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10화 (1,310/1,329)

16화

사건 처리가 빠르게 진행됐다.

검찰에서 정식으로 하윤호를 기소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지 진료와 수술 모두 가능하지만 섣불리 메스를 잡지 못할 것이다.

윤리 위원회는 중심을 잃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의료사고임을 인정하고,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면허 박탈이나 취소는 물론 정지조차 결정할 권한이 없어 형식에 가까운 처벌이었지만 법정에서 무척 중요한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았다.

사회적 매장이나 다름없었다.

일련의 과정 모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때문인지 숱한 압력과 청탁의 전화가 싹 사라졌다. 하씨 일가도 더 이상 하윤호를 보호할 능력이 없고, 그럴 의지마저 꺾였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내친 것이다.

‘그래! 가진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고 조용히 살아. 그게 우리 의사들까지 돕는 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종훈도 하윤호와 책임 소재를 두고 다투다 병원을 그만두었고, 개원을 준비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개인 의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질환 위주로 진료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애꿎은 피해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어시스트를 선 간호사였다.

수술 전문 간호사가 흔하지 않은 데다 능력이 있다면 보다 좋은 직장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관련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직 후에 어떤 삶을 살든 한동안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정의가 실현되고 있었다.

반면 어떤 경과를 거친다 해도 환자에게 실질적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 역시 변함이 없었다. 환자가 회복 정도와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외래로 방문한 날, 김지훈이 민정호와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주었다.

민정호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조언 하나를 건넸다. 관심 하나 없는 사람처럼 목소리까지 건조했지만 오히려 진지하다는 의미였다.

“조금 더 시간을 끌다 합의하시죠.”

“이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윤호 측은 유죄를 받더라도 실형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시험과 같아서 누구도 끝날 때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자존심과 명예욕이 강한 사람입니다. 실형은 차치하고 집행유예를 받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고 싶을 겁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피해자와의 합의입니다. 가장 큰 보상을 받을 기회란 말입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 합의를 한다면 그동안 자신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모든 이들을 배신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민정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런 모습이 사람 모습이지.’

“법적 처벌과 무관하게 이미 실질적인 처벌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분 모두 할 만큼 하셨습니다. 합의했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가해자일 겁니다. 김 부원장님도 동의하셨습니다.”

“부원장님도요?”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까지 치셨습니다. 하윤호는 벌을 받고, 환자분은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면 이보다 좋은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 협상의 기술은 보호자분께서 발휘하셔야 합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 액수가 얼마일지 모르지만 일거양득이었다.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첫 재판 결과가 나오면 하윤호는 더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사필귀정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하는 결과가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세상의 그물은 아직 촘촘해 이미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의료계도 조금은 더 투명하고, 깨끗해지겠지. 일련의 일들이 신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카르페 디엠!

***

썩은 가지 하나 잘랐다고 무조건 건강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다듬고, 강하게 만들어야 지친 사람에게 그늘과 기댈 밑동을 제공하는 법이었다.

의료계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또 하나의 일에 매달렸다.

일반외과 교수 선발이었다.

이번 일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를 중심으로 손일석, 이경석, 진충기 교수와 함께 평가를 하게 됐다. 갑상선, 유방, 항문 등등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의사들이 있었지만 공정한 심사만이 유일한 기준이자 원칙이었다.

일차 심사를 시작했다.

지원자들의 이력부터 확인했다.

고심 끝에 기준을 통과한 의사들을 선별했다.

많은 이들이 쟁쟁한 경력을 자랑했지만 서류 하나만 믿지 않았다. 직접 연락해 진위 여부는 물론 주변의 평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였다.

‘이 중 여럿이 고배를 마실 텐데 다들 욕심이 날 정도로 훌륭한 선생님들이라 마음이 안 좋네.’

자리가 한정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누구 한 명 빠지지 않고 고생한 보람을 찾길 바랄 뿐이었다.

드디어 이차 심사인 면접 날이 밝았다.

낯익은 얼굴과 낯선 이들 모두 무척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교수 임용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이유도 있었지만 전문 병원 의료진이 주는 압박감이 예상외로 강력한 탓이었다.

