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환자와 보호자의 뜻을 다시 확인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제 환자의 의향은 결정적인 변수가 아니었다. 때문에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상황이었다. 솔직히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의료진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오천이란 돈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법정까지 가게 되면 훨씬 못 미치는 보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합의하라는 말씀입니까?”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고소와 별개로 우리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그대로 시행할 생각입니다.”
상황이 확실히 바뀌었다.
하윤호가 돌이킬 수 없는 악수를 두었다.
김지훈은 독을 품었다.
정훈철에게 연락해 이번 일에만 국한하지 말고 보다 심층적으로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고가 많을 것이란 말도 아끼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제보를 받으면 백이면 백 줄줄이 다른 사고가 튀어나올 겁니다. 의료 과실 중재 위원회에 협조를 요청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봅니다. 저도 다른 사고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방송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사람들 입에 한 번 오르내리면 어디에 숨든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물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다수의 피해를 예방할 것이다.
서정호와 장시간 통화를 했다.
환자의 고소와 상관없이 수사를 할 수 있는 사안인지 불분명했다. 의사에게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데 증명하기 힘든 탓이었다.
현행법의 한계이기도 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제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시도했는데 명예훼손 같은 걸로 고발할 수 없습니까? 형님, 정말 수술하면 안 되는 의사입니다. 없는 죄를 만들 수는 없지만 저지른 일만이라도 책임지게 해 주십시오.’
아직 경찰이 조사하는 단계지만 법정까지 끌고 가는 주체는 검찰이다. 서정호가 음으로 양으로 신경 쓴다면 적어도 허무한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와도 발을 맞췄다.
의사 협회 내 윤리 위원회에 정식으로 제소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공론화를 통해 많은 의사들에게 하윤호라는 의사가 어떤 인간인지 알릴 수단이었다.
더욱이 행세하는 집안의 한 명이었다.
자신들의 이득과 명예를 끔찍이 여기는 이상 불미한 일로 제소당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하윤호를 감쌀 수 있지만 더 이상 집안의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없는 실력이 갑자기 생길 까닭이 없으니 자신의 힘과 실력만으로는 수술은커녕 진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꼴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같은 의사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반면 거창한 명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현실적 보상이라는 점 역시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법정까지 가게 되는 이유도 다름 아닌 돈 때문이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제가 합의한다면 하윤호가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더 떨어지겠죠?”
“당연히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만 환자분과 보호자분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본인들만 생각하세요.”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김지훈에겐 득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지역이 다르고, 민망할 정도로 규모 차이가 나 경쟁 병원이라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의사들 사이에서는 욕을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똑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노력이었다.
‘부원장님뿐일까? 다른 선생님들도 얼굴 볼 때마다 어떤지 물으며 걱정해 주신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대접을 받고, 결국 우리 때문에 시작된 일인데 여기서 합의한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일종의 감동이기도 했다.
환자와 보호자의 눈길이 마주쳤다.
서로를 보며 웃었다.
“부원장님, 우리는 끝까지 가겠습니다. 부원장님이야말로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도중에 마음이 변하셔도 기분 좋게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우리가 감사드립니다.”
김지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직 하나의 목적만 생각했다.
‘하윤호 같은 의사가 다시는 의료계에 발을 붙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하윤호 집안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다. 일단 하윤호를 세간의 이목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때론 옳고 그름을 떠나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집요한 부탁과 교묘한 압박에 물러서기도 한다.
그들은 그런 틈을 노렸다.
재단 이사들이 잦은 전화에 시달렸다.
윤리 위원회 구성원들도 덜컥 부탁을 빙자한 향응에 응해 곤욕을 치렀다. 인맥을 총동원해 경찰, 검찰, 방송국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것은 양측이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는 막강한 방패였다.
공언한 대로 전문 병원 내부에 가해지는 모든 연락과 압력을 차단했다. 행정 부분을 담당한 민정호 역시 완전히 자신의 품 안에 품고 보호했다.
송재덕 교수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훈아, 오늘 또 쓸데없는 전화 받았다. 하윤호도 꼴에 의사라고 생각하는지 이놈들이 아주 집요하다. 집요해. 흔들리지 마라. 준영이하고 내가 있잖니. 내가.)
(김 부원장, 윤리 위원회 선생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다시 한번 설명했다. 내 할 일은 다 하고 있어. 다. 뉴스 언제 나니? 언제? 빨리 터트리라고 말 좀 해.)
이삼 일에 한 번은 전화기에 대고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연발해야 하는 상황에 시달리긴 했지만 정말 기분 좋은 후유증이었다.
병원 내 모든 의사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현수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도리어 이사장의 힘을 이용해 그동안 있었던 하윤호의 과실까지 잡아냈다.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무엇보다 환자와 보호자의 의지가 절대적이었다. 하윤호가 이후에도 수차례 찾아와 읍소했지만 고소를 철회하지 않았다. 돈이 결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물론 누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액수를 제시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결국 김지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김 부원장, 내가 무릎 꿇고 빌게.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 줘. 이 상태로 일이 진행되면 난 끝이야. 나도 살아갈 권리가 있잖아.”
찬바람만 불었다.
