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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95화 (1,295/1,329)

1화

자신의 미진한 부분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지적한 것은 책망이 아니라 기대가 분명했다. 수술을 끝내고 나온 고경철이 이를 확인해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술 기록지가 원래 빨간색인 줄 알겠다. 야! 굿모닝 아뻬가 아니라 터지기 직전의 아뻬처럼 기록해 놨는데 이걸 일일이 다 수정해 주셨네. 김지훈 선생님이 이 정도로 신경을 쓰시다니 너도 참 운이 좋다.”

“원래 그렇게 가르치시는 선생님 아닙니까?”

“미운 놈 떡 하나 준다는 말이 손톱만큼도 통하지 않는 선생님이야. 기다렸다가 모찬우 선생님에게 맡겨도 되는데 직접 퍼스트를 서신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어쨌든 첫 집도 축하한다. 김지훈 선생님이 첫 수술을 주신 이상 지금처럼 하면 몇 개 더 하고 갈 수도 있어.”

“몇 개 더요?”

“달랑 하나 주고 할 일 다 했다고 하실 선생님들이 아니야. 대신 죽었다고 복창하고 들어가. 똑바로 하라는 말 또 들으면 현실이 될 수도 있어. 늦기 전에 수술 기록지 다시 제대로 작성해.”

홀로 남아 수술 기록을 하던 양재필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히죽히죽 실없이 웃었다. 기본을 지키면 어떻게든 득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급히 병동에 올라가 환자를 찾았다.

김지훈과 딱 마주쳤다.

별말 없이 병실을 나갔지만 똑똑하게 보았다.

웃고 있었다.

미적미적 시간 끌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응급실은 환자들로 북적였고, 김지훈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를 지켰다.

양재필은 거의 피곤을 느끼지 못했다.

첫 집도의 흥분이 당직 내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 회진 때 마주친 펠로우들의 시선이 왠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일 것이다.

김지훈이 간만에 나른한 휴식을 가졌다.

당직 다음 날 수술에 관해서만은 무리한 스케줄을 잡지 않은 지 오래였다. 마치 공식처럼 밤을 새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딱 하나뿐인 수술이 오후 세 시가 돼서야 끝났지만 피곤한 몸을 누일 시간을 얻었다.

마음먹고 늦은 낮잠을 잤다.

오래 자면 오히려 더 피곤해진다.

삼십 분 정도 수면을 취한 후 찬물로 세수해 재빨리 몸과 정신을 각성시켰다. 가벼운 커피 한 잔을 곁들여 몽롱한 잔재를 씻어 냈다.

‘여섯 시에 회의였지? 우리 과 구성 최종 시안을 결정해 제시해야 하는 자리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

종합 병원 인력 채용을 알리는 일 차 공고가 나간 상태지만, 각 파트에 필요한 인원에 대한 상세 정보는 아직 제공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단 산하 인사 위원회에 종합 병원에 개설될 각 과의 최종 시안이 속속 올라가고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위원회가 활동하는 서울 병원과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탓할 시기도 지났다.

시간에 맞춰 일과를 끝냈다.

이준영 교수, 이경석과 함께 몇 차례 논의를 거쳤지만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제법 시간이 걸릴 회의였다. 더구나 신임 교수들까지 모두 참석해 인원까지 적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입술을 내밀었다.

‘와! 우리 과가 언제 이렇게 컸지?’

간 이식 전문 병원을 표방하며 개원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교수만 열두 명이었다. 면면이 화려한 것을 떠나 모두 다 크고 작은 인연으로 이어진 동료들이기에 새삼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스승님, 일석이, 경석이 형, 진충기 선생님, 안호석, 서도진, 서도훈, 강병옥,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까지 웬만한 종합 병원 수준이네. 외래 교수로 올 홍재순 선생님과 유석재 선생님까지 하면 모두 열네 명이네. 우와! 많다.’

물론 간 이식 부분이 전국에서 수위를 달릴 정도로 활성화된 덕분이지만 복강경을 비롯해 다른 파트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시너지 효과가 지속될 것이다.

종합 병원에 새로 개설해야 할 파트까지 생각하면 도대체 몇 명이 될지 계산이 안 될 정도였다. 일반외과로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가 될 것이다.

