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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304화 (1,304/1,329)

10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동명이인이길 바랄 정도였다.

“하윤호가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그쪽 총무과에 상황을 전했더니 서울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혹시 아시는 의사입니까?”

다른 하윤호가 있을 수 없었다.

갑갑한 한숨만 터졌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함께 일할 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당시에도 몇 번이나 문제가 생긴 환자를 수습해야 했었다. 미안한 기색은커녕 당당하기까지 해 이해할 구석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그 이후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건만 또 뒷수습을 한다고 생각하니 천불이 날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일반외과 의사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실력조차 없었던 하윤호였다.

시간이 지났다고 없던 실력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인간이 지금도 버젓이 수술을 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어쩐지 수술 부위가 개판이더라.’

“후우! 결국 이런 사고를 치네.”

“왜 그러십니까?”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같은 의사로서 누워 침 뱉는 꼴이었지만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피해를 입는 환자가 끊임없이 나올 테고, 최악의 경우 사망 사고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결코 남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자존심 하나로 먹고살며 유지하고 있는 일반외과의 위상마저 땅에 떨어질 수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연못물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김지훈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민 부원장님, 내일 아침에 시간 되는 대로 보호자를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인간 배경이 만만치 않아요. 어떤 식으로든 무마하려 할 텐데 환자가 이 차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에겐 이미 말했지만 우리 능력이 닿는 선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면 합니다.”

민정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웬만해선 다른 사람을 그 인간이라고 부를 분이 아닌데 감정적인 문제까지 겹친 건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믿어도 될까요?”

“그렇게 보인다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술을 해서는 안 되는 의사를 두고 볼 수만은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면허까지 박탈시켜 버리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제도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 아쉬울 뿐입니다.”

김지훈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민정호에겐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적정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법적인 부분까지 검토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원장님도 전면에 나서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의사 사회가 정말 좁지 않습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오해는 풀리기 마련입니다. 사정을 알고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필요하다면 법정에 설 용의가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진행하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의료인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어깨가 무거워지지만 부원장님과 같은 의사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네요.”

“칭찬입니까?”

“존경입니다. 오늘 밤 준비할 것이 제법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존경이라고 했다.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이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분명했다.

일방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개선해 나가야 불신의 벽을 깰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하윤호 때문에 망가진 기분이 민정호의 말 한마디로 풀렸다.

물론 응징은 별개였다.

***

토요일 아침.

회진이 끝나자마자 긴급회의가 열렸다.

뜻밖에도 이준영 교수의 요청이었다.

김지훈, 손일석, 이경석, 진충기 교수, 서도진에 민정호까지 참석했다. 특별한 안건이 있을 상황이 아닌 탓에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회의를 기다렸다.

물론 최해연 환자 문제로 많은 말들이 오고 갔고,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에 김지훈이 별도로 보고를 하긴 했다. 하지만 일반외과 주요 인물이 모두 모일 사안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민정호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선생님, 모두 모였습니다.”

“김 부원장, 최해연 환자는 어때?”

“다행히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만 소장과 대장의 염증이 심해 아직은 지켜봐야 합니다. 곧 집담회를 시작할 시간인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잔뜩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한 상황과 현재 진행하고 있는 대처에 대해 다시 설명해 달라는 말까지 했다.

김지훈이 핵심적인 사항을 보고했다.

“잘 대처했어. 의료사고가 확실하다는 사실에 이견이 있는 사람 있나?”

있을 리 없었다.

진충기 교수도 십분 동의했다.

“하윤호 선생이 누군지 잘 모르지만, 부러진 기구까지 명확한 증거가 있는 이상 이번 일은 빼도 박도 못할 의료사고입니다. 수술 후 진료 과정이나 행태도 정상적이지 못했습니다.”

“진 교수,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원칙이 뭐지?”

“환자와 보호자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합의가 안 되거나 법적인 문제로 비화된다면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도의적인 책임 이런 말 자체가 불쾌할 지경입니다.”

“다들 동의해?”

“동의합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마치 다짐을 받는 것 같았다.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뭔가 이상해.’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별일 아니지만 하윤호 집안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일로 연락을 받는 사람이 여럿 있을 거야. 확실하게 대처해.”

“잘 봐달라는 전화라도 받으셨습니까?”

“받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윤호는 써전이 아니라고 했다.”

다들 멍하니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직진도 이런 직진이 없었다.

당연히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면전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평소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던 만큼 확실하게 대처하라는 말 역시 글자 그 자체로 해석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해야 했다. 원장 취임이 거의 기정사실인 상황인지라 세간의 눈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경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년에 종합 병원으로 새롭게 개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의사는 없습니다. 의료계에 하윤호 집안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너무 전면에 나서시면 상황에 따라 입장이 곤란해지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은연중 원장 취임을 기정사실화했다.

