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307화 (1,307/1,329)

13화

주말이 지났다.

하윤호가 코웃음을 쳤다.

“합의를 거부했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대?”

“고소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고소? 돈 더 달라고 시위를 하고 자빠졌네. 삼천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한 푼도 더 줄 수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 끝까지 가면 누가 손해인지 곧 알게 될 거야.”

총무 부장이 눈가를 찡그렸다.

“보호자 태도가 너무 단호해 마음에 걸립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한 번은 만나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나면? 건수 하나 잡았다고 머리 맞대고 있을 텐데 돈 얘기 이외에 뭐가 있겠어? 한 번 밀리면 병원 거덜 나는 거 시간문제야. 지금까지 조용히 잘 처리했잖아. 그동안 해 왔던 대로 해.”

‘지금도 병원에 기여하는 게 없는데 거덜은 무슨! 집안 잘 타고난 거 고마워하면서 사고나 치지 마라. 제길! 이 자식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돈이 웬수다. 웬수.’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지만 이런 일을 해결할 때마다 떨어지는 떡고물이 쏠쏠했다. 미더운 구석 하나 없건만 집안에서 내치지 않는 것도 불가사의였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 대부분 가족 사랑이 왜 이렇게 유별난지 모르겠네. 하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가족밖에 없을 테니 도리가 없겠지.’

자신이나 가족이 아플 때 기피해야 할 일 순위가 하윤호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번듯한 건물과 대학 교수 출신이라는 말에 혹한 환자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월요일이 지났다.

총무 부장이 허겁지겁 달려와 꿀꿀한 기분에 일찌감치 퇴근을 하려던 하윤호를 붙잡았다.

“과장님,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무슨 소리야?”

“경찰 쪽에서 최해연 환자 진술을 들은 후 며칠 내에 정식 조사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단단히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까짓 일에 경찰이 왜 조사를 와? 합의하면 고소거리 자체가 안 되잖아?”

“전문 병원에서 일반적인 과실이 아니라 사고가 확실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답니다.”

“뭐? 김지훈 이 새끼가 정말.”

하윤호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아셔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가 있어?”

“이번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에서 보도하겠답니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 있거나 반론이 있으면 가급적 빨리 연락해 달라고 합니다.”

“방송국은 또 뭐야?”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하윤호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병원 내부와 달리 외부 인사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는 김지훈이었지만 예외적인 사람이 둘 있었다.

‘이 새끼가 작정을 했네. 한 명은 검사고, 한 명은 방송국 피디인지 국장인지 뭐 그랬던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제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발등에 불 떨어졌다.

경찰 조사에 이어 뉴스까지 나면 자칫 인생이 나락에 빠질 수도 있었다. 현행법상 의사 면허가 취소되지는 않지만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순간 다들 백안시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총무 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과장님, 집안분 중에 경찰 쪽과 방송국에 끈이 있는 분이 여럿 계시지 않습니까? 빨리 연락해 보십시오.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내 전화기가 어디 있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낸 하윤호가 사방팔방에 전화를 했다. 호되게 욕을 먹겠지만 집안의 수치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서 줄 것이라 믿었다. 이미 이준영 교수와 재단에 연락한 마당인데 한 번 힘을 써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절박해 보이면 안 된다. 침착하게.’

“큰아버님, 접니다. 일이 좀 묘하게 꼬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본론을 말하기도 전이었다.

(야, 이 자식아! 또 뭘 부탁해? 전문 병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준영하고 송재덕은 천성이 글러 먹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내가 네놈 일 때문에 재단 이사들에게 개망신을 당해야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입으로 일일이 말해야 알아 처먹을래? 그쪽 병원에서 도움받기 글렀으니까 앞으로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난 할 만큼 했다.)

“큰아버님, 경찰과 방송국에서…….”

(뭐? 경찰에 빙송국까지? 이 자식이 아주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네. 후우! 총무 부장 바꿔.)

