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어느새 정선호가 전문 병원 마지막 일정인 일반외과로 올 때가 됐다. 자신의 파견 근무 역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는 곧 써전의 평생 기억이자 시작인 첫 집도가 걸린 때라는 말이었다.
‘무작정 칼을 줄 선생님들이 아니다.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구경도 못한다.’
고경철이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삼 년 차인데도 불구하고 준비가 안 됐다고 판단되면 아뻬조차 주지 않았다. 실력만이 아니라 환자 파악을 무엇보다 중시 여기는 탓이었다.
절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응급실 환자를 뒤늦게 보기 마련인 상황에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여기에 기본을 부르짖는 김지훈에 대한 경보까지 발령됐다.
들은 말까지 있었다.
자격이 되면!
판단은 교수 개개인의 몫이지만 결코 이준영 교수나 김지훈의 기준을 벗어날 리 없었다. 오직 첫 집도라는 당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대한 집중하며 실과 기구를 놓지 않았다.
따르륵! 따가각!
사락! 사락! 사락!
기구가 손에 익고, 타이 매듭이 무수하게 쌓여야 결실을 볼 것이다. 아무리 졸음이 몰려와도 교수들의 손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아야 함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기구 잡고 푸는 소리가 쌍으로 들렸다.
정선호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따르륵! 따가각!
‘후배가 이렇게 자극을 줄지는 몰랐네.’
양재필이 뻑뻑한 눈가를 비볐다.
***
많은 후배들에게 다행스럽게도 김지훈의 온 신경이 의료 쪽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었다. 인사와 관련된 일은 여전히 부원장의 업무 중 하나였다.
다른 과는 인사 위원회에서 결정하겠지만 일반외과는 부원장인 자신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다고 했다. 게다가 신현수가 뜻밖의 연락을 해 왔다.
‘원장님과 우리 과 과장님으로 어떤 선생님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내가 아는 선생님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과장은 이경석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모든 의국원의 동의 아래 연임이 확정적이었기에 원장 후보만 물색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신현수도 모르지 않을 테고, 타 병원 의사를 물망에 올릴 사안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인망과 능력을 갖춘 의사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객관적이어야 했다.
많은 이들의 추천이나 동의가 있어야 했고, 종합 병원 내에 전문 병원이 녹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현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의사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고민 끝에 세 명으로 압축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김진호 교수였다. 제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누구도 쉽사리 반대하지 못할 의사들이란 사실은 명확했다.
‘부원장으로서 마음이 잘 통하는 분을 원장님으로 모실 필요가 있다. 만일 일반외과에서 원장과 부원장을 모두 맡게 되면 잡음이 있을 수 있지만 과도기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흐흐흐! 스승님, 후보에 든 것마저 고사하시겠지만 이번에는 못 벗어나십니다.’
김지훈의 관심이 잠시 분산됐다.
은밀하게 각 과 과장 및 행정 간부들의 의견을 구했다. 김진호 교수가 현 원장인 상황인지라 흔히 말하는 현직 프리미엄을 배제해 달라는 요청을 잊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신중했다.
원장 한 명이 병원을 쥐락펴락할 수 없지만 막강한 힘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직원 개개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꼼꼼하게 의견을 수렴한 결과 다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배나 이력을 따져 볼 때 열세일 것이라 예상했던 김진호 교수의 경쟁력이 만만치 않아 후보 압축이 쉽지 않았다.
제자 혹은 후배 입장에서 스승과 선배의 평가를 구한다는 것이 무례할 수 있었지만 김지훈은 자신이 부원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스승님을 비롯해 세 분 모두 좋은 평판을 얻어 다행이지만 예상외로 박빙이네. 난감하지만 초대 원장님을 추천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연륜과 카리스마가 모두 필요해.’
다양한 부문을 고려해 잠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후는 신현수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였다. 임명 형식을 빌린다면 누구도 고사하지 못할 것이다. 설혹 고집을 꺾기 힘든 이준영 교수라고 해도 말이다.
김지훈이 딱딱 손바닥을 쳤다.
‘다시 본업에 집중해 볼까?’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는 순간 일반외과 역시 더욱 세분화될 것이다. 지금처럼 간 이식과 간담췌 질환 전반을 모두 감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담당 의사부터 수술 팀까지 다시 검토했다.
