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97화 (1,297/1,329)

3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한 명이 남았다.

인턴 때 시작해 음성 병원에서 큰 인연이 닿은 정형외과 교수 김대성이었다. 두루두루 인망이 두터워 과를 불문하고 존경을 받은 써전이기도 했다. 정성스럽게 맞이해도 모자랄 판에 회의 내내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죄송합니다.’

“신 이사장님, 우리 과 일밖에 없는데 김대성 선생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김대성 선생님, 미리 인사부터 하시죠.”

“서울 병원에서 스파인(Spine:척추) 파트를 맡고 있는 김대성입니다. 반갑습니다.”

김대성 교수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늘 함께 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신설 종합 병원의 정형외과 과장님으로 내정되셨기 때문입니다. 정형외과 환자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전문 병원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여러 선생님들과 인사도 나눌 겸 모셨습니다. 김대성 선생님,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저 때문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습니다. 회의 끝난 후 응급실에 들러 현황만 파악하면 됩니다.”

모든 논의가 끝났다.

오래간만에 본 데다 교수로 복귀한다는 특별한 결정을 내린 이상 간단하나마 환영의 뒤풀이가 필요했다. 그 전에 응급실을 들러야 하지만 말이다.

김지훈이 부원장으로서 수련 부장인 서도진과 함께 김대성 교수를 안내했다. 가뜩이나 환자들로 붐비는 상황에서 일복의 화신이 난데없이 방문하자 간호사들이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김 부원장, 왜 저래?”

“글쎄요. 왜 저럴까요?”

“듣던 대로 아직도 많이 뿌리고 다니는구나. 그런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살살 해.”

“마음처럼 되질 않네요. 하하하!”

김대성 교수가 유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전공의와 인턴들을 바라보았다. 한편으로 월간 통계를 보며 응급실로 내원하는 정형외과 환자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다.

“이젠 이 지역 사람들 모두 정형외과가 없는 걸 알 텐데 수술이 필요한 골절 환자까지 상당히 많네. 다 어떻게 봤어?”

“일반 사고 같은 경우에도 동반 손상이 걱정되는지 심하다 싶으면 일단 우리 병원부터 내원합니다. 대부분 응급 처치 후 이송하지만 시간이 꽤 걸려 항상 조마조마한 상황입니다.”

“전문 병원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가 보네.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긴 한데 처치가 정확하게 되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최선을 다하지만 기본 처치라 해도 정형외과 선생만큼 치료할 수는 없죠. 신경외과 환자와 성형외과 환자도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자체적으로 인원을 확보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걱정입니다.”

“전공의라도 파견해 주면 좋겠지만 서울 병원 상황 역시 만만치 않아. 어쨌든 이렇게 환자가 많으면 병상 확보도 그렇고 전공의 티오까지 제법 신청해야 할 것 같네. 미리 와 보길 잘했어.”

단순한 현황 파악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써전답게 김대성 교수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의 과가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면 다른 과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면 이 건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해? 규모가 작지 않아서 건강 검진 센터로 만들어도 되겠어. 요새 검진받는 사람이 정말 많잖아.”

“계속 간 이식 센터로 사용될 겁니다.”

“그래? 환자 엄청 많다며? 기부까지 크게 받아서 새 건물로 더 넓게 옮겨 갈 줄 알았는데 의외네.”

“우리만 진료하나요.”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졌다.

너무 시간을 끌었다.

왜애애애앵!

무슨 사고인지 온몸이 허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한눈에도 중한 환자들이었고, 으레 그렇듯 팔다리가 성할 상태가 아니었다.

간호사들 눈빛이 살벌해졌다.

당직이기도 했지만 김지훈 때문에 집에 갈 생각을 하지 못하던 서도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대성 교수가 피식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럼 그렇지. 초지일관 변하질 않네.’

정형외과 써전 한 명이 가세했을 뿐인데 정말 빠르게 환자 처치가 이어졌다. 수북하게 쌓인 방사선 필름을 확인하며 바로 필요한 오더를 내렸고, 이내 수술 여부 및 이송까지 모두 완료됐다. 노련한 써전의 힘이자 다양한 과가 필요한 이유였다.

응급실이 평정됐다.

“부원장님, 계속 있으실 거예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응급실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흠칫 놀란 김지훈이 김대성 교수와 함께 빠르게 빠져나갔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더 이상의 폭탄은 없을 것이다.

간단한 자리가 이어졌다.

은퇴를 앞두고 본연의 일에 전념하고자 하는 송재덕 교수의 결정은 분명 귀감이었다. 후배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다.

“내 결정이 정답은 아니지만 지나친 욕심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다 알지? 그치? 적당히가 아니라 적절하게 처신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 평균은 간다. 평균은. 이 교수, 우리 적절하게 평균적으로 행동하자.”

의미심장한 말까지 덧붙였다.

이준영 교수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얼굴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도 대놓고 좋아할 상황이 아닌지라 딴청을 피웠지만 내심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파이팅! 더, 더 밀어붙여 주세요.’

신현수의 결정은 강력한 자극이었다.

이사장직을 내려놓는 결단은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특히 어떤 각오로 위장관 교수직을 수행할지에 대해서는 가늠조차 불가능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건 정도 수술한다고 들었는데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 안 되나? 신 이사장 능력이면 충분하잖아?”

“손 교수, 현재 내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서 나가는 사람을 따라잡기 힘들어. 우리 사인방의 등을 보고 싶지 않아. 그게 최소한의 목표야.”

“겁나는 최소다. 하긴 나도 신현수 뒤에 서고 싶지 않으니까 피장파장이네. 내년에 합류하면 발바닥에 땀날 정도로 달려야 할 거야.”

