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96화 (1,296/1,329)

2화

참석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는 태도였다.

“오늘 논의 주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기에 앞서 먼저 이사장이 아니라 일반외과 교수로서 드리는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현 서울 병원 원장님이신 송재덕 선생님께서 전문 병원, 아니 신생 종합 병원으로의 복귀를 원하십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다른 연락이 없었는데 이미 원장님으로 내정한 건가? 반대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공식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일을 왜 이렇게 처리하지? 현수가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복귀라면 원장님으로 다시 취임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후보 중 한 분으로 추천되셨습니다만 고사하셨습니다. 직위를 떠나 한 명의 교수로서 근무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이경석도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대장 파트 교수로 근무하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임 교수 자리까지 고사하시면서 이경석 선생님이 대장 파트를 맡아 주었으면 하는 의향을 밝히셨습니다.”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이경석과 나종진을 번갈아 보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설혹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지라도 제자와 관련된 일인 만큼 깊은 고민을 하고도 남을 스승이었다.

“크게 생각할 일 아닙니다. 원장도 할 만큼 해서 더 한다고 했다간 욕먹을 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고요. 게다가 은퇴할 날도 머지않아 이젠 환자를 보며 마지막 의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입니다.”

특유의 말투가 사라졌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는 의미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찬성과 반대를 말하기에는 송재덕 교수의 위상과 영향력이 너무 커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더구나 은퇴라는 말이 가슴 한구석을 서글프게 만들어 분위기까지 가라앉았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생 종합 병원을 위해 맡아 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공식적으로 원장 자리를 고사하시다니 한 방 맞았네. 원치 않는 일이지만 은퇴까지 거론하신 이상 반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후우! 이렇게 되면 김진호 선생을 적극적으로 밀어야겠군. 지근거리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면 별문제 없겠지.’

“이경석 선생과 함께 대장 파트를 맡으신다면 걱정이 없겠습니다. 홍재순 선생과 유석재 선생이 맡게 될 항문 파트와의 유기적인 협력에도 문제가 없겠군요. 전 개인적으로 찬성합니다. 반대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리 뜻밖의 말이라고 해도 일반외과의 정신적 지주 두 명의 결정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만큼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원장님의 결정이 무척 의외지만 이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고, 스승님까지 동의를 하신 이상 확정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번에는 원장직을 수락하실 생각이신가?’

원장 후보에 대한 전문 병원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전달한 당사자였다. 누가 돼도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송재덕 교수의 말을 듣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사반대할 줄 알았던 스승의 변화조차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의견을 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준영 교수와는 다른 위치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했다.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원장님, 재고하실 수는 없습니까?”

“김 부원장, 말은 고맙지만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이번은 내 뜻을 따라 줬으면 해. 할 만큼 했으면서 은퇴할 때까지 자리 고집하는 것도 추태라면 추태야.”

송재덕 교수의 뜻은 확고했다.

더군다나 상황을 비틀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떠보는 행동 자체를 경멸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인지 계속해서 재고를 요청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대장 파트 교수로 근무하신다고 해서 병원 일에 신경을 안 쓰실 원장님도 아니시고, 새롭게 취임하실 원장님께도 큰 힘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훌륭하신 원장님 두 분을 모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신생 병원인 데다 규모까지 갑작스럽게 늘게 되면 다소 혼란스럽기 마련인데, 원장님께서 중심을 잡아 주신다면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과장님, 그렇지 않습니까?”

써전들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는 손일석도 십분 동의를 했다. 반면 이경석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스승의 일인 데다 자칫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나종진까지 무척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김지훈이 대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되면 나종진 선생 파트도 자연스럽게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상의한 대로 진행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습니다.”

“담낭 쪽 라파로 케이스가 가장 많은 이상 역시 서도훈 선생과 한 파트가 되는 것이 맞겠죠? 기타 양성 질환 수술은 그대로 가져가야 하고요.”

“손 교수 말에 동의합니다. 같은 파트라고 해도 서로 영역을 침범할 일이 없어 교통정리를 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서 교수, 나 교수, 어떻게 생각해?”

서도훈과 나종진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만큼 든든한 상황이 없었다. 대상 질환이 다르다 해서 상의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희야 좋죠.”

손일석이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케이! 원장님 결정 하나로 대장 파트와 라파로 파트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됐네요. 정말 아쉬운 말씀이지만 감사합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했는데 김 부원장과 손 교수 덕에 내 마음도 편해졌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근무하는 그 순간부터 열심히 할 테니까 우리 잘해 보자.”

“근데 서울 병원은 괜찮겠습니까?”

“누가 누굴 걱정해? 박승준 교수가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와 함께 중심 꽉 잡고 있어. 꽉. 다른 교수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우리도 긴장해야 된다. 긴장. 언제 추월당할지 모른다. 정신 바짝 차리자. 바짝.”

벌써 우리였다.

특유의 말투도 되찾았다.

손일석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이쯤에서 우리 원장님의 결단에 박수 한 번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짝짝짝짝!

환영의 박수 제대로 터졌다.

송재덕 교수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과연 처세의 달인이었다.

변변한 직위 하나 갖지 못했지만 말이다.

“고맙다. 고마워. 자자자! 아직 신 이사장 말 안 끝났다. 안 끝났어. 중요한 얘기니까 들어 보자. 빨리 들어 보자.”

할 말이 남았다는 말에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남은 파트라고는 위장관 파트 하나뿐인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지훈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이사장으로서 당부의 말을 할 생각인가? 스승님들 앞에서 굳이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는데 뭐가 또 있지?’