진충기 교수 이하 간 이식 팀은 누구 한 명 나무랄 데 없었다. 규모가 더욱 커진다고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서도훈 선생에게 췌장과 담도 쪽을 모두 맡게 하는 것이 어떨까? 소아 외과도 진우와 수영이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얼마나 보강해야 하지? 아! 응급실 부장도 정해야 하는구나.’
생각해 보니 관여한 파트가 문어발처럼 많았다. 그러나 환자든 의사든 사람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기에 골머리가 썩을 수밖에 없었다. 서류 속 숫자에서 벗어났다고 편해질 인생이 아닌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뻑뻑한 목을 돌렸다.
우두둑! 우두둑!
의사의 육신을 혹사시키는 수술만 근육을 굳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병원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정신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이럴 때는 일종의 환기가 필요했다.
파릇파릇한 후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편해질 것 같았다. 물론 경보 발생에 긴장할 대로 긴장했을 후배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정선호 선생, 회식 날 정했어?”
“다음 주로 오프를 맞추기는 했습니다.”
“그래? 잘됐네. 회식비야.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삼겹살 먹지 말고, 등급 높은 소로 먹어.”
“감사합니다.”
봉투가 두툼했다.
어쩐지 볼살이 홀쭉해진 것 같은 정선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돼지든 소든 남의 살은 다 맛있지만 공짜로 먹는 소만큼 맛있는 고기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짜가 맞나?
어쨌든 약속을 지킨 김지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응급실을 찾았다. 서도진이 동의한 이상 아뻬만 오면 양재필의 애끓는 소원을 이뤄 줄 때가 됐다.
마침 당직이었다.
부원장이나 돼서 까마득한 후배인 전공의 일 년 차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라는 말의 의미를 기억하고 있는 강력한 선생이 필요했다.
‘모찬우 선생도 수련 때 다시 소리 많이 들었다고 했지? 첫 집도의 의미를 잘 살리겠어.’
가는 날이 장날인 모양이었다.
당직 때마다 거의 100퍼센트 가깝게 오던 아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단체 교통사고가 터졌고, 혈복강 환자가 혼을 쏙 빼놓았다.
“모찬우 선생, 응급실은 양재필 선생하고 내가 맡을 테니까 고경철 선생하고 수술해.”
“알겠습니다. 양재필 선생, 확실하게 처리해.”
일반적으로 교통사고만큼 손이 많이 가는 환자가 없었다. 내심 김지훈이 당직이라는 사실에 기대 만발이었던 양재필이 환자 처치를 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여러 환자를 봐야 큰 도움이 되겠지만 역시 정형외과가 있어야 돼.’
얼추 정리가 됐다.
그때 환자 한 명이 내원했다.
초진을 한 인턴이 바로 양재필에게 보고했다. 재빨리, 그러나 신중하게 진찰을 한 양재필의 눈가에 돌연 생기가 돌았다. 노티하는 양식 자체도 환자 파악의 기본으로 따지는 김지훈이기에 형식에 맞춰 정확하게 상태를 보고했다.
김지훈이 정석대로 진찰했다.
“아뻬 맞네. 수술 준비해.”
양재필이 툭하면 시계를 보았다.
좋은 기회가 왔건만 혈복강 환자의 수술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설상가상 마취과도 도와주지 않았다. 양방을 열 여력이 있는 데다 연달아 해야 시간만 길어지기에 바로 수술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부원장님이 일 년 차에게 수술 주겠다고 퍼스트를 서실 리가 없잖아? 모찬우 선생님 수술이 빨리 끝나야 기대라도 할 텐데……. 후우! 정말 오늘은 아닌가? 그래도 끝까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아뻬 수술 과정을 수없이 상기했다. 행여 원하는 말이 나올까 싶어 슬쩍슬쩍 김지훈의 눈치를 보았지만 끝내 말이 없었다.
무심한 시간이 흘렀다.
“인턴 선생, 우리 먼저 올라갈 테니까 수술 방에서 환자 올리라고 하면 직접 옮겨. 양재필 선생, 가자.”
양재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뻬를 받을 기회가 사라졌다.
모찬우의 수술마저 한창 진행 중이라 변수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수술복을 갈아입자마자 김지훈이 교수 휴게실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김지훈이 유심히 양재필을 보았다.
