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김지훈이 민정호와 함께 병동으로 향했다.
최해연 환자의 보호자가 면담 요청을 한 데다 하윤호와 함께 온 총무 부장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하기도 한 참이었다.
병동 당직실에서 만났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주말인데 죄송합니다. 이게 상의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첫 수술을 했던 병원의 총무 부장이 찾아와 합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치료비 일체와 위로금조로 삼천만 원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와이프 보기 미안하지만 나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사실 이게 가장 일반적인 해결 방법이겠지. 삼천이란 돈이 적정한지 모르겠지만 작은 돈은 아니네. 현실은 현실이지.’
하윤호를 보며 된통 난리를 쳤지만 김지훈은 제삼자에 불과했고, 결정은 어디까지나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의 분쟁은 없을 것이다.
내심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꼴이었다. 보호자 역시 유리할 일이 없기에 감정만 앞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합의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언제든 제공하겠지만 합의 조건을 두고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분쟁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민정호는 더욱 객관적이었다.
보호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스러운 눈치였다.
“법정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요?”
합의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액수가 문제이긴 했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정호가 답을 해야 할 문제였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의료사고는 양면성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변호사의 능력과 판사의 성향에 달린 일일 테고, 물질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민정호의 말이 맞았다. 부당한 판결이 아니라 의료사고와 과실의 경계가 모호한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어쨌든 법적 분쟁 자체가 환자에게 유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하윤호가 큰 소리를 친 이유가 소송까지 가도 불리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가? 하긴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변호사를 구할 수 있겠지. 생각만 해도 답답하네.’
보호자 역시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군요. 총무 부장이란 사람도 비슷한 말을 하긴 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승복을 하지 않으면 소송 기간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는 말까지 하더군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때론 타협 자체가 죄책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더욱이 허세에 불과한 협박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이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보호자를 설득해 하윤호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책임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보상은 아무것도 없다. 욕심을 부리다간 환자에게 피해만 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의사는 의료계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마땅하건만 현실적인 대안이 없었다. 대신 돈으로 보상해 줄 수도, 대신 법정에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최소 수술한 의사가 직접 와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삼천만 원이란 돈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건 아니겠죠.”
“싸우고 싶습니다. 더 많은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한 생각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와이프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소송을 걸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이렇게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와이프는 배까지 열어 다시 수술을 했는데 수술한 의사의 얼굴도 못 봤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감정적인 판단일 수 있었다.
보호자 독단으로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제삼자 입장에서 섣불리 조언하거나 개입한다면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환자분은 동의하셨습니까?”
“저보다 더 화를 내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성급한 결정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변호사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주말 동안 조금 더 찬찬히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보호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선생님의 도움이 없으면 법정으로 갈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설마 이제 와 다른 소리를 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끝까지 돕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환자분과 보호자분의 의지가 단단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수술 후 얼굴도 제대로 비치지 않았습니다. 아프다고 쩔쩔매는 와이프에게 성의조차 보이지 않은 인간입니다. 대학 교수 출신이라는 말에 혹한 제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아십니까? 와이프 볼 면목조차 없습니다.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정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 말을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지나친다면 누군가 또 피해를 입을 겁니다. 능력이 있다면 공론화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는 수술해선 안 될 사람입니다.”
단호했다.
적어도 돈에 굴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설령 굴복한다고 해도 하윤호가 제시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의사 같지도 않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는데 삼천만 원이란 돈이 적정한지도 의문이었다.
‘무자격자가 수술을 했으면 구속이겠지? 하윤호 넌 자격이 없는 인간이야. 대가를 치러.’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환자와 보호자를 응원해야 했다. 실제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알고 있었고,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개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한 분은 검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방송국 국장님입니다. 제가 미리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사안이 된다면 법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으실 테고, 보도까지 될 겁니다.”
민정호가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서정호 검사님이나 정훈철 국장님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분명 의사가 의사를 공격한다는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부원장님이 전면에 나서는 꼴이 될 텐데 후폭풍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안 하시나?’
“부원장님, 법적인 문제와 제보는 보호자분께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칫 우리 병원이 타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의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잘 압니다만, 이준영 선생님도 십분 동의하실 겁니다. 썩은 살을 도려 내지 않고서는 건강해질 방법이 없어요. 하윤호는 청진기조차 잡으면 안 되는 인간입니다. 보호자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보호자의 눈이 흔들렸다.
의사가 의사에 대해 이렇듯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김지훈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나 불신마저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내가 왜 가까운 병원을 두고 그 병원으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평판을 믿어야 할 때와 믿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한 제가 죄인입니다.”
보호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내를 향한 죄책감과 생면부지의 의사에게 받는 도움이 겹치며 감정적으로 격해진 모양이었다. 사실 같은 의사에게는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손길이기도 했다.
“잘못은 보호자분이 아니라 하윤호라는 인간이 범했습니다. 눈물을 흘려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절대 자책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면담을 끝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김지훈이 바로 전화를 했다.
(뭐? 배 속에 부러진 기구를 남기고 수술을 끝냈어? 가뜩이나 의료사고에 민감한 세상인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혹시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갈지 몰라서 김 부원장에겐 미안하지만 여론 좀 만들어야겠다. 괜찮지?)