시곗바늘이 일자로 섰다.

이경석이 모두 발언을 하기로 했다.

바쁜 일이 있었는지 가장 늦게 들어와 당장 시작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힐끗 시계를 보며 이준영 교수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무언가 양해를 구했다.

“방금 전에 갑자기 연락을 받았…….”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들 깜짝 놀란 가운데 이준영 교수까지 일제히 일어났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재빨리 달려가 꾸벅 인사를 하고 급히 자리를 마련했다.

“원장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단 앉으시죠.”

“그래. 그래. 다들 잘 있었지? 야! 이게 모두 몇 명이야? 서울 병원보다 교수가 더 많네. 더. 신 교수, 거꾸로 된 거 아니니? 거꾸로.”

“그러게 말입니다.”

송재덕 교수와 신현수가 온 것만도 놀랄 일인데 얼굴 하나가 더 보였다. 이 자리에 참석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서울 병원 정형외과 교수 김대성이었다.

김지훈이 미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또 무슨 일로.”

“신 이사장님이 같이 오자고 해서 왔지. 이준영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인사 못 드려 죄송합니다. 김 부원장도 잘 지냈지? 소문 많이 들었어.”

“예. 잘 지냈습니다. 신 이사장, 김대성 선생님과 같이 오다니 무슨 일 있어?”

“적절한 때에 말할 테니까 그때 얘기하자. 이경석 선생님, 시작하시죠.”

스승의 앞에 선 이경석이 과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듯 어깨를 폈다.

“오늘 이 자리는 종합 병원 개원 후 우리 과의 구성 및 적정 인원에 관한 최종 시안을 작성해 인사 위원회에 전달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송재덕 원장님과 신현수 이사장님께서도 이와 관련해 참석하신 만큼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먼저 간암 및 간 이식 공여자 파트 의견부터 듣겠습니다.”

이준영 교수, 안호석, 오만석이 맡고 있다.

파트를 막론하고 주임 교수 대부분 자신이 맡고 있는 파트의 규모를 늘리길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병원 내 영향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수혜자 파트 규모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해야겠지만 현재 수준에서 내년에 당장 교수를 늘릴 이유가 없습니다. 내후년에나 충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여러 이유로 간 이식 센터장이신 진충기 선생님 의견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의견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파트 역시 이혁원 선생이 합류한 데다 당분간 종합 병원 운영에 맞춰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해야 할 상황입니다. 순차적으로 펠로우 선생 중 한두 명을 보강하는 선에서 정리했으면 합니다.”

‘내후년에 두세 명 정도면 펠로우들에게도 좋은 기회이자 강한 자극이 되겠어.’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모두들 무리한 요구를 배제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은 덕에 순조롭게 논의가 진행됐다. 도중 김지훈의 발언에 잠시 웅성거리긴 했다.

“서도훈 선생에게 췌장 및 담도 파트를 모두 맡겼으면 좋겠습니다. 외부에서든, 펠로우에서든 한 명 정도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견이 없었다.

사실상 담도 및 췌장 파트 주임 교수가 된 서도훈이 얼굴을 붉혔다. 이미 예정된 일이었지만 서도진과 안호석이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소아외과가 남았다.

박재순 회장의 기부로 수술이 엄청나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송진우의 교수 임명이 확정적이라고 해도 단 한 명뿐이었다. 펠로우인 한수영에게 교수에 버금가는 책임과 의무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아외과를 전공한 교수가 가장 적을 텐데 지원할 사람이 있나?’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짓자 김지훈이 씨익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의사 생활을 시작하며 맺은 인연의 끈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신규 교수가 한 명 이상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소아외과를 전공한 써전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저도 고민 중이었는데 정말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원 의사를 밝힌 선생님이라도 있습니까?”

“모 대학 병원에서 소아외과를 전공하고 계신 펠로우 선생님 한 분이 연락하셨습니다. 간 이식 학회에서 인사를 나눈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께서 알려 주셨답니다. 물론 심사를 통과해야겠지만 일단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경석이 눈가를 좁혔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송진우 선생까지 모두 내년에 갓 교수가 되는 상황으로 보이는데 주임 교수로서 적당한 선생님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박재순 회장님 일도 있고 해서 당분간 제가 함께 환자를 볼 생각입니다만, 혹시 이 중에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도 이제 본격적으로 수술을 하는 만큼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파트 하나를 맡고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일과 부담을 피하기 어려운 파트였다. 누구나 혹할 주임 교수 자리는 달콤한 당근이 아니라 독이 든 사과였다.