‘충분히 준비됐는데 더 이상 미뤄야 사기만 꺾이겠지. 모찬우에게 받는 게 편하겠지만 나하고 둘이 하자.’
어쩔 수 없었다.
수술에 관한 한 전문 병원에서 가장 빡빡한 의사 김지훈과 아직 한 번도 메스를 잡아 보지 못한 일 년 차 전공의가 한 팀이 됐다.
“양재필 선생, 수술 과정 말해 봐.”
“예?”
“뭘 그렇게 놀라? 시간 없어.”
양재필이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드디어 첫 집도를 하게 됐다.
두근두근! 흥분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지만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기에 최선을 다해 수술 과정을 설명했다. 아뻬 환자가 올 때마다 반복한 일인지라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빼먹었다.
김지훈이다!
아주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다시! 다시! 다시!”
김지훈은 극히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수술 때보다 더한 긴장 속에 똑같은 말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반복됐다. 간신히 마무리까지 끝냈지만 여지없이 다시 소리가 들렸다.
환자가 올라오고 나서야 끝났다.
김지훈이 별다른 말 없이 눈길 한 번 주고는 휴게실을 나가자 양재필의 얼굴이 벌게졌다.
‘가장 간단하다고 여긴 아뻬 수술이 이런 거였나? 이렇게 지적을 많이 받았는데 수술을 주시기는 할까?’
가뜩이나 부족한 자신감이 완전히 떨어질 지경이었다. 못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여기는 순간 김지훈이 당연하다는 듯 퍼스트 자리에 섰다.
확신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게 설명한 대로 하면 돼.’
어느새 마취가 끝났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양재필 선생, 첫 집도 축하해.”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해.”
“감사합니다.”
수술이 시작됐다.
아무리 담이 세고, 손이 좋다고 해도 일 년 차에게는 명확한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첫 집도가 주는 두려움에 너무 매몰되면 실수까지 하기 마련이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양재필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수술을 진행했다. 복막을 연 순간 김지훈이 첫 집도를 준 이유가 바로 드러났다.
아뻬가 방긋 인사를 했다.
보고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해 아뻬를 절제했다. 그토록 다시 소리를 연발한 김지훈은 수술 부위를 깨끗이 닦고, 배를 봉합할 때까지 묵묵히 퍼스트 역할에만 집중했다.
“컷!”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양재필이 훅 숨을 몰아쉬었다.
굿모닝 아뻬건만 사십 분 이상 소요됐고, 온몸이 물에 빠진 것처럼 후줄근하게 젖었다. 첫 집도를 제대로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순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엄청나게 걸렸지만 분명 김지훈에게 설명한 대로 정확히 진행했다. 이제야 수술 전의 상황과 다시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이해됐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감사합니다.”
“아직 일러.”
양재필의 목이 완전히 꺾였다.
‘내 딴에 정확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 눈에도 그렇게 보일 리가 없지. 단순히 오래 걸렸다는 말씀은 아닐 테고, 또 무엇이 미진했을까?’
무사히 환자가 깨어났다.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복실로 옮길 때까지도 김지훈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환자가 병실로 올라갈 때가 돼서야 한마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수술 기록지 작성해서 가져와.”
어려울 것이 없는 수술 기록이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던 양재필이 최선을 다해 작성했다. 단어 하나를 곱씹을 정도였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혀를 차며 볼펜을 꺼냈다.
빨간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양재필이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양재필, 네가 한 수술을 기록해야지 다른 선생이 한 수술을 기록하면 어떻게 해? 아뻬가 다 똑같아? 네가 하는 모든 수술의 시작이자 기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마지막 단어 하나까지 불길 속으로 날려 버린 김지훈이 결정타를 날렸다.
“똑바로 하자.”
양재필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수술 준비 때부터 지금까지 들은 말이라고는 몇 마디가 다였건만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절대 듣지 말아야 할 소리까지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양재필을 보던 김지훈이 툭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스스로에게 달렸지만 이제 일 년 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
“수고했어. 나도 이렇게 배웠다.”
양재필이 훅 숨을 내쉬었다.
이상할 정도로 정말 고맙고, 기뻤다.
최고의 써전이 고작 일 년 차인 자신에게 생애 첫 수술을 주었고, 퍼스트까지 직접 섰다는 사실이 이제야 피부로 다가왔다.