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하윤호가 웃었다.
너무 민망하면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결이 달랐다. 이미 알아서 잘 해결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 같았다.
“우리 병원 총무 부장이 만나고 있어. 개인 병원이지만 규모가 있는 데다 능력이 좋아서 잘 처리할 거야. 전종훈 선생도 온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니까.”
“전종훈 선생이요?”
끼리끼리 논다더니 실력 없고, 후배 알기를 발가락의 때처럼 여기는 인간들끼리 한 병원에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동안 사고 꽤나 쳤을 것이다.
“같이 근무했었으니까 누군지 잘 알지? 하여튼 우리 병원 전체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조금만 도와주면 깔끔하게 처리될 거야.”
원래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반응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던 인간이었다. 점점 험악해지는 김지훈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도 나지만 수술 방 간호사도 문제야. 수술 끝나기 직전에 부러지긴 했지만 뒤늦게 기구 끝이 떨어져 나간 걸 알렸거든. 일 커지면 책임을 피하지 못할 거야. 에이! 일도 못하는데 미리 잘랐어야 했어. 어쨌든 김 부원장에게는 털끝만치도 피해가 가지 않을 거고,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자신의 잘못은 아예 없다는 투였다.
차라리 변명이나 핑계를 대기 급급했으면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간호사를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책임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했을 환자의 감정과 고통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한마디로 반성 자체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지금도 김지훈이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 믿고 있는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몸을 푹 묻고 있었다. 아주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자신의 지난날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인간이 있었네. 스승님의 실수가 아니라 내 실수다. 병원을 그만두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되는 인간이었어.’
한숨이 절로 터졌다.
초등학생이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차근차근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올바른 해결인지 말해 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긴말 필요 없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총무 부장이 아니라 집도의가 직접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 잘못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겠다’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잘못? 같은 써전끼리 왜 이래? 수술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잖아. 솔직히 환자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건수 하나 잡았다고 아귀처럼 달려들 거야. 돈, 돈 달라고 말이야.”
김지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이런 인간들 때문에 환자와 의사 서로가 상대를 불신하고, 피해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소 잘못을 인정한 후 다음을 말했어야 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였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인간 망종 같은 새끼!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거야? 너 같은 놈과 같은 의사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할 뿐이다.’
더 이상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말이 길어져야 기분만 상할 것 같군요. 원칙대로 진행할 겁니다. 돌아가세요.”
“원칙대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의료사고가 분명한 이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사고라니?”
“사람이 죽어야만 사고예요? 배 속에 기구를 남겨 두고 나왔는데, 그게 사고가 아니면 뭡니까?”
“좁쌀만 한 거 하나야. 고름이 잡히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지나갈 일이었어. 가위를 남겨 두고 나와도 과실로 잡히는 게 현실이라는 거 몰라? 일 크게 만들지 말자. 어차피 환자만 손해야.”
“서울 병원에서 실수한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이미 여기저기 전화를 한 모양인데 내가 부원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우리 병원 누구도 당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어요.”
하윤호의 얼굴이 돌변했다.
이제야 김지훈이 결코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예전처럼 만만하게 보았거나, 혹은 부원장이 된 이상 변했을 것이라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 부원장, 왜 이래? 이게 나만의 일 같아? 김 부원장도 예외가 아니야. 한 명이 밀리면 다 밀리는 거야. 나한테 도와달라는 소리 평생 안 할 것 같아? 이준영 선생님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잘 생각해.”
‘네가 감히 스승님을 들먹여?’
하윤호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김지훈의 스승인 이준영 교수까지 거론했다. 제 딴에는 압박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붓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윤호, 말 가려 해.”
“뭐?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거야?”
“뭐가 잘못됐어? 넌 써전이기 전에 의사가 돼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어.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을 자격 자체가 없다는 말이야.”
“이… 이……. 너 정말 이럴래?”
“하윤호, 너 사람 잘못 봤어. 이준영 선생님에게 갈 것도 없이 나부터 넘어야 할 거야. 선배 노릇 할 생각 하지 말고 나가.”
김지훈의 목소리가 도리어 나직해졌다.
폭발할 줄 알았건만 이상스럽게도 차분해진 탓이었다.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인간에게 언성을 높이면 똑같은 인간이 될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서울 병원에서 날 밀어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 나 혼자 피해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
‘스승님과 내가 자리에 미쳤다고 생각하나? 부원장을 하기에 내가 너무 젊다 이거야? 미친놈! 넌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야.’
“나가라고 했다.”
“김지훈! 너 이 새끼…….”
급기야 욕이 나왔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윤호!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환자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거야. 실력이 없으면 인간성이라도 갖춰. 당장 나가.”
하윤호를 보는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더 이상 의사로서는 물론 선배로도 대우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분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너 후회할 거야.”
“나가.”
“다시 보자. 그때는 웃을 수 없을 거야.”