대가라 불리는 의사,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들이란 사실도 모자라 태도와 품성에 문제가 있다면 같은 의사도 내치는 단호함까지 갖췄다.

여유를 가질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면접이 시작됐다.

모두들 귀를 활짝 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품이나 자세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주관을 배제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찰랑이는 단발머리의 오하석과 선후배로 이어진 홍재순, 유석재를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주말 내내 면접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후우! 힘들다.’

“손 교수, 역시 외부에서 수혈하는 게 쉽지 않네. 장단점이 있겠지만 우리 병원 펠로우 출신 중에서 뽑는 게 제일 무난할 것 같아.”

“그게 그건지도 몰라. 오하석 선생부터 선배들까지 빤히 아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니까 나도 정말 힘들더라. 그래도 현수나 선발 위원장을 맡고 계신 송재덕 선생님만 하겠어?”

같은 시간, 서울 병원에서 일반외과, 내과, 마취과를 제외한 모든 과의 구성원 선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면접관이 많다고 해도 대상 인원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더구나 과장급은 선발이 아니라 초빙이기 때문에 대상자를 두고 골머리를 썩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일까?

간호사를 비롯해 다른 직종까지 기한 내에 선발해야 한다. 누구 한 명 허투루 뽑을 수 없는 데다 의사보다 훨씬 대상 인원이 많아 몇 배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고경아와 민정호를 비롯해 전문 병원 직원들이 함께 진행하기로 결정됐지만 힘든 일이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부원장님이 엄살을 떠시면 안 되죠. 여하튼 난 대충 누구를 뽑아야 할지 결정했는데 김 부원장은 누구에게 높은 점수를 줬어?”

“개별 점수는 비공개가 원칙이잖아. 이준영 선생님이 취합해 일차 결정을 내리시면 상의해 동의하는 것으로 우리 일은 끝이야. 설마 공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이준영 선생님을 의심한다고? 행여 농담이라도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누구 죽일 일 있어? 치사해서 안 본다.”

말과는 달리 힐끔힐끔 눈길을 주었다.

“너나 나나 사람 보는 눈에 큰 차이 없을 텐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 우리에게 어떤 의사가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인간의 본성을 얕보지 마. 호기심이야말로 발전의 원동력이다. 게다가 내 정보망이 괜히 정확한 게 아니야. 끊임없는 호기심과 노력의 결과라고.”

“쯧쯧!”

혀를 차던 김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문득 이틀 내내 면접을 주관하던 이준영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딱히 꼬집어 이유를 말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완전히 마음을 굳히신 것이 틀림없어. 카리스마 뿜으시며 원장실에 계신 스승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네.’

“왜 웃어? 실실 웃는 모양을 보니까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하게 불어.”

“에휴! 하오문주 감이 바닥이네.”

“뭐? 그럴 리가 없는데.”

“헛다리 짚지 말고 앞을 봐. 앞을. 우리 과가 완벽한 체계를 갖출 날이 머지않았는데 현실에 안주할 수 없잖아? 지금은 도약을 준비할 때야.”

“도약? 좋지. 이젠 일복을 그렇게 포장하는구나. 어쨌든 나도 계획하는 바가 있어. 내 파트 한번 제대로 키워 볼 생각이야. 스승님께 배운 것이 있는데 지금 수준에 만족할 수는 없지 않겠어?”

손일석의 눈이 번쩍였다.

김지훈은 묻지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손일석을 비롯해 동료들 역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최고의 써전을 향한 경쟁이었다.

대가라 불려도 끝은 없을 것이다.

김지훈의 눈빛도 불타올랐다.

김지훈이 시간만 나면 수술을 참관하기 시작했다. 파트와 종류를 가리지 않는 데다 입까지 닫아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준영 교수의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을 유심히 보는가 하면 불과 하루 뒤에는 이경석의 복강경 수술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파트까지 넘겼으면서 서도훈 선생 수술은 왜?’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오만석과 나종진의 수술에도 얼굴을 비쳤다. 최고의 써전이자 부원장인 김지훈이 교수 면접이 끝나자마자 보인 행동에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

‘혹시 부교수 임명 대상자를 염두에 두시나? 그럼 이준영 선생님이나 과장님 수술까지 볼 이유가 없잖아?’

