주도적으로 준비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아외과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종합 병원이 되면 자연스럽게 확장될 텐데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더불어 송진우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하지 않으면 뒤로 미뤘을 시도였다.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라파로는 과장님 못지않다는 평가가 많으니까 제대로 준비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다른 수술도 아니고 간 이식이야. 김지훈 선생님도 휘플 라파로 준비를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기억 안 나?”

“김지훈 선생님이 직접 오더를 내렸는데 라파로 실력 하나만 보고 결정했겠어? 우리보다 나 교수를 훨씬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소리야. 어쨌든 기대되네.”

“하긴 이준영 선생님도 적극적으로 참관하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소리가 들리긴 해. 야! 손일석 선생님도 그렇고 조용할 때 도리어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깜짝 놀랄 일들이 연이어 터지네.”

주말 집담회 이후 결정된 두 가지 사안이 모든 의국원들에게 상당한 자극으로 작용했다. 한편으로 즐거운 웃음을 주기도 했다.

김지훈과 나종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공여자 수술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김지훈과 송진우가 함께하는 소아 수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종진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이란 말에 충실한 이혁원과 오만석도 거의 쉴 틈을 갖지 못했다.

‘겸사겸사 라파로도 수준급에 올라야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손일석 역시 신장 이식 파트 개설을 목표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몇몇 병원에서는 상당히 보편화된 수술이기에 도리어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경석과 진충기 교수는 물론 새로운 시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김지훈도 조력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많은 준비를 한 데다 워낙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 온 덕에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묘한 일이 일어났다.

사인방의 회동과 빠른 진행을 본 펠로우들이 나종진 편에 서 열성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송진우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나종진 선생님, 소아외과 라파로 계획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한수영 선생과 함께 최대한 확실하게 준비해 보겠습니다. 기필코 김지훈 선생님 못지않은 안을 만들겠습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 정말 버거웠는데 고맙다. 이혁원 선생에게도 도와주라고 부탁해 놓을게.”

정교수와 전임의 공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전임도 교수가 분명했고, 펠로우 역시 전문의인 이상 한데 뭉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운 경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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