다들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강은미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과 더불어 소아외과에 잠시 발을 담갔다는 이유 하나로 이혁원이 눈길을 받았지만 강력한 방패가 있었다.

진충기 교수가 바로 방어막을 쳤다.

“김 부원장님만 한 적임자가 있을까요? 박재순 회장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계속 맡으시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간 이식 파트 전체가 한마음이 됐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내심 송진우가 한 파트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도와주길 바랐지만 물 건너갔다. 어떻게 보면 담도와 췌장 파트 업무를 덜은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소아외과 전문의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적정 규모까지 충원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준영 교수까지 진충기 교수의 의견을 적극 지지한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것이 소아 환자를 위한 가장 최적의 방안이기도 했다.

당분간 문은 열려만 있을 것이다.

손일석이 힐끗 김지훈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세부 전공자가 적은 파트는 움직일 공간이 많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 왜 그래? 나도 문제다.’

“과장님,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면 혈관 파트 위치가 많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과에 신장 파트가 있는 이상 혈관 파트도 손 교수님 주관하에 당연히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할 겁니다. 다만 당분간 펠로우 배정으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그럼 단 한 명뿐인 파트의 주임 교수가 되는 거네요. 속상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루뻬 써야 하는 혈관 파트의 운명인가 봅니다. 흔쾌히 동의하겠습니다.”

지금도 거의 전적으로 혈관 수술을 하고 있는 신기동 교수를 은연중 언급했다. 사실 투석 환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수술 특성상 다수의 교수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복강경 파트가 남았다.

뭉뚱그려 양성 질환을 대상으로 한 전문 병원의 운영 방식은 종합 병원과 맞지 않았다. 대세라 해도 수술 기법 중 하나인 복강경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전 논의 중에도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특히 파트를 가리지 않고 수술한 나종진의 소속이 문제였다. 애초 대장 파트를 전공했지만, 그 때문에 이경석의 입장이 더 애매모호해졌다.

다소 난감해하는 이경석을 본 김지훈이 제안 하나를 했다. 과장이기에 도리어 나종진의 진로를 말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라파로 파트가 남았습니다만, 우리 모두의 의견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위장관과 대장 파트를 제외한 나머지 몇몇 파트부터 해결하고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전문 병원에 존재하지 않는 파트부터 차례차례 결정했다. 유방 파트는 오하석이 이미 지원을 한 상태였고, 더 이상 선발할 이유가 없어 자연스럽게 주임 교수 후보로 결정됐다. 갑상샘 파트 역시 한 명만 뽑기로 했고, 적임자가 없다면 당분간 오하석이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항문 파트 역시 이견이 없었다.

외래 교수 제도가 도입된다면 홍재순과 유석재로 충분했다. 주당 두 번의 진료 및 수술이면 기존 종합 병원 형태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지원하신 선생님들이 인사 위원회를 통과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미비한 점이 없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파트가 남았다.

위장관과 대장 파트였다.

모든 병원의 주력이자 엄청난 수의 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어느 파트보다 신경 써야 했다. 그만큼 중요해 지원자가 많다고 해서 원하는 인재가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더구나 이경석의 거취까지 관련이 있었다.

“파트당 최소 세 명 이상 확보해야 하고, 주임 교수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면접을 진행한다고 해도 복수 추천이기 때문에 최종 승인을 내릴 인사 위원회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준 자체가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애매모호한 면이 있었다. 써전의 실력은 물론 한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을 계량화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 스승님을 포함해 면접을 진행할 선생님들의 안목을 믿는 수밖에 더 있나. 그나저나 경석이 형이 다시 대장 파트로 복귀한다면 종진이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말이 나왔던 대로 담낭 질환까지 보게 될 서도훈 선생 파트에 넣어야 하나? 그게 가장 적절하긴 한데…….’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신현수가 발언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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