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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300화 (1,300/1,329)

6화

여전히 환자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이탈의 변동은 없었지만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술 전과의 차이라면 깨진 비장을 제거했다는 것뿐이었다.

심각한 눈으로 환자 상태를 점검하며 수시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던 김지훈이 다른 교수들의 회진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병동으로 올라갔다.

“정선호, 킵하고 있어.”

고경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정선호가 슬며시 김지훈이 내린 오더가 지닌 의미에 대해 물었다.

“킵하라고 하셨다고?”

“예. 중환자실을 돌긴 했지만 개별 환자 때문에 킵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전에 다른 말씀 없었고?”

“환자 파악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경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턴 선생 혼자 킵을 서게 하실 리가 없는데, 환자를 파악하라고 하셨다면 킵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려는 생각일까? 선호가 마음에 딱 드신 모양이네.’

정선호에겐 무척 예외적인 일일 수 있었지만 김지훈은 예전부터 인턴도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의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의도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해도 해 줄 말이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원하신 것은 아닐 거야. 다만 환자 파악을 말씀하신 걸 보면 무엇을 봐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자리만 지킨다고 킵이 아니잖아?”

지당한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정선호가 고경철의 대처를 유심히 살피며 환자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덕분인지 오더를 받아 무조건 실행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오더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아! 이럴 때는 바로 대처해야 하는구나.’

꽤 시간이 지나 병동 일을 다 끝낸 양재필이 내려왔다. 고경철이 그사이 있었던 변동에 대해 충분히 전달한 후 오프를 갔다. 물론 언제든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기록한 후였다.

“근처에 있을 거니까 혹시 수술 때문에 킵을 할 사람이 없거나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정선호가 흠칫 놀랐다.

“고경철 선생님 오프셨어요?”

“뭘 놀라고 그래?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 바이탈이 안 잡혔으면 주말 오프 반납하고도 남을 선생님이야. 어후! 내 오프 때는 조용히 지나가야 하는데.”

인턴에게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일 년 차였다. 보다 마음 편히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사이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정선호가 먼저 끼니를 해결했다.

중환자실 환자가 신경 쓰여 밥맛이 없었지만 킵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꾸역꾸역 배를 채워 체력을 비축했다.

“선호야, 나는 밥 먹고 병동 일 끝내야 하니까 그때까지 환자 잘 보고 있어. 오후 검사 결과 확인하고, 이상 있으면 바로 연락 줘.”

정선호 홀로 남았다.

‘은근히 졸리네. 차라리 굶을 걸 그랬나? 양재필 선생님은 어떻게 버티시는지 모르겠네.’

참거나 오프 때 몰아 자는 수밖에!

찬물에 머리까지 감고서야 졸음이 달아났다.

머릿속이 다소 개운해진 덕인지 환자를 파악하고, 킵을 하라는 김지훈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주말 오프임에도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킨 후 멀리 가지 못하는 고경철까지 생각났다.

단순히 자리를 지킬 수만은 없었다. 막연히 바이탈의 변동만 점검하는 것이 아닌 환자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각오로 진짜 킵을 해야 했다.

띠띠띠! 띠띠띠!

심박동은 아직도 급박했다.

슈우욱! 슈우욱!

강제적인 인공호흡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안정을 위해 재운 탓도 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살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긍정적인 면은 없을까?’

조심스럽게 드레인을 확인했다.

피가 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소변 줄을 살폈다.

똑! 똑! 똑!

느린 속도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희망이 있다는 의미였지만 혼자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불안이 엄습했다. 제때 대처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겹치며 불길한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필사적인 CPR에도 사망했던 환자.

토요일 오전부터 써전들이 달라붙어 결국 수술까지 시행했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는 환자.

둘의 차이는 없었다.

의사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자 절대 피해서는 안 될 환자들이었다. 하지만 죽음에 직면한 환자를 생각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선배들은 이렇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이겨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뎌진 걸까? 보다 보면 나도 무뎌질까? 과연 내가 치료하던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이 환자를 살리고 싶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바이탈과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차근차근 오더를 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치료 지침서를 다시 읽어 가며 의미를 되새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록에도 충실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

환자는 변화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육 년간의 힘든 공부를 마치고 의사 면허를 땄을 때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뻤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보아야 했다.

‘난 그동안 무엇을 배운 걸까? 분명 머릿속에 다 있을 텐데 정작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턴이기 때문에? 아니다. 미숙하기 때문이다.’

비참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는커녕 일반적인 환자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목숨을 맡기고 있는 환자 얼굴에 눈길도 주지 못했다.

살리고 싶다는 생각만 남았다.

그럴수록 더욱 초조하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김지훈이었다.

정선호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양재필 선생은?”

“병동에 계실 겁니다. 연락할까요?”

“아니다. 차트 보자.”

김지훈이 자신이 없었던 동안의 기록을 살폈다. 현재 상태와 비교할 생각인지 때때로 환자를 보는 눈빛이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정선호로서는 떨리는 순간이었다.

