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찌이이익! 찌이이익!
튜브를 통해 진한 가래를 뽑아냈다.
산소 포화도가 널뛰며 또 다른 경고음이 울렸다. 동시에 심전도 그래프가 출렁였다. 심장 기능 이상이 아니라 강한 자극에 환자 스스로 가슴을 움직였다는 의미였다.
정선호의 심장이 뛰었다.
출발선에 선 사람처럼 긴장이 고조됐다.
‘제발! 제발!’
환자의 눈꺼풀이 떨렸다.
창백한 팔다리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눈을 떴다.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며 인투베이션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고경철이 소리쳤다.
“환자분, 내 말 들리세요? 들리면 눈 한 번 깜빡여 보세요. 내 말 들려요?”
환자가 눈을 깜빡였다.
의식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게도 혈압까지 상승하며 더욱 강하게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경험도 없는 정선호에겐 충격이자 기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김지훈의 퇴근이 늦어졌다.
갖가지 검사가 다시 시행됐다.
신중한 판단하에 인투베이션까지 제거하기로 했다. 애초 비장만 손상을 받은 환자기에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한 치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킵을 하는 사람은 밤새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인투베이션 빼자.”
쿨럭! 쿨럭!
“끄으으응!”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치에 수반되는 자극과 고통 때문이겠지만 정선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특별 면회를 허락받은 보호자들이 환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펑펑 울었다.
환자가 안정 상태를 유지했다.
한동안 자리를 지키던 김지훈이 벅찬 표정으로 퇴근했다. 고경철이 주의할 점을 신신당부한 후 숙소로 향했다. 거의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어깨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양재필과 정선호만 남았다.
“이게 터닝 포인트인가요?”
“그렇겠지?”
“너무 드라마틱해서 믿어지지가 않네요. 어떻게 한순간에 좋아질 수가 있죠?”
“나도 이런 경우는 거의 경험이 없지만 병동에서는 가끔 봐. 어느 날 갑자기 죽도 못 먹던 환자 식욕이 폭발하는 날이 있거든. 이 정도로 극적이진 않지만 터닝 포인트인 것만은 분명해.”
양재필이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일반외과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야. 가망이 없다고 여겨졌던 환자를 살리는 것만큼 벅차고 멋진 일이 있을까? 열심히 해서 전문 병원 선생님들에게 인정받는 써전이 되고 싶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강인한 의지가 눈에 보였다.
정선호가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싸워 이기는 의사와 환자를 처음 보았다. 경제적인 풍요, 개인적인 명예 이전에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을 본 날이기도 했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극적으로 삶을 찾은 환자가 병실로 옮겨졌다. 환자 한 명이 주는 부담을 덜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아픈 사람은 끝이 없었고, 의사들의 어깨는 여전히 무거웠다.
모두들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워낙 업무량이 많은 데다 병원 분위기상 독불장군이 살아남기 힘든 구조였다. 선후배는 물론 모든 직원과 긴밀하게 협조해야만 탈이 생기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한 것이 아니었다.
정답에 가까운 일의 방식일 것이다.
“의사의 오더가 철저하게 이행돼야 하는 경우는 치료에 국한될 때뿐이야. 만약 오류가 있다면 누가 어떤 지적을 하든 반드시 수정해야 돼. 그래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병원 운영에 관한 나머지 부분은 수평적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마.”
김지훈의 철학이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났다.
모든 인턴들이 자신의 업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다른 병원에 비해 상당히 빡빡한 수련 방식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어느새 전문 병원 근무가 일주일 남았다.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준 비장 손상 환자가 무사히 퇴원하는 모습에 정선호가 무척 즐거워했다. 그도 잠시, 돌아서는 순간 본래의 안색인 것처럼 얼굴이 까매졌다.
어마어마하게 밀어닥치는 일이 주는 중압감만 있다면 누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당근 잘 받아먹었다.