하씨 일가에 비상이 걸렸다.

하윤호 때문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의료계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돈이 되는 분야도 아니었지만 졸부 소리보다는 번듯한 직함을 가지는 편이 훨씬 명예가 되는 탓이었다.

옆에서 뭐 했냐는 타박을 잔뜩 받은 총무 부장이 이를 악물며 하윤호를 주저앉혔다.

“지금이라도 환자에게 직접 사과하세요. 고소라도 막아야 할 것 아닙니까?”

“방송국은?”

“만에 하나 뉴스에 뜬다고 해도 얼굴까지 나오진 않지 않습니까? 시간 지나면 다 잊기 마련이니까 일단 법적인 부분부터 막자고요.”

“제길! 일단 큰아버지 연락 기다려 보고, 안 되면 그때 갈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자존심인지, 자신의 실수를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아예 안중에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윤호가 투덜투덜 불평을 터트리며 전종훈을 찾았다.

퇴근 전, 거의 매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달달한 말을 늘어놓던 전종훈이 상황을 전해 듣고는 눈치를 보았다. 환자가 김지훈에게 재수술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불안하던 참이었다.

‘재수도 없지. 그 많은 의사 중에 하필이면 김지훈이야. 이거 잘못하면 나까지 걸려 들어가게 생겼어. 후우! 나보고 수술하라는 걸 피해 가길 정말 잘했네.’

“집도의로서 부담이 크시겠습니다.”

“같이 수술했잖아. 다 동의해 놓고 이제 와 퍼스트는 책임이 없다 이거야?”

“그런 말이 아니라……. 어쨌든 다른 때와는 다르게 대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정말 만만치 않은 놈인데 부원장까지 하고 있으니…….”

말꼬리를 흐렸다.

구체적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걱정하는 듯 빙빙 말을 돌렸다. 똥은 똥끼리 뭉친다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하윤호가 모를 수 없었다.

‘개새끼! 유리할 게 없다 이거지? 자리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놈을 받아 줬는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니까 발 뺄 궁리부터 하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

“당장은 막막하네요. 오늘 밤 고민 좀 해 봐야겠습니다. 상황이 변하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죄송한데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전종훈이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김 간호사, 난데 하 과장이 수술하고 전문 병원에서 재수술한 환자 알지?”

(들었어요. 기구 끝이 없어졌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왜 제 말을 무시하셨어요.)

“말 똑바로 해. 내가 언제 무시했어? 하 과장이 괜찮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닫았잖아.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마. 어쨌든 문제 커지면 김 간호사도 걸려들 가능성이 높아. 간호과 수술 기록 철저히 하고, 복사해서 나 한 부 주고 따로 보관해 놔.”

(그 정도로 심각한 거예요?)

“미리미리 대처하자는 거야. 하 과장 때문에 우리까지 피해 볼 이유가 없잖아?”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전종훈이 훅 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풀었다. 불안하기만 했던 근무였기에 더 이상 돈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윤호 뒤치다꺼리도 이젠 지치네. 돈도 돈이지만 외래나 보고 사는 게 마음 편하겠다.’

환자 진료는 쉬울까?

단순 질환을 주로 보는 개인 의원도 얼마든지 사고가 날 수 있다. 하다못해 기침을 무시하다 폐렴은 둘째 치고 폐암이나 폐결핵을 놓치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현장이 바로 개인 의원이었다.

진단이 불가능하더라도 세심한 진찰 후에 빠른 검사를 권유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사고였다. 검사 장비가 없는 의원의 경우 일반외과 영역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 아무런 경고 없이 처방만 하다 아뻬라도 터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수술 팀마저 각자도생을 하는 판이니 하윤호가 궁지에 몰린 것이 사실이었다. 통렬히 반성한 후 스스로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건만 그마저 집안의 위세에 기대고 있었다.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이었다.

