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08화 (1,308/1,329)

14화

최해연 환자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건강해지기 위해 몸을 맡겼는데 수술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이후 대처마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다시 수술을 했을 때 바로 찾아와 사과했으면 다소 누그러질 여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총무 부장만 달랑 와 삼천이라는 돈을 제시했을 때 모멸감까지 느꼈다.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집도의에게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평생을 가고도 남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고소한다는 사실 하나로 찾아올 하윤호가 아니었다. 뉴스에 나간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일이 커지자 마지못해 온 것이 분명했다.

‘연락처 주인이 검사와 국장이었다니! 부원장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사람 얼굴조차 보지 못했겠지.’

“할 얘기 없습니다. 돌아가요.”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하윤호가 총무 부장의 눈짓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찾아뵀어야 했는데 갑자기 병원에 일이 생겨 이제야 온 점 사과드립니다. 마음 푸시고 원만하게 해결했으면 합니다.”

“원만하게?”

보호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과는 하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원만하게 해결하자는 말부터 나오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럴 때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네.’

“들어나 봅시다.”

‘그럼 그렇지.’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성의껏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치료비까지 책임지면 퇴원 후 몸을 추스르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하윤호가 말을 끊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 슬며시 종이 가방을 밀었다.

“오천입니다. 합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보호자의 눈썹이 곤두섰다.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오천만 원이란 돈은 합의에 충분한 액수가 분명했다. 액수만으로 보면 오히려 예상치 못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또한 상황에 알맞은 태도를 보여야 하는 법이다. 말투, 목소리, 몸짓, 진정성을 담은 표정은 물론 상대방의 기분까지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과할 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윤호는 달랐다.

돈이면 다 된다는 그릇된 의식이 눈에 보였다. 무릎을 꿇어도 시원찮을 판에 목에 깁스를 했는지 고개가 빳빳하기만 했다.

보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눈앞의 돈이 주는 욕심을 덮어 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총무 부장이 하윤호에게 계속 눈짓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한 손에는 합의서로 보이는 종이까지 들고 있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이 돈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오천이에요, 오천.”

“그 돈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그래서 사과부터 하지 않았습니까?”

“평생 미안하다는 말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까? 돈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말아요. 당신한테 수술을 받는 게 아니었어요. 의사에게 받았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윤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떤 마음인지 잘 압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까지가 최선이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법정까지 가야 양쪽 모두 피해만…….”

순간 보호자의 눈이 허옇게 변했다.

‘양쪽 모두?’

“내 와이프는 이미 피해를 입었어.”

악에 받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당신이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뭔데? 그동안 뻔뻔하게 수술을 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내팽개쳤겠지만 더 이상 그런 짓은 못할 거야. 당신은 의사가 아니야. 이 돈 갖고 당장 사라져.”

총무 부장이 당황했다.

사과하러 왔다 상황만 더 악화시켰다.

“보호자분, 진정하세요.”

“당신은 끼어들지 마. 하윤호, 내 말 못 들었어?”

“이봐요,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 ‘이봐’라고 했어? 욕이 안 나온 걸 다행으로 알아. 꺼져.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당장 꺼져.”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환자는 설움이 복받쳤는지 눈물까지 보였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돈,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먼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과하러 왔고,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곤란합니다. 냉정하게…….”

“뭐가 곤란해요? 뭐가?”

난데없는 고함 소리와 흐느낌에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몰려 나와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래요? 다른 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사고가 나 다시 수술한 환자가 있는 병실 아니에요?”

“맞아요. 처음 수술한 병원에서 사람들이 온 것 같은데 얘기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에요. 배 속에 수술 기구인지 뭔지를 남기고 나온 게 맞으면 대화가 되겠어요?”

“얼핏 저 환자 남편이 하는 말을 들으니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대뜸 돈으로 해결하자고 한 모양이에요.”

“얼굴도 안 비쳤다면서요?”

“어머! 못된 사람이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의사가 됐대. 혹시 하윤호가 그 의사 이름인가? 저렇게 화가 나서 소리 지르는 거 보면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맞다. 맞아. 남편이 말한 적이 있어요. 어머! 저런 일을 당하고도 점잖았던 사람인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를까?”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그때 김지훈이 나타났다.

막 수술을 끝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서둘러 병실로 들어갔다. 병동에 올라오는 순간 들려온 큰 소리에 이미 사태를 직감했다.

‘하윤호!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병실이 흥분으로 난장판이었다.

핏대가 솟은 보호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덜덜 떨고 있었고, 하윤호는 종이 한 장을 든 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환자분! 보호자분! 무슨 일입니까?”

“부원장님! 우리가 사정해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가요? 우리가 돈을 원했었나요? 왜? 왜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죠?”

하소연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하윤호는 기본적으로 사과할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고소와 뉴스 보도를 막을 요량으로 돈을 싸 들고 온 것이 빤했다.

‘환자! 환자부터 생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일인실이라고 해도 병동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수술을 받은 환자가 많은 이상 피해를 주고도 남았다.

“진정하세요.”