힐끗 눈길을 준 이준영 교수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평소라면 한마디 할 법했지만 분명 예전과 다른 눈빛이었다. 이어진 말 역시 의외였다.

“그런 점을 생각하기에는 내 실수가 너무 컸다.”

“실수라니요?”

“김 부원장과 자네들의 노력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인간이란 사실을 간과했어. 내 불찰이야. 선배로서 바로잡았어야 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김 부원장과 함께 원칙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완고하고,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의료계야.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해도 의사 하나 매장시켰다는 사실 하나로 허물이 될 수도 있어. 너희들에게 그런 짐을 안긴다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하윤호 건은 내가 최종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다. 앞으로 모든 진행 상황을 내게 보고해. 민 부원장도 마찬가지야. 이 건에 대해 연락을 받으면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내게 돌려.”

“선생님!”

“선배로서 내리는 오더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대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전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집담회 준비해야지.”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하윤호 건보다 환자와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뒤를 따르는 교수들의 발걸음에 은근한 힘이 들어갔다. 궂은일, 다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자청한 선배이자 스승의 등이 정말 든든했다.

민정호가 중얼거렸다.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제 입장까지 신경 쓰시다니 보기와 달리 섬세한 구석까지 있으시네요.”

“민 부원장, 다들 괜히 원장님으로 추대하는 게 아니야. 나하고 완전히 상반되는 분이지만 솔직히 닮고 싶을 때가 많아.”

“손 교수님도 좋은 분입니다.”

“좋은 성격에 카리스마까지 갖추면 완벽할 텐데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서 문제네. 어쨌든 이준영 선생님이 직접 칼을 뽑은 이상 하윤호는 확실히 죽었어. 불길에 휩싸인 칼에 타 죽을까? 맞아 죽을까? 그것만 남았네.”

‘카리스마?’

민정호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그때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손님이 왔다고요?”

김지훈이 돌연 혀를 찼다.

이준영 교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손 교수, 나 오늘 집담회 못 들어가.”

“왜? 설마 또 응급실이야?”

“에휴! 보기 싫은 인간이 왔단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봐야겠지.”

“환자는 그따위로 보면서 자기 일이 되니까 똥줄이 탔구나. 방금 전에 하신 말씀도 있는데 이준영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왜 써? 나서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히 처리할 거야. 선배 대접을 할 상황이 아니잖아. 선생님께는 만나 보고 말씀드릴 테니까 지금은 못 들은 걸로 해.”

“오케이! 우리 김 부원장이 칼 뽑으면 누구보다도 무섭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민 부원장, 갑시다. 아! 각자 갈 길로.”

손일석이 손마디를 꺾었다.

함께 가면 더욱 강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여러 사람이 달려들 일이 아니었다. 재수술을 한 집도의로서 대처해도 충분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부원장실로 향했다.

엉뚱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턴 선생들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로 근무 끝나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정선호 선생, 일과 아직 안 끝났잖아.”

“고경철 선생님이 토요일이라 시간이 없다고 인사부터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끝나는 대로 집담회 참석하겠습니다.”

“알았다. 내가 지금 급하게 만날 사람이 있으니까 일단 집담회부터 참석해. 가기 전에 얼굴 보자. 미안하다.”

“알겠습니다.”

정선호가 머뭇거렸다.

“안 가?”

“성오야, 지금 아니면 인사 못 드릴 것 같아.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가자.”

“툭하면 응급 수술을 하시는데 그렇긴 해.”

인턴들도 확실하게 깨달은 지 오래였다.

일복의 화신이 누구인지.

방금 전에 본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집담회 참석 안 했다고 설마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하윤호와 마주 앉았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며 선물이 담긴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지만 긴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형식적인 인사조차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용건이 뭡니까? 최해연 환자 때문에 오셨습니까?”

“많이 급해졌네. 좋은 일도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도와줬으면 해.”

“도와달라고요?”

김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장 곤란한 거 나도 알아. 수술 후에 끝까지 찾아봤는데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 솔직히 뼈에 쇠를 대도 괜찮은데 기구 쪼가리 하나가 배 속에서 난리를 쳤다는 게 이상한 일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미안. 핑계처럼 들리겠지. 어쨌든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환자와 보호자에게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준영 선생님과 원장님에게도 이미 연락이 갔을 거야. 김 부원장만 잘 말해 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김지훈이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환자였다.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그저 그런 집이더라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돈 좀 집어 주면 별말 없을 거야. 물론 치료비 일체를 책임져야겠지. 우리 모두 같은 의사잖아. 이럴 때 서로 돕고 살면 김 부원장 앞날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우리 집안 힘이라면…….”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그런 집안.

도의적 책임.

같은 의사.

집안의 위세.

더 이상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그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환자는 만났습니까?”

김지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폭발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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