김지훈이 준 회식비를 탈탈 털어 몽땅 배 속에 집어넣었다. 허해진 몸에 다소 활력이 돌자 의사들의 회식 자리가 으레 그렇듯 바로 병원이 입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진로 문제가 이어졌다.
“이번 주만 버티면 끝이네. 어후! 다신 이런 스케줄에 걸리고 싶지 않다. 선호야, 넌 어때?”
“몸은 힘들어도 병원 분위기가 정말 좋은 것 같아. 배운 것도 정말 많고.”
“그래서 설마 외과 지원하겠다는 거야? 잘 생각해. 죽어라 고생해도 돈 못 버는 과야. 성오야, 너도 같은 생각인 건 아니지?”
“돈이 문제가 아니야. 예상외로 재밌었어. 어후! 내가 왜 이러지? 루뻬에 홀렸나?”
정선호가 피식 웃었다.
“홀렸네. 손일석 선생님 혈관 수술을 들어가면 엄청 무서우면서도 재미있긴 하더라. 솔직히 김지훈 선생님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은 되는데 양재필 선생님을 보면 살이 떨려.”
“재미있다고? 미쳤네. 미쳤어.”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반외과 입장에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네 명 중 무려 두 명이 호의 혹은 지원 의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 들었다면 남은 일주일 동안 엄청난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인턴만의 자리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간만에 단둘만의 자리를 가졌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니라 커피 한잔하고 싶었다. 부담 없이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웠다.
“정훈이 본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네.”
“희연이가 누나 노릇 잘하고 있어. 내 눈에는 다 애들인데 언제 컸는지 아주 야물딱져.”
“간 이식 센터 일에 신경 못 써서 미안하다.”
“진충기 선생님과 내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지금처럼 부원장 일에 신경 쓰면서 한 발만 담가도 돼. 우리도 좀 먹고살자. 그나저나 이준영 선생님은 말씀 없으셨어?”
이준영 교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별말씀이 없으신데 원장 자리를 수락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참 희한한 양반이야. 환자에 관한 일은 딱 부러지게 행동하시면서 자리만 관련되면 왜 그렇게 미적지근하신지 모르겠어. 확인해 본다고 공연히 말 꺼냈다간 역효과만 날 거야. 조용히 모른 척하면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그럴까?”
김지훈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은 곧 긍정이라지만 마냥 손 놓고 기다리다가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더구나 초대 원장인 만큼 누구보다 병원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당연히 준비가 필요했다.
눈가를 굳히던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노심초사할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단독 후보로 결정된 이후 병원과 관련된 사안이 담긴 서류를 매일 이준영 교수 방에 전달해 왔다. 김진호 교수는 환영 일색이었고, 한 번쯤 된소리 할 것 같았던 스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토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식적으로 취임을 하는 순간이 돼야 마음이 놓이겠지만 왠지 뿌듯했다. 원장실에 앉아 자신의 보고를 듣고 결정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스승님, 왜 그렇게 자리를 마다하시는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음성 병원으로 가게 된 이유와 금경태와의 일이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다면 억측일까요? 하지만 스승님만큼 자격이 되시는 분도 없습니다. 우리 병원 모든 직원들이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훈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이준영 교수는 음성 병원부터 시작해 부원장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존재가 중심을 잡아 준다면 어떤 어려움도 앞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손일석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 내 말에 무슨 하자라도 있다는 거야?”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당연하지. 유석재 선생님과 최철한 선생님을 생각해 봐. 항문하고 위장관 쪽으로 진로를 바꾸셨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만 봐도 그래. 경석이 형이나 나나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가잖아. 사람 다 상황에 맞춰 변하는 거야. 이준영 선생님이라고 별수 있겠어? 제자가 부원장인데 원장을 하네 마네 하시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니야?”
“그런가?”
“세상은 요지경, 돌고 돌아 제자리란 말이 괜히 있겠어? 이준영 선생님도 이제 고집 꺾으시고 자기 자리 찾으시는 것이 맞아. 네가 드린 서류도 다 검토하시는 것 같던데 이 정도면 승낙하신 거나 마찬가지지.”