눈물범벅이 된 환자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억울하다는 말만 했다. 보호자는 분이 안 풀리는 듯 거친 숨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내내 감정에 휩싸여 있었지만 몇 마디 말로도 무엇 때문에 서러울 정도로 서운하고, 화가 나는지 알 수 있었다.

진심이 빠져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윤호 선생, 나갑시다.”

김지훈이 한숨만 터트렸다.

하윤호는 자신에게 쏠린 수많은 눈들을 보고서야 창피했는지 헛기침을 연발했다. 총무 부장은 이마를 감싼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리를 마련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인지 모르지만 돌아가요.”

“김 교수!”

총무 부장이 툭 하윤호의 팔을 쳤다.

“김 부원장! 없는 시간 내서 사과했고, 보상도 오천으로 올렸어. 보호자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만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사과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구나.’

“말 듣자고 함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도울 일이 없고, 도울 생각도 없습니다.”

“김 부원장! 왜 이래? 저번 일은 내가 미안해. 너무 흥분했었어. 고소 남발하고, 뉴스에 나와 봐야 우리 의사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환자하고 보호자 좀 설득해 줘.”

화도 감정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었다.

“같은 말 반복해야 합니까? 그만합시다.”

김지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차갑기 짝이 없었다.

마치 하윤호가 없는 것처럼 등을 돌린 채 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하윤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새끼한테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나? 서울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잊은 내가 병신이었어.’

기분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었지만 최악의 상황을 면할 길이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김 부원장, 미안해. 내가 정말 부탁할게.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검찰하고 방송국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던데 고소하고 뉴스 보도만 막아 줘. 그리고 이건 조그만 성의니까 받아 줬으면 해. 일 잘 끝내 주면 다시 한번 자리 만들 테니까 부탁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허탈한 한숨만 터졌다.

총무 부장이 재빨리 하윤호를 잡아끌었다.

오늘은 어떤 수를 써도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었다. 환자와 보호자를 비롯해 김지훈을 설득할 수 있는 대책도 다시 짜야 했다.

‘후우! 어떻게 이 인간은 기본 자체가 없는 걸까? 하루 이틀 사이에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돈이라도 통해야 하는데 걱정이네.’

일단 돈이 가야 다음 자리가 만들어질 테고, 말이 먹힐 것이다. 내심 환자에게 줄 합의금까지 던져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과장님, 오늘은 이만 가시죠. 부원장님, 큰 소리까지 나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다.

“하윤호! 너 이 자식 날 뭘로 보는 거야?”

김지훈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윤호의 면상을 향해 돈 봉투를 냅다 던지려 했다.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몸을 피했던 하윤호가 빼꼼히 눈을 돌렸다. 길길이 날뛰던 김지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툭 수표 하나가 떨어졌다.

‘갑자기 왜 저래?’

돌연 엘리베이터 앞에서 난리가 났다.

이준영 교수가 서 있었다.

“과장님, 이준영 선생님 모시고 빨리 내려가세요. 서도진 선생, 같이 모셔. 이혁원 선생, 김 부원장 막지 않고 뭐 해?”

손일석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준영 교수 앞을 막으며 다급하게 손짓했다. 하윤호, 수표 한 장, 수많은 환자와 간호사 앞에서 욕까지 내뱉은 김지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가장 어렵고 무서운 원칙주의자, 이준영 교수 눈앞에서 말이다.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가자.”

이경석과 서도진이 물러섰다.

뚜벅! 뚜벅!

이준영 교수가 하윤호 앞에 섰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교수나 선배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면 이미 몇 대 맞고도 남았다. 한 방에 죽을 수도 있는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말이다.

“하윤호!”

“예, 선생님!”

하윤호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넌 의사도, 동료도 아니다.”

뚜벅! 뚜벅!

그 한마디뿐이었다.

“김 교수, 환자들이 치료받는 병동이야. 잊지 마. 고경철 선생, 회진 돌자. 다들 회진 안 돌고 뭐 해?”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이준영 교수에게는 그랬다.

상대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고경철과 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김지훈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손일석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표와 돈 봉투를 하윤호에게 내밀었다. 경멸에 찬 눈초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끌끌 혀를 찼다.

“하윤호 씨, 우리 김 부원장님을 너무 만만히 봤네요. 이왕 줄 거면 평생 팔자 고칠 돈을 주든지. 사고를 연이어 쳤으면 대가를 치르는 게 세상 아니겠습니까? 경찰 조사도 받아야 하고, 뉴스에 출연까지 하게 돼서 바쁠 텐데 앞으로는 얼굴 보지 맙시다. 정신 건강에 해롭네요.”

하윤호의 볼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는 얼굴이 한둘이 아닌데 누구 한 명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전문 병원에는 자신을 도와줄 의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작스레 한기가 돌았다.

그 순간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돌렸다.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이었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이미 집안 식구마저 돌아섰다.

자만, 거만, 불량한 양심, 이기적인 태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성, 최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실력과 직업의식 및 직업윤리 중 단 한두 개만 있어도 일이 터졌을 때 외면받기 마련이었다.

하윤호는 어디에 해당될까?

확실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에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누구 탓도 아닌 마치 업보처럼 스스로 쌓은 인생의 허물 탓이었다.

하윤호가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김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