의대를 뒷구멍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때 집안의 힘과 버스 몇 대에 해당하는 돈으로 의대 편입을 시키는 때가 있었다. 그나마 학업을 쫓아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유급이란 좋은 제도마저 유명무실했다면 하윤호나 정갑수 같은 의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편입 제도 자체가 투명해졌다. 머릿속 지식만은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틀 후.

하윤호가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손이 달달 떨렸다.

모든 악재가 한꺼번에 터졌다.

경찰과 검찰이 모두 이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끈이 연결돼 있는 경찰 간부들도 손사래를 치며 합의가 최선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했다.

방송국 상황은 더 급박했다.

합당한 반론이 없거나 구체적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면 보도는 기정사실이었다. 국장이란 사람이 딱 버티고 서서 제삼자의 말에는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렸다.

실로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피해자 대부분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져야 할 상황이건만 불과 며칠 사이에 마치 짠 것처럼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윤호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큰아버지는 더 이상 뒤를 봐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자신을 지켜 주었던 울타리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일은 이미 터졌다.

수습할 사람도 자신뿐이었다.

파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우선이었다.

‘까짓것 눈 딱 감고 사과하는 건 어렵지 않아. 액수가 관건인데 얼마를 불러야 하지? 오천? 장을 자른 것도 아니고 배를 열고 닫은 것에 불과하니까 오천이면 눈이 뒤집히고도 남을 거야.’

문제는 김지훈이었다.

재단 이사들이 연락조차 받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불미한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큰아버지의 위세를 고려할 때 누군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검찰이 튀어나오고, 대형 방송국에서 정식으로 보도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김지훈이 제 일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몇 안 되는 인맥을 생각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같이 근무한 적이 없었으면 두 눈 뜨고 당할 뻔했어. 근데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 어쨌든 그 자식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내가 큰 피해를 입는다. 뭘 줘야 하지? 가만! 그 나이에 어떻게 부원장이 됐을까?’

이사장의 친구였다.

실력은 자타가 공인했다.

반면 너무 젊었다.

이사장 또한 발판이 부족하고,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매사 조심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도리어 가까운 관계 자체가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보수적인 의료계에서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을 때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과연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는 두 가지 사실만으로 부원장이 됐을지 의문스러웠다.

‘교수들의 지지? 전문 병원 자체가 외과 주축인데 이혁민 선생과 신기동 선생은 물론 선배들을 다 제치고 부원장을 하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사적인 접대? 가능성이 높아. 사실 입막음용으로 돈만 한 게 없긴 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정을 내렸다.

급히 은행으로 달려가 빳빳한 현금을 찾은 후 총무 부장과 함께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관련됐을 것이란 의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지 않아?”

“오천이면 바로 고소에 고 자도 안 나올 겁니다. 형사 사건도 아닌데 경찰 역시 합의서가 있는 한 조사할 이유가 없고요. 대신 사과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알았어. 김지훈은?”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돈 싫어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후배라는 생각 버리시고, 부원장 대우 확실하게 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윤호가 눈가를 좁혔다.

‘예전이면 돈이 통할 놈이 아니지만 이젠 나이 먹었고, 부원장까지 하는 걸 보면 변한 게 틀림없어. 말 한마디 해 주는 대가로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아.’

모든 사람을 자신 위주로 보고 있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생각의 한계였다.

하윤호가 전문 병원에 도착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환자부터 찾기로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합의서가 있으면 김지훈 부원장님도 더 이상 나설 명분이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과장님께 유리한 소견서를 받으면 가장 좋고요.”

“써 줄 놈이 아니긴 하지만 말은 해 봐야지. 젠장! 표정이나 연습해 둘걸.”

세상이 항상 예상한 대로 굴러가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부정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하려면 언젠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반면 돈 몇만 원에 살인이 벌어지는 세상이었다. 말로만 들은 삼천과 눈앞에 놓인 오천은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윤호가 병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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