“서류? 어떻게 알았어?”
“지훈아, 나 손일석이야.”
하오문주의 능력을 잠시 잊고 있었다.
긍정적인 말에 힘도 얻었다.
어깨를 으쓱인 손일석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휘파람을 불었다.
“야! 세상이 변하긴 변하는 모양이네. 우리 부원장님과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일복 조절하면 얼마나 좋아.”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몸이 편해졌다.
서도훈과 나종진에게 파트 하나를 온전히 넘긴 후 수술이 줄어든 덕이었다. 손이 근질근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대신 다른 수술에 그만큼 더 집중할 수 있어 오히려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
고경아와 희연이 입에도 꽃이 폈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일찍 퇴근하는 남편과 아빠를 마다할 가족은 없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진 희연이를 챙겨 주는 것만으로도 고경아에게는 엄청난 힘이었다.
“나도 여유롭게 일하고 싶다.”
“내가 응원해 줄 테니까 노력해. 오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대신 알맞게 일하자. 이젠 하루가 멀다 하고 어깨가 쑤셔요. 적당한 휴식도 일의 연장 아니겠어?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윈윈이야.”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각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겠지만 선택과 집중은 일상에도 적용해야 할 말이었다. 무리하게 몸을 굴리다 보면 언젠가 탈이 나고도 남았다.
‘간 이식과 소아외과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건 사실이야. 적당한 휴식이라!’
슬슬 주말이 가까워졌다.
목요일 오후 진료를 앞둔 김지훈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육체적 피로를 덜은 데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자 치료를 두고 펠로우들끼리 격한 논쟁이 있었다. 모찬우와 한수영은 물론 송진우까지 참전했고, 결국 한쪽의 주장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자존심 강한 써전들이었다.
논리에서 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는 기분 나빠하거나 반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흔쾌히 상대의 의견을 인정했고, 십분 반영했다.
치료 방식 결정의 정석이었다.
‘이런 태도는 선배 후배를 가리지 않고 배워야 돼. 환자에게 이보다 최선은 없지. 나도 가끔은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기 어려운데 집담회의 힘인가? 정말 보기 좋네.’
한없이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었다.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후 진료를 시작했다.
다소 의외의 환자가 내원했다.
35세 여자, 최해연.
한 달 전 모 개인 종합 병원에서 담석으로 담낭 절제술을 받았다. 대세와 달리 쓰리 포트로 복강경을 시행했지만 포트 수가 적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쓰리 포트로 해야 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런데 왜 과장님이나 나 교수를 두고 내 앞으로 접수했을까?’
환자가 진료 교수를 특정했을 테지만 복강경 수술에 관한 한 소문난 교수들을 보유한 전문 병원이었다. 수술 후 치료의 전문성도 마찬가지였다.
의아한 일이긴 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한 달 전에 담석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계속 아파서 왔어요. 이제는 열이 나면서 오한까지 느껴지네요. 배도 수술하기 전보다 더 아파졌어요.”
환자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오랜 통증에 시달린 티가 역력했다.
보호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원인을 떠나 병을 고치러 갔다가 병을 얻은 꼴이니 담담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뻬와 치질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으로 신경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수술 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개복이든 복강경이든 배 속을 보고, 직접 병변을 해결한 의사가 환자 상태를 가장 잘 알기 마련이었다. 환자의 수술 병력과 함께 집도의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셨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수술한 병원에는 찾아가 보셨나요?”
“세 번이나 갔다 왔어요. 심할 때는 꼼짝도 못하는데 배만 만져 보고 문제없다는 소리만 하네요. 아는 사람에게 선생님을 소개받아 찾아왔어요.”
“검사는 안 받았습니까?”
“배만 만져 본 게 다예요. 선생님, 저 좀 살려 주세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간 모양인데 배만 만져 봤다고? 이거 이상하네.’
살려 달라는 말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정말 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