“지금은 내가 뒤처졌을지 모르지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김지훈이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각자 세부 전공이 달라 예전처럼 실력의 우열을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누가 먼저 최고의 써전 혹은 대가로 인정받는지를 두고 싸우게 될 것이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하면 족한 만큼 이보다 건전한 경쟁은 없었다.

‘우리가 단순히 명수 때문에 사인방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네. 방심할 만하면 누군가 한 명이 꼭 정신이 번쩍 들 자극을 준단 말이지?’

그런 면에서 김대성 교수에게도 배울 것이 많았다. 하나의 과를 책임져야 하는 의사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김대성 선생님, 내년에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할 말이야. 일개 과장인데 부원장님한테 잘 보이는 게 맞지 않아?”

“에이! 병원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자리입니다. 다음번 부원장을 하실 선생님께 폐를 안 끼치면 다행이죠.”

‘하긴 김 교수처럼 부원장 티를 내지 않는 의사가 없을 거야. 욕먹기 딱 좋은 자리지만 김 교수는 반대일 것 같긴 해.’

어느새 밤이 깊었다.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가 돌아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복귀까지 결정된 마당이라 종합 병원 개원 전이라도 지겹도록 얼굴을 볼 것이다.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강력한 자극이었다.

교수 선발 인원이 줄어든 덕분에 김지훈의 업무 중 가장 까다롭게 여겼던 부분의 일이 확 줄었다. 다만 그 이상 신경이 가는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김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며칠 후.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부리나케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원장 후보 중 한 명인 김진호 교수는 물론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와도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눈 후였다.

“무슨 일이야?”

“송재덕 선생님께서 원장직을 고사하셨는데 스승님도 결정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결정?”

“왜 이러십니까?”

“김 원장과 얘기 끝났어.”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원장님과 상의 끝냈습니다. 송재덕 교수님이 고사하신 마당에 종합 병원 초대 원장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신다며, 후보군에서 아예 제외해 달라는 요청까지 하신 상태입니다.”

“뭐? 언제?”

“오늘 오전에 인사 위원회와 통화를 하신 모양입니다. 신 이사장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요.”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후보에서조차 빼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단독 후보라면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원장 취임이 기정사실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초 원장 자리에 욕심을 냈다면 이미 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이제 와 마음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이를 모를 김지훈이 아니었다.

“고사 이런 단어는 떠올리지도 마십시오. 스승님으로 결정됐다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행정 일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됐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맡으면 제대로 굴러가겠어? 직원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동안 제가 진행 상황을 일일이 보고드렸습니다. 김진호 선생님만큼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후보 명단에 들었을 때 눈치채고 아예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스로 발등을 찍은 꼴이군. 서류 들고 찾아올 때마다 내쫓았어야 했어.’

김지훈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고, 김진호 교수가 워낙 원장 역할을 잘 수행해 방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변명조차 궁했다.

“흐음! 그거야…….”

“제게 틈틈이 조언까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 원장님 후보를 다시 물색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시간은 충분해.”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희연이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하나뿐인 제자 살려 주시는 일이란 말씀입니다. 제 얼굴 죽어 가는 거 안 보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을 더 주셔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이준영 교수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표정부터 말까지 일석이에게 아주 좋은 걸 배웠구나.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제자 입장에서 스승이 원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이준영 교수 입장에서 보면 핑계이자 앓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김진호 원장 체제 아래 어떤 문제도 없이 잘 운영해 왔다. 솔직히 새로운 후보를 물색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애먼 소리 하지 말고 다시 생각해. 원장을 할 만한 선생님들이 많아.”

목소리까지 더욱 낮아졌다.

능글능글한 태도로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려는 제자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이 정도면 응당 꼬리를 내리며 타협점을 찾았던 김지훈이었다.

오판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김지훈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낭랑한 목소리로 치고 들어왔다.

“여러 번 생각하고 드린 말씀입니다. 송재덕 선생님도 스승님이 정말 적임자라고 말씀하셔서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원장직을 수행하시는 데 전혀 불편이 없도록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답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은 금이자 강한 부정이었다.

‘소용없습니다.’

“말씀이 없으시네요. 긍정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서류입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김지훈!”

“감사합니다. 신 이사장과 송재덕 선생님께는 제가 연락할 테니까 따로 통화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수락하신다는 말씀은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원장직을 수락해 감사하다는 듯 몸에 좋다는 홍삼액 두 봉에 비타민까지 놓여 있었다. 평안 감사도 제 싫다면 어쩔 수 없다는데 억지가 따로 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긴 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법이다. 신경 쓰지 않고 살면 된다지만 주변의 눈도 엄격해질 테고 말이야. 내가 원장을 하면 네가 훨씬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지.’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준영아! 잘 생각했다. 원장은 중심만 꽉 잡고 있으면 된다. 중심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지만 지훈이를 믿어. 그놈이 대장 안 하고 간 했을 때를 생각해 봐. 고집도 고집이지만 주관이 뚜렷한 놈이잖아. 말해 뭐 하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헤! 학처럼 산다고 학이 되니? 안 된다. 안 돼. 너나 나나 원죄가 있어. 원죄가. 이제 활짝 꽃을 피워야 할 제자들의 앞날을 잘 열어 줘야 할 의무를 잊지 마라. 기동이는 매일 죽상이고, 혁민이는 현수 떠난다고 어깨가 처지더라. 있을 때 잘하자. 있을 때. 끊는다.)

금경태까지 거론했다.

이준영 교수의 고민이 깊어졌다.

고집을 꺾어야 할 때인 모양이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지금쯤 송재덕 선생님 전화를 받으셨겠지?’

몰라보게 음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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