(직무 유기라고 봐야 하나? 일단 고소가 돼야 수사를 진행할 수 있어. 내가 잘 아는 직원 한 명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쪽으로 소장 넣으라고 해.)
둘 모두 긍정적이었다.
대신 일 있을 때만 연락한다는 핀잔과 타박을 꽤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반드시 유지해야 할 인간관계가 좁아지기 마련인데 미안할 따름이었다.
“시간 되시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제가 좋은 안주에 술 한 잔 사겠습니다.”
소고기 예약 됐다.
카드 정말 가벼워질 것이다.
환자가 회복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드레인이 깨끗했고, 장 기능도 상당 부분 좋아졌다. 겸사겸사 약간은 어색한 듯 오히려 가까워진 듯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이 추세라면 별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주말 지나고 물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환자분이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의 눈에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김지훈이 민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울 병원 근무 당시 하윤호를 확실하게 해결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에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본의 아니게 집담회에 불참했다.
‘왜 토요일마다 일이 생기지?’
이준영 교수를 찾아 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대응 방안까지 보고했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며 물끄러미 제자를 보던 스승이 혀를 찼다.
‘내게 책임을 넘길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이럴 때는 뒤로 빠져도 괜찮아.’
“알았다. 자료를 넘길 때 내 이름으로 넘겨야 한다는 걸 잊지 마. 공식 서류라면 더더욱 철저하게 작성해.”
“알겠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제 실행력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취임하시기 전에 챙기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저도 명색이 부원장입니다. 하윤호 같은 잔챙이는 걱정하지 마시고, 제게 다 맡기셔도 됩니다.”
“취임이라니? 이번 일과…….”
“관련이 깊죠. 애먼 걱정까지 하시고 스승님답지 않습니다. 환자가 큰 결심을 한 날인데 오래간만에 캔 커피 한잔하실까요?”
김지훈이 감히 스승의 말을 자르다 못해 사실상 무시까지 했다.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캔 커피 두 개를 자연스럽게 꺼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절 보호하시려는 마음 왜 모르겠습니까? 이젠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승님, 시원한 게 오늘따라 맛이 좋습니다. 어서 드시죠. 따 드릴까요?”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언변보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는 이준영 교수로서는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던져야 하건만 입은 이미 캔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후우! 오늘따라 맛있긴 하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준영이니? 나야. 나. 지훈이 거기 있니? 거기 있지? 빨리빨리 바꿔 줘. 뭐 하니? 뭐 해?)
“알겠습니다. 김 교수, 받아 봐.”
“예. 김지훈입니다.”
(지훈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윤호가 뭔 짓을 저질렀기에 재단 이사님들이 나한테 전화까지 해? 그놈 사고 쳤지? 그치? 내 감이 맞지?)
김지훈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윤호가 당당한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았다.
이준영 교수도 모자라 재단 이사들에게까지 연락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모양이었다. 이사들로서는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데다 마냥 무시하기 어려워 송재덕 교수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집안 사람들의 영향력이 있다니 우습지도 않네. 의사는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데 돈으로 말하는 걸 보면 패가망신이 멀지 않겠다.’
한편으로 자신감이 생겼다.
하윤호 자신도 이번 사고를 두려워한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방팔방에 전화를 해 무마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윤호! 있지도 않은 경력에 흠이 갈까 무서운 거야? 그런 거였으면 무릎 꿇고 사죄했어야지.’
송재덕 교수에게 첫 수술과 이후 진료 태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하윤호 걔 써전 맞니? 지훈아, 우리가 가르치지 않았지? 그치? 천만다행이다. 천만다행.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겠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겠지만 궁금하다. 궁금해.)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지만 불과 한두 시간 전 일이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하자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당한 긴장이 느껴졌다.
(야야야!)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하윤호를 향한 일성이었지만 터지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두려운 소리였다.
“선생님!”
(그 자식 어디 갔어? 어디? 개노무 시키! 사람이 뻔뻔해도 유분수가 있지, 어디서 그따위 말을 해? 소송하기로 했다고? 지훈아, 환자와 보호자 끝까지 도와줘야 한다. 여기는 걱정도 하지 마.)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온 동네에 알려서 아주 개망신을 줘야겠다. 지훈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테니까 그놈 가운 벗기자. 그 자식 살려 두면 우리까지 다 망한다. 망해. 이건 욕먹거나 망신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아니야.)
“선생님, 진정하시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윤호, 그 자식이 우리 병원에서 근무까지 했었는데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원장까지 한 놈이 맨날 돈만 밝히고, 자리에만 연연하니 애새끼가 그 모양이 되지. 전화해 달라고 한 놈이나 전화한 놈이나 다 개새끼다. 개새끼.)
“예. 개새끼 맞습니다.”
펄펄 뛰며 화를 내는 송재덕 교수 덕에 속이 후련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며칠 안에 서울 병원에도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어떤 인간들인지도 모르고 친분을 유지하던 몇몇 이사들이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이준영 교수도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잔꾀를 부리며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던 하윤호였지만 제 발로 무덤을 판 꼴이었다. 알량한 돈과 자존심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