‘아무리 막돼먹은 인간이라도 그렇지, 너무 뻔뻔해.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또 한 번 내 눈에 보이면 그땐 정말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얼마든지 와.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당장 꺼져. 넌 의사도 선배도 아니야. 나가.”
악을 쓰려던 하윤호가 일어서다 말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김지훈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냥 사람이 좋아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냈다.
“당장 가운 벗고 수술은 물론 환자도 보지 마. 그따위 실력과 정신으로는 어림도 없어.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야. 가슴 깊이 새겨.”
하윤호의 얼굴이 똥색으로 물들었다.
이보다 더한 수치가 없었다.
거칠게 문이 열렸다.
눈길도 주지 않으려 했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저 자식들이 왜?’
얼떨결에 자리를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선배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반면 이제 의사 생활을 시작한 후배들이기에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욕 안 하길 잘했네.’
쭈뼛쭈뼛!
심호흡을 한 김지훈이 손짓을 했다.
“들어와.”
인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했었다. 더구나 쌍욕이 터지지 않았을 뿐 김지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대화가 오고 갔다.
후배들의 입장을 모를 김지훈이 아니었다.
구차하게 설명할 일도 아니었다.
“인사하려고 기다렸어?”
“죄송합니다.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괜찮아. 도리어 내가 추태를 보여 미안하다. 어쨌든 삼 개월 동안 수고 많았어.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너희들이 원하는 길로 갔으면 좋겠다. 가 봐.”
“감사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인턴들이 서둘러 나왔다.
김지훈의 거친 숨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지성오가 넥타이를 풀었다.
“어후! 선호야, 내가 그냥 가자고 했지? 큰 소리 나올 때 도망갔어야 했는데 이게 뭐야? 하윤호라는 사람이 그 사람 맞지?”
“배 속에 기구 조각 남기고 나온 의사 맞아.”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인데, 왜 그 사람이 욕을 하지? 도대체 무슨 말이 오고 간 걸까? 그건 그렇고, 김지훈 선생님 엄청 무섭네. 욕을 듣고도 목소리 쫙 깔리는데 소름이 다 돋더라.”
정선호가 돌연 웃었다.
“왜 웃어?”
“김지훈 선생님, 정말 인간적이지 않아? 기본과 원칙을 워낙 강조하셔서 엄격한 줄만 알았는데 저런 면이 있으신지 몰랐어. 솔직히 지금도 무섭긴 하지만 왜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어.”
지성오가 한숨을 내뱉었다.
“에휴! 선호야? 회식비를 누가 주셨지?”
“부원장님이시지.”
“다른 병원에서 인턴 회식비 주었다는 소리를 들었어? 못 들었어?”
“못 들었지.”
“우리 오프 확실하게 챙겨 주라는 오더를 누가 내리셨지? 화를 한 번도 안 낸 선생님은 또 누구?”
“그것도 부원장님이시지.”
지성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똑같이 경험했는데 이렇게 해석이 달라질 수 있구나. 난 김지훈 선생님이 무척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가 오늘 모습을 보고 무섭다는 건데, 넌 반대네?”
정선호가 눈만 껌벅거렸다.
‘성오 말이 맞는 것 같네. 난 무엇을 보고 김지훈 선생님이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그때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민정호였다.
“부원장님께 인사드리고 가시는 모양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예. 안녕히 계세요.”
참 특이한 병원이었다.
대개 행정 직원과 의사는 친하지 않다. 특히 인턴이나 전공의는 얼굴 마주할 일이 없어 데면데면한 것이 정상이었다.
민정호는 달랐다.
항상 먼저 아는 척을 하며 깍듯하게 대해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표정 하나 보이지 않아 초반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부원장 직위를 가진 의사가 보이지도 않는 후배들에게 엄청 신경을 썼다. 다른 교수들에게 맡겨도 뭐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 덕에 혹독할 만큼 업무가 많았던 전문 병원 근무를 버텼는지도 몰랐다.
‘좋은 선생님들이 정말 많다는 것은 확실해. 김지훈 선생님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 혹시 하윤호라는 사람과 환자 때문인가?’
“성오야, 김지훈 선생님과 행정부원장님을 보면 정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어울리지 않아?”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나 보지.”
인턴들이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었다.
힘들고 어려운 근무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때 호출기가 울렸다.
정선호가 부리나케 번호를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 나오기도 전에 사색이 됐다.
(너 어디야?)
“부원장님 방 앞입니다.”
(김지훈 선생님이 전화하셨다. 인사드렸으면 바로 와야지, 거기서 뭐 해? 마지막 날이라고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야? 빨리 뛰어와.)
아! 김지훈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았다.
고경철의 목소리가 다급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일과까지 결코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느 한 사람이 있는 한 전문 병원의 분위기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가?”
“집담회!”
정선호의 발소리가 복도를 웅웅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