‘설마 라파로를 다시 하실 생각인가? 아니지. 개복 수술이 절반은 될 텐데.’

그나마 김지훈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손일석마저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수술과 진료 때를 제외하면 교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이 눈가를 좁혔다.

“종진아, 과장님 수술을 가장 많이 참관하시는 것 같은데 확실히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갑자기 왜 라파로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시는지 모르겠어. 과장님은 뭔가 아시는 것 같은데 은근슬쩍 여쭤봐도 말씀이 없으시네.”

“요즘 송진우 선생에게도 부쩍 신경을 쓰셔. 소아외과와도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오만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다만 최근 김지훈의 행보를 설명하기에 너무 부족했다. 게다가 오만석 수술까지 참관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추측을 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손일석 선생님은 뭘 준비하시는 거야?”

이혁원이 눈을 반짝였다.

“그 부분은 짐작이 가. 십중팔구 신장 이식 파트 준비를 하시는 것이 틀림없어.”

“신장 이식? 간 이식은 어떻게 하고?”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간 이식 수술만 두 건을 하는 것이 너무 무리라는 말씀을 하셨어. 수술 팀 인원이 배로 필요한 데다 생체일 경우 수술실도 네 개나 필요하잖아. 어느 부분에서든 실수할 확률이 커질 거야.”

나종진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누군가 간 이식 파트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인데, 손일석 선생님이?”

“혈관 수술은 절대 놓지 않으실 테고, 신장 이식 파트까지 개설하고 주력하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 김지훈 선생님도 눈치채셨을 텐데 아무 말씀 없는 거 보면 결국 장기 이식 전문 센터로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계획이신지도 몰라.”

“간, 신장만이 아니라 다른 장기까지 확대한다? 규모가 장난 아니겠네. 에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구나.”

나종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강경에 관한 한 김지훈, 이경석 다음으로 뛰어나지만 파트 성격상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수술을 할 기회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현 상황이 유지되는 한 써전이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부분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혁원과 오만석이 어색한 기침을 터트렸다.

“과장님이 다시 대장 파트를 맡으시니까 내년에는 달라질 거야. 서도훈 선생님도 췌장에만 전념하시잖아.”

“그렇긴 해. 메이저 수술이란 게 은근히 사람 불편하게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불만스럽지는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라 해도 처한 상황과 입장이 다른 이상 입을 닫는 편이 나았다.

교수가 돼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전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 명예나 명성을 추구하는 것 역시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다.

갓 교수가 된 써전들의 예측이 맞았다.

주말 집담회가 끝난 후 손일석이 추가 시간을 요청했다. 세세한 내용이 기술된 각종 자료를 배포한 후 자신의 구상을 알렸다.

“종합 병원 개원과 동시에 신장 이식과 혈관 수술을 담당한 파트를 개설할 생각입니다. 새로 들어올 펠로우 선생님만이 아니라 기존 펠로우 선생님들에게도 함께할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핵심 교수들은 조금도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 김지훈, 이경석은 물론 진충기 교수까지 사전에 상의를 끝낸 것이 분명했다.

신장 이식 파트의 구성원이 될 수도 있는 모찬우가 손을 들었다. 간 이식 파트가 확대될 여지가 줄어든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본 모양이었다.

“장기 이식 센터를 설립해야 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 전문 병원 건물 전체를 이식 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식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모두 종합 병원 본관으로 옮길 예정이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는 충분합니다. 가장 필요한 부분은 바로 사람입니다.”

손일석의 눈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전에 없이 진지했고, 시종일관 강한 의욕과 활력으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핵심 교수들 모두 손일석의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이준영 교수가 마무리를 지었다.

“손 교수, 책임지고 진행해.”

“감사합니다.”

손일석의 어깨에 강한 의지가 실렸다.

나종진이 다소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은 제자리를 맴도는 반면 후배 중 한 명이 치고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김지훈이 어깨를 툭 쳤다.

“나 교수, 나 좀 보자.”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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