“지금 역시 교수로서 말씀드립니다. 반대나 이의가 없다면 저 역시 내년에 신생 종합 병원 위장관 교수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복귀라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서울 병원을 놔두고 재단 이사장 역할을 우리 병원에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텐데요. 설마…….”

“맞습니다. 올해를 끝으로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경악스러운 선언이었다.

지난 기억이 마구 스치며 또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만 남았다. 송재덕 교수의 담담한 표정을 빤히 보면서도 말이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재단 이사님들 중에 훌륭하신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지금처럼 뜻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이사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실 겁니다.”

“그래도…….”

“무엇보다 전 지금도 써전입니다. 개인적인 목표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장 쟁쟁한 라이벌이 있는 병원에서 제 목표를 이루고 싶네요.”

침묵만이 흘렀다.

그동안 사람 한 명, 특히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전횡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지 절실하게 경험했다. 금경태와의 악연까지 떠올랐는지 이준영 교수도 자신의 의견을 쉽사리 밝히지 못했다.

신현수는 누구보다 냉철했다.

이런 일을 별다른 준비 없이 내지르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결심을 확고하게 드러낼 수 있는 카드 하나를 더 꺼냈다.

“현재 모 대학 병원에서 위장관 교수로 근무하시는 최철한 선생님과 함께 합류하고자 합니다. 누군지 잘 모르는 선생님들도 계시겠지만, 아시는 선생님들은 모두 최철한 선생님이 충분한 자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준비 다 했구나.’

“이렇게 되면 외과 교수 충원도 불과 네다섯 명이면 충분해 한결 수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거운 공기가 가시지 않았다.

문제가 없다고 해도 한 번 데인 사람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와 진씨 일가가 끼친 폐해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기도 했다.

송재덕 교수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다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안다. 잘 알아. 전문 병원이 세워진 이유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고도 남겠지. 나도 이사장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당황했지만 이사님들 면면을 보면 기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습니다. 이제 특정한 사람 한 명의 뜻대로 재단이 굴러가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한 상태입니다. 저 역시 이사 중 한 명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고요. 아! 김 부원장님의 운영이사 자격도 아직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맞다. 맞아. 무엇보다 신 이사장이 써전으로 살고 싶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니? 누가. 나도 원장으로 일하며 많이 고민한 문제다. 환자 보고 수술하며 사는 일이 의외로 간절할 때가 많다. 많아. 게다가 너희들이 있잖아. 너희들이.”

“저희요?”

“마음 맞는 동료 만나기 쉽지 않다. 그것도 이렇게 무더기잖아. 무더기. 천운이다. 천운. 내년을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데 서류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신 이사장은 오죽하겠니? 다른 걱정 하지 말자.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쓸데없는 걱정.”

여전히 분위기 어색했다.

송재덕 교수가 소리쳤다.

“박수 치자. 박수. 다들 손 뒀다 뭐 할래? 김 부원장, 경석아, 일석아, 진 교수, 우리가 일 덜어 줬으니까 고마워해야 돼.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뭐 해?”

짝짝짝짝짝!

박수는 터졌다.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결단도 결단 나름이지. 현수 네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게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르는 거야?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걱정 없이 환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야.’

김지훈의 생각을 읽은 듯 손일석이 눈가를 굳히며 입을 열었다. 때론 군말 없이 현실을 빨리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우리 까놓고 얘기합시다. 원장님과 이사장님 결정을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하라면 해야죠.”

“지금 우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그런 거야? 손 교수,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서운하다. 서운해.”

“마음속 불안을 지우라는 말입니다. 빤히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김 부원장, 안 그래?”

“인사 위원회 결정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렇긴 하네요. 솔직히 옛날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거지, 어떤 써전이 와도 원장님과 신 이사장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네요.”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야! 최철한 선생님까지 오시게 되면 왕년 멤버들이 다 모이는 꼴이네요. 근데 설마 시어머니로 오시는 건 아니겠죠.”

웃음이 터졌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섞여 있었다.

전공의 때 선배였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외래 교수가 아닌 정식 교수기에 만에 하나 과장 자리 등 직위를 두고 논란이 일어난다면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면접 때 확실하게 말씀드려야겠지만 선배라는 사실을 강조하실 분이 아니잖아요. 솔직히 누가 먼저 우리 병원에서 근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 된다면 시어머니 노릇을 하셔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네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환영합니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어느 병원도 넘보지 못할 최고의 일반외과가 될 것 같습니다.”

이경석은 물론 최철한을 잘 모르는 진충기 교수까지 동의했다. 대학 병원이 통상 동문들로 채워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사인방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역들이 모두 찬성했다.

딱 한 사람 남았다.

“신 교수, 환영한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폭탄선언이 잠시 혼란을 유발했지만 전에 없는 진용이 꾸려지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특히 사인방이 다시 온전하게 모여 자신이 전공했던 분야에 집중하게 됐다.

간 이식과 소아외과의 김지훈.

간 이식과 혈관의 손일석.

대장과 복강경의 이경석.

위장관의 신현수.

그중 누군가는 한발 앞서 있을 수 있었다.

미묘한 차이긴 하지만 사인방 모두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자 세부 전공이 다르다 해서 경쟁을 마다할 리도 없었다.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는 순간 최강의 라이벌들 간의 불꽃 튀는 경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같은 과에서 수련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신현수의 복귀에 숨은 의미였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내년이 정말 기대되네.’

3D과, 기피 일 순위, 돈 못 버는 과 등등 온갖 좋지 않은 말로 도배되는 현실이었지만 일반외과의 저력이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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