사실 김지훈이라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해자가 단 한 명이라도 더 나온다면 지금 이상으로 괴로울 것이 빤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고개 드는 인간적 연민을 단호하게 눌렀다. 충고나 조언 따위도 필요 없었다. 스스로 느낀 후 변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숨 가쁜 나날이 흘렀다.
그사이 퇴원할 날이 다가왔다.
환자에겐 장기간의 싸움이었고, 가시적인 결과를 보일 시기도 아니기에 다소 조바심이 날 때였다. 하지만 마침내 첫 번째 결실이 터져 웃으며 퇴원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정훈철 덕분이었다.
『지금 이 시간, 어딘가에서 환자와 의사 간의 의료 분쟁이 또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불가피한 상황과 과실, 혹은 사고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인데요. 그 탓에 잘잘못을 따지기 정말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명백한 경우도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모자이크 처리한 병원 전경에 이어 음성을 변조한 환자와 병원 직원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단호하게 사고를 주장하는 환자와 얼버무리며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모습이 극과 극이었다.
『수술 도중 기구 끝이 부러졌는데 배 속에 남기고 수술을 끝냈다니 정말 믿기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크기가 작고,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도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분명합니다. 재수술을 해 이물을 제거한 의사의 소견을 들어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떡하니 얼굴을 노출시켰다.
여기저기에서 헉 소리가 터졌다.
놀랍다는 반응 그 자체였다.
『이번 일은 사고가 분명합니다. 부러진 기구를 중심으로 농양까지 잡혀 제때 제거하지 않았으면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큰일 날 뻔한 상황인데 같은 의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급적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도의적 책임만으로 넘어갈 일인지 의문스럽습니다. 합당한 처벌이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아울러 같은 의사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환자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김지훈이 공개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최해연 환자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보호자도 먹먹한지 헛기침만 터트렸다.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 시간.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굳혔다.
‘언제 인터뷰를 했지? 모든 책임과 후폭풍은 내가 맡는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김지훈, 넌 앞길이 구만리야.’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싱싱한 대나무도 한 번 부러지고 나면 절대 원상복구 되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내부 고발자가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자칫 의사 잡아먹은 의사라는 선입견이라도 생기면 많은 이들이 거리를 두려 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김지훈 역시 뒤지고 뒤지다 보면 실수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음해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숨에 얼굴조차 펴지 못했다.
그런데 입가가 묘하게 말려 있었다.
‘후우! 실력만이 의사를 평가하는 척도가 아니지. 어쩌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주변에 신경 쓰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김지훈과 함께 즐겨 마시던 커피 향기만 감돌았다.
간만에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던 손일석, 진충기 교수, 민정호도 난리가 났다.
“야! 내가 김지훈 때문에 못 산다. 못 살아.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 변조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런 식으로 전국에 얼굴을 알리네.”
“곱게 보지 않는 의사들이 제법 있을 텐데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내 말이요. 하윤호라고 해도 의사 하나를 매장시키는 일인데 숨어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 결국 사고를 치네요. 다른 병원 원장님이나 부원장님 만날 때 삐딱한 시선을 받으면 어떻게 하죠? 어? 민 부원장, 지금 웃었지? 분명히 웃었어.”
“제가요?”
“완벽한 무표정은 불가능해. 근데 왜 웃었어? 이게 시원하긴 하지만 의사 입장은 좀 달라. 걱정 안 돼?”
민정호가 더욱 무장을 단단히 했다.
‘방심하지 말자.’
“의료인이 아닌 환자 입장에 더 가까워서 그런지 나쁘지 않네요. 환자를 가장 중시한다는 말씀을 스스로 지키시는 것 같고요.”
“아뻬 수술 받더니 김 부원장 편으로 확 변했어. 왜 배신감이 느껴지지? 선생님, 우리는 술이나 먹죠. 깡으로 사는 김지훈을 위하여!”
“위하여!”
그날 밤, 잔잔하지만 무척 강력한 파장이 사방으로 퍼졌다. 하루 후면 온갖 매체가 이 사건을 앞다퉈 다룰 것이다. 의사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지만 썩은 살을 완전히 도려내야 오히려 강한 신뢰가 생길 것이다.
하기에 같은 의사임에도 웃을 수 있었다. 어쩌면 하윤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료계를 위해 좋은 일을 했는지도 몰랐다.
아직 법정과 윤리 위원회가 남았다.
이것도 살신성인일까?
다음 날,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최해연 환자가 퇴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구보다 깊은 인상과 발자국을 남긴 환자였다. 아쉬움 없이 웃는 얼굴로 퇴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다.
김지훈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스승님에 경석이 형에게까지 한 소리 들었지만 내가 부원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똑같은 일이 또 터진다면 그때 역시 동일하게 대처해야 한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자신과 동료들을 믿고 찾아오는 환자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서도진 선생이 있긴 하지만 인턴, 레지던트 교육도 신경을 못 썼네. 재필이, 선호, 성오, 너희들 모두 열심히 배워야 한다. 우리 병원 우리 과에 지원하면 제일 좋고. 잠깐! 교수 면접이 얼마 안 남았네.’
이래저래 바쁘게 살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