‘내 기록도 있는데 괜히 했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은 조용히 환자를 보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오더가 떨어질 때마다 정선호가 꿀꺽 침을 삼켰다.

기대와 달리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련한 의사가 이토록 신경을 쓰는데 반응조차 없다니 가망이 없는 환자인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이제야 눈길을 주었다.

‘중환자실 근무 때와 또 다르겠지. 어떤 과를 하든 바이탈의 의미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겠다. 힘들 때는 쉬는 것도 환자를 잘 보는 방법 중 하나야.’

“들어가서 쉬어.”

“아닙니다. 양재필 선생님이 교대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있겠습니다.”

입장 곤란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언뜻 각오가 엿보인 데다 인턴에게 무리한 과제까지 던진 이상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필요한 때였다.

“정선호, 이 환자 살 것 같아?”

두려운 질문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때가 의사로서 가장 힘든 순간이긴 해. 선호야, 환자는 어떤 의사에게 치료받길 원할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인간성은 빵점이지만 실력만은 인정받는 의사, 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인간성은 정말 좋은 의사 중 어떤 쪽을 원할 것 같아?”

“둘 중의 한 명을 꼭 택해야 한다면 인간성이 좋은 의사 아닐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대부분의 환자에게는 인간성이 좋은 의사가 필요해. 우리가 흔히 보는 질환이라면 한마디 말도 좋은 약만큼 치료 효과가 있을 거야. 하지만 생사가 달린 환자를 보아야 하는 대학 병원 의사라면?”

“실력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맞아. 지금 이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는 같이 불안해하며 눈물을 흘려 줄 의사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야. 최선이란 말속에 무엇을 포함시킬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실력은 절대 빠지면 안 된다.”

정선호가 콧등을 찡그렸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마음대로 돼? 나도 힘들어. 하지만 치료 중인 의사는 무조건 이성이 앞서야 돼. 감정은 환자가 건강해지고 난 후의 일이야. 앞으로 어깨 떨어트리지 마라. 감정에 소모되는 정신을 치료에 쏟아부어. 난 아직 희망을 잃지 않았다. 환자 보자.”

김지훈이 다시 환자에게 집중했다.

정선호가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의사도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양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평범하기만 한 등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흘렀다.

환자는 여전히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 탓인지 머릿속으로는 김지훈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정선호였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다 알고 계셨구나. 하지만 죽어 가는 환자를 보며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지? 그래야 한다는 걸 안다고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아.’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고경철과 양재필이었다.

“선생님, 왜 오셨어요?”

“걱정돼서 왔지. 솔직히 할 일도 없고, 혼자 술 마시는 건 더 지겨워. 어? 김지훈 선생님 오셨네. 선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환자에게…….”

“별일 없어. 펠로우 선생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와서 나왔을 뿐이야. 오프인 놈이 잠이나 푹 잘 것이지, 병원은 왜 또 와?”

김지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환자를 보는 척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미안하면서 한편으로 고마운 모양이었다.

“저희가 볼 테니까 들어가시죠.”

“안정제 투여 중지했다. 조금만 더 보자.”

“자발 호흡이 더 강해졌습니까?”

“자발 호흡 위주로 돌아가도록 인공호흡기 모드(Mode) 바꾼 후에도 별문제 없는 상태야.”

고경철과 양재필이 바짝 긴장했다.

미세하게나마 호흡이 강해졌다는 것은 회복의 징후 중 하나였다. 겸사겸사 의식 상태까지 확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집중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결국 의사 넷이 킵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정제 효과가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확실한 변화를 보이는지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김지훈이 그간의 경험이 가득 담긴 보따리를 풀었다. 정선호는 물론 고경철과 양재필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산지식이었다.

정선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이 먼저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오히려 의사가 가져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을 보여 주시는 거 아닌가? 환자가 원하는 의사는 인간성과 실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어야 하겠지.’

김지훈의 강의 아닌 강의가 이어졌다.

정선호가 바짝 귀를 기울이면서도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선배들의 열정과 의지가 전해졌는지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라도 절대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정선호가 눈을 비볐다.

모든 정신이 환자에게만 집중됐다.

김지훈의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움직인 것 같은데 아닌가?’

잘못 본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비비는 순간 환자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환자를 건드린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대로 소리쳤다.

“선생님, 환자…….”

삐이이이! 삐이이이!

동시에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정선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경련이었나?’

화들짝 놀라며 허둥거리는 의사는 정선호뿐이었다. 다들 눈가에 힘을 준 채 비명을 질러 대는 인공호흡기를 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양재필이 입술을 물었다.

“파이팅 같습니다.”

“파이팅 맞아. 인공호흡기 떼고 바이탈, 동공반사, 의식 상태 체크해.”

모두들 빠르게 대처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환자 머리맡에 서서 선배들의 대처를 지켜보던 정선호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의식을 회복하고, 바이탈이 더욱 안정된다면 말로만 듣던 터